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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2,023
추천수 :
80
글자수 :
139,372

작성
19.10.23 11:15
조회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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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1쪽

1화: 게임 오버

DUMMY

이완이 죽음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회사 때문이었다.


이완의 회사는 흔했다. 여행 팜플렛을 만들었다. 비수기에는 그럭저럭 다닐 만 했지만 성수기 한 달 전부터는 여섯 시 출근에 한 시 퇴근이 흔했다. 사장은 중소기업에 일이 많은 건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증거라며 종종 야근 수당을 주는 걸 잊은 척 입을 닦았다.


애초에 사람을 한 시까지 굴리는 시점에서 야근 수당을 꼬박꼬박 줄 법한 사장은 아니었다. 이런 점이 흔한 회사였다.


"졸려 죽겠다."


잠을 적게 잔 것도 아닌데 하품이 절로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 주일 전, 이완은 출근 중이었다. 여덟 시.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각. 최근의 회사는 일이 많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성수기에 비해서지만.


'오늘은 어제 시안 보낸 책자 검수하고, 작업 문구 수정하고...'


사원증을 찍고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생각이 났다. 작년, 회사 규모가 코딱지만큼 커지면서 출근 시스템도 입구에서 한 번, 부서에서 한 번으로 바뀌었다. 이완은 바뀌기 전 시스템이었던, 출퇴근 지문 인식도 종종 까먹곤 했었다. 덕분에 결근 처리되었다가 수동으로 바꾼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바뀐 시스템이 퍽 귀찮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칩을 새로 하느라 새로 발급된 사원증은 마음에 들었다. 이전 사원증은 포켓에 인쇄한 종이를 넣는 식이어서 종종 커피 얼룩이 묻어 새로 뽑거나 얼룩진 걸 들고 다녀야 했다.


"주 대리님, 커피 드실래요."

"아, 네. 고마워요."


막 출근한 주 대리가 가방을 정리하다 대답했다. 주 대리는 이완의 뒷자리였다. 이완보다 빨리 입사한 그녀는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일 처리가 빠르고 잡음이 없어서 모두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완도 마찬가지였다. 이완의 일은 팜플렛 주문부터 완성본 검수, 멋있어 보이면서 호감을 끌지만 부풀린 여행 문구 생각하기, 있어 보이는 타 사의 팜플렛 디자인 교묘하게 베끼기까지 딱히 무슨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는 잡일을 모두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성수기만 되면 잠이 부족해 더러 실수를 했다.


주 대리는 종종 자신의 업무도 아니면서 이완의 업무를 도와주었다. 자신의 몫을 다 해서 퇴근 시간까지 할 일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 2팀 직원들은 대부분 주 대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인스턴트 커피 봉지를 반으로 접어 커피를 저으면서, 이완은 그래도 퇴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쉬는 시간이 났다. 퇴근까지 삼십 분. 이완은 발주서를 수정해 거래처에 보내고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었다.


'시간도 남았는데 나가서 아메리카노나 사 올까. 요 앞에 새 카페 생겼던데, 한 잔에 천 원으로 오픈 세일 하던데... 이왕 살 거면 퇴근하고 사는 게 나은가. 지금은 사봤자 몇 모금 못 마실 것 같긴 한데.'


2팀은 전부 네 명이었다. 아메리카노 네 잔을 사는 건 별 문제 없었지만 점심 먹은 후도 아닌데 애매한 시간에 커피를 사봤자 모두들 귀찮아 할 것 같았다. 이완은 옆 자리 사수를 흘끔거렸다. 개인에 할당된 일이 지나치니 제발 새 직원을 뽑아 달라는 이완과 여타 직원들의 징징거림이 통했는지, 지난 달에 새로 들어온 사원이었다.


'저걸 아직까지 하고 있는 건가?'


일을 잘 하진 못했다. 특히 속도가 느렸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성격 좋은 이완도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 대리는 벌써 그에게 세 번이나 화를 냈다. 제법 지원자가 많이 왔다고 들었는데, 꼭 이런 사람을 뽑아야 했나.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싹싹하고 배우는 것도 열심이라 한 달 만에 정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 하겠지. 나라고 처음부터 실수 안 했나.


사수는 컴퓨터 안에 거의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단순 계산 문서를 맡겼을 뿐인데 그새 실수해서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으으......"


앓는 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들려왔다. 눈이 마주칠까 봐 이완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끼어들지 말자. 본인도 답답하겠지.'


그새 커피가 식어 버렸다. 인스턴트 커피라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이완의 자리는 복도 제일 안 쪽이었다.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왔다갔다하면 신경 쓰이겠다는 생각에 종이컵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깨물며 미리 짐을 챙겼다.


'들어가면서 맥주 사 가야지. 밀린 야구 봐야겠다.'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는 건 절망스러웠지만 모처럼 칼퇴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행복했다. 옆 자리의 사원은 아직도 일을 끝마치지 못한 듯했다. 표를 보고 타자를 쳤다가, 다시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측은했지만 도와줄 수 없었다. 이 정도도 혼자 하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맡긴단 말인가.


여섯 시. 드디어 퇴근 시간이었다.


이완은 미리 싸 둔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수에게 다 끝나면 출력해서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퇴근하라고 말할 참이었다.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고막이 아팠다.


폭죽 몇 개가 동시에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한 번도 들어보진 못했지만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풍선껌이 터지는 소리나, 타이어가 터지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


이완은 사원의 몸이 터져나가는 걸 똑똑히 보았다. 일 초 전까지만 해도 의자에 앉아 한껏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서, 한 자 한 자 숫자를 입력해 나가던 중이었던 그가. 지금 생각해 보니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완이 들은 건 사람의 몸이 터지는 소리였다.


"헉."


잠금쇠를 걸지 않았던 가방 사이로 서류며 팜플렛이며, 필기구가 와르르 쏟아졌다.


"이거 떨어뜨렸네요. 가방에 단추는 왜 넣고 다녀요."

"으아아아아악!"

"깜짝이야, 소리는 왜 질러요."

"아아아아악!"


주 대리가 이완의 가방에서 떨어져 발치까지 굴러간 단추를 들고 다가왔다. 처음엔 이완에게 내밀었다가, 이완이 받지 않자 가방에 다시 넣어주었다. 이완은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이완이 계속 소리를 지르자 주 대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서윤까지 의자에서 일어나 이완 쪽을 살폈다.


"이완 선배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프냐니. 주 대리와 김서윤은 보지 못한 걸까.


이완은 보았다. 사원의 몸이 터져나가는 걸. 맹세할 수 있었다. 처음엔 눈동자가 살갗을 뚫고 나와 공중으로 날아갔고, 목덜미와 몸의 피부, 옷이 차례대로 뜯어졌고, 나중에는 장기와 핏줄기, 굽어졌던 척추까지 공기를 밀고 나아가 사라졌다. 자판 위에 올라앉았던 손가락 역시 흔적도 없었다.


사라졌다?


분명 죽었을 것이 분명한 사원의 몸이 온데간데 없었다. 핏줄기도, 살점도 뼛조각도 없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았으니 이완 자신은 물론이고 주 대리에게까지 튀었을 텐데. 이완은 황급히 바닥을 살폈다. 치아 조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대리님, 기, 김 사원이."

"안됐네요, 오늘 할당량을 못 채운 모양이네."

"뭐라고요?"

"걱정돼서 그렇게 혼냈는데. 자꾸 일 그렇게 하면 죽는다고."

"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안됐다고요. 잘 좀 적응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새 퇴근할 준비를 마친 김서윤이 스카프를 두르면서 이완과 주 대리에게 목례했다.


"이완 씨, 대리님. 전 먼저 가 볼게요. 이완 선배님, 아픈 거면 얼른 병원 가세요. 아직 열었을 거예요."


김서윤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쓰러져 소리를 지른 이완을 걱정한 것이지, 죽어 사라진 사원을 걱정한 게 아니었다. 이완은 김서윤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투명한 문을 바라보았다. 곧, 멀리서 삼 층입니다, 앨리베이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게, 이완 씨. 내가 자주 가는 병원 알려줄까요?"

"대리님, 사, 사람이 죽었어요."

"어쩔 수 없잖아. 설마 그거 때문에 소리지른 거야? 왜 이래요."

"사람이 죽었다고요."

"새삼스럽게 충격이라도 먹은 거예요? 일단 일어나는 게 어때."

"사람이 죽었다니까요!"


이완이 같은 말만 반복하자 주 대리는 짜증스러운 눈치였다. 오늘 하루, 다섯 잔 넘게 들이부었던 미지근한 커피와 점심으로 먹은 순두부찌개가 목구멍을 뚫고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한 달이었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지난 주 주 대리는 새로 들어온 사원이 잘 적응했으면 한다고, 이완 씨가 챙겨주라며, 혼낸 건 자의가 아니었다고 다독이기까지 했다.


끈끈한 정이 아니더라도 눈 앞에서 사람이 터져나갔는데, 이상했다. 길거리에서 똑같은 상황과 맞닥트렸더라도 이완은 똑같이 반응했을 거였다.


"죽었다고. 방금까지 같이 일하던 사람이 죽었다고요!"


이완이 벌떡 일어나 주 대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주 대리의 블라우스가 늘어나 이완의 손에 감겼다.


"이거 놔, 이완 씨."


주 대리가 인상을 쓰고 이완을 노려보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이래요? 무섭지도 않아요? 이게, 어떻게..."

"나도 오늘 할당량 남았으니까 놓으라고. 사십 분 남았어요. 죽고 싶지 않거든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 대리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손이 떨려서 계속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주 대리는 블라우스 값은 나중에 청구하겠다면서, 병원이라도 다녀와 보라며 자신의 사원증 뒷면을 이완에게 보여주었다.


"봐. 오늘 넘겨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고요."


사원증 뒷면에는 붉은 글씨로 해야 할 일과 남은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완은 눈을 깜빡였다. 전자 시계를 붙여둔 것처럼 기계적인 글씨였다.


서울 지하철 여행 홍보 이미지 디자인하기 (1/1)

관광공사에서 수정 들어온 작업 수정해서 넘기기 (1/1)

회사 홈페이지에 올릴 배너 작업하기 (1/1)


추가 업무(남은 시간: 34분 21초)


새 팜플렛 디자인 시안 짜서 사장실에 넘기기 (0/1)



사원증은 작았다. 해야 할 일들이 몇 초 단위로, 다음으로 넘어가며 표시되고 있었다. 완료된 일과, 완료하지 못한 일. 글씨가 깜빡거렸다. 이완은 현기증을 느꼈다.


"이번 일은 넘어가줄 테니까 얼른 퇴근해요."


뿌리내린 듯 서 있는 이완을 뒤로 하고, 주 대리는 자리에 앉았다. 펜이 움직이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이완의 귓전을 메웠다. 이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사원증을 뒤집어 보았다.


이완이 끝낸 일과 퇴근 시간이 주 대리의 사원증에 기입되어 있던 글씨와 같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붉은 글씨와, 깜빡이는 시계까지 똑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릴 역을 알리는 전광판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어딘가 공기업에서 만든 것 같은, 익숙한 모양새로.


오늘의 미션을 클리어 하였습니다.

할당량 완료.


다른 점이라면 삼 초 단위로 넘어가는 화면 끝으로 그런 문구가 적혀 있다는 것 뿐이었다. 이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라진 사원의 책상 아래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사원증이었다. 이완이 주었던, 사원이 퇴근까지 끝내지 못한 일이 게임 오버라는 말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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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화: 천부적인 재능을. 19.11.22 3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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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화: 고양이 눈매의 남매 19.11.18 3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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