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소꿉친구 (3)
‘넌 인간이 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손하란이 될 수 있어. 네가 마음을 먹으면 하란은 다시 태어난다. 하란이 다시 살아나는 거야.’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 아무런 생각도 없었겠지. 슬픔에 텅 비어있는 상태였으니까.”
누군지 모를 사람에 의해 그녀는 텅 비어버린 하란의 시신으로 스며들었다. 이미 죽어버린 육신이기에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지만, 손하란은 분명히 살아난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
“난 보이지 않는 그의 수족이 되었어. 그의 의지에 따라 ‘파괴창조’를 만들었고, 회원도 모집했어. 관리하기 쉽게 남녀 둘. 그 사람의 지식을 배우면서 온갖 일들을 저질러왔어. 대부분의 일은 밑의 둘이 했지만, 결국 내가 지시한 거나 다름없어. 난 타락해버린 거야. 그저 하란이 그토록 바라는 너를 다시 만나는 것만이 내 바람이었는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도 이 학교로 전학 와서 너를 만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드디어 하란과 너를 만나게 해줄 수 있었으니까.”
그게 과연 하란의 감정이었을까, 그녀의 감정이었을까?
“너희들의 목적은 뭐야?”
이런 질문을 하긴 싫었지만, 우주로선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피해를 없애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녀가 우주의 소중한 친구이기에,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더 자세히 알아야했다.
“…….”
하란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우주를 가리켰다.
“나?”
“응. 어제 소멸한 둘은 단순히 이세계로 영혼을 팔아 이익을 챙기려는 줄로만 알고 있었겠지만.”
결국 정식 조직원이면서도 태호와 예은에게 씌인 소울 헌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내가 어떻게 목적이 되는데?”
“넌 아직 네 자신을 잘 몰라.”
하란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신의 영역으로 다다르는 길.”
생소한 이야기에 우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거둬주신 분의 목적이지. 이세계로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도 이 때문이야. 대가로 신이나 신족, 마족과 같은 그쪽 세계의 고위종족에게 지식을 받아. 덕분에 보통으로선 알기 어려운 여러 오컬트 기술을 가지고 있어.”
그럼에도 그는 신으로의 길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찾은 것이 바로 우주였다.
“나? 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아니, 넌 신의 영역으로 오르는 길, 그 반쪽의 자질이 있어. 넌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티아는 우주가 경악할 말을 꺼냈다.
“내가 이 학교로 전학을 온 것, 너를 만난 것도 다 계획된 것이었어. 난 그저 너를 다시 볼 수 있단 사실이 기뻐 그분의 계획대로 따랐지만…….”
“…….”
할 말을 잃은 우주를 보며 하란은 씁쓸히 웃었다.
“내가 왜 너를 초대하고, 이런 얘길 다 했는지 알아?”
“떠날 생각이야?”
우주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에게 정체를 들켰으니까. 다만 너에게만은 모든 걸 말해주고 싶었어. 너에게만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었어.”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어 내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가지마.”
“응?”
“가지마. 그냥 여기 있어.”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지금 우주를 바라보면 울 것 같았다.
“난 하란이 아니야. 난 네 소꿉친구가 아니야. 널 속이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불법귀신단체의 수괴일 뿐이야.”
“그래, 넌 하란은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호흡을 멈췄다. 우주의 이어질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걸 듣는다면 자신은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꼭 듣고 싶었다. 불안감 속에 그를 속이면서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소꿉친구는 맞잖아? 어릴 때 함께 놀았잖아. 함께 어울렸잖아.”
“난, 난…….”
“지금껏 눈치 채지 못해서 미안.”
“난, 나는, 난…….”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다.
“흐, 흐흥, 지금은 달려와서 안아줘야 할 타이밍이잖아.”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미안, 내가 원래 그런 데 눈치가 없잖아.”
“아니, 오히려 다행이야.”
만약 정말 안았다면 그녀는 결코 떠나지 못했을 테니까.
펑, 퍼퍼퍼퍼펑!
그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으려는 듯 집안의 집기들이 갑자기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 하란?”
“흐흥, 아직도 날 하란이라고 불러주는 거야?”
콰앙, 퍼퍼퍼펑!
우주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폭발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 부반장님.”
하란은 우주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게. 우리 함께 어디 도망갈래?”
“응?”
“위험이란 없는 곳으로,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필요 없는 곳으로. 무언가 속이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그런 곳으로 함께 도망갈래?”
어제 옥상에서 했던 말. 그때 우주는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래, 가자.”
“……뭐?”
“어디든 같이 갈게. 그러니 혼자 떠날 생각은 하지 마.”
“…….”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하란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행복한 미소, 이어 결심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덕분에 결심이 섰어.”
그녀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안녕, 어디선가 다시 꼭 보기를.”
“하란!”
우주는 순식간에 쿤달리니 각성을 마치고 그녀를 붙잡고자 했다. 하지만 하란이 시동한 폭발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사방에 폭발의 여파로 폭풍이 몰아치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저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는 것만도 벅찼다.
타탁!
“너…….”
폭발에 놀라 날아온 티아는 베란다 앞에서 하란을 노려봤다. 그녀는 바로 근처에서 둘 사이의 대화를 모두 들었었다.
“나를 붙잡는 것보다 우주를 구하는 게 먼저 아닐까?”
“…….”
티아는 부정하지 못했다. 지금 하란의 집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제 부딪혔던 함정 따위와 비교하는 게 불경스러울 정도다.
“어쩔 생각이야?”
“떠나야지.”
하란은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단 그 사람을 찾아갈 거야. 그리고 그의 계획을 막아봐야지.”
그것은 지금까지의 하란을 만든, 부모와도 같은 존재에 대한 반기였다.
“더 이상 우주가 위험해지게 만들 수 없어.”
“그래서 어제 나타난 거야?”
“그래. 원래 그분의 계획이라면 내가 나서는 건 우주와 좀 더 사이가 진척되고 난 뒤이겠지만.”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네 말 한 마디로 막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잖아. 시도는 해봐야지. 일이 어떻게 되든 나머진 저승사자님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지?”
“넌…….”
하란은 크게 소리를 지르려는 티아를 가로막고 집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아?”
“우주가 다치도록 설정하진 않았을 텐데?”
방금 전 대화를 들었다면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럴까? 그리고 만의 하나의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잖아.”
“…….”
티아는 하란을 쏘아준 뒤 아직도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물리적인 폭발도 가미되어 있어. 경찰 아저씨나 소방관 아저씨를 만나기 싫으면 빨리 나와야 할 거야.”
티아의 등 뒤로 조언 아닌 조언을 말해준 뒤, 하란은 허공을 박차 올랐다. 미련이 남는지 집 안을 돌아보려 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다시 돌아보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우주를 부탁할게. 하지만 너무 친하게 지내진 말아줘. 질투 나서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하란은 자신의 집을 뒤로하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안녕, 사랑하는 나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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