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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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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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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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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7화: 유성지

DUMMY

유성지의 작업실은 어두웠다. 창문이 두 개나 있었지만 커튼을 꼼꼼하게 내린 채였다. 벽지도 바르지 않은 시멘트 벽 위에서 할당량 시계가 깜빡이고 있었다.


...

11월 5일 (수)

2시 41분

날씨: 일교차가 있으니 따듯하게 입어요.


금일 할당량:

인물 흉상 조각 틀 잡기 (1/1)

고객 X 주문_ 유화 밑 작업 (1/1)

고객 L주문_ 디자인 외주 시안 (1/1)

D업체 시계 광고 센터 방문_6시 (0/1)

...


유성지에게 할당량을 채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성지의 할당량은 타인보다 많았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유성지의 할당량을 소화하다 보면 버티지 못하고 일 주일 안에 터져 나갈 것이었다.


'내일 보내야 하는 조각도 미리 끝내야겠군.'


유성지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디자인, 조각, 현대 미술, 고전 미술까지 유성지가 손대지 못하는 분야는 없었다. 유성지는 젊은 남자였다. 신경질적인 인상에 제때 자르지 않아 길러 묶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나쁘지 않은 탓에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쾅.


잘 웃지 않아 표정은 딱딱했고 얇은 입술은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며, 실제로 말주변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유성지의 그런 점마저 예술가답다며 치켜세웠다.


쾅, 쾅, 쾅.


시대를 앞서 나가는 젊은 미술가, 여성 팬이 많은 미인 예술가, 천재적인 작가, 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의 합일을 아우르는...... 유성지는 예술가라면 모두 탐낼 법한 수식어를 하나씩 꿰차고 있었다.


'시끄러워.'


유성지는 앞치마에 묻은 석회 가루를 털어냈다. 조각부터 유화, 컴퓨터 작업까지 넘나드는 덕에 유성지의 작업실은 언제나 매캐했다. 석유 냄새가 났다. 유성지는 종종 환기를 잊었다. 구석에 놓인 컴퓨터가 깜빡였다. 다음 달까지 넘기기만 하면 되는 디자인 외주가 완성된 채 반짝이고 있었다.


쾅.


유성지는 짜증이 난 상태였다. 몇 분 전부터 근원 모를 시끄러운 소리가 유성지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보기에는 귀찮았다. 저러다 말겠지. 유성지는 조각용 망치를 집었다.


"너는 나와 보지도 않냐?"


벌컥, 문이 열렸다. 하마터면 망치질을 잘못해서 흉상의 코가 전부 깎여나갈 뻔했다. 문틈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유성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후였다.


유성지는 할당량을 잘 확인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머릿속에 있었고, 잊는 법이 없었다.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새벽에 쓰러지듯 잠이 들고 오후에 일어나거나, 하루 종일 자거나 거의 자지 않거나 하는 생활을 오래도록 해 왔다.


"뭐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성준이었다. 김성준은 유성지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유성지가 기억하는 김성준과 유성지의 공통점이라고는 그 뿐이었는데, 김성준은 종종 유성지의 작업실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작품 납품을 도와주거나 작업실을 청소하는 일도 그가 했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김성준은 잔소리가 많았다.


햇빛이 역광으로 쏟아져 들어와 김성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유성지는 망치를 내려놓고 천을 가져다 조각을 덮었다. 빛이 잘못 들어오면 곤란했다.


유성지는 김성준이 들어오든 나가든 문을 닫아 주길 바랐으나, 김성준은 되려 보란 듯이 문을 활짝 열었다. 김성준의 뒤로 무너진 잔해들이 보였다. 유성지가 며칠 전에 끝내서 외부로 빼둔 조각들이었다. 시끄러운 소리는 유성지의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였던 듯했다.


"존나 시끄러울 텐데 나와 보지도 않냐고."

"나가서 뭐해. 그보다 안 들어올 거면 문 좀..."

"이 싸이코패스 새끼야."


김성준의 손에 피가 흘렀다. 손 끝에 석회 조각이 묻어 있었다. 가만 보니 조각 사이로 망치가 던져져 있었다. 유성지는 조금 놀랐다. 김성준이 욕하는 걸 처음 들어본 탓이었다.


제발 좀 치우고 살라든지, 네가 뱀파이어냐 가끔 햇빛도 보고 외출도 하고 불 좀 켜고 살라든지 쓸데없는 걱정은 많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유성지에게 험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너는 누나가 죽었는데 장례식도 안 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친누나잖아."


김성준은 울고 있었다. 조각을 부수면서도 계속 울었던 건지, 뺨에 눈물 자국이 얼룩덜룩 흉하게 묻어 있었다. 덕분에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김성준의 다갈색 눈이 당장이라도 녹아 내릴 것 같았다.


"가서 뭐해. 할당량 있잖아."

"미루지도 못해? 너 인기 많잖아. 지위 높잖아. 하루 쯤 휴가 내는 거 아무것도 아닐 거 아냐!"

"어떻게 그래. 맨날 하던 건데."

"쓰레기 같은 새끼."


유성지의 높낮이 없는 대답에 김성준은 분을 참지 못하는 눈치였다. 유성지는 이런 대화가 불편했다. 김성준이 조각을 부쉈으니 재작업을 시작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두고 작업이나 하고 싶었다. 유성지는 김성준의 눈치를 보느라 장갑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김성준은 문을 닫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수지 누나 죽은 거, 다 너 때문이라고."

"누나가 할당량 못 채운 게 왜 나 때문인데."

"... ...너는...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 미안하지도 않아, 누나한테? 수지가 너를 얼마나 챙겼는데...! 너 지금 유명해진 거, 방구석에 박혀서 그림만 그리던 거. 꺼내준 것도 수지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다음 달에 우리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을 거라고!"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김성준과 유수지가 그런 사이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던 것이다. 유성지만 몰랐을 뿐, 김성준과 유수지는 주변에서 알아주는 커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끔찍하게 여긴다고 해서 인망도 높았다.


"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언젠가는 수지 노력 알아줄 거라고, 우리 노력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쾅.


한참을 씨근덕대며 유성지를 노려보던 김성준은 문을 부서져라 닫고 떠났다. 멀리서 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발주서를 어디 놨더라."


바깥에 두었던 조각은 총 다섯 점으로, 납기일은 다음 달이었다.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난잡한 작업실에서 이미 완성한 작업물의 발주서를 찾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분명 여기 뒀던 것 같은데."


유성지는 종이 뭉치를 뒤적였다. 산처럼 쌓인 종이가 위태하게 흔들렸다.


"아."


검지 손가락에 핏방울이 맺혔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베인 듯했다. 장갑 끄트머리를 살피니 닳아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이런."


유성지는 새 장갑을 찾다가 주저앉았다.


'성준이랑 누나가 그런 사이였구나.'


허전했다.



업자가 방문한 건 성준이 떠나고 오후 네 시. 해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이었다.


"작가님, 이거 아까워서 어떡해요. 속상하시겠다."


작품을 수거하러 왔던 업자가 아깝다며 유성지의 무너진 조각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성지는 이전의 업자가 더 좋았다. 그는 말이 없고 유성지에게 사무적이었다. 회수해야 하는 작품 수가 일치하는 것만 확인하면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괜찮아요, 다시 작업하면 되니까."

"그래도요. 누가 이랬담, 진짜. 내가 다 속상하네."

"손 다칠지도 모르니까 만지지 마세요."

"어머, 친절하기도 하셔라."


이전 업자는 작품을 만지는 손이 세심하고 착오가 없어서 일을 잘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갑작스레 다른 업자로 교체되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죽었다는 거였다. 덧없지 않은가. 그렇게 꼼꼼했는데도 조금만 부주의하면 죽어버리는 세상이었다.


바뀐 업자는 오지랖이 넓고 자꾸만 유성지에게 말을 붙였다. 가져가야 하는 작품을 헷갈려서 재방문 하기도 부지기수였고, 이 작품이 맞느냐고 확인하는 일도 잦았다. 다시 만들기만 하면 되는 무너진 조각을 제 일마냥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요, 이번 작품 세 점."


유성지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단 뜻으로 수거해 가야 하는 작품 세 점을 내놓고 문을 닫아 버렸다. 곧 광고 센터에 가야 했다.


날씨가 추웠다. 업자가 완전히 떠난 걸 창문으로 확인한 뒤, 유성지는 현관 앞에 두었던 스카프를 동여맸다. 태워다 드리겠다느니 가는 길이 같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유성지는 추위를 탔다. 김성준의 말에 의하면 운동도 안 하고 삐쩍 마른 주제에 밥도 안 챙겨먹으니 그렇다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유성지는 입김을 불었다. 11월이었다. 하얀 입김이 유성지의 입술 바깥으로 나왔다가, 사라졌다. 고층 건물 위, 광고판에서 유성지가 디자인한 할당량 시계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호황이라고 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웃던 팀장의 말이 과언이 아니었는지,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언뜻언뜻 시계가 보였다. 소매와 장갑 사이, 셔츠와 손목 사이에 자리잡은 시계는 과연 누구에게나 잘 어울렸고 세련돼 보였다.


"안녕하세요."

"날아가는 거 좀 잘 좀 해 봐! 리얼리티하게! 넌 뒈질 때 그러고 죽냐?"


센터에 도착하자 아예 시계 포스터가 전면에 깔려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물량이 완판된 기념으로 새 광고를 찍을 예정이니, 작가님이 오셔서 봐 달라는 거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 몇 주만 기다리면 우리 카피 작품 줄줄 나올 텐데. 이럴 때 못 박아둬야죠.'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팀장의 목소리는 활발했다.


'저는 디자인만 했는데 참여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그럼요. 솔직히 작가님 네임밸류가 얼마나 도움이 많이 됐는데요. 와서 꼭 봐 주세요. 작가님 작품이잖아요?'


귀찮았다. 제 몫의 일은 끝났으니 시계가 어떻게 쓰이든 상관없었다.


방문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당량에 떠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광고 현장은 시끄러웠다. 유성지를 발견한 팀장이 인사를 해 왔다. 유성지는 팀장과 형식적인 악수를 했다.


"유성지 작가님, 어서 오세요. 시간 맞춰 오셨네요! 오시느라 힘들진 않으셨어요?"


팀장이 시놉시스를 복사한 스크립트를 유성지에게 한 부 내밀었다.


"혹시 아이디어 있으면 말 좀 해주세요. 작가님 아이디어면 이거 다 엎어도 되니까. 이 기회에 시리즈 작품으로 재계약도 어떠신가 하고 위에서. 유성지 이름 내 걸고요. 물론 계약금은 다시 조정하고, 작가님 최대한 바라시는 선에서......"

"아... 생각해 볼게요."


배우에게 소리지르는 감독의 목소리에 묻혀 팀장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유성지는 팀장의 말을 끊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었다.


촬영 중인 세트장 옆으로, 한 쪽에 미리 완성한 CG가 띄워져 있었다. 사람이 분해되어 터져 나가 죽었다가, 다시 되돌아와 살아났다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유성지는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다.'


벌써부터 피곤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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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화: 고양이 눈매의 남매 19.11.18 3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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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5화: 외곽으로 향하다 19.11.13 4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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