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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야 님의 서재입니다.

혼자서는 못 죽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김백야
작품등록일 :
2019.10.21 17:46
최근연재일 :
2019.12.0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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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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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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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화: 우연을 가장한 필연

DUMMY

유성지는 이완에게 붙들린 채로, 이완이 나온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불려다닌 적 있는 디자인 회사, G 건물이었다. 디자인 작업 한 건, 광고 시놉시스 작업 한 건, 일정이 안 맞아서 거절했던 작업은 세 건.


'같이 작업했던 사람인가?'


유성지는 팔뚝을 쥔 이완을 바라보았다. 키가 훌쩍 컸다. 백 구십도 넘는 것 같았다. 긴 눈매에 높은 코, 골격이 확실한 얼굴.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미남이었다.


'아니면 배우인가? 배우랑 작업한 건 이 년 전이 마지막인데.'


이완이 디자인 회사 사람이든, 배우든, 아무 사람도 아니든 유성지는 불쾌했다. 뿌리치기에는 힘이 좋았다. 유성지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례한 사람이었다.


"저랑 작업하셨던 분인가요. 그런데 왜."


놓아 달라는 소리였다.


"아......"

"일 문제라면 나중에 메일로 보내 주시겠어요."

"저, 그게요."


이완은 멍청한 목소리로 침음을 냈다가, 유성지의 표정이 구겨버린 종잇장처럼 시시각각 쭈그러지고 있다는 걸 안 뒤에야 변명을 생각해냈다.


"진짜 이상하게 보일 건 압니다만,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으니 대화 좀."

"제가 좀 바쁜데요. 제발 이것 좀 놓으실래요."

"죄송합니다."


유성지에게 사과하고도 이완은 팔뚝을 놓지 않았다. 유성지의 몸이 신호등 쪽으로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을 놓는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갈 것 같았다.


'이 사람, 나를 알고 있나?'


이완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같이 작업했던 사람이냐는 딱딱한 물음은, 이완에게 기시감을 느껴 나온 말이 아닌가 했다. 이완은 유성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완은 기억력이 좋았다. 현장에서 지나친 스탭의 얼굴도 기억해내 말을 걸고는 했던 것이다. 유성지는 어딘가 익숙했지만 이완이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기회였다.


"일, 일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이라면 매니지먼트를 통해 정식으로 의뢰해 주십시오."

"급해서요."

"제 알 바 아니죠. 그러면 이만."


손에 힘이 빠진 틈을 타 유성지가 이완을 뿌리쳤다.


기억났다. 이완은 유성지를 기억해 냈다. 서현주의 집에서였다. 이 사람을 그린 건지, 이 사람이 그린 건진 몰라도 장식장 옆에 걸려 있던 그림은 분명히 유성지의 얼굴이었다.


"작가님 자화상을 봤습니다."


유성지가 작업 얘길 하는 걸 보면 직접 그린 그림일 확률이 높았다. 동료가 그렸다거나, 모델도 선다거나 하는 가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판사판이었다.


"네?"

"자화상이요. 노란색이랑 검은색 물감으로만 그린."


유성지가 멈춰 섰다.


'요즘엔 놀랄 일이 많네.'


이완이 말하는 자화상은 유성지 본인이 그린 게 맞았다. 일 얘기로 나올 작품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리즈는 딱 세 점만 그려서 팬들에게 배포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유성지는 그림을 그릴 당시를 기억했다. 갈수록 불어나는 팬층. 사인회와 방송 출연 요청을 거절하느라 이골이 났을 때였다. 한층 신경이 예민해진 유성지를 위해 김성준이 제안했다. 팬들을 위해 스패셜 에디션 같은 거라도 내놓으면 어떻겠냐고.


'네가 원한 건 아니라고 해도 유명해진 이상 그 정도는 해주면 좋잖아.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게 결국 대중이고. 토크쇼 같은 거 나가라고 안 할 테니까. 어차피 너 말주변 없어서, 그런 데 나가면 있는 팬도 이럴 줄 몰랐다고 엄청 깼다면서 죄 안티로 돌아설걸.'


그 무렵 김성준은 유성지의 매니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유성지가 부탁한 것도, 하물며 금전적 지불이 있지도 않았다. 오로지 김성준이 원해서였다.


유성지는 김성준의 말에 공감했다. 방송이라니, 일 분도 못 버틸 게 분명했다. 생방송 중에 뛰쳐나가면 그야말로 기사감이 아닌가. 뛰쳐나갈 용기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좀 더 그럴듯했지만. 김성준은 거절하기 곤란한 요청을 전부 없애 주겠다고 했다.


'알겠어. 할게.'

'팬카페에서 이미 투표를 했어. 너한테 선물을 받는다면 뭘 받고 싶느냐고... 네가 그린 자화상을 다들 보고 싶다는데.'

'악취미로군.'

'왜, 좋잖아.'


자화상 같은 건 흥미도 없고 그려본 적도 없었다. 어쨌거나 유성지는 천재였다. 대화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색과 검은색, 분홍색과 검은색, 파란색과 검은색을 사용한 그림 세 점을 완성해 김성준에게 넘겼다.


할당량에 작업물이 뜨기도 전이었다. 이후는 유성지도 몰랐다. 누구에게, 어떻게 갔든 알 바 아니었다.


"네, 바로 그 작품 때문에요."


그렇게 거취를 모르는 작품을, 생면부지의 남자 이완이 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게 업체한테 간 그림은 아니었는데. 당첨된 사람한테 바로 보냈다고 하지 않았나.'


그림들의 행방을 제대로 알아둘 걸 그랬다. 대신 확인해 줄 김성준이 없는 지금, 유성지는 이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성지는 이런 일로 김성준에게 연락할 만큼 간이 붓지 못했다.


카페 의자는 불편했고 이완은 눈에 튀는 사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나가는 사람 한둘이 유성지를 흘낏거리며 아는 척을 했다. 간절히 집에 가고 싶었다.


한편, 이완은 유성지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기억해냈다. 이완은 커피를 받으러 픽업대 앞에 서 있었다. 이완은 카페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손가락을 움츠리고 있는 유성지를 바라보았다. 일 주일 내내 잠만 자는 사람 같기도 했고, 일 주일 내내 잠을 안 자는 사람 같기도 했다. 제 꼴도 지금은 엇비슷할 터였다.


'무슨 혼자 사는 사람마냥 사교성도 없고 무뚝뚝해서 절대 그 사람이랑 동일인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길에서 잠깐 얘기하는 동안에도 계속 바닥을 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지.'


"손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 잔, 아이스 모카 라떼 한 잔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완은 트레이를 받아 유성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작은 행동에도 유성지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마치 집에 아이를 홀로 둔 다음 가스 불이라도 켜놓고 나온 사람마냥 불안한 얼굴이었다.


유성지는 서현주가 좋아하던 작가였다. 대학 시절, 서현주와 함께 유성지의 전시를 보러 갔던 적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미술 평론을 진로로 꿈꾸고 있던 이완은 유성지의 작품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 자화상, 안 그래 보여도 역시 검은색 물감을 안 쓰셨더라고요."

"네?"

"원래 검은색 사용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인터뷰에서 읽었습니다. 다른 색을 혼합하거나 채도를 조절해서 검은색처럼 보이게 한다고. 그 기법이 탁월하다고 언론에서도 몇 번 다뤘었죠."

"타, 탁월...요. 그런 건 아닌데."

"방법을 알아도 작가님만 쓸 수 있는 테크닉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잖아요. 작가님 그림을 계속 봐 와서 그 자화상도, 조금 다르긴 했습니다만... ...첫눈에 작가님 작품인 걸 알았습니다."


이완은 술술 입을 털었다. 이완이 기억하는 유성지라는 작가는 자신감이 만만하고 자만심까지 가득하던 사람이었다.


유성지 개인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잡지 사진에 찍힌 유성지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손을 사용해 의사 소통하기를 즐겨 했고, 방송 출연이나 팬을 만나는 것도 좋아했다. 자신의 작품에 애착이 가득해서 조금이라도 지적 엇비슷한 의견을 받으면 날카롭게 받아 치곤 했었다.


이완은 그런 예민함이 오만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졸업평론으로 유성지의 그림을 골랐다. 그 때만 해도 미래에 확신이 있었기에 작성한 평론을 유성지 본인에게 보내기까지 했었다. 페이지에 기제된 메일 주소는 아마도 유성지 본인이 아니라 매니지먼트가 관리하는 거였겠지만.


"...그런...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검은색을 쓰지 않는 건 맞지만..."


유성지가 웅얼거렸다. 이완은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수 없이 봐 온 사진과 동영상, 얼굴은 같았지만 태도가 전혀 달랐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나마 유성지라는 걸 알아보았던 건 서현주의 본가에 걸려 있던 그림이 지금의 유성지와 비슷했던 덕이었다.


이완은 어떻게든 말을 지어냈다. 그가 유성지라는 걸 알고 나니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이완의 눈이 반짝였다. 최근에는 유성지의 동영상을 찾아본 적이 없었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작가님이 평소엔 사용하지 않던 터치라 자화상 작업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항상 궁금했습니다."

"처음... ...이었던 것도 맞지만."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그것도 유화에서 그런 깊이감을 내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매력적이잖아요."

"......어떻게...?"

"팬입니다."


이상했다. 유성지는 인터뷰 같은 걸 한 적 없었다. 애초에 자화상 따위를 그리게 된 것도 인터뷰가 싫어서가 아니었던가. 그림에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는 건 맞았다.


수많은 기법 중 하나였을 뿐이고, 그런 기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유성지 본인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림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들은 건 처음이었던 지라 당황했다. 항상 근처에서 유성지의 작품을 보던 김성준도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완이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이완입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님을 길에서 보게 될 줄은 몰라서요."


A사 이완 주임.


유성지는 A사를 알았다. 공익의 목적으로 작업한 광고가 한 건. 오 년 전이었다. 같은 회사라고 해서, 모든 사원이 광고 하나에 매달리는 건 아니었다. 다만 유성지가 기억하는 A사는 규모가 작았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인가. 어리겠네.'


유성지는 이완의 명함을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A사... 광고에 들어가는 오브제를 디자인한 기억은 있지만... ...저는 명함이 없는데요."

"아닙니다. 유성지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한국에 있나요. 적어도 미술 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 유성지가 명함이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명함을 처음 받아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이완은 말했다.


"선생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삼 년쯤 전에 선생님 메일로 평론을 보냈던 적이 있어요. 당시에 진행하셨던 전시를 중심으로 작업했던 거고요."

"아...... 네. 집에 가서... ...찾아볼..."

"아뇨, 굳이 그렇게 하진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만큼 팬이라는 뜻입니다."


이완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옆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시계도 네임밸류 빼면 디자인은 흔한 거 아닌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노렸나 보지."

"그러니까, 유성지 쯤 돼서도 그러는데 우리나라 미술에 희망이 있긴 하냐고."

"있겠냐? 이 작가도 뒷돈 엄청 먹었을걸. 이 사람 때문에 묻힌 예술인이 한둘이냐. 알면서 그래."


이완의 목소리가 옆 테이블까지 흘러간 것 같았다. 그들은 들으라는 듯이 떠들고 있었다. 유성지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모서리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옆 테이블에서는, 당사자가 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 같았다. 이완은 유성지의 표정을 살폈다. 유성지는 라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완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옆 테이블의 대화를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조금 피곤해 보였다.


"괜찮으신가요."

"뭐가요."

"저런 말을 들었는데. 작가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작가님 작품은 독창적이기로 외국에서도 유명한데......"

"할당량만 채우면 되죠. 작업을 계속하는 것도 할당량 때문인데요.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커피잔을 쥔 이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놈의 할당량.


'죽고 싶지 않으니까, 할당량만 채우는'


유성지에게마저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대한민국 미술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이완이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이완은 다시 한 번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42 콤부차
    작성일
    19.11.22 16:58
    No. 1

    나와 있는 거 끝까지 보고 댓글을 달고 싶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남깁니다. 흥미진진해요. 오늘 막 처음 보지만, 팬입니다. 라는 말 저도 써도 될까요?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 김백야
    작성일
    19.11.22 20:54
    No. 2

    안녕하세요 하메스트님. 덧글이 달린 건 처음이라 감개무량하네요.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ㅜㅜ!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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