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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검 님의 서재입니다.

아스톨리아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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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불타는검
작품등록일 :
2021.04.26 23:55
최근연재일 :
2023.05.19 20:47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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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0
추천수 :
87
글자수 :
444,514

작성
21.05.0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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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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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아스톨리아의 불꽃 1부 1장

DUMMY

소년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지막 폐허도시를 떠난 뒤 얼마가 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상대로 도시나 마을은커녕 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수중에 남아있는 음식은 없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 했다. 힘도 없다. 정신도 몽롱하다.


이제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이대로 굶어 죽던, 마물들에게 잡아 먹히던 결과는 오직 하나, 죽음뿐이다. 힘을 잃어가면서 소년은 생각했다. 이대로 죽을 거면 그냥 마물들이나 잡아먹어 볼 걸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마물을 먹으면 안 된다. 아무리 불로 구워도 그 안에 독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피곤했다. 어깨에 기댄 지팡이가 굴러 떨어졌지만 주을 힘도 없었다. 소년은 그냥 멍하니 지팡이의 붉은 마석만 바라봤다. 피곤했다. 가을이지만 따뜻한 바람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소년은 더 이상 생각하기 조차 귀찮아졌다. 그저 본능에 따라 잠들었다.


소년이 다시 잠에 깼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만월이었다. 희미한 그림자까지 생길 정도로 밝은 밤이었다. 달빛은 작은 호수에 반사가 되면서 은은한 조명을 만들었다.


소년은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된다. 다만, 강한 허기만이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소년은 아직 죽지 않았다. 마물에게 잡아 먹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배가 고팠다. 갈증도 느꼈다. 간신히 호수까지 기어갔다. 어쩌면 자신 생애 마지막 물 한 모금이 될 수 있었다.


호숫가에 다가간 소년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물을 퍼 올렸다.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실 수 없었다. 소년의 손에 머물렀던 물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갔다. 손가락에서 멀어진 물방울은 다시 호수로 낙하하면서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소년은 한곳을 응시했다. 마치 눈으로 호숫물을 마시듯이 바라봤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소년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호숫가에 서 있는 모습은 분명 사람이었다.


“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큰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소년을 돌아봤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기엔 먼 거리였지만 모른 척하기엔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소년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몰랐다. 어색한 침묵만이 있었다.


때마침 구름이 달을 가렸다. 소년도 그 사람도 그 사람도 어둠 속에 몸을 가릴 수 있었다. 소년은 안도감과 조바심을 동시에 느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내가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름이 지나가고 달빛이 다시 호수를 비추었다. 하지만 호수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소년은 자신이 헛것을 본 건가 하고 눈을 깜빡였다. 계속 깜빡였다. 눈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호숫가에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사라졌다. 물소리조차 없었다.


소년은 아직도 손에 물을 담기 위한 자세 그대로인 것을 깨달았다. 손에 더 이상 물은 없었다. 손에 물이 다 떨어질 때가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난생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외에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은. 어쩌면 착각이나 환상을 본 것일 수 있었다. 아마 착각일 수 있다. 굶주림에서 오는 착각. 물소리마저 없이 사라지는 건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소년이 너무 지쳐 못 들은 거 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소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에. 사람이라니.


소년은 어쩌면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말이다. 어쩌면 위험한 여행을 시작하고 중단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강한 게 아닌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소년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보았다. 보고 말았다.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사람을 보았다.


배가 미칠 듯이 고파 고통까지 느껴졌지만 소년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진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짧은 시간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소년은 자신이 본 게 환상이 아니라면 방금 그 사람이 있는 곳에 흔적이 남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세를 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 순간, 소년의 복부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소년은 그대로 쓰러지고 한 손이 호수 수면을 내려쳤다. 물방울이 치솟고 수십 개의 파문이 호수로 번져나갔다.


강한 고통에 소년은 몸을 움츠렸다. 창자가 뒤집히고 몸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고통으로 소년의 움츠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누군가 소년의 가슴을 발로 강하게 짓누르고 뾰족한 무언가가 소년의 이마에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소년은 무엇이 이마를 누르고 있는지 봤다. 화살이다. 쇠뇌에 장전된 화살. 소년은 쇠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가느다란 나무가 발사된다면 자신의 머리를 박살낼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고통 속에서 소년의 시선은 이 치명적인 무기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옮겨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아직 어리고 호기심이 많았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공포심마저 누를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쇠뇌가 위험한 무기일 걸 알지만 처음 본 무기에 그렇게 공포심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 이외의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생애 처음.


쇠뇌를 들고 있는 손은 하얗고 가늘었지만 억셌다. 팔을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을 마주보았다. 파란 눈이었다. 여름 하늘처럼 여린 파란 색이 아니라 심해처럼 강한 파란 색 눈동자였다. 아름다운 눈동자와 달리 매서운 눈매를 가졌다. 눈꼬리가 위로 올려져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고불고불한 긴 금발에는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턱선은 여렸고 수염은 없었다. 여린 턱선과 달리 입매는 강한 의지를 지녔다. 귀는 소년과 달리 길고 뾰족했다. 엘프였다. 소년이 처음 본 사람이 엘프였다. 그것도 여자 엘프였다. 왜 물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알 수 있었다. 엘프는 자연을 몸의 일부처럼 다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호숫가에서 씻고 있었는지 몸에서 물방울이 계속 흘러내렸다. 긴 머리카락은 물기 때문에 볼과 몸에 달라 붙었다. 볼에 달라 붙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물방울은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더니 쇄골을 지나 젖가슴에 머물더니 그대로 땅에 뚝 떨어졌다.


물기에 젖은 몸은 달빛에 반짝였고 소년은 여자 엘프의 몸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입 안이 텁텁하고 심한 갈증을 느꼈다. 생각 같아선 호수의 물을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이 사람의 아름다운 몸을 더 보고 싶었다.


소년은 시선은 젖가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는 소년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릴 뻔 했다. 대신 쇠뇌로 소년의 이마를 눌렀다. 짜증이 섞인 감정과 함께. 그리고 말 했다.


“누구냐?”


여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그때서야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것을 깨달았다.


“네?”


바로 질문을 이해할 순 없었다. 여자는 그대로 쇠뇌를 당기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질문을 했다. 100년 전에 이런 상황이었으면 진작에 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르다. 살아있는 사람을, 이렇게 우연이라도 만나기 힘든 세상이다.


“누구냐고?”


“아··· 유··· 유리스요.”


여자 처음에는 소년의 대답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게 소년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스······?”


“네···”


여자는 자신의 질문을 잘못했나 생각했다. 누구냐고 묻는데 이름을 말하다니. 그게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적절한 대답인가? 여자는 질문을 더 해보기로 했다.


“어디서 왔지?”


“어, 저기 고개 10갠가? 11갠가를 지나고··· 그 다음에 쌍둥이 바위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꺾은 뒤, 쭉 가면 물결 초원이 나와요. 음··· 그곳에서 언덕이 하나 있는데요. 그곳에 집이 있어요. 거기서 왔어요.“


“······ 사는 곳 이름은?”


말문이 막힌다.


“음··· 모르겠어요.”


예상했던 답변. 질문 변경.


“여기서 뭐하고 있지?”


“물을 마시려고요.”


“왜?”


“목이 말라서요.”


당연한 말이지만 여자 엘프가 원하던 답변은 아니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내 질문은 여기에 뭐 하는 중이냐고!”


유리스는 한참 고민하더니.


“먹을 게 떨어져서 마을을 찾다가 여기로 왔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여자는 혼란스러웠다. 질문의 대한 답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소년은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을 하지 못했다.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소년의 이름 뿐. 이 유리스라는 소년은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는 것인가. 손가락에 조그만 힘이 들어가면 소년의 짧은 삶은 여기서 끝장날 수 있다. 그럼에도 저런 긴장감 없는 대답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는 사이, 유리스의 시선이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여자는 한숨을 쉬면서 쇠뇌에 다시 힘을 주었다. 유리스는 시선을 여자 다시 마주보았다. 하지만 잠시일 것이다.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다. 여자는 판단을 해야 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쇠뇌를 당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여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깔끔하고 뒤끝이 없는 해결 방법이다. 하지만 여자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다. 정당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소년은 그런 것과 너무 동떨어져 보였다. 낡은 옷, 지저분한 머리카락, 왼쪽 손은 다쳤는지 붕대를 감고 있다. 무엇보다 이런 얼빠지고 멍청한 표정이 연기라면 600년을 살아온 여자의 인생을 다시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여자는 결단을 내렸다. 쇠뇌를 치웠다. 무릎을 꿇고 유리스의 볼을 심하게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야···”


“악마는 아니군.”


“아··· 아니에요.”


이 소년의 정체가 뭔지 모른다. 그냥 떠돌이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같은 세상에 떠돌이라니. 방금 말한 거처럼 먹을 게 떨어져 떠도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고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다시는 얼굴을 볼 일이 없을 테니.


씻다 말았지만 여자는 더 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짐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 옮겼다. 멀지 않는 곳에 짐이 있었다. 여자는 속옷부터 입기 시작했다.


유리스는 여자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말을 걸고 싶었다. 유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단어가 무엇인지 고심했다. 여자가 옷을 다 입으면 그대로 떠날 것 같았다. 그전에 생각을 해내야 한다.


“어, 이름이··· 이름이 뭐에요?”


막 푸른빛이 도는 블라우스를 입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빼낸 여자가 무심히 말했다.


“피오르네··· 피오르네다.”


하지만 피오르네는 이 이름이 다시 불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저 소년과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여자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은 많지 않았다. 금방이었다. 유리스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다. 피오르네는 유리스를 한 번 보더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꼬르륵.”


대단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피오르네의 걸음이 멈췄다. 또 생각이 났다. 먹을 게 없다는 말. 그냥 가도 됐지만 멈췄다.


“꼬르르륵···”


“저녁은?”


유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안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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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스톨리아의 불꽃 1부 4장 21.05.25 278 5 11쪽
4 아스톨리아의 불꽃 1부 3장 21.05.18 300 5 13쪽
3 아스톨리아의 불꽃 1부 2장 21.05.11 321 5 8쪽
» 아스톨리아의 불꽃 1부 1장 21.05.04 402 3 12쪽
1 아스톨리아의 불꽃 - 프롤로그 21.04.27 514 4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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