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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2,024
추천수 :
80
글자수 :
139,372

작성
19.12.0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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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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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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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6화: 죄책감의 무게

DUMMY

유성지는 정새벽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이완과 만남이 있었던 이후로 유성지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길 가던 자신을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귀찮고 짜증났으나 갈수록 곱씹게 되었던 것이다.


'죽지 못한다는 것도 어쩌면 사실이 아닐까. 내가 그의 얘기를 제대로 들었어야 했나. 하지만 제대로 들으면? 뭘 할 수 있는데, 내가. 나 따위가..."


유성지는 날이 갈 수록 수척해졌다. 유성지의 일이라면 머리카락 한 올 사라져도 알아보곤 하던 정새벽이 바뀐 상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정새벽의 다정한 추궁에 유성지는 결국 이완과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그 사람이, 내 말만 듣고 외곽으로 갔다가 죽기라도 했으면. 아니, 못 죽는다고 했는데... 대체 내가 어떻게 해, 했어야 하는지... 대체 왜 나를 잡아서..."

"진정해요, 성지 씨. 괜찮아요."

"하, 하지만... 그 사람이 죽었으면 어떡하죠."

"일단 숨을 천천히 쉬어 봐요. 지금 성지 씨, 그 분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걸요. 걱정도 성지 씨가 건강해야 하죠."


유성지는 애초에 자신이 건강한 적 있었던가 반문하고 싶었지만 숨을 내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뼈마디가 툭툭 드러난 길쭉하고 왜소한 팔이 덜덜 떨렸다.


정새벽이 유성지의 손을 잡아 제 무릎 위로 끌어 갔다.


유성지는 꼭 금단 증상 온 마약 중독자마냥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수척한 얼굴은 표정 없이 딱딱하게 굳었고 숨을 빠르게 내뱉거나 아예 쉬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지 씨, 저는 성지 씨가 이야기하는 무두라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 어떻게, 말입니까."


의사를 찾아갔다면 가벼운 공황 장애 증상에 과호흡이 온 거라는 진단을 내리며 약을 처방해 주었겠지만, 김성준과 사이가 틀어진 지금 그런 유성지를 병원까지 데리고 갈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유성지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가벼운 죄책감, 신경 쓰지 않을 일로 남았어야 했던 이완의 대화는 그가 던지고 간 의미심장한 말들 덕에 유성지의 피부 속 깊게 자리잡아 혈관을 막는 지방 덩어리처럼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고 답답하게 했다.


'여긴 할당량 없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었나. 어떻게 이 분이 무두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거지. 나조차도 잘 모르는데...'


판단력이 흐려졌다. 유성지가 퀭하고 커다랗기만 한 눈으로 정새벽을 바라보았다.


"제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요. 성지 씨에게 블루와 블랙 칼라에 대해 얘기해준 것도 저였잖아요. 블루 칼라, 그렇게 불리는 외곽인들 안에 또다른 비밀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죠."


"...그런... 건가요."


유성지가 의뭉스럽게 답해도 정새벽은 다정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꿀을 발라 둔 것처럼 다정한 눈매가 유성지를 마주 보며 부드럽게 접혔다. 유성지는 잠시나마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쪽으로 오세요."

"...네, 네."


유성지가 붓을 놓고 정새벽을 따라갔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거북이 같던 그림의 진도는 한참 느려진 지 오래였다.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정새벽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새벽은 유성지를 정원 깊숙이 데려갔다. 줄곧 그림을 그리던 정원의 중심부보다도 깊은 곳이었다.


정새벽이 말했다.


"그 일 때문에 잠을 설쳤군요. 성지 씨가 오지 않아서 얼마나 외롭고, 걱정 되었는지 몰라요."

"죄, 죄송......"

"나에게 미안해 할 일이 아니에요. 성지 씨가 지금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그 분. 그 분에게 직접 사과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얀 손이 유성지의 두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성지 씨가 그 분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내가 무두에 대해 알려줄게요."


정새벽이 유성지의 뺨을 어루만졌다. 유성지는 눈가를 움츠렸지만 입술을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려다 본 정새벽의 얼굴은 더없이 평온했다.


"무두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어둠과 구석진 곳을 중심으로 다니면 되거든요. 그들은 죽음의 연기를 풍기고 다니니, 예민한 성지 씨라면 미리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성지 씨가 그 구역에 가더라도 어둠 속으로만 다니면 피하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예요. 다만..."

"...?"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럴 수 없겠죠. 그들은 빛을 좋아해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뭘 들고 다니겠어요, 성지 씨."

"...그거야, 빛을...휴대 전화 라이트나..."

"맞아요. 그들은 사람을 공격하고, 빛을 든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죠. 사람은 그들을 절대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들과 닿으면 모든 게 사라지거든요. 사람들이 골목 사이에 숨어 무두를 사냥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무두가 벽에 닿으면 벽조차 사라지고, 그렇게 된 무두는 돌아갈 곳이 없어지니."


정새벽의 목소리가 살짝 굳었다. 유성지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이완이 보았다면 무두의 피부나 다름 없다고 말했을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살인자!'


김성준의 목소리가 뇌 속을 파고들었다.


'수지 누나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너 때문에......'


유성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나는, 나는... 그런 게."


누나를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사람까지 사지로 몰아넣은 거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정새벽의 손길에 멈추었던 떨림이 다시 손 끝을 울렸다. 정새벽이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두는 머리가 없어요. 머리가 없다는 건 지능이 부족하다는 거죠. 잘만 피하면 가능해요. 하지만... 성지 씨가 얘기하는 그 분이 잘 피했을지는 걱정이 되네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다리에 힘이 풀린 유성지가 풀숲에 주저앉았다.


"...그 분이 말하기를,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죠, 성지 씨."

"...네, 자기 말로는 그랬습니다."


정새벽이 뜸을 들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무두들에게 붙잡혀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죽는 것보다 괴로울지도 몰라요."


불안감 때문에 심장을 토할 것 같았다.


정새벽과 대화 후, 꿈에서 깨고 나서도 유성지는 도통 진정할 수가 없었다.


잠을 자기도 어려웠다. 정새벽은 이완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이완을 죽을 곳으로 몰아 넣은 유성지를 책망할지도 몰랐다.


정새벽에게만은 책망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유성지를 향한 비난으로 구겨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집중이 안 돼.'


헛손질만 다섯 번 째였다. 유성지는 작업하던 조각을 내려놓고 새 석고를 꺼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끌이 엇나갔다.


'못 하겠어.'


처음이었다. 눈이 내리든 비가 오든 햇빛이 쨍쨍하든 유성지의 작업은 변함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유성지를 보고 진정한 프로라며 박수까지 쳐 주지 않았던가.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유성지는 몸을 일으켰다. 추운 날씨에 스카프를 두르고도 목 끝까지 패딩의 지퍼를 올려야 했다.


'할당량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야. 이런 식으로 작업을 못 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할당량이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할당량이...'


입술에서 피가 났다. 이완을 만나 무두가 당신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이 얘길 해 주지 않으면 작업을 못 할 거고. 못 하다 보면 누나처럼 나 때문에 죽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럴 수는 없으니까.'


내키지 않은 발을 질질 끌며 유성지는 외곽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멋모르고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다들 외곽으로는 가지 않는다며, 강동구의 도로는 뒤집어진 지 오래고 신호등도 고장나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고 했다.


지하철은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유성지는 머플러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 석고와 물감 냄새로 가득한 작업실로 돌아가 처박히고 싶은 욕구를 몇 번이나 눌러야 했다.


'어떻게든 외곽엘 가서. 블랙의 지역에서 그 사람을 찾아서. 가능하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두꺼운 패딩을 입었어도 유성지의 왜소한 몸집은 가려지지 않았다.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 딱딱한 빵 몇 개로 식사를 떼운 지 오래였으니 원래도 마른 체형이었던 몸은 속절없이 말라 갔다.


이완의 일이 아니더라도, 줄곧 식사와 생활을 챙겨 주던 유수지와 김성준이 없으니 유성지는 천천히 말라 갔을 거였다.


죄책감. 죄책감의 무게였다.


*


남자와 이완이 유성지를 남겨 두고 문 밖으로 나간 동안 유성지는 생각했다.


'언제나 집에 가고 싶지만 지금은 정말 간곡하게 집에 가고 싶다.'


그럴 수 없었다. 방음이 안 되는 탓에 추주안, 이라고 불리던 사내의 목소리가 전부 들렸다.


'나한테 계획을 왜 말하는데, 그러니까......'


유성지는 이완을 통해 블랙 칼라들의 계획을 듣고 말지 않았는가. 사실 이완의 입을 막고 싶었던 건 추주안도 추주원도 아닌 유성지였다.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에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블랙 칼라들이 유성지를 믿어 줄 리 없었다. 유성지는 정새벽의 말을 떠올렸다.


'블랙 칼라, 그렇게 불리는 이들은 험한 삶을 살아 왔으니 여유가 없고 두려움이 가득해요. 성지 씨, 최대한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하지만 그를 찾으려면 잡히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성지는 혼잣말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한 편으로는 이완을 찾아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다.


유성지는 패딩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머리에 검은 교복을 입은 여자는 추주안과 이완이 나가는 걸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총구를 유성지의 뒤통수에 들이댄 채였다.


"잡히기 싫었으면 옷이라도 헤지게 입지 그랬어? 당신 뭐 하는 사람인진 몰라도 그렇게 마르고 수척해서는, 옷만 잘 입었어도 블랙이라고 다들 착각했을 거야."

"......"

"대답 안 해?"

"......"

"그럴 수록 더 수상해 보이는 거 알지? 이완 오빠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당신을 믿지 않아. 당신이 정말 총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추주원! 그 놈이랑 말 섞지 마라!"


추주안이 내려와 추주원마저 데라고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유성지는 도망갈 생각도 않고 생각했다.


'그래. 총이든 뭐든 구해 주면 되지. 저 사람들이 바라는 걸 해 주고 나면 정말 갚을 빚은 없는 거야. 그런 다음에 돌아가면 돼, 그런 다음에 돌아가도 충분해...'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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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죄책감의 무게 19.12.02 23 2 11쪽
26 25화: 블루 칼라 중의 블루 칼라 +1 19.12.01 24 2 12쪽
25 24화: 미로같은 골목, 골목같은 미로 (2) +1 19.11.29 26 2 12쪽
24 23화: 미로같은 골목, 골목같은 미로 19.11.27 31 2 12쪽
23 22화: 형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19.11.25 34 1 11쪽
22 21화: 사냥에 천부적인 재능을. +1 19.11.24 32 2 12쪽
21 20화: 천부적인 재능을. 19.11.22 35 3 12쪽
20 19화: 훈련 19.11.20 31 1 12쪽
19 18화: 고양이 눈매의 남매 19.11.18 35 3 12쪽
18 17화: 괴물의 심장은 사람과 같다 19.11.17 40 3 11쪽
17 16화: 외곽으로 향하다(2) 19.11.15 47 4 12쪽
16 15화: 외곽으로 향하다 19.11.13 45 3 11쪽
15 14화: 블루 칼라 19.11.11 53 3 11쪽
14 13화: 세계가 조작한 만남 19.11.10 44 3 12쪽
13 12화: 이세계의 정원 19.11.08 60 3 13쪽
12 11화: 나도 모르는 새에 살인자가 되었다 19.11.06 55 3 11쪽
11 10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4 58 3 12쪽
10 9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3 73 3 12쪽
9 8화: 만남 19.11.01 68 3 12쪽
8 7화: 유성지 19.10.30 69 3 11쪽
7 6화: 죽음을 결심하다 19.10.28 74 4 11쪽
6 5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 19.10.27 78 3 13쪽
5 4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9.10.25 86 3 11쪽
4 3화: 할당량 19.10.23 100 3 14쪽
3 2화: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19.10.23 143 4 11쪽
2 1화: 게임 오버 19.10.23 212 6 11쪽
1 프롤로그 19.10.21 447 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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