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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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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글자수 :
139,372

작성
19.11.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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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2화: 형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DUMMY

아침이 되자마자 이완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짐은 많지 않았다. 자그마한 오피스 박스에 연필과 메모장 따위를 밀어 넣던 이완에게 주 대리가 다가왔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주 대리는 숄을 두른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완이 먼저 입술을 뗐다.


"죄송합니다, 주 대리님, 김서윤 씨. 그 동안 제 할당량 감당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이완 씨, 그 정도는 괜찮아. 서윤 씨도 괜찮았을 거야."


어디로 보아도 김서윤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피곤함이 내려앉은 채로 말 없이 주 대리와 이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두 사냥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처리한 업무가 없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퇴근 직전까지 가서야 어떻게든 서류를 넘기는 것으로 할당량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전단지 백 장을 성의 없이 행인의 손에 쥐어주든, 소개말과 함께 인사를 건네며 나눠주든 할당량이 채워지는 건 마찬가지인 원리였다.


'피곤한 것도 못 이기겠지만, 우리 팀에 계속 신세지는 건 그만둬야지. 블랙들을 지키려다 주 대리님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추가 근무가 뜨는 걸 여러 번 보았지만 그 때는 이미 외곽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후였다. 업무는 고스란히 주 대리와 김서윤에게 갔을 거였다. 이완은 추가 근무를 하지 않아도 죽지 않으니.


그 덕분인지 이완의 사직 소식을 들은 김서윤은 그렇게까지 아쉬운 얼굴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완이 사라지면 새로운 사람을 뽑을 거고, 김서윤의 업무는 평상시로 돌아갈 테니까.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완의 업무는 김서윤이 감당하기에는 애매했고 주 대리가 처리하기에는 잡무였다. 그만두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제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요."

"그 일 때문이야? 기억을 잃었다는."


주 대리는 로비까지 이완을 따라 나왔다. 이완은 웃어 보였다. 잡무를 떠맡았으면서도 그러지 말라며 이완을 다독이는 게 고마웠다.


"그 일도 있고요."


"여태까지 일 잘 했잖아, 이완 씨. 이제 회사 좀 크려는데 아쉽지 않아요? 잠시 슬럼프인 걸 거야. 응?"

"주 대리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시 연락 줘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 나 승진해. 이완 씨 자리 정도는 다시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상사도 아쉬워 하는 눈치고."

"축하드려요.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완은 회사 밖에 서서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주 대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계가 걱정이었지만 짐을 던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앞으로는 무두 사냥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흥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자부심이 들어. 괴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지키고 있는 거니까. 도움이 된다면 하루에 열 구든, 이십 구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버스 정거장으로 향하며 이완은, 오피스 박스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오늘은 자고 가도 될까요."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완은 추남매의 집에 와 있었다. 곰팡이 선 벽도, 낡은 이불도 친숙했다.


"그러십쇼. 안 그래도 형,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슴다. 추주원 그 녀석이 형 좀 너무 고생시키지 말라고 저를 얼마나 갈구는지 모름다."

"아하하. 주안 씨가 나를 무리시키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무리하는 거죠."

"그래도 걱정됨다. 사람은 무한한 자원이 아니니까요. 무두도 죽이면 리젠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이완이 가방에서 과일 주스를 꺼내 내밀었다. 지하철 역사에서 산 거였다.


"여기요. 빵이랑 이것저것 있으니까 같이 먹어요."


추주원은 문장이 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떠들기를 좋아했고, 대부분은 추주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빠가 보기보다 군것질을 좋아한다느니, 그런 걸 먹어본 지 오래 되었다느니 하는 사사로운 것들.


"...감사함다."


추주안은 주스와 빵을 집어 구석에 내려놓았다.


"왜 지금 안 먹고."

"주원이 오면 주려고요."

"주원이 것도 있어요. 이건 주안 씨 건데."

"그래도요."


추주안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후의 판자집엔 노을이 들었다. 이 빠진 유리창과 얇은 벽 사이로 붉은 물이 가득했다.


냉장고 없는 궁색한 부엌도, 녹슨 주전자도 노을 빛에 드러났지만 어쩐지 궁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가로웠다.


"일 시작하기 전까지 좀 주무십쇼. 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던데."

"어떻게 알았어요. 관찰력이 좋네요, 주안 씨."

"이제 그만 말 놓으셔도 됨다. 주원이는 편하게 대하면서 저한테는 왜."

"......그럴까. 딱히 차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주안 씨... 아니, 주안이 네가 기분 나쁠까 봐."

"기분 나쁘면 애초에 형이라고 안 불렀죠."


추주안이 피식 웃었다. 이완이 침대에 몸을 누였다.


"여기에도 물건 파는 사람들은 옴다. 질이 좋은 건 아니지만 가끔 운 좋으면 주원이가 갖고 싶어하는 핸드폰이나, 그런 것도 들어오고. 인터넷이 안 되니 쓸모는 없지만요."


이완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피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우니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 아래로 온통 붉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노을 때문이었다.


추주안은 이완에게 말하는 것도, 그렇다고 혼잣말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블랙 얘기, 사는 얘기, 무두 얘기 같은 걸 흘림다. 모은 돈도 좀 주고. 주운 돈도 주고. 정부는 지원을 포기했지만 기업 같은 데서 구색 차리려고 지원이 옴다. 그런 걸로도 생활하고......"

"피곤하겠어.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게. 모은 돈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무두에게 여자친구를 잃었다고 그러셨죠. 그 때문에 우리를 이렇게 돕는 검까."


속이 뜨끔했지만 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주안의 목소리에 측은지심이 어려 있었다. 오빠나 동생이나 감수성 가득한, 순진한 남매였다.


"형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됨다. 곧 블랙들에게 형을 소개할 수 있을 거예요. 다들 형을 가족이라고 생각해 줄 검다.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게 느끼니까 걱정하지 마. 오히려 여기가 편해, 집 같고. ...블루들의 지역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라."

"고맙슴다. 이 은혜는 제가 꼭 갚을 검다. 무두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추주안의 목소리는 노을이 가시고 어둠이 찾아오며 점차 잦아들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고,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이완은 그저 눈을 감았다.


"...해... ...오빠가..."

"...너야말로..."

"아니......"


눈을 뜬 이완은 베갯머리 옆에 놓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스프링이 나간 매트였는데도 허리조차 배기지 않고 잠을 잤다.


"형 자니까 조용히 좀 하라니까."

"그래도 밥은 먹여야 하지 않냐고..."


추주안과 추주원이 이완이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나 일어났어, 일어났어."


이완이 몸을 일으켰다. 밥을 먹으라고 성화인 추주원과 좀 더 눈을 붙이라는 추주안을 지나 집 밖으로 향했다.


"문 앞에만 잠깐 나갔다 올게."

"조심하십쇼."


다른 블랙에게 들킬 위험이 있으니 멀리 나가진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이완은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듯하네, 그래도.'


이완은 서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길어지고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메세지가 들려 왔다.


삐---


"현주야. 나, 잘 하고 있는 거겠지. 사직서를 냈는데 마음이 편해. 여기가 나 있을 자리일까."


이완은 서현주의 핸드폰을 보물처럼 들고 다녔다. 이완에게는 부적이었다.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들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서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음성 사서함에 메세지를 남겼다.


그러고 나면 조금 더 나았다. 최근에는 무두의 이야기와, 어른스러운 척 하느라 남매에겐 자랑하지 않은 뿌듯함 같은 것들을 털어놓고 있었다.


"아악!"


골목 너머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열 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무두가 나타날 시간이야!'


이완은 서현주의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고개를 들었다. 작은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완은 뛰었다. 촌각을 다투는 때였다.


무두의 등이 보이자마자 이완은 총을 들어올렸다. 사람이 어디 있는지 살피기도 전이었다.


탕.


총성이 공중을 울리고 무두의 너른 등을 파고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경직된 조직을 뚫고 뼈를 조각내 무두의 삶을 거두어 갔다. 쓰러진 무두 너머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람 셋이 이완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괘, 괜찮...콜록!"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완은 남자를 일으켜 세워 사라진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연기로 변한 부분은 없었다. 남자 뒤로 비슷비슷한 체격의 이들이 총을 든 채 떨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하실의.


'아차.'


이완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이미 늦었다. 쓰러졌던 남자가 이완의 팔을 잡았다. 남자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이완의 것이었다.


"당신......"

"블랙! 당신이 새로 나타났다는 블랙이지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사람들이 이완의 앞에 몰려들었다. 경외심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추주원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낮, 사막의 물처럼, 한밤, 사막의 이불처럼 이완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지하실에서 이완을 노려보던 사람도 함께였다. 그들은 이완을 광신도처럼 찬양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우리는 살았어, 살았다고... 블랙, 당신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의 소문을 들었어요..."

"어떻게 저 거대한 무두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죠."

"위세화보다 대단하더니 진짜잖아!"

"당신은 신인가요? 우리는 당신을 블랙이라고 불러요. 우리의 구원자! 블랙들의 블랙!"


화룡점정으로, 무두에게 사라지기 직전이었던 남자가 이완의 양 손을 꼬옥 쥐었다.


"우리들의 아지트로 가요. 대접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의 무리에 이끌려 지하실에 도착해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완이 따라가지 않으면 헹가래라도 해서 끌고 올 기세였던 것이다.


"저는 구원자 같은 게 아니고요, 그렇게 거창한 말로 불리고 싶지도 않고, 몸이 괜찮은 거라면 이만 가 보겠......"


지하실에는 익숙한 얼굴이 가득했다. 어느 누구도 이완을 기억하지 못했다.


저 사람이, 저 분이, 바로, 블랙, 귀가 멎을 지경이었다.


과도한 환대였다. 이완은 후드를 깊이 눌러 썼다.


과연 사람들이 들이마실 공기는 충분한가 걱정할 만큼 가득 찬 지하실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추주안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형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이완만큼이나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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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화: 미로같은 골목, 골목같은 미로 (2) +1 19.11.29 26 2 12쪽
24 23화: 미로같은 골목, 골목같은 미로 19.11.27 31 2 12쪽
» 22화: 형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19.11.25 35 1 11쪽
22 21화: 사냥에 천부적인 재능을. +1 19.11.24 32 2 12쪽
21 20화: 천부적인 재능을. 19.11.22 35 3 12쪽
20 19화: 훈련 19.11.20 31 1 12쪽
19 18화: 고양이 눈매의 남매 19.11.18 35 3 12쪽
18 17화: 괴물의 심장은 사람과 같다 19.11.17 40 3 11쪽
17 16화: 외곽으로 향하다(2) 19.11.15 47 4 12쪽
16 15화: 외곽으로 향하다 19.11.13 45 3 11쪽
15 14화: 블루 칼라 19.11.11 53 3 11쪽
14 13화: 세계가 조작한 만남 19.11.10 44 3 12쪽
13 12화: 이세계의 정원 19.11.08 60 3 13쪽
12 11화: 나도 모르는 새에 살인자가 되었다 19.11.06 55 3 11쪽
11 10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4 58 3 12쪽
10 9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2 19.11.03 73 3 12쪽
9 8화: 만남 19.11.01 68 3 12쪽
8 7화: 유성지 19.10.30 69 3 11쪽
7 6화: 죽음을 결심하다 19.10.28 74 4 11쪽
6 5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2) 19.10.27 78 3 13쪽
5 4화: 서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9.10.25 86 3 11쪽
4 3화: 할당량 19.10.23 100 3 14쪽
3 2화: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19.10.23 143 4 11쪽
2 1화: 게임 오버 19.10.23 212 6 11쪽
1 프롤로그 19.10.21 447 5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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