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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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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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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9,279

작성
22.06.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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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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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12쪽

음력 사월 스무 닷새(2)

DUMMY

화령백 이성계.

상승불패의 명장이자 고려의 수호신이며 동북면의 지배자이자 고려 제일의 권신인 사나이가 도평의사사의 문 안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으며 좌중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산과 같았다. 낙마(落馬)하여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말과는 달리 화령백의 신위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대한 어깨는 어지간한 장정 둘을 합쳐 놓은 듯한 형상이고 번쩍이는 눈빛으로 좌중을 살피는 사내의 머리는 어지간한 사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위에 있었다.

천천히 자기 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사내는 건물의 기둥이 하나 뽑혀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담항설이 그를 가리켜 범이니 호랑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실제 그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말이 얼마나 가볍고 속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터였다.

이성계는 범으로 따지자면 대호(大虎)요, 산군(山君)이며 용(龍)에 필적하는 위압을 지닌 생물이었다. 재추에 모여 있는 모든 권신들은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크게 숨소리를 내지도 못하였다.

“미련한 몸이 병상(病床)에서 늦게 일어나 회의가 있음을 알면서도 일찍 오지 못하였소이다.”

사내의 목소리는 깊은 굴 속에서 울부짖는 범의 울음소리 같았으니, 그 낮고 굵은 소리는 마룻바닥을 통해 앉아있는 사내들의 오장 육부를 진동시켰다. 좌정한 권신 중 이성계와 눈을 마주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논의가 제법 된 것 같구려. 논지(論旨)를 볼 수 있겠소이까.”

이성계의 손에 회의록이 들어오고 화살촉 같은 날카로운 눈매가 아래로 움직였다. 순간, 문하시중의 고개가 다시 위로 들리며 재추의 한 곳을 쳐다보는데, 그곳은 다름아닌 밀직제학 이방원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이방원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을 채 마주보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어찌하며 밀직사에서는 판사사 대신 밀직제학이 이 자리에 온 것인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낮게 도평의사사를 진동시키자 이방원의 목울대가 자기도 모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방원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문하시중에게 절도있는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근자에 개경 성내를 불안에 떨게 하였던 중승 이진헌의 살인범이 잡혀 판사사가 심문 질의를 하고 죄인을 압송하는 중이옵니다.”

“어찌 재추의 일원이 형리(刑吏)의 일을 도맡는단 말이오. 어디로 그를 호송하는겐가.”

문하시중 이성계의 목소리에는 차갑고 웅장했다. 이방원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 낭랑했던 이방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고 메마른 소리로 변해 있었다.

“추동으로 자리를 옮기는 중입니다.”

순간 이성계의 눈이 번득이며 이방원을 노려보았다.

“밀직제학과 판밀직사사는 어찌 사사로이 범인의 신병을 인도하는가? 형법에 저족됨을 모르시오?”

죄 짓지 않은 이도 순식간에 얼어붙어 없는 죄를 토설하고도 남을만큼 광폭한 안광이 무형의 압력으로 화해 이방원에게 쏟아졌다. 주변의 대신들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방원은 이를 악물고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문하시중에게 말을 전하였다.

“죄인의 동류가 여전히 흉심을 품고 다른 범죄를 저지를 것 같아 부득불 급히 일을 처리하느라 그리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 자의 죄가 국정을 등한시할 정도로 크단 말인가?”

“유비무환인줄 아옵니다.”

이성계가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아직 낙마의 내상이 다 낫지는 않은 듯싶었다. 하지만 그 신음소리조차 호랑이의 울음소리로 들리며 번득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이방원을 향해 있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오. 밀직제학과 판사사는 공연히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 재추를 불안하게 하고 민심을 소요케 하지 말라.”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부자간의 메마른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성계는 다시 회의록을 살펴보며 다른 재추의 대신들과 짧은 문답을 나누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성계는 이방원을 향해 더는 시선을 주지 않았고 이방원 역시 이성계를 향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성계가 다시 그 장대한 체구를 일으켜 회의를 파하고, 재추의 대신들이 모두 몸을 일으켜 하나씩 밖을 나가는 중에도 이방원은 잠자코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기(失期)였다.

분명 오늘의 일은 자신과 형 이방과의 계략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재추들의 움직임을 확인해야 하는 터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난입한 부친, 이성계의 노여움에 방원은 제대로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재추의 노인들을 판별할 짧은 때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낭패로다.”

이방원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사내는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쥔 채로 탁자 위를 멍하니 노려보는 중이었다.


*----------*


“시간이 얼추 다 되어갑니다. 지유.”

이상겸의 말에 견태고 역시 첩리 안의 쇄자갑을 목까지 채운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척오조의 사내들 모두 견태고와 같이 자신의 방호구를 입고 무장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상겸이 부하들을 바라보며 수염을 만지작 거리다가 영 꺼림칙 하다는 눈빛으로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지유. 드릴 말이 있습니다.”

“뭔가?”

“이 이야기를 조원들에게 전하실 생각이시오? 큰돌이를 우리가 호송한다는 이야기 말이오.”

이상겸의 말에 견태고가 새삼스럽다는 듯 척오조 행수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견태고가 이방과와 나눈 이야기를 이상겸과 나눴을 때 이상겸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 하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견태고를 바라보던 이상겸은 결국 그의 지시에 순응하였지만 그 역시 불안감은 지울 수 없는 눈치였다.

“개중에 세작이 섞여 있소.”

이상겸의 눈이 번득이자 견태고는 알고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작은 하나고 조원은 일곱이네. 일곱이 영문도 모르고 사지에 발을 들여서야 되겠나?”

“그럼 그냥 다 같이 가자는 말이오?”

“자네 눈썰미를 믿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나, 참 환장하겠네.”

이삼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 판사사 영감 성품을 알고 지유를 못 믿는 것도 아니긴 한데···.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오? 막말로 우리가 화살받이가 될 지도 모르는데?”

“화살받이 맞네.”

“넨장맞을. 말이라도 그렇지 않다고 좀 해 보시우.”

이상겸은 쉴새없이 투덜대면서도 견태고의 옆에 붙어 척오조가 도열한 곳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엄격한 표정으로 조원들을 챙기는 부장 장천보를 위시하여 웃음을 머금고 농담을 나누는 유종기와 왕지균, 견태고와 이상겸을 보고 묵묵히 서 있는 어경순과 왕운, 동향 사람인 홍일국과 강예구가 자세를 가다듬고 명을 기다렸다.

같이 한 시간은 짧았지만 각자의 능력과 성격이 맘에 드는 인물들이었다. 견태고는 저 중 하나가 다른 이의 명을 받아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전장의 인연이란 아지랑이 같은 것인데.”

“응? 뭐라고 하셨소. 지유?”

“아무것도 아닐세. 행수는 조원들에게 설명을 해 주게나.”

“아이 참, 꺼내기 어려운 말은 왜 나더러 하라 하시는지 모르겠네.”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어슬렁어슬렁 앞으로 나간 이상겸은 그들 보고 있는 척오조원들을 보며 팔을 턱하니 옆구리에 얹고는 말을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껄렁대던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노련한 척후 궁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오늘 할 일은 죄인 큰돌, 적릉을 우거(牛車)에 넣고 새로운 장소로 이관하는 일이다. 새 장소는 추동, 밀직제학 이방원 영감의 거처가 될 것이네.”

“추동? 오히려 더 남쪽 아닙니까?”

장천보의 물음에 이상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던진 것은 장천보였지만 모여있는 다른 조원들 역시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이상겸은 츳 혀를 한번 차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큰돌을 이관하고 그를 호송하는 일을 우리 척오조가 맡는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멀리서 가별초와 판사사 영감이 직접 통제할 것이지만 죄인의 옆에서 직접 호송하는 것은 우리라 이거다.”

“아니 왜······”

왕운이 손을 들어 질문을 던지려 하자 이상겸이 손을 들어 질문을 막고 말을 이었다. 무엇을 물을 것인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는 것이겠지. 우리의 진짜 할 일은 호송이 아니라 사냥이다. 호랑이 잡아본 사람 있는가?”

“네.”

왕운과 유종기가 같이 대답하자 이상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히(개) 하나 잡아다가 산중턱 나무에 묶어 놓고 호랑이 내려오기를 기다려 본 사람은 오늘 일이 무엇인지 알 것이네. 분명 저 살수들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자신들의 비밀을 큰돌이 토설하기 전에 저 자를 다시 탈취하거나 습격하여 후환을 없애려 할 것이야.”

“······그런데 우리가 가히입니까, 사냥꾼입니까?”

왕지균이 불쑥 말을 던지자 이상겸이 말을 그치고 입맛을 다셨다. 좌중의 모든 이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견태고가 이상겸의 뒤에서 왕지균의 말을 받았다.

“우리는 가히로 변한 사냥꾼이네. 모두 갑옷을 껴 입고 활을 손에서 놓지 말게.”

“알겠습니다!”

척오조원들이 대답하자 견태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창령방의 처마와 지붕을 둘러보았다.

“우리의 임무는 이행수 말대로 호랑이를 잡는 것이지 먹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접해본 살수들의 무예는 결코 얕잡아볼 수준이 아니다. 첫째는 사방을 경계해 궁시(弓矢)를 주의하고, 둘째는 작은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자객들을 경계하게.”

“알겠습니다!”

견태고의 말이 끝나자 이상겸이 각자의 일을 분장하였다.

“어경순과 왕지균이 전후위를 맡아 근접을 경계하고 나머지는 지붕과 나무위를 보며 천천히 호송한다. 장부장은 중간에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고 병력을 좌우로 움직이게. 지유와 나는 선봉과 후위에서 요격할 것이네. 질문 있는가?”

척오조의 사내들은 말이 없었다. 이상겸과 견태고 역시 굳은 표정으로 조원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장천보도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색한 침묵이 주변을 감쌌다. 그 때 왕운이 히죽 이를 드러내더니 껄껄대며 말했다.

“이제 좀 재미있어지는구먼. 이게 별초(別抄)가 하는 일이지!”

왕운의 말에 유종기도 히죽 웃음을 머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네. 지금까지 매일 시장에서 상인들하고 탐문하는 것도 이제 지겨웠는데 말이야.”

“나도 이런 일 하려고 여기 지원한 거라오.”

어경순까지 조곤조곤 대며 이야기하자 모여있던 척오조원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이상겸과 견태로를 바라보았다. 장천보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웃으며 이상겸에게 말하였다.

“조원들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하겠습니다.”

이상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척오조를 바라보더니만 헛웃음을 지으며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이것들 보시오. 맨 처음부터 내 느낀 바지만 다들 약간 이상한 놈들이라니까.”

“자네나 나나 모두 같은 지원자 아니었나?”

“사실 나도 재미는 있어 보이오.”

“동감이네.”

이상겸은 실없이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안해보였다. 견태고 역시 가슴 한 켠이 무거운 짐을 덜어 놓는 것 같았다. 견태고가 조원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큰돌을 끌고 와 우거에 태워라! 이제 추동으로 넘어갈 것이다! 다들 기습에 만전을 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척오조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를 멘 수레가 창고 쪽으로 향하고 왕지균과 유종기가 부지런히 뛰어가 창고문을 열었다. 다른 조원들이 동개의 화살을 확인하고 칼을 확인한 뒤 다시 자루에 넣었다. 견태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출진(出陣)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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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음력 오월 열 사흘(2) +5 22.07.18 302 20 13쪽
59 음력 오월 열 사흘(1) +2 22.07.18 285 21 14쪽
58 음력 오월 열 이틀 +4 22.07.15 338 17 13쪽
57 음력 오월 아흐레 (2) +3 22.07.15 298 14 13쪽
56 음력 오월 아흐레 (1) +3 22.07.14 321 14 13쪽
55 음력 오월 이레 +1 22.07.14 294 15 17쪽
54 음력 오월 닷새 (2) +2 22.07.13 319 15 13쪽
53 음력 오월 닷새 (1) +2 22.07.13 317 14 13쪽
52 음력 오월 나흘 +4 22.07.12 328 20 11쪽
51 음력 오월 초이틀(3) +5 22.07.11 343 20 13쪽
50 음력 오월 초이틀(2) +5 22.07.08 380 17 15쪽
49 음력 오월 초이틀(1) +2 22.07.07 358 17 13쪽
48 음력 오월 초하루(2) +8 22.07.06 369 20 14쪽
47 음력 오월 초하루(1) +6 22.07.05 357 24 14쪽
46 음력 사월 스무 아흐레(4) +6 22.07.04 386 23 14쪽
45 음력 사월 스무 아흐레(3) +4 22.07.01 382 20 14쪽
44 음력 사월 스무 아흐레(2) +5 22.06.30 362 18 14쪽
43 음력 사월 스무 아흐레(1) +4 22.06.29 384 19 15쪽
42 음력 사월 스무 여드레(3) +3 22.06.28 390 18 13쪽
41 음력 사월 스무 여드레(2) +1 22.06.27 380 16 14쪽
40 음력 사월 스무 여드레(1) +4 22.06.24 417 20 13쪽
39 음력 사월 스무 이레(2) +1 22.06.23 416 20 15쪽
38 음력 사월 스무 이레(1) +3 22.06.22 417 19 13쪽
37 음력 사월 스무 엿새(2) +2 22.06.21 380 20 14쪽
36 음력 사월 스무 엿새(1) +4 22.06.20 407 23 14쪽
35 음력 사월 스무 닷새(3) +3 22.06.17 410 18 16쪽
» 음력 사월 스무 닷새(2) +2 22.06.16 417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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