퀵바

덧붙임

용 찢는 북부인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새글

덧붙임
작품등록일 :
2024.07.14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2 20:05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680,717
추천수 :
25,561
글자수 :
294,682

작성
24.07.27 12:35
조회
21,395
추천
585
글자
12쪽

6

DUMMY

* * *


샬릭은 곧게 뻗은 길 위를 걷고 있다. 위대한 옛 제국은 이미 과거의 영광이 되어 사라졌을 뿐이지만 그 유산만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다.


대로(大路) 역시 그중 하나다. 대륙 전역으로 뻗은 이 도로는 한때 제국의 혈관으로서 기능하며 많은 사람과 물자를 운송했으나 지금은 그저 낡아빠진 도로일 뿐이다.


그러나 그때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언젠가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샬릭이 대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국이 무너지며 대로를 따라 번영했던 수많은 도시 역시 멸망했으나 일부 도시만은 몰락의 흐름으로부터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장벽 도시라 부른다. 어째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면 그 외형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황무지의 먼지 때문에 투구를 단단히 눌러쓰고 있던 샬릭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봤다.


힘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장벽이다, 위대한 옛 제국조차 버티지 못했던 몰락의 운명을 이겨낸 장벽이다.


“아크툴······.”


장벽 도시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장벽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그것이 제국의 몰락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장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본래 적으로부터 제국민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장벽은 지금도 여전히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황무지를 떠도는 사악한 괴물들로부터, 또는 같은 제국의 망령으로부터.


“혼자 오셨소?”


아크툴의 성문은 정해진 시간에만 열린다. 지금 막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성문이 열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웬 놈인가 하고 쳐다보니 사십 대쯤 돼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빙긋 웃으며 샬릭에게 말을 붙였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샬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기 드문데, 혹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일행을 잃은 게요?”


“아니.”


“그럼 처음부터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소리로군.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오.”


“자기 몸 지킬 정도는 되지.”


남자가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아크툴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일거리를 찾으러?”


몇 번 대답해줬더니 친구라도 되는 줄 아나? 자꾸만 말 붙이는 게 귀찮아서 샬릭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혼자서 지껄여댔다.


“그런 거라면 내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관심 없소?”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대개 수상쩍은 놈이다. 내가 무슨 일거리를 찾아온 줄 알고 도움을 주겠다는 말인가?


슬슬 귀찮아진 샬릭이 손을 내저으며 남자를 쫓아내려 할 때였다.


“아, 혹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난 상인이오. 작게나마 상단 하나를 이끌고 있지.”


“상인이라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쳐다봤다. 그를 따라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짐마차 세 대와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차에 그려진 문장은 아마 상단의 상징일 것이다.


“내가 보니 당신은 제법 실력 있는 용병인 것 같은데, 가능하다면 우리 상단의 호위가 되어주지 않겠소? 우린 아크툴에서 거래를 끝내고 다음 도시로 갈 생각인데 내가 고용한 용병 중 몇 명이 아크툴에서 헤어지기로 해서 말이오.”


호위 없이 상단을 이끌고 가는 건 위험한 일이다. 괴물들의 습격은 물론이고 굶주림에 미친 부랑자들까지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 있는 자라면 감히 적들이 덤벼들지 못하도록 든든한 전력을 꾸리려 할 것이다. 물건 때문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위해서.


샬릭은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이해했다. 혼자서 황무지를 돌아다닐 정도의 실력이라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으리라 여겼을 테지.


샬릭이 웃으며 말했다.


“날 고용하려고? 안 그러는 게 나을걸.”


“어째서요? 내가 볼 때 당신은 실력 있는 용병 같은데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난 실력이 제법 대단하지. 용 사냥꾼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게 뭘 뜻하는지 아나?”


남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가 샬릭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단단히 무장했는데 일행도 없이 혼자 다니면 그놈은 대개 북부인이다.


“···북부인이신가?”


“그래. 충고하는데 나라면 북부인은 고용 안 해.”


북부인인 주제에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남자가 큼 하고 헛기침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나도 북부인을 몇 번 만나봤는데 다들 생각보다 괜찮던데. 비싼 돈 주고 고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소.”


“그래서 기어코 날 고용하겠다고?”


“가능하다면.”


샬릭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지?”


“고디아.”


고디아라면 샬릭이 가려는 방향과 다르다. 물론 가는 길이 같았다고 해도 굳이 동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단의 호위로 함께한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샬릭은 그런 책임을 지기 싫었다. 그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난 안 가. 다른 사람 알아봐.”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같이 가는 게 나을 거요.”


“뭔 근거로?”


남자가 샬릭을 설득하려는 듯 말했다.


“저 뒤를 보시오. 사람들이 많지. 그것도 아주 많아. 저들이 누구인 것 같소?”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대략 보기에도 수백 명쯤 되는데 그들의 꼴이 제법 안쓰러웠다.


제대로 못 먹고 다닌 탓인지 대부분 깡마른 체형에 볼이 해쓱했다. 입고 있는 옷도 다 찢어져 너덜거렸고 몸에서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이었다. 그런 자들이 수백 명이나 있었고 모두 아크툴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뭘 원해서 이곳에 왔나? 왜 목숨을 걸고서 황무지를 지나 대로를 따라 장벽 도시로 향했나?


남자가 말했다.


“살기 위해 이곳까지 도망친 자들이오. 저들이 살던 마을이 괴물의 습격을 받아서, 또는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서, 그도 아니면 역병이 돌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살기 위해 장벽 도시로 도망친 자들이오. 요즘 시대에 가장 안전한 곳은 장벽 도시 안이니까. 하지만 장벽 도시가 저들을 받아들여 줄 것 같소?”


안 그럴 것 같다. 아크툴 입장에서 저들의 존재는 장벽 수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저 도움이 안 되는 걸 넘어서 오히려 도시 내부의 치안을 악화시킬 것이다. 갈 곳 없어 도시로 도망친 부랑자들은 대개 그러니까.


그러니 아크툴은 저들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황무지 위에서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겠지.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받아줄 리가 없지. 저들은 아크툴에 별 도움이 안 되니까. 그런데도 매일 수많은 부랑자가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소.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장벽 도시 역시 마찬가지요. 살기 위해서지. 대개 황무지 위에서 죽지만.”


“그러냐.”


“각 도시의 영주들은 엄격한 선별을 통해 자격 있는 자들의 입성(入城)만을 허락하고 있소. 그래야 도시 안의 혼란을 통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 상단은 그 자격을 갖췄지.”


그러니까 아크툴 안에 들어가려면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게 나으리라는 소리였다. 샬릭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고마운 제안이다만 필요 없다. 그 자격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저 부랑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 것 같진 않군.”


샬릭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췄고 혼자서 대로를 걸어올 만큼 뛰어난 실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절대로 부랑자 따위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남자 역시 그걸 알기에 고용을 제안했던 것 아닌가.


“······물론 그럴 테지. 하지만 우리와 함께 가면 좀 더 빨리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소. 우린 아크툴에서 여러 번 거래했거든. 당신도 이 황무지 위에서 오래 기다리긴 싫을 것 아니오?”


“내 아까도 말했지만······.”


샬릭은 문득 자신이 왜 이런 쓸데없는 입씨름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아해졌다. 그냥 머리나 한 대 쥐어박아서 쫓아 보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먹을 말아쥘 때였다.


“꺄아악!”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부랑자 무리 뒤쪽에서 난 비명이었는데 남자가 뭔 일인지 보기 위해 목을 쭉 뺄 때였다.


샬릭이 한 발자국 성큼 걸어 나오며 말했다.


“비켜.”


샬릭의 목소리에 남자가 어리둥절했다. 비키라니, 갑자기 무슨······.


“비키라고, 죽기 싫으면.”


나직한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남자가 어어 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부랑자 무리에서 사람 머리 하나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저게 뭔? 고약한 서커스라도 되나? 그런 게 아니었다. 부랑자 무리에서 무언가 사람을 찢으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사람을 찢으며 나왔다는 건 과장이 아니었다. 사마귀를 닮은 괴물 놈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더 컸는데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며 사람을 찢어버리고 있었으니까.


놈의 양쪽 눈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며 다른 사냥감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부랑자들은 감히 덤벼들 생각도 못 하고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으아아아아!”


도망치는 사람 중에는 상단의 용병들도 있었다. 물건 지키라고 비싼 돈 주며 고용했던 놈들이 감히 저딴 짓거리를?


남자가 눈을 부릅떴으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괴물 놈이 그 목을 베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용병들은 부끄러움도 잊고 망설임 없이 성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문 열어! 이 새끼들아, 문 열라고!”


괴물 놈은 하나가 아니었다. 점차 숫자가 늘어났고 부랑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게 닫힌 성문을 열리지 않았다.


어째서?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과연 정확한 추측이었다. 성벽 위에는 활을 든 병사들이 있었으나 그들을 화살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있었으니까.


“고약한 짓이로군.”


그러나 현명한 일이다. 샬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랑자 살리겠다고 장벽 도시를 위험에 빠트려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문 열라고! 씨발, 이러다 다 죽는다고!”


비명과 고함, 시끄러운 괴성. 그 모든 것을 무시하며 샬릭은 제 할 일을 했다. 성문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헤치고 나가 괴물과 마주했다.


괴물은 제 발로 찾아온 샬릭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빨리 칼날을 휘둘렀다. 그걸 본 샬릭의 반응은 간단했다.


허리춤의 칼을 뽑는 것. 단지 그뿐이었으나 괴물의 몸은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피를 흥건히 흩뿌렸다.


놈이 죽으면서 내지른 비명은 다른 괴물들을 자극했다. 그들은 부랑자들을 학살하던 걸 멈추고 샬릭을 향해 달려왔다.


칼날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양쪽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크게 휘두르니 일격에 목 두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의 몸은 몹시 단단하고 질겨서 벨 수는 있어도 완전히 자르는 건 어려운 법인데 샬릭은 그걸 아주 쉽게 해냈다.


또한 그는 갑옷을 입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움직였다.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괴물 세 마리를 죽인 그는 마지막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능이 낮아 오직 전투에 대한 갈망만으로 살아가는 괴물은 그 돌격을 피하지 않았다. 칼날이 질주했고 괴물의 몸이 비스듬히 기우는 듯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싸움은 거기서 끝이었다. 허공에 칼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낸 샬릭은 고개를 들어 아크툴의 성문을 쳐다봤다.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문 열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 찢는 북부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유료화 안내 +12 24.09.10 1,189 0 -
공지 연재 시간 변경 안내 +4 24.09.05 2,797 0 -
53 53 NEW +19 4시간 전 1,714 154 12쪽
52 52 +38 24.09.11 4,225 279 11쪽
51 51 +26 24.09.10 4,970 290 12쪽
50 50 +56 24.09.09 5,266 336 13쪽
49 49 +29 24.09.08 5,517 328 12쪽
48 48 +30 24.09.07 5,740 307 12쪽
47 47 +32 24.09.06 5,835 353 12쪽
46 46 +31 24.09.05 6,232 317 13쪽
45 45 +48 24.09.04 6,639 349 12쪽
44 44 +37 24.09.03 7,062 357 11쪽
43 43 +40 24.09.02 7,718 353 12쪽
42 42 +37 24.09.01 7,894 388 12쪽
41 41 +39 24.08.31 7,983 356 12쪽
40 40 +32 24.08.30 8,225 353 12쪽
39 39 +33 24.08.29 8,464 402 12쪽
38 38 +28 24.08.28 8,840 422 12쪽
37 37 +31 24.08.27 9,387 416 13쪽
36 36 +46 24.08.26 9,710 464 12쪽
35 35 +30 24.08.25 9,420 442 11쪽
34 34 +22 24.08.24 9,433 416 12쪽
33 33 +22 24.08.23 9,842 405 13쪽
32 32 +46 24.08.22 9,956 472 12쪽
31 31 +35 24.08.21 10,373 459 14쪽
30 30 +31 24.08.20 10,549 458 12쪽
29 29 +16 24.08.19 11,171 433 13쪽
28 28 +37 24.08.18 11,312 488 12쪽
27 27 +32 24.08.17 11,693 477 13쪽
26 26 +38 24.08.16 11,897 516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