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조회수 :
787,432
추천수 :
11,578
글자수 :
5,820,877

작성
14.11.10 04:17
조회
2,369
추천
30
글자
35쪽

해의 그림자 214

DUMMY

고작 여덟자였다. 하지만 정작 여덟자였다. 김석하가 남겨놓은 전언은 그걸로 충분했다. 시어미가 자신을 찾아왔을 당시 양화당 쪽에 있더라니, 그는 용케 자신과 시어미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어미를 믿지 말라는 말을 자신에게 귀띔하기 위해 새끼줄에 종이를 같이 말아서 끼워넣은 것이 분명했다.


이건 김석하도 아는, 김석하도 의심하는 일이었다. 옥당 공좌부는 최석정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를 파악해야 했다.


진홍은 띠지를 빼내어 헐렁해진 고삐줄을 다시금 두손으로 비벼 꼬아보았다. 하지만 회임 중이라 손끝에 힘이 실리지 않는 탓인지, 엉성하게 헐거워진 고삐줄은 도무지 촘촘하게 꼬이질 않았다. 진홍이 아무리 손끝에 힘을 줘도 성기게만 되었다.


진홍은 원래 손길이 굼떠서 그렇지, 원래 뭐든 한번 하면 끝을 볼 정도로 손매가 야무진 성미였다. 그래선지 괜히 고삐줄이 더 어설퍼 보이고, 그래서 더 거슬려 보였다. 진홍은 가만히 삽살 고삐줄을 들여다 보았다. 회임 중만 아니었더라면 손끝에 힘이 풀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봉이나 우희한테 맡겨서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려놓거나,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지아비에게 고하거나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김석하가 지아비에게 고하지 않고 굳이 새끼줄에 띠지를 끼워서 자신에게 언질을 남긴 데는 달리 사정이 있을 지도 몰랐다.


내코가 석자인데, 남의 코를 살피다니.


진홍은 코끝을 긁으며 쓰게 웃고선 다시금 수중의 고삐줄을 그러쥐고 한걸음한걸음 옮겨서 연당을 돌아서 통명전 월대로 돌아왔다.


월대에서 내려와서 그 아래의 차일고리에 고삐줄을 매달아야 했지만, 어쩐지 피로감이 엄습해서, 진홍은 월대 밑으로 내려갈 엄두도 나질 않았다. 진홍은 월대를 두리번거리며 월대에도 차일고리가 있나 살피다가 청동드므에 시선이 닿았다.


워낙 묵직하여 원래도 장정 혼자서는 쉽사리 들지 못하고, 물을 받아두면 장정 여럿이서 어렵사리 들 법한 청동드므였다. 당연히 여기에 동서남북 네군데로 못박힌 손잡이들 중 하나에 고삐줄을 묶어두면, 제 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더라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지아비가 그리도 예민하게 집착하던 섬돌을 침범하지도 못할 터였다.


삽살을 청동드므에 묶어두고 진홍이 상체를 쭉 펴고 일어서는데, 삽살이 얼른 청동드므의 손잡이를 딛고 드므의 운두에 매달려 물을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목이 탔으면 저럴까 싶어서, 진홍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삽살이 갑자기 양화당쪽을 향해 컹컹컹 짖어댔다.


"왜 이러느냐?"


진홍이 의아히 고개를 드니, 살갗이 유독 검고 몸집이 너무 비대한 홍단령의 신료가 걸어오다가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뒤로 제치는 참이었다.


놀라서 자빠질 뻔한 김석주는 고개를 홱 돌렸다가, 통명전 월대에 선 진홍을 보고 눈시울이 꿈틀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속이 뒤틀렸다. 이내 김석주는 실태를 깨닫고 진홍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던 그는 청동드므 운두에 매달린 은금빛 삽살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문인석처럼 굳었다.


"저놈이..."


방금 전까지 우렁차게 짖던 저 삽살은 언제 짖었냐는 듯이 고개를 드므 속에 쳐박고 물을 핥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석주는 진홍과 함께 있는 삽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딱 세번만 짖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필시 재산루에서도 자기만 보면 세번씩 짖어대다 내쫓긴 그놈이 분명했다. 석주는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저놈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석하가 이리로 데려다 놓은 게 분명했다. 이건 그냥 의심을 묻고 지나치려 해도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미심쩍고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석하는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을 안하려고 해도,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귀신을 보는 영방을 중궁전에 데려다 놓다니. 걸핏하면 자신을 보고 짖어대어 쫓아내긴 했어도, 또 남 주긴 아까운 게 저 영방 놈이었다. 헌데 저 영방이 중궁전에 와 있다니. 석하 그놈이 요즘 왕의 심부름을 곧잘 하더니, 자신이 누구의 사람인지를 망각한 모양이었다. 똑바로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진홍은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허리숙여 보이다가 삽살을 노려보고 양화당으로 들어가는 김석주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하며 삽살을 쳐다보았다.


"너, 병판대감 처음 보니?"


이미 석주에겐 관심도 두지 않는 삽살을 보니 진홍은 그저 의아했다. 방금 이 삽살은 병판대감을 보고 세차례 연거푸 짖어댔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게을러서 처음 세번만 짖고, 그 뒤엔 안 짖는다지 않았나? 헌데 왜..."


묻는다고 사람의 말로 답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영방이래봤자, 사람의 언어는 영역 밖이었다. 삽살은 그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양화당쪽을 한번더 쳐다보는가 싶더니 계속해서 새치름하게 물을 홀짝거렸다. 진홍의 눈엔 괴이한 장면이었다. 어째서, 김석하의 삽살인 이 영방은 김석주를 보고도 세번을 짖는 건지. 둘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진홍의 두눈이 반짝였다.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보고 짖는다면..."


진홍은 가만히 미간을 찡그렸다. 김석주를 볼 때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저 느낌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김석주에게 귀신이 붙어서, 영방이 그 귀신을 보고 짖는 것이라면...또 누군가를 죽인 것이었다. 최근 김석주가 죽였을 법한 사람은 장고상궁 뿐일텐데...아니면 또 다른 희생양이라든지.


"너, 정말로 세번씩 짖는구나. 진짜 영방이구나."


진홍은 삽살을 내려다보며 신기한 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의 갈기처럼 기다란 은금빛 털이 진홍의 손샅으로 미끄러졌다. 삽살은 기분이 좋은 듯이 고개를 돌려서 진홍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진홍은 여린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견삼犬彡이다. 개견犬자에 터럭삼彡."

"..."


이름이 좀 시시하다는 듯 삽살은 고개를 홱 돌리고 청동드므에서 내려왔다. 그 모습에 진홍은 피식 웃었다.


"네가 영방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제야 삽살이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려 진홍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삽살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청동드므 밑의 그늘로 돌아가 늘어지게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진홍은 쓴웃음을 지으며, 눈길을 들어서 양화당 쪽을 쳐다보았다. 벌써 김석주는 양화당의 서쪽 섬돌에 목화를 벗는 참이었다.


이번엔 또 누구를...


진홍은 김석주가 정말로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지아비가 옥당 공좌부를 두고 불같이 화를 내었다면, 그것이 옥당 전한으로 있는 최석정에게 무슨 해를 미칠 물건이라면, 또 김석주가 개입한 사건이라면, 그 내막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김석주는 김석주대로, 자꾸만 뒤통수로 달라붙는 진홍의 시선을 느끼고 모골이 송연해진 터였다. 목화를 벗고도 양화당 툇마루로 올라설 수가 없었다.


"안 올라가십니까?"


등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낭랑한 음성에 김석주가 곁눈을 흘기니 얼핏 붉은 빛이 눈에 비쳤다. 자신보다 젊은 목소리에 붉은 웃도리를 누릴 만한 자는 손에 겨우 꼽힐 정도였다. 최석정 그리고 김만중...자기도 모르게 어깻죽지를 움츠리고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최석정이었다. 얼굴은 핼쑥하니 아직도 반하독 후유증에 시달리나 싶었다.


"자네는 저쪽으로 가게나."


김석주는 동쪽 섬돌을 턱짓으로 가리키곤 주춤주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또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게나 널브러지게 벗어놓고 갔을 목화 두짝을 주섬주섬 주워들어 똑바로 붙여놓느라 시간을 끌었다. 최석정은 그러한 김석주의 둔중한 등줄기를 밑눈으로 훑어보면서 제 앞섶을 꾹 눌렀다.


"저와 얘기 좀 하시죠."

"얘기? 지금? 전하께서 기다리시는데?"


김석주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도, 얼른 섬돌에서 발을 떼어 양화당 툇마루로 올라섰다. 그 모습에 최석정은 가시돋친 눈길로 쳐다보았다. 뭐가 저리 켕겨서 발을 빼는 건지 그 속을 알 것 같기도 하였다.


"전하의 처분을 기다리는 내가 어찌 거꾸로 전하를 기다리게 하겠나."

"끝나고 뵙지요."


석정은 냉담한 눈길로 석주를 보았다. 그리고서 자신도 걸음을 우측으로 떼어서 동쪽 섬돌로 다가섰다. 날이 흐려선지 햇볕이 설핏하여 그림자도 흐릿했다. 하지만 김석주를 노려보는 석정의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한번 해 보십시다.


석정이 불편한 심기를 삭이며 양화당 안으로 들어서니, 두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시름에 잠긴 왕의 용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양화당의 공기도 여느때보다도 무거웠다. 석정은 눈빛을 흐리고 가만히 품속을 더듬었다. 숙종의 뒤에서 말없이 부채질만 하던 두광이 석정을 힐끗 쳐다보니, 이런 분위기에 품속의 물건을 꺼내놓아도 되는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도대체 뭘 가졌기에?


숙종은 김석주와 최석정을 비롯해서 신료들이 속속 입시하는 줄도 모르고, 두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눈앞의 서안만 뚫어져라 보았다. 자신의 두팔에 갇힌 시야만 쳐다보면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니 이마가 빠개질 듯 무겁고 아픈데다, 뒷목도 뻐근하니 버겁고 결려서, 고개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었다. 자신이 두통 때문에 이러는 건지, 이러다가 두통이 생긴 건지, 원인과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전하...신료들이 입시했나이다."


마침내 도승지까지 내관 한명을 앞세워서 서반書盤에 온갖 계문들을 받쳐들고 입시했다. 두광은 서반을 건네받아 숙종의 서안 옆에 내려놓으며 고하였다. 숙종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앞을 보았다. 뭔가 단단히 벼르는 듯이 굳어버린 최석정의 얼굴, 그리고 여전히 의뭉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김석주의 얼굴을 보니, 숙종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괜히 인중 쪽이 가려웠다.


"계문은 이게 다요?"


이미 계문이 없다는 핑계로 왕이 도목정도 앞당긴 전력이 있는 터라, 도승지로선 이 상소, 저 차자, 웬만하면 싹싹 긁어서 봉입하여 들고 왔는데도, 왕의 성엔 차지 않는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도승지는 등뒤의 김수항과 민정중 등을 힐끔 돌아보았다. 왕이 말하는 건 어쩌면 단순한 상소나 차자, 장계가 아닐 지도 몰랐다. 혹시 저사람들 사직소도 필요하냐는 질문이 목울대로 올라왔다. 하지만 감히 내뱉을 수는 없었다.


"여기..."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신들이..."


김수항과 민정중, 민유중이 민유중은 물론 김석주까지 일제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손을 빼지는 못했다. 관직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높은 자리에선 허적이 그랬듯이 자신들도 언제나 품속에 사직소를 넣어두고 다녀야만 했다. 더군다나 전날 자신들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난 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미련이 남았다. 오랜 남인천하를 끝장내고 이제야 서인들이 기지개를 좀 켜보나 했더니...자신들이 디래도 물러나면 조정은 누가 책임지고 서인은 누가 영도하나 싶었다.


"여기 또 있습니다."


갑자기 최석정이 제 품속으로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무릎맡으로 꺼내놓았다.


"뭐요?"


숙종은 충혈된 두눈으로 석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만큼 눈자위가 뜨겁고도 따가웠다. 헌데 최석정이 내어놓은 서계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미와 중궁의 일로 머릿속이 부산스러운 탓에, 숙종은 조금은 내키지 않는 음성으로 두광에게 손짓했다.


"가져오라."


도승지는 어이가 없어서 흘끔 석정을 흘겨보았다. 모든 상소와 차자는 자신을 거쳐야 하는데, 바로 왕에게 전하려고 한 것이 괘씸했다. 그렇다고 최석정보다 품계가 높은 자신이 차자를 받아서 전하는 것도 체모가 깎이는 일 같아서 왕 등뒤의 내관 둘을 보며 눈치를 줄 뿐이었다.


두광이란 놈이 숙종의 등뒤에서 부채를 내려놓고 다가들었다. 도승지는 그제야 머뭇대며 엉거주춤 석정에게로 다가섰다. 두광이 주저없이 손을 뻗어 석정의 무릎맡에 놓인 차자를 한장 받아들려다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최석정崔錫鼎 백배百拜란 첫머리부터 僉尊前첨존전 근강謹控이란 뒤꼬리까지, 어디서 많이 본 글자들이었다. 전한의 직임을 수행하기엔 자신이 부족함이 많으니 이만 자신을 내쳐달라는 의미로 걸사전면乞賜鐫免이란 글자들까지 정말로 많이 본 글귀였다.


"사직소?"


두광의 어깨너머로 쳐다보던 도승지가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어디서 한두번쯤 본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도승지를 맡은 두어달 사이 보았을 법한 사직소라면 몇 없을 텐데...워낙 수많은 계문들을 처리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최석정이 사직소를 밥먹듯이 냈던 양반도 아니었다. 예전에 산증을 앓았다가 낫고 나서, 괜히 병을 핑계대고 사직소를 낸 적이 있긴 해도, 그때 한번 뿐이었다. 예전에 최석정이 썼던 사직차자를 그대로 재탕한 건 아니었다.


누구더라?


하지만 기억력이 나쁜 두광으로선 딱히 짚이는 곳도 없고, 그저 왕에게로 엉거주춤 가져올 뿐이었다. 어차피 기억력이 좋은 자신의 주군은 이 사직소를 보는 순간 알아차릴테니.


헌데 그렇게 최석정의 무릎맡에서 사직차자를 집어들고 돌아오고도, 두광은 막상 숙종 앞에 사직차자를 내어놓기가 겁이 났다. 이미 도승지 입에서 나온 사직소란 석자에 왕이 저 짙은 속눈썹에 불이 붙을 기세로, 두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쪽을 쏘아보는 참이었다. 두광은 오금이 저리고 오감이 굳었다. 더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중궁전에 이어 최석정까지, 오늘 자신의 상전이 믿는 도끼에 발등 손등 죄다 찍히시는구나 싶었다.


"전하...여기..."


말이 나오다가 말고 목에 콱 걸리는 바람에, 두광이 다시 겨우 목청을 가다듬는데, 왕이 냅다 손을 뻗어서 아무런 말도 없이 두광의 손에서 사직소를 확 낚아챘다.


"왜 거꾸로..."


숙종은 이글이글거리는 쌍심지로 석정의 사직소를 내려다보면서, 글자들을 죄다 집어삼켰다. 예전에 누가 썼던 사직소와 똑같았다. 그는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최석정을 흘겨보더니, 이내 김석주를 쏘아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사직소로군?"

"..."


왕의 시선이 김석주에게로 향하자, 도승지도 그제야 아차 싶어서, 눈길을 돌려서 김석주를 보았다. 최석정이 김석주의 사직차자를 그대로 인용했다? 예전에 윤휴가 허적을 겨냥했던 그대로 최석정도 김석주를 겨냥한 모양이었다.


"병판대감도 한번 보시겠소?"


숙종은 치미는 분노를 꾹꾹 눌러담으면서, 일부러 불편한 공대로 거북한 심기를 표출했다. 김석주의 어깻죽지가 대번에 굳어졌다. 자신이 이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최석정 저놈이 얘기 좀 하자고 하더니, 이런 뜻이었나 싶었다.


"대감께 미리 양해를 구하려던 게, 좀 늦었습니다."


석정 역시 담담히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자신이 김석주와 맞붙는 것은 그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왕은 김석주를 치는 것과는 별개로 병조판서 자리를 빼앗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김석주를 궁지로 내몰 수는 있었다.


"자네...?"

"천신이 미욱하여, 과분한 직임을 맡아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모든 관직과 품계를 내려놓고 초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한술 더떠 품계까지 내려놓겠다고 선언했다. 김수항과 민정중 등은 움찔하며 최석정을 돌아보곤, 다시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최석정이든 김석주든, 둘중 하나만 물러나면 일이 정리될 듯 싶었다. 어차피 김석주는 같은 서인이지만 한편으론 외척이기도 했다. 최석정도 같은 서인이긴 해도 지천遲川의 지류支流였다. 둘 중 아무나 없어져 주면 좋았다.


김석주는 최석정을 쏘아보고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왕으로선 신료들의 기나 확 꺾어놓고 덮어둘 수 밖에 없었다. 서인들의 수뇌부인 김수항과 민정중, 민유중은 물론 자신까지 한꺼번에 퇴진하게 되면, 서인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왕으로선 송시열의 수족인 이상이나 권상하 같은 인물은 물론, 어쩌면 송시열까지 불러들여야 할 판이었다. 그것만은 왕으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정중이나 민유중 한둘 잠시 내보내는 선에서 무마할 터였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왕의 제물이 자기 하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죄는 지어도, 받기는 싫은 신료들로선 얼씨구나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김석주 자신에게 죄다 떠넘기고 자신들은 뒷짐지고 물러날 것이 너무도 뻔하였다. 김석주 자신이라도, 민유중 혼자 다 뒤집어쓰고 나가주면 다행스러워 할 테니. 그런 신료들의 속성을 익히 아는 건지, 최석정은 그 희생양을 자신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황당했다. 김석주 자신은 그저 꾀만 조금 빌려줬을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손을 보탠 것은 호조판서 민유중이었다. 물론 자신이 배후라는 생각은 김석주는 하지 않았다. 배후도 자신이 아니라 사촌누이인 대비 김씨였다. 아니, 진짜 배후는 따로 있었다. 어쨌든 김석주 자신은 아니었다. 막상 벌을 받게 생기자, 김석주의 의식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굴을 파고들어 어디론가로 닿았다. 진짜 배후는 해의 저편이었다.


"이만 윤대를 파하노니 그만 물러가라."


왕의 옥음이 그저 멀게만 들렸다. 김석주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서 양화당을 나서면서, 최석정의 뒷덜미를 노려보았다. 최석정은 자신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동쪽 섬돌로 가서 목화를 신는 참이었다. 마음 같아선 허적에게 그랬듯이 그대로 뒷덜미를 확 잡아서 허공에 쳐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후미진 골목도 아니었고, 황의 시야에 탁 트인 양화당 앞이었다.


"자네 정말 이러긴가?"


가쁜 숨결로 고작 외마디 내뱉고 났더니, 또 숨이 찼다. 헌데 최석정은 아까 자신이 했던 그대로 대충 시선을 건네는 둥 마는 둥 대꾸할 뿐이었다.


"서쪽 섬돌로 가셔야죠."

"아니 자네..."

"죄를 받으러 오신댔으니 뭐..."


최석정은 그리 건성으로 야죽야죽 대꾸하곤 그대로 목화를 마저 신었다. 등뒤에서 김석주가 자신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상관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가진 패는 던졌다. 상대는 흑돼지로 불리지만, 또 한편으론 가막쇠 대감이라 불릴 정도로 왕에게서 유일무이하게 병권을 위임받는 김석주였다. 어쩌면 자신이 지고 모든 관품을 발가벗기고 도리어 쫓겨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쫓으면, 그 죄업이 그대로 굴레로 작용할테니 김석주는 오래 못갈 터였다.


"자네..."


뚫린 입으로 말문이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는 김석주를 뒤로 하고 통명문 쪽으로 돌아서다가, 석정은 흠칫 놀라서 두눈을 크게 떴다. 성균관에 있어야 할 김만중이 이제 막 통명문 협문을 지나서 홍단령 차림으로 걸어오는 참이었다. 그것도 양화당이 아니라 통명전 쪽으로 에돌아서 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감...?"


석정은 고개를 비끼고 김만중을 쳐다보았다. 당장 양화당이 아니라 통명전 쪽으로 가는 것만 봐도 김만중이 배알하러 온 이는 왕이 아니라 왕비일 것 같았다. 물론 중궁의 친정식구이니 만큼 왕도 통명전에서 김만중을 함께 만날 수도 있겠지만.


"저 친구가 여긴 웬 일로..."


옆에서 김석주도 살짝 인상을 쓰고 중얼거리는 참이었다. 석정은 곁눈으로 흘겨보곤 바로 김만중을 향해 두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김만중이 걸어오다 말고 두눈을 크게 떴다. 김석주와 최석정이 나란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니 기분이 묘하였다. 한눈에도 서로 물과 불, 혹은 물과 기름인 사람들이 같이 있다니.


"그쪽이야말로 어찌 둘이 같이..."

"피터지게 싸우지요."

"응?"


만중은 석정의 대답이 어쩐지 허세가 조금 들어간 것 같아서 벙찐 얼굴이 되었다. 일단 만중의 눈에는 조금도 피터지는 몰골이 아니었다. 김석주나 최석정이나, 홍단령의 실올 하나 풀리질 않았으니.


"그러는 영감은..."

"중궁전하께서 갑자기 부르시어..."


김만중은 말끝을 흐리며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언제부턴지 여인들은 조금씩 입지가 약해지는 참이었다. 혼례를 올리고 한동안은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풍습도 점차 없어지고, 또 시댁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친정나들이는 눈치를 보게 되는 풍토가 늘어났다. 며느리의 친정식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대비 김씨가 달갑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대비 김씨의 지친인 김석주가 말을 전하기라도 하면, 조카딸이 곤경에 처하게 될까봐 불안했다.


"중궁전하께서요?"


김석주는 자신도 모르게 또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까 삽살을 데리고 자신을 쳐다보던 중궁의 눈빛이 뇌리에 떠올랐다. 느낌 탓인지 눈빛이 유독 짙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눈빛이 짙었다. 그런데, 별안간 친정식구를 불렀다? 중궁이 그냥 불렀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사가의 어미나 숙모도 아니고 숙부를 불렀다면, 정치적인 행보로 보였다.


"무슨 일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제가 있다 보니...형님보다야..."


김석주가 말끝을 흐리며 묻는 말에, 만중도 말끝을 얼버무렸다. 석정은 미심쩍은 기분이 되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물론 김만중의 말마따나 김만기보다는 더 지척에 있었으니 중궁이 아비 대신 숙부를 더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본방의 어미나 숙모를 놔두고 김만중이라니?


"그럼 이만..."


김만중은 서둘러 말끝을 줄이고서, 석정과 석주의 의혹어린 눈길을 뒤로 하고 통명전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웬만해선 친정식구들을 찾지 않던 조카딸이, 갑자기 자신을 이리로 부른 사실이 심상치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그나마 자신이 원한대로 삽살이 통명전 월대에 엎드린 것을 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정도였다.


김만중이 통명전 섬돌을 올라서 서온돌에 들고 보니, 진홍 앞에 놓인 서안 위에 조보가 수북히 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굳이 자신을 부른 것이 이상하다 싶었더니, 저 손때 묻은 조보들을 서안에 쌓아두고 자신을 맞이한 것만 봐도, 자신을 부른 건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했다.


"중궁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어서오시어요. 숙부님."


진홍도 열은 미소로 답하였다. 눈밑이 살짝 푸석푸석했다. 진홍은 만중의 어깨너머로 봉이가 보이자, 어서 다과상을 들이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는 어인 일로..."

"숙부님께 여쭐 것이 있습니다."


진홍의 목소리는 담담한 듯 하면서도, 한줄기 떨림이 있었다. 김만중의 입가가 굳어졌다.


"저에게요?"

"예, 숙부님."

"무슨..."

"일단...다과부터 드시고..."


진홍은 본론을 꺼내기 전에 봉이와 우희가 다과상을 들이기만 기다렸다. 아무리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라곤 해도, 자신의 초대로 집춘문을 열어서 김만중을 궐내로 들였다곤 해도, 그래도 더운 날씨에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갈증이나 허기가 도질 법도 했다. 봉이가 서둘러 소박하나마 당과와 육포, 그리고 연꽃차를 갖춘 다반을 들고 와서 만중의 무릎맡에 내려놓고 나간 뒤에야 진홍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최근 옥당 공좌부에 관한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던 김만중의 동공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조카딸이 갑자기 옥당 공좌부의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애초에 정치엔 관심도 없었고, 또 어떤 청탁도 않겠다고 친정에도 선을 그은 조카딸이, 이렇게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다니. 하기야 사람은 변하는 법이니.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진홍은 초조함이 밴 목소리로 숙부를 보채었다. 느릿한 듯하지만 어조는 평소보다 빠릿하고, 차분한 듯 하지만, 음정도 다소 흥분했다.


여민락만與民樂慢 초반부 만큼이나 예스럽게 늘어지던 말투가 중반부 정도로 빨라진 셈이었다. 물론 진홍이니 이상한 것이었다. 남들에 비하면 빠른 말씨는 아니지만, 진홍답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뭔가 불안을 감지하고, 김만중은 의아한 눈길로 진홍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옥당 공좌부에 얽힌 일이나 말씀해 주십시오. 최석정과 얽힌 일입니까?"


보채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어쩐지 숨소리도 거칠었다. 중궁의 몸이 불편한 것 같기도 하였다. 자꾸만 예민해지는 진홍의 모습에, 김만중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진홍의 분위기가 이상해서 살피느라 대답을 못했을 뿐이지, 그는 원래 남들보다 신중한 성품도 아니었다.


"전하께서 도목정을 실시하려 하자 신료들이 이번 기회에 최석정을 끌어내리려 야합을 했습니다. 원래 옥당 공좌부 진본엔 전임 전한이 태학에 시관으로 사진한 것이 누락되어 있었는데, 최석정이 도력장을 작성한 뒤에...저들이 옥당과 태학의 공좌부 진본을 가본으로 바꿔치기 하고서, 최석정이 전임 전한의 사일仕日을 누락시켰다고 덮어씌우려 한 것입니다."

"허면...이번 일은 호조, 옥당 수뇌부의 합작이겠군요."

"예? 예..."

"김석주가 얼마전까지 옥당 대제학을 겸임하였으니, 옥당서리 몇 구워삶는 일쯤은 거뜬했을 것이고, 거기에 성균관이면..."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진홍의 시선이 김만중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김만중은 움찔하여 잠시 호흡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천신은 아닙니다."

"아니라구요?"

"예, 전하."

"보아하니 숙부님은 이 일을 꽤 소상히 아십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요?"

"저는 아닙니다. 그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허면..."

"원래 전적이 성균관 안의 장부와 장서를 관리하는 일을 도맡는데..."


김만중은 어쩐지 거북하여 더는 할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은 최석정이 다녀간 후에 바로 사위 이이명을 다그쳐서, 사위의 큰형 이사명의 죄상을 캐물었다. 하지만 이사명 또한 깊게 관여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연관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허면...그 일에 가담한 성균관 전적이 누굽니까?"

"중궁전하, 그건..."

"이번에 옥당 수찬으로 발탁된 이사명...그러니까 숙부님의 사위 이이명의 큰형이던가요? 최석정과 더불어 천재라고 이름이 난."

"..."

"하여, 숙부님께서도 이번 일을 자세히 알아보신 것이구요?"

"..."


김만중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곤란했다. 미우나 고우나, 제자이자 사위인 이명이 끔찍이도 위하는 큰형이었다. 또한 관상감의 천재인 이민철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는 조카이기도 했다. 저들 백강 가문은 배 다른 건 참을 수 있어도, 씨 다른 건 못 참을 정도로 똘똘 뭉친 한통속이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벌집을 들쑤신 꼴이 될 터였다. 어떻게든 진홍의 관심을 이사명에게서 돌려놔야 했다.


"천신이 알아보기 보단...최전한이 직접 성균관으로 찾아왔습니다."

"최전한이요?"

"예, 원래 신료들이 빼돌린 옥당과 태학 공좌부엔 전하께서 모종의 안배를 해두신 터라..."

"안배요? 전하께서 어찌 아시고..."

"누군가 밀고를 했겠지요."

"밀고?"

"예, 하여 전하께서 두 공좌부에 미리 반하를 칠해놓으셔서...반하를 만지거나 하는 자들이 저마다 구창이나 인통 등 크고 작은 후유증에 시달리게..."


만중의 설명을 듣던 진홍의 얼굴이 한순간에 파리해졌다. 두 공좌부에 미리 반하를 칠해놓았다면, 반하를 만지거나 하는 자들이 저마다 중독증세를 보인다면...진홍의 눈길이 자신의 서안 위로 내려갔다. 물론 서안엔 공좌부가 없었다. 이미 지아비가 가져가고 없었다. 하지만, 진홍은 눈앞에 문제의 공좌부가 있기라도 하듯 두눈이 뎅그렇게 되어 서안 위만 쳐다보았다.


반하라고?


지금은 없는 옥당 공좌부를 쳐다보는 듯한 진홍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두손으로 떨어졌다. 진홍은 자신의 두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시선이 그대로 꽂혔다. 아까 문에 끼여서 입가에 대고서 호호 불다가, 아예 혀끝으로 축이기까지 했었는데...


"숙부님, 반하가...반산을 일으키..."


진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다 말고, 자신의 붉은 치마를 내려다 보았다. 괜한 불안 탓인지, 이상하게 속곳이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치마가 붉다 보니, 하혈이 번져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속히 숙부를 내보내고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알았으니 이만 가보세요."

"중궁전하?"


김만중은 의아히 되묻듯이 진홍을 불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홍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얼굴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가래떡 단면 같기만 하였다. 왜 그런지 짚이지도 않았다. 김만중은 방금 전 진홍과의 대화를 복기하듯 뇌리에 떠올리며, 원인을 짚어내려 애를 썼다.


- 숙부님, 반하가...반산을 일으키...


"중궁전하?"


김만중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진홍을 보았다. 반하? 반산? 그 두가지를 걱정한다는 건, 진홍의 수중에 옥당 공좌부가 있다는 얘기가 되었다.


말도 안돼.


진홍에게 옥당 공좌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신료들과 달리 진홍에겐 최석정을 끌어내릴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자신에겐 형이지만, 중궁에겐 아비인 김만기가 최석정의 스승 남구만과 죽마고우지간이었다. 남들처럼 눈엣가시처럼 볼 리가 없었다. 오히려 선대의 인연을 소중히 하여 최석정의 승급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면 모를까.


"어찌..."

"이만 물러가세요."


진홍은 하복부나 치골에 아무런 통증도 없는데 불두덩쪽이 척척해지는 것을 느끼며 안색이 더욱 핼쑥해졌다. 동공이 더욱 커다랗게 변해선 불안하게 흔들렸다.


만중은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진홍의 모습에 덩달아 불안해졌다. 누구보다 차분한 조카딸이 이렇게까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다소 낯설었다. 갑자기 옥당 공좌부에 대해 자초지종을 캐묻는 모습도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진홍이 아니었다.


"어서 가시어요."

"예, 그럼 이만..."

"어서..."


아무래도 가는 길에 내의원에 들러 백광현을 만나봐야 하나 싶었다. 얼른 가라고 손까지 내젓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더 백광현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만중은 중얼거리듯이 대꾸하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장지문이 열리고, 대청마루로 나오는데 얼핏 왕의 붉은 용포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양화당쪽에서 용포자락을 사납게 펄럭이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심기가 사나워 보였다. 석정이 사직소를 낸 것을 미처 모르는 탓에, 만중은 그저 의아히 쳐다보았다. 얼른 자신의 목화가 놓인 서쪽 섬돌로 내려서는데, 어느틈에 삽살이 가운데 섬돌로 와서 진홍의 당혜를 혀로 핥는 것이 눈에 비꼈다. 곧바로 왕의 짜증섞인 옥음이 귀를 찔렀다.


"이놈은 왜 또 여기 있는 것이냐? 섬돌에 못 오게 하랬더니..."

"그게...중궁전하께서 친히 여기 드므에 묶어두시어..."


숙종이 섬돌을 또 침범한 삽살을 보고 화를 버럭내자 커다란 파초선을 들고 숙종의 뒤를 따르던 두광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데, 통명전을 지키던 금군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중궁이?"


숙종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통명전 안쪽에 흘끔 눈길을 두었다.딱 보니 중궁이 이 삽살에게 꽤나 배려를 해준 모양이었다.


이 청동 드므는 어린 아이 한명 정도는 씻길 수도 있을 만큼 청동으로 커다랗게 만든 독이었다. 평소에도 물을 담아두어 불이 나면 끼얹어서 끄려고 비치해 두지만, 기실은 삽살은 물론 장정 혼자서는 끌지도, 들지도 못할 만큼 묵직했다. 화마火魔가 들어왔다가도 이 안에 비친 자기 얼굴에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도록 주술이 걸린 물건일 뿐이었다. 처마 그늘에 가까운 드므에 매달아두는 것도, 그리하여 또 목이 마르면 드므 안에 가득 담긴 물을 할짝이는 것도, 삽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헌데,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드므고리에 고삐를 묶었다?


"거 참..."


숙종은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설피 꼬인 듯한 새끼줄을 흘끔 흘겨볼 뿐, 더는 군말 않고 섬돌을 딛고 올라섰다.


그 뒷모습에 두광이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아직은 중궁의 중中자만 나와도 약해지는 상전이었다. 그런데 웃던 두광의 눈꼬리에 김만중의 시뻘건 홍단령이 걸렸다.


"전하...저기...대사성 김만중이..."


바로 옆 서쪽 섬돌에 서서 목화를 신던 김만중을 이제야 본 것처럼, 두광이 차마 숙종의 용포자락을 잡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고하였다. 만중은 의아한 눈길로 두광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다소곳이 섰는데도, 왕도 두광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이상했다. 물론 뭔가에 흥분해서 시야가 좁아진 왕은 그렇다 쳐도,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한 두광의 기색도 이상했다.


"어? 처숙께서 여긴 웬일이오?"


편전에서라면 바로 하대를 하겠지만, 여긴 대전이자 내전이니 숙종도 조심스러웠다. 만중은 어쩐지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중궁전하께서 부르시어..."

"중궁이? 중궁이 왜?"

"몇가지 일을 물어보시어..."


만중은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게 자꾸 주눅이 들었다. 오늘따라 참 이상했다.


"중궁이? 그래, 뭘 물어봤소?"

"최석정에게 무슨 일이 있나를 물어보셨습니다."

"..."


숙종은 눈썹을 가만히 꿈틀거렸다. 눈치가 아주 없는 중궁도 아닌 만큼, 중궁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시어미가 덮어씌운다고 지아비가 곧이 곧대로 믿을 거라고 불안해 할 줄은 몰랐던 탓에, 숙종은 그저 짧은 한숨만 흘렸다. 왜 걱정을 사서 하는 건지.


"중궁이 신경 쓸 일이 아니오. 나중에 또 묻거든 그리 전하시오."


숙종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딱 잘라서 말하고선 그대로 섬돌에 올랐다. 그래도 중궁의 처가식구인데 좀더 살갑게 대해도 좋았다. 하지만 왕은 똑같은 처가식구라 해도 김만중에겐 손길은 커녕 눈길도 곱지가 않았다. 김만기는 몰라도, 김만중은 당색에 편중한 구석이 더 있었다. 어쩌면 김만기도 딸의 입지를 생각해서 그나마 몸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두광이 목화를 벗기는 것을 느끼고, 숙종이 바로 홀가분해진 버선발로 대청으로 거침없이 올라서 서온돌을 향해 돌아서자, 장지문이 열렸다. 그런데 숙종의 두눈엔 뜻밖에도 파리한 얼굴의 진홍이 보였다.


"전하..."


숙종을 보는 진홍의 두눈은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숙종은 불안해진 시선으로 진홍의 불두덩 쪽을 내려다 보았다. 벌건 치맛자락 때문에 색깔이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도 젖어 있었다. 숙종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미 진홍의 궁둥이 밑으로도, 연옥빛 모시이불이 검붉게 물든 채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4.11.10 08:28
    No. 1

    이런이런...
    너무 똑똑한 숙종과 중전이 빚은 슬픈 이야기가 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11.11 13:46
    No. 2

    진홍이 손가락 찧을 때 뭔가 불길하더니만 이렇게 되는 건가요?
    참으로 고약한 인연이고, 불쌍한 한쌍입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12.18 22:48
    No. 3

    너무 바빠서 한달이 넘은 지금에서야 들러 읽고 갑니다.
    해의 그림자를 읽을때는
    꽤 많은 비중있는 조연에다 주연들의 비중도 상당하기에
    읽기전에 복기 혹은 복습 한번 하고 읽는게 습관이 되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하는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정담에만 가끔 출몰하고 해의 그림자가 쌓여가는 걸 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네요 ㅠㅠ

    찬 바람이 매서운데, 건강 잘 챙기셧으면 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해의 그림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4 해의 그림자 223 +2 14.12.27 1,382 26 43쪽
223 해의 그림자 222 +4 14.12.22 1,889 27 43쪽
222 해의 그림자 221 +1 14.12.16 1,441 23 43쪽
221 해의 그림자 220 +2 14.12.10 1,492 28 43쪽
220 해의 그림자 219 +1 14.12.05 1,624 21 43쪽
219 해의 그림자 218 +3 14.11.30 1,350 29 41쪽
218 해의 그림자 217 +1 14.11.25 1,618 23 43쪽
217 해의 그림자 216 +2 14.11.20 1,573 28 43쪽
216 해의 그림자 215 +3 14.11.14 1,713 30 43쪽
» 해의 그림자 214 +3 14.11.10 2,370 30 35쪽
214 해의 그림자 213 +3 14.11.06 1,318 27 42쪽
213 해의 그림자 212 +3 14.11.02 1,612 29 43쪽
212 해의 그림자 211 +3 14.10.26 1,827 33 44쪽
211 해의 그림자 210 +3 14.10.20 1,629 26 42쪽
210 해의 그림자 209 +4 14.10.13 1,954 30 44쪽
209 해의 그림자 208 +3 14.10.07 1,492 28 43쪽
208 해의 그림자 207 +3 14.10.02 1,312 22 43쪽
207 해의 그림자 206 +4 14.09.25 2,690 34 43쪽
206 해의 그림자 205 +4 14.09.19 1,624 26 43쪽
205 해의 그림자 204 +3 14.09.12 1,709 26 40쪽
204 해의 그림자 203 +6 14.09.05 1,496 30 39쪽
203 해의 그림자 202 +7 14.08.30 1,732 31 41쪽
202 해의 그림자 201 +4 14.08.21 1,842 42 41쪽
201 해의 그림자 200 +5 14.08.14 1,381 30 42쪽
200 해의 그림자 199 +4 14.08.07 2,036 34 42쪽
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2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5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45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17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1 34 4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