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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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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글자수 :
139,372

작성
19.11.1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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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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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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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3화: 세계가 조작한 만남

DUMMY

유성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세계의 시간은 천천히 지나갈 때도, 빠르게 지나갈 때도 있었다. 최근에는 빠르게 지나가는 편이었다. 꿈 속의 그림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 분이 보시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데. 아직 한참 미완성이야.'


잠을 자지 않으면 꿈 속의 그림을 볼 수 없었으니 점검하기도 어려웠다.


몸이 피로하면 꿈 없는 잠을 잤다. 유성지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성지는 이세계 그림에 집중하기 위해 할 일을 몰아서 끝내고 하루 내리 잠만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 분을 봽는 날이 줄어들고 있어. 그 정원과, 아름다운 꽃을.'


그렇게 잠에 들었는데 정작 정새벽의 꿈을 꾸지 못하면 화가 났다. 정새벽은 규칙적인 수면과 식사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작업을 우선으로 두다 보면 백 번을 말해도 백 번을 잊었다.


'걱정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누나 얘기도 해 버렸고.'


유성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꿈은 항상 정새벽과 그녀의 정원, 이세계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유성지가 줄곧 꿈이 상상력의 원천, 영감이라고 말해 왔던 건 전적으로 정새벽을 얘기했던 거였다.


"하아."


유성지는 할당량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

11월 23일 (일)

9시 33분

날씨: 온화합니다. 저녁에는 비가 내립니다.

이완과 약속 (0/1)

...


다짜고짜 새벽에 전화를 청한 이완은, 다시 만나달라는 의사를 전해 왔다.


"작가님, 실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 지금... 몇 시인 줄은... 알고 있나요."

"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랑 내가 언제부터... 친밀한 사이였죠."

"최대한 작가님의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한 번만 더 만나 주시면."

"제가 ...왜 그래야 하나요."


유성지는 이완의 요청을 거절했다.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할당량 카드에 이완과의 약속이 뜨기 전까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완은 업무용 핸드폰으로 만날 장소와 시간을 보내 왔다. 죄송하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었지만 마음이 풀어질 리 만무했다.


'업무용 핸드폰을 바꾸던가 해야지. 아니, 번호 차단은 못 하나. 이 번호는 어떻게 안 건지.'


유성지는 이완이 불편했다.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지만 불편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짜고짜 사람을 잡아 세운 뒤 이어진 얘기는 허랑했다.


광고 업계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조금이라도 접점이 생기면 피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차였다. 유성지는 처음으로 할당량을 미루거나 휴가를 쓰는 걸 생각해 보았다.


'이걸 대체 누구한테 미뤄. 일도 아닌데.'


휴가를 쓰더라도 다음 날이면 다시 할당량에 등장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하아."


유성지는 이완이 보내 온 카페로 발을 옮겼다.


*


카페는 조용했다.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이완은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출되는 걸 꺼리는 유성지를 배려한 장소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성지가 배려에 감사할 이유는 없었다.


"무슨 ...일이죠."


이완의 앞에 선 유성지는 인사도 없이 대뜸 말을 꺼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인데 이렇게나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허락해 주시더라도 한참 뒤에 스케쥴이......"

"본론부터 얘기하세요. 당신 만나고 싶어서 나온 거 아닙니다. 할당량에 떠서 어쩔 수... ...없었어요. 죽고 싶진 않으니까요."


죽고 싶지 않다, 이완에게 그 말은 최근 유행어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술집엘 가도, 식당엘 가도, 카페를 가도, 길거리에서도 심심하면 들려왔다.


수없이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다 보니 대단한 유성지 작가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 이완은 유성지가 친숙해졌다. 어디까지나 이완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이었지만.


"유성지 작가님, 일전에는 죄송했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할당량이 타인에게 넘어갈 거라고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사과나 감사는 됐습니다."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요, 유성지는 속으로 뒷말을 끝마치며 선 채로 이완을 내려다보았다.


"작가님 덕분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본론을 얘기해 줬으면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유성지는 이완이 자기반성을 멈췄으면 했다. 하필이면 자신을 앞에 두고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털어놓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정새벽에게 이완에 대해 털어놓았다면 조언을 들을 수 있었을까.


유성지는 이완이 한 톨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완은 그런 유성지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왜냐면 저는 정말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는 지난번에도."

"우연히 오류로 하루 죽지 않는 게 아니에요, 작가님. 저는 세계 사람들과 다릅니다. 이 주간 할당량을 채우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는 선례는 없던걸요."


이완의 말에 입술을 뻐끔거리던 유성지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 얘기를 왜 저한테. 당신이 어떻든, 저와는 상관없지... 않나요."

"할당량 때문입니다."


유성지가 자리에 앉았다.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완은 유성지가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아닌 척 하면서 잘 낚였다.


이완은 미리 계산해 둔 따듯한 모카 라떼를 유성지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시기 좋은 정도로 따듯하게 식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작가님께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는 저도 몰랐습니다."

"네."

"그 날, 작가님을 잡은 것도 사실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작가님께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자정이 넘어서였어요. 그런데... 할당량 카드에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이 작가님께 연락하기가 떠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예요."


이완이 자신의 할당량 카드를 목에서 빼내 유성지에게 보여주었다.


...

11월 23일 (일)

3시 10분

날씨: 온화합니다. 저녁에는 비가 내립니다.

유성지와 약속 잡기(1/1)

유성지와의 만남 (1/1)

...


"다른 사람들과 약속이 있을 때는 할당량 카드에 뜨는 걸 본 적 없어요. 오로지 작가님과의 약속만 할당량에 등장합니다."

"......아."

유성지는 처음으로 이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약속 문자를 보낸 것도, 내가 나올 걸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도 할당량 때문이었구나. 할당량은 불가능한 걸 시키진 않으니, 기본적으로.'


이완은 양 손을 모아 교차시켜 쥐었다.


"작가님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식으로 길거리에서 사람을 잡아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이렇게 얘기하면 우스우시겠지만, 마치 세계가 강제로 개입하는 것 같은."


이완은,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졌으며, 원래 있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비슷하지만 할당량 같은 건 없었다고 설명했다.


생면부지의 세계에 똑 떨어진 자신만 할당량을 지키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거나, 그런 주제에 작가님을 만나라는 얘기까지 카드에 뜬다는 건 이상하다고.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당신이 혼자 기억을 잃었다거나 그런 건."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이완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유까지는 유성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유성지는 눈을 내리깔았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도 그 분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잖아. 이 사람처럼은 아니고 불안정하지만.'


이완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성지는, 자신도 이완처럼 정새벽의 세계에 완전히 떨어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성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게 바라는 게 뭔가요."

"제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세요."

"...그런 건 모릅니다. 설령 당신의 말대로, 세계가 당신과 나의 만남... 을 조작했다고 하더라도. 정말 난 아는 게 없어요."

"작가님."

"지난번에 얘기한 할당량과 책임에 대해서도, 이 세계 사람들이라면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기는... 있습니다."


이완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완을 흘끔 올려다보았던 유성지는 시선을 무릎으로 다시 떨구었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보기에 눈과 코, 입술의 비율이 완벽하고 모난 곳이 없는 얼굴이었다.


이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유성지는 정새벽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호감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건 싫었다.


"혹시, 서울 외곽...외진 곳을 가본 적이 있나요. 이 얘기도 이 세계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얘기해 주세요, 작가님. 외진 곳이라면 여자친... 아니, 아는 어른이 강동구에 사셔서 며칠 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혼자서요."

"네, 무언가 잘못 된 일이라도."


유성지의 눈이 뜨였다. 어쩌면 홀로 세계에 떨어졌다는 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상식도 없어서야.


"블루 칼라들은 절대 외곽에 혼자 가지 않습니다."

"블루 칼라요?"

"당신 같은 사람이요. 지금 길거리를 보면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단어는 처음 듣는데. 또 이 세계만의 규칙인 건가.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다.'


이완은 생각했다.


"왜 혼자 가지 않나요?"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 건물이 허물어지고 길이 바뀌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실종되고 없어집니다. 불안정한... 곳이에요."


이완은 서현주의 부모님 댁에 가던 길을 떠올렸다. 이완의 생각과는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던 건물들, 분명히 있었는데 사라졌던 아파트.


"거길 혼자 가서 살아남았다니 당신은 운이 좋은 겁니다. 서울 외곽은... 여러모로 위험해요."

"어떻게 위험한지 좀 더 설명해 주세요, 작가님."

"나도 말로만 들어서 잘은... 모릅니다. 그 쪽으로만 가면 사람들이 실종된다고 하니까... 성별, 나이 상관 없이요. 들리는 소문... 에 의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괴물 같은 것들이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고."

"네?"


이건 또 무슨 얘긴가. 이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세계에 대한 것을 이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유성지가 말을 이었다.


"할당량... 같은 게, 왜 있는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주가 불안정하다고 해도 까마득히 먼 이야기가 아니냐고."

"네. 저도 들었습니다."


이완은 주 대리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상관 있습니다. 벌써 서울 외곽부터 무너지고 있고, 이상한 괴물들이... 출현하고.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은 안 죽는다니까, 그런 괴물들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지나치게 불안에 떨던 서현주의 모친이 생각났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서현주의 본가를 방문했던 날 느껴지는 시선과 소곤거림의 정체는 유성지가 얘기하는 괴물들이었을지도 몰랐다.


"외곽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버려졌어요. 개발이나 공사는 중단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언론이 통제되고. 사람들이 벌써 많이 죽었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없애기 까다롭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괴물이라고 불리겠죠."

"저라면."

"...네, 그래서 하는 겁니다. 안 죽는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이 정도예요. 그러니 뭘 해야 하느냐고 물어도 저는 모릅니다."


이완은 비로소 자신의 쓰임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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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3화: 미로같은 골목, 골목같은 미로 19.11.27 31 2 12쪽
23 22화: 형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19.11.25 35 1 11쪽
22 21화: 사냥에 천부적인 재능을. +1 19.11.24 32 2 12쪽
21 20화: 천부적인 재능을. 19.11.22 35 3 12쪽
20 19화: 훈련 19.11.20 31 1 12쪽
19 18화: 고양이 눈매의 남매 19.11.18 35 3 12쪽
18 17화: 괴물의 심장은 사람과 같다 19.11.17 40 3 11쪽
17 16화: 외곽으로 향하다(2) 19.11.15 47 4 12쪽
16 15화: 외곽으로 향하다 19.11.13 45 3 11쪽
15 14화: 블루 칼라 19.11.11 53 3 11쪽
» 13화: 세계가 조작한 만남 19.11.10 45 3 12쪽
13 12화: 이세계의 정원 19.11.08 60 3 13쪽
12 11화: 나도 모르는 새에 살인자가 되었다 19.11.06 55 3 11쪽
11 10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4 58 3 12쪽
10 9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3 73 3 12쪽
9 8화: 만남 19.11.01 68 3 12쪽
8 7화: 유성지 19.10.30 69 3 11쪽
7 6화: 죽음을 결심하다 19.10.28 74 4 11쪽
6 5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 19.10.27 78 3 13쪽
5 4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9.10.25 86 3 11쪽
4 3화: 할당량 19.10.23 100 3 14쪽
3 2화: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19.10.23 143 4 11쪽
2 1화: 게임 오버 19.10.23 212 6 11쪽
1 프롤로그 19.10.21 447 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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