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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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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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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2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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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1쪽

해의 그림자 201

DUMMY

"금궤당귀산金匱當歸散으로...화제和劑(처방전)를 내리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소대도 금세 파하고서 왕이 백광현과 이동형만 따로 서온돌 안으로 들여서 내린 분부였다. 이동형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비록 자세는 바닥에 부복하여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 속내는 당장이라도 불복하고 싶은 건지, 음색이 둔탁하게 깔렸다. 반면에 왕은 오히려 음색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어도 음정이 초조하게 떨렸다.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잔말 말고 백광현의 의견을 따르라."

"하오나..."


명색이 수의인데 불문곡직不問曲直(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음)하고 어의의 의견을 따르라니. 자존심이 상하여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려던 순간, 수의 이동형은 자신의 눈동자를 직시하는 왕의 눈동자를 보았다.


무서운 눈이었다. 평소에는 그 성정이 유순하고 온화해도, 유독 신료들 앞에선 험상궂고 포악하다 싶었더니, 지금 자신을 보는 눈동자는 그저 칠흑처럼 검었다. 점칠안이란 게 이렇게 눈길이 맞닿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눈빛인가 싶었다. 그 눈빛을 이동형이 곱씹을 겨를도 없이 왕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곤룡포를 펄럭이며 서둘러 양화당을 나섰다. 그동안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었는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휘청이며 너럭바위 앞을 지나 통명전 서온돌로 건너가는 참이었다.


"주상!"

"중궁은요?"


마침 급보를 듣고 달려온 대비전과 자의전의 음성이 등줄기에 달라붙자, 숙종은 섬돌에 목화를 벗다 말고 멈칫했다. 잠시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등줄기가 굳는가 싶더니, 그는 신경이 폭발하는 듯한 눈빛으로 대비 김씨를 돌아보았다. 유독 살의가 짙은 그 눈빛에 대비 김씨는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주, 주상..."

"나중에, 이야기 하지요."


아랫입술을 씹어먹기라도 하는 듯한 아들의 음성에 대비 김씨는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나날이 달라지는 건지. 얼음도 녹일 것처럼 따스한 눈길로 중궁을 보더니, 어미에겐 오히려 가시돋친 시선을 던지는 게 고작이라니. 아니, 시선마저도 이젠 아까운 지, 아들은 지체 없이 돌아서서 등줄기만 보이고 통명전 대청마루로 올라섰다.


"주상...어찌..."


대비 김씨는 자신은 중궁의 불행과 아무 연관도 없다는 듯, 영문도 모르는 척 탈을 쓰려 하였지만, 아들의 등줄기를 향해 손을 뻗다 말고 가만히 빈손을 쥐었다. 평소 대비 김씨를 못마땅하게 여긴 대왕대비 조씨가 곁에서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없이 웃는 참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대비 김씨가 화살을 겨누자, 대왕대비 조씨는 입가의 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눈가의 비웃음은 그대로였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이 할미야...증손주가 아내를 아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웃음이 나왔습니다만....대비전께선 어째 심사가 사나워 보이십니다?"

"몰라서 물으시옵니까?"

"알면 묻겠습니까?"

"그럼, 복중의 원자를 잃게 생겼는데 만수전께오선 참으로 평안하시온지요."

"아...복중의 원자...난 또...어찌 원자라고 확신하십니까? 한줄기 바람이 말해주더이까?"

"뭐 원자든 아니든...이미 세번이나 아픔을 겪은 중궁이니...네번째가 되면 견디기 힘들 것이옵니다. 만수전께오서는 아마 물에 빠져도 두 다리가 닿지 않을, 그런 고통이자 공포이니..."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부딪혔다. 목재를 다듬는 손끌처럼 서로의 심장을 때리고, 찌르고, 후벼팠다. 물밑에서나 서로 할퀴던 이들이 이젠 물위로도 손톱을 드러냈다. 벌써부터 드러내기엔 이른 시기였다. 피차 궐안의 이목을 생각해서 그들은 애써 웃음을 지우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양화당 앞에서 백광현이 최석정과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속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고슴도치 바늘같은 시선을 느꼈는지,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싶은 찰나 최석정이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


대비 김씨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이제는 옆에서 시할미가 눈가며 입가로 조소를 흘리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고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중궁이고, 그 다음으로 최석정이었다. 항상 아들의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소중한 기분이 들어야 할진대,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 드니...


갑자기 명치 끝이 욱신거려왔다.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니 시큰거렸다. 대비 김씨는 빈손을 심장 쪽에 갖다대고 반바닥 뿌리 쪽으로 꾹꾹 눌러 문질렀다. 또 병이 도졌다. 약방의 어의들이나 승정원의 관료들이 자신의 증세를 괴질이라고 말하면서 국화차를 심장에 좋다며 권하지만, 사실은 서로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을 뿐, 대비 김씨 자신의 증세는 '화병火病'이었다. 그것도 결코 후궁을 두지 않고 궁녀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지아비가 붕어하기 훨씬 전부터 생긴 가슴앓이였다. 그 내막을 세상은 아마 알 수 없을 테지만.


아들이 아직도 중궁 한사람만 바라보는 사실이...억울했다. 탈상 이후로 지금까지 고작 3년 여 시간이 흘렀을 뿐이니, 또 언제 눈길을 돌릴 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들이 중궁에게만 눈길을 못박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하늘은 불공평했다.


"들어갑시다.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대왕대비 조씨의 말에, 대비 김씨는 잠시 망설였다. 짧은 순간 자신을 쏘아보던 아들의 시뻘건 눈빛이 가슴에 착 달라붙어 어지간해선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대비전 체면에 통명전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망신이었다. 귀하디 귀한 아들인데 어미를 밖에 세워놓는 불효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대비 김씨는 시어미를 따라 통명전 서온돌 안으로 들어섰다.


희디 흰 주렴 저편에서 아들이 며느리의 한손을 붙들고 놓질 않는 참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더위를 타는 아들이 웬일로 중궁의 두손을 부여잡고 초조히 제 얼굴을 부비는 모습이 희미한 윤곽으로 비쳤다. 자신들이 들어왔는데도 아들은 손을 놓질 않았다. 마치 며느리와 아들의 손목 힘줄들이 연리지連理枝처럼 서로 한몸으로 엉키고 엉기기나 하는 것처럼, 혹은 비익조比翼鳥처럼 서로 떨어지면 날지 못하기나 하는 것처럼, 떨어지면 서로 핏줄이 끊어져 핏물을 뿜어낼 기세로.


"중궁은 좀 어떻습니까?"

"아직이옵니다."


아들은 낮고 빠른 어조로 대충 대답하곤 여전히 며느리의 안색과 숨결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의가 둘씩이나 병상을 지키는데도, 곁을 내어주질 않았다.


대비 김씨는 자신의 심장이 여느 때보다 심하게 날뛰는 것을 느꼈다. 박동이 점점 거칠어졌다. 며느리가 정신이 들면, 저 장지문 뒤의 우물가에서 벌어진 일을 아들에게 고해바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영영 죽어 없어져 준다면...대비 김씨는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균열이 생겼다. 한편으론 중궁의 뱃속 원자가 무사하길 바라는 심정, 또 한편으론 이대로 중궁이 영영 의식을 되찾지 못하길 바라는 심정...애써 뇌리의 틈새로 온갖 생각들을 밀어넣고 대비 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매번 중궁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아무도 중궁의 회임을 원치 않기 때문이란 것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대비 김씨가 알고, 대왕대비 조씨도 알았다. 조정에 서로 대치하는 적당 남인이며 동당 서인도, 본래는 한가지였던 자의대비 조씨도, 그녀 자신도, 모두가 각자의 이익을 따라서 입장을 바꿀 뿐이었다. 잠시 뜨악한 눈빛으로 왕과 대왕대비가 대비 김씨에게 시선을 던지는 찰나, 병상의 중궁이 꼭 닫힌 눈시울과 입시울을 실룩였다.


"중궁! 정신이 드오?"


물, 물, 물...그 외마디 단어를 몇번이고 뇌까리는 모양이었다. 연지를 덧바른 것처럼 진하던 입술이 어느덧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랫입술에 각질이 허옇게 일어났다. 진홍은 멍하니 두눈을 끔뻑였다.


"중궁!"


진홍은 눈꺼풀이 축축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되질 않았다. 오른손을 이미 지아비의 어수가 물샐 틈 없이 봉한데다 흰 발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는 윤곽만 봐도 시어미와 시할미까지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버선발이 잰 걸음으로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지만 윤곽조차 희미했다.


"중전마마께 어서 이 탕약을..."

"이리...!"


평소엔 한마디든 열마디든 문장을 똑바로 갖춰서 완성해야 직성이 풀리는 왕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주어든 술어든 빼먹는 줄도 몰랐다. 그저 탕약을 백광현에게서 정신없이 받아들고 진홍의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입가로 흘려넣느라 바빴다. 하지만 진홍은 뜨끈뜨끈한 탕약이 입가에 닿는 순간 고개를 돌려 지아비를 보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묻고 싶지만, 듣고 싶진 않은 두려움이 고스란히 비치는 눈이었다. 하지만 탕약을 먹이느라 마음이 급한 숙종은 그녀의 눈빛을 미처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챘다.


"어서, 쭉 마시시오 쭉..."

"..."


진홍은 강제로 와닿는 약사발에서 입술을 떼진 않았지만, 고개를 비껴서 다시금 지아비의 얼굴을 보았다. 그 바람에 또다시 거무스름한 탕약이 그녀의 갸름한 턱선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


"좀...! 얼른 좀 마셔야..."


거무스름한 탕약이 한두방울 진홍의 턱에 맺혀 뚝뚝 떨어지자 숙종은 자신의 손등으로 쓱쓱 닦아내고 억지로 다른 한손으로 진홍의 얼굴을 자신의 품으로 당겨서 꾹 누르고서 서둘러 계속해서 입가로 흘려넣었다. 흐르면 흐르는대로, 마시면 마시는대로, 계속해서 약사발을 기울이다보니 탕약이 조금씩 흘러 곤룡포를 적시는 줄도 몰랐다.


"이걸 마셔야 우리 아기를 지킬 수가 있소."


우리 아기...무사하구나. 태아의 안위를 물어볼 여력도 없어 입술만 달싹이다가, 입안으로 흘러드는 쓰디쓴 탕약에 잔기침을 할 뻔했던 진홍은, 지아비의 말에 겨우 안도하며 탕약을 꿀꺽꿀꺽 넘겼다.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 같아서 의식도 축축 늘어지는 터라, 뺨끝에 닿는 지아비의 손을 겨우 붙들고서 약사발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온힘을 다해서 꾸역꾸역 마셨다.


"더, 더...잘했소."

"전하..."

"얼른 누우시오, 얼른..."

"우...물에...시체가..."


목안에 뭔가가 꽉 차서 더는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입안 가득 맴도는 쓴맛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시어미의 뾰족한 눈매며, 표독한 눈동자 탓이었다. 하지만 진홍은 온힘을 다해서 말하고 다시금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우물에...시체라?"


숙종은 도무지 중궁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우물이라니, 통명전 뒤켠의 그 얼음장 같은 우물을 말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일전의 소산으로 생숙탕이나 백비탕이 아니면 찬물을 마시지도 않는 중궁이 우물가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최석정이 말한, 딸을 아들로 바꾸는 비방을 행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 우물은 왜..."


의문 어린 눈길로 서온돌 안을 둘러보니 발너머로 어미의 모호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윤곽이 흐릿하여 표정까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중궁이 언급한 우물이란 단어 만으로도 어미의 어깻죽지가 흠칫하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또 귀신이..."


어미가 두려움에 질린 음성을 간신히 내뱉다가 삼켰다. 어미 곁의 계조모 역시 해연히 놀라서 헛숨을 들이키며 좌우를 둘러보는 참이었다.


"또요?"


중궁은 시체라고 말했는데, 대비전의 한마디 탓인지, 방안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게 얼어붙었다. 워낙 귀매가 출몰한다던 통명전이었다. 중궁의 시체 운운을 대비전이 교묘하게 귀신 얘기로 둔갑시켰는데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고 곧이 믿을 만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숙종은 어미의 반응이 단순한 두려움인지, 죄책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물이란 단어 만으로도 괜히 찜찜해졌다. 이미 어미가 비방이란 비방은 모조리 가리지 않고 중궁에게 시킬 기세였던데다, 최석정이 차라리 우물에 얼굴을 비추는 비방을 행하라고 권고했다가 도로 취소했으니, 둘중 누군가의 입김이 닿았다는 의미였다. 슬기로운 중궁이 제발로 우물가에 얼굴을 비추는 짓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두광아! 우물에 뭐가 있는 지 가서 보고 오너라!"


불러놓고 조금 미안하긴 하였지만, 워낙 해괴한 일인 터라 두광에게 맡겨야만 믿을 수 있었다. 문간에 서성이던 두광의 그림자가 움찔했다.


"예? 저더러 귀, 귀신을 보고 오라구요?"


하필이면 대비 김씨가 귀신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바람에 두광이 겁을 지어먹었다. 두광은 귀신을 믿었다. 동지 때 단팥죽을 먹으면 귀신이 들지 않는다는 미신도 믿고 동짓날엔 삼시세끼 꼬박꼬박 단팥죽을 챙겨먹을 정도였다. 그런 두광에게 우물을 확인하라고 하였으니 겁이 날 법도 했다.


"백어의도 함께 가보시오."

"예? 예."


백광현이 떨떠름히 대꾸했다. 자신도 귀신은 무서웠다. 한때는 귀신을 겁내지 않았는데, 귀신의 존재도 믿지 않았는데, 무당의 굿보다야 자신의 침이 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는데...하필이면 석하놈과 어울리면서 생각이 바뀐 터였다. 그 경험은 정말로 끔찍했다. 석하한테는 미안하지만, 정말로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냥, 귀신이 아니라 시체이길 바랄 뿐이었다. 시체라면 질리도록 보았으니까. 백골 조차도 이골이 나도록 만져보았으니까.


어명을 받들어 두광과 광현은 통명전 뒤편의 우물을 확인하러 나섰다. 정신이 반쯤 얼어붙었는 지, 고작 섬돌 아래에 놓인 목화를 찾아 신는 일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자꾸만 발뒤꿈치가 뒤축에 걸렸다. 다시 발을 빼서 신는다는 것이 목화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서 깨금발로 뛰어가야 했다.


"쯧, 뭐 하나? 하여간..."


광현의 핀잔에, 두광은 겸연쩍게 웃음을 실실 흘리면서 매미관 아래 살쩍을 긁적였다.


"백어의님은 귀신 안 믿으시죠?"

"..."


시덥지도 않은 질문이라 여겨선지, 아니면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라 느낀 건지, 광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침묵을 할 수록 대답을 듣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두광은 아예 광현의 소맷부리를 잡고 깐족거렸다.


"어? 믿으시나 보옵니다?"

"..."

"백어의님도 무섭죠? 예?"

"..."

"소인도 원래는 안 무서워했는데 말이옵니다. 전하께서 부르신 어떤 해괴한 사내가 글쎄 꼭 허목 대감의 글씨나 그림이 있어야지만 복잡한 셈도 숫자 하나 안 틀리고 척척 풀어내는 것이...허목 대감이 귀신 쫓는 대감이온데...하온데 그분 글씨나 그림을 부적처럼 지녀야지만 된다는 것은 그 사내가 바로 귀신에 씌인..."

"아 그 손 치워!"


광현이 신경질적으로 두광의 손을 떨쳐냈다. 잠시 몸의 균형을 잃은 두광은 헛발을 디디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서 원망스런 눈빛으로 광현을 쳐다보았다.


"아니...그렇다고 밀치실 것 까진..."


두광은 짓궂고도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귀신이 무섭네 하고 요란을 떨던 자신보다도 더 백어의가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좀더 강도 높은 장난으로 광현을 놀랠 필요가 있었다.


"이게 다 석하놈 탓이야...!"


광현이 궁시렁거리며 누군가를 탓하는 게 두광의 귀엔 마냥 우스웠다. 물론 석하란 이름은 두광 자신도 알았지만,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광현을 놀랠 만한 물건을 찾기 바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두광은 문득 자신의 두손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빈손이었다. 두광은 통명전 앞을 지키는 금군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두광이 따라오지 않는 줄도 모르고, 광현은 성큼성큼 연못가를 돌아서 통명전 서북쪽 우물로 향했다.


막상 우물 앞으로 다가서니 우물 안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두 팔로 둥그런 운두를 붙잡고 상체를 기울여 내려다 보니 물빛이 마냥 검푸르스름하니 바닥이 들여다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와버렸다.


"아 이거 등불이..."


난처히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광현은 갑자기 눈앞에 번쩍거리는 귀신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무릎에서 힘이 탁 풀리며 광현은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네모난 운두 모서리에 받혀서 등줄기가 화끈거렸지만, 당장 아무 생각도 없었다.


"뭐, 뭐야...?"

"겁먹으시긴. 저예요 저, 김상세尙洗!"

"자네...!"


광현은 혼비백산하여 두손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다가 두손바닥에 잡히는 축축한 감촉에 또 한번 정신이 나갔다. 소름이 끼치도록 엉덩이가 순식간에 척척해졌다. 이 한밤중에 누가 물을 길었다고 운두 앞바닥에 물이 이토록 흥건한지.


"놀라셨사옵니까?"

"자네 진짜...!"

"얼마나 무서우셨으면...."


두광이 턱밑으로 조족등을 비추며 히죽 웃었다. 눈두덩이며 눈시울이며 온통 음영이 드리워져 괴기스런 도깨비 얼굴이 되었다. 겁에 질려 얼이 빠진 광현의 얼굴이 통쾌했는 지 듯 두광이 잇몸까지 드러내고 낄낄 웃으면서 손에 든 조족등을 떨구었다. 그바람에 조족등의 축이 한바퀴 회전하여 발치를 비추는가 싶더니 이내 한바퀴 또 회전해서 도로 두광의 얼굴을 턱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춤추듯이 비추었다. 조족등 내부의 회전식 초꽂이가 워낙 어떤 상황에서든 촛불이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하게끔 안전하게 고안된 탓이었다. 그 바람에 광현은 또 한번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수습했다.


"자네, 자꾸..."

"뭐 좀 나오셨사옵니까?"

"여, 여긴 아무 것도 없으이. 시체는 커녕 귀신도 없으이. "

"없다구요?"

"이만 가세나."

"어의영감..."

"..."

"저쪽에도 있는데요, 우물은."


두광이 양화당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연히 중궁이 앞뜰을 거닐다가 우물 속에서 시체를 보았다고 느낀 탓이었다. 중궁이 굳이 한밤중에 통명전 뒷뜰의 우물에서 귀신인지 시체인지를 보았으리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

"중전마마께오서 뭐하러 이 으슥한 데까지 오셨겠사옵니까?"

"아니 뭐..."


광현은 변명을 하려다가 얼버무렸다. 두광의 말도 옳았다. 중궁이 한밤중에 이슥한 우물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시어미의 강압에 못 이겨서 우물을 들여다 봤을 거란 생각 자체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일어나는 순간, 그 반바닥에 젖은 흙알갱이가 박이면서 들러붙었다. 처음만 차가웠을 뿐, 이내 그 두손으로 궁덩이를 턴답시고 두손을 붙이는데, 금세 꿉꿉해졌다. 손금 부위로 땀과 흙이 뭉치면서 끈적거렸다.


"저기요. 한두번 와보신 분도 아니면서 어찌 우물도 못 찾으시고 그리 우물쭈물..."

"..."

"역시 귀신이 무서운 것이지요?"

"아니래도...!"


욱하는 성미에 광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부채 변죽인지, 얼굴 거죽인지, 정작 본인도 겁에 질려 벌벌 떨었으면서 두광은 낯짝도 두껍게 깐족거렸다.


"정신 차리시고...어서 가자구요."


두광이 양화당 쪽 우물로 광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뭔가 공포와 흥분으로 들떴는지, 조족등을 든 오른손을 마음껏 휘저으며 통명전 앞뜨락을 가로질렀다. 대여섯 발짝을 걷다 보니 광현이 자기 궁둥이를 손바닥이며 손등으로 문질러도 보고, 젖어서 달라붙은 옷자락을 잡아떼어도 보고, 하면서 뒤따르는 참이었다..


"뭐예요? 왜 그래요?"

"아니...궁둥이가 좀 젖어서..."

"젖어요? 아까 넘어져서...말이옵니까?"

"..."


광현은 어쩐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무서웠다. 걷다 보니 양화당 앞을 최석정이 초조히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마 통명전까지는 들어서질 못하고서 너럭바위 앞도 한바퀴 돌고서, 또 우물 운두를 오른손 손끝으로 툭툭 쓰다듬듯 스치듯이 하며 우물 주변을 한바퀴 돌고서, 그렇게 마냥 거닐었다. 광현으로선 아까 자신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고서 여태 최석정이 양화당을 벗어나지 않은 사실이 이상하여 두눈을 깜빡였다.


"어? 행行 응교 영감님?"

"이보게 여시이! 왜 여태 안가고?"


반가운 얼굴로 두광과 광현이 손을 흔들어 보이자, 석정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왠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서 양화당 앞을 배회하던 참이었다. 이러다 자칫 금군들에게 끌려나갈까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려 네번째 회임인데 매번 중궁이 순산을 하지 못하고 온갖 곤욕을 치른데다, 이번엔 안정기도 지나서 반산半産의 위기를 겪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게다가 석하가 굳이 서찰로 암시했던 송시열과 민정중간의 가짜 혼담이 어쩐지 뇌리에 달라붙어 껍질이 벗겨질락 말락 하는 느낌이었다.


"복중 아기씨는 무사하십니까?"

"뭐 아직은...근데 그게 걱정이 되어서 안 가고 있었나?"

"또 무슨 곡절인가 찜찜해서 말입니다."

"..."


백광현은 갑자기 합죽이처럼 위아래 입술을 모두 안으로 빨아서 입을 꾹 닫았다. 눈에 띄게 어색한 동작이었다. 두광은 그런 광현을 보고 눈시울을 실룩이며 고개를 돌렸다. 저 순박한 양반이 또 이대로 죄다 표정으로 말해주게 생겼다. 이미 행行 응교 최석정은 미심쩍은 것을 느끼고서 우물 운두에 엉덩이를 걸터앉는 참이었다. 아예 웅크린 두 다리를 뻗고서.


"그냥...잠결에 악몽을 꾸셔서 그러시니 이만 좀 나오시..."


두광 역시 광현을 탓할 게 못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짓으로 최석정이 걸터앉은 엉덩이를 밀어내는 동작을 하였으니, 눈치 빠른 최석정이 수상쩍게 여길 빌미를 던져준 꼴이었다. 게다가 가보란 말도 아니고, 나오란 말이니 어휘 선택 역시 실수한 셈이었다.


"이 우물에 뭐 있는가?"

"아 없으니 빨리 가래도!"

"어서요 어서!"


입질이 이리 빠른 물고기들을 보았나. 석정은 입을 반쯤 벌리고 히죽 웃었다. 한마디로 물반 고기반이었다. 그냥 낚싯줄만 드리워도 낚이는 신세들이었다. 광현과 두광이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벌개졌다. 약이 오른 김에 광현이 살짝 볼멘 얼굴로 한마디 했다.


"거기, 귀신이 있다네."

"귀..."


순식간에 석정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김석하를 아는 위인들은 하나같이 귀신을 겁내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찌감치 믿었든, 느지막이 믿었든, 한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니 귀신이란 소리만 들어도 멀쩡하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며 안색이 쌀뜨물처럼 허여멀개지는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상체가 뒤로 제껴지며 우물에 빠질 뻔했다.


"조심하지 않고?"


석정의 반응을 떠본 광현이 마침 팔을 뻗어 소매라도 잡아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석정은 뎅그래진 눈으로 등뒤를 돌아보며 우물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어라? 영감께오서도 귀신이 겁나시옵니까? 전 영감 만큼은 아니 겁내실 줄..."

"뭔 소리야, 나보다 더 많은데."


옆에서 광현과 두광이 실실 쪼개거나 말거나, 석정의 두눈이 이내 진지해졌다.


"갑자기 왜들 귀신 타령입니까? 설마 중궁전하께서 이 우물 속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말씀..."

"..."


또 다시 두광과 광현의 안면근육이 그대로 경직되었다. 너무 솔직해서 탈인 얼굴이었다. 역시 최석정과 말을 섞으면 본전도 못 찾고 털린다는 생각까지 그대로 최석정의 갈퀴 같은 눈초리에 읽힐 정도였다. 괜히 머쓱해진 광현이 찰싹 달라붙은 궁둥이를 오른손으로 잡아떼며 엉덩이 사이에 낀 고의 솔기를 잡아떼었다.


"아 척척해..."

"어디 봐요."

"됐..."

"왜 흙을 묻히고 다니세요."

"아까 네놈 때문에 넘어져서 그러지..."


두광이 손을 뻗어 광현의 궁둥이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주는 시늉을 했다. 어디까지나 석정의 주의를 돌리려는 꼼수였다. 하지만 석정은 두광이나 광현의 딴청에는 털끝 만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보며 동공이 흔들리더니, 자기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빈손을 옴츠릴 뿐이었다.


석정 자신이 왕을 독대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다. 도끼 비방 대신 우물 비방을 쓰라고 처음에 왕에게 간언 드린 일이 오히려 중궁에게 해를 끼쳤나 죄스러운 심정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주상께는 어떤 비방이든 시행하지 말라고 이내 못박아두었는데...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궁전하께서 우물은 왜..."

"우리야 모르지. 갑자기 여긴 왜 오셨는 지..."

"전하께서 시키신 일도 아닌데..."


석정의 물음에 광현과 두광이 말끝을 흐렸다. 중궁에게 아들 낳는 비방 따위는 섣불리 행하지 말아달라 석정이 왕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것을 두광 또한 장지문 너머로 들었다. 남의 말 듣지 않는 왕이긴 해도, 석정의 충언은 일단 귀에 담아두고 보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왕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중궁이 아들 낳는 비방이랍시고 한밤중에 우물가로 나왔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버젓이 많은 이들의 시선에 노출된 양화당쪽 우물이라면...


"이 우물이 아니라 저 우물 같은데?"


석정은 용마루가 없는 통명전 지붕 뒤를 가리켰다. 통명전 서북쪽 우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열천冽泉(이가 시리도록 차고 맑은 샘)에 속할 만큼 시린 물맛에 일전에도 중궁이 소산의 고통을 맛보기까지 하였다. 뒤쪽 장지문으로 나가면 바로 발길이 닿는 저 이슥한 구석의 우물을 놔두고, 이렇게 탁 트인 양화당 우물을 중궁이 찾을 리가 없었다.


"예?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구요?"

"사람들 몰래 우물에 얼굴을 비춰야 아들을 낳는다는 비방이니, 이 우물이 아니라 저 우물인 게지."

"그럴..."


두광은 석정의 주장에 수긍하지 못하고, 한가닥 미련이 남은 듯 조족등으로 우물 속을 비추었다. 워낙 전방이나 상방을 비추기 좋게 고안된 군문軍門의 물건이다 보니, 또 둥그런 박 모양의 등갓 안의 초꽂이가 핑그르르 돌아서 마치 춤추듯이 우물 속을 은금빛으로 비추었다. 헌데 등불의 발자국이 우물 속을 헤집어도 귀신 아닌 귀신 할아버지도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머쓱해 하던 광현이 어깨가 으쓱해져서 또 한번 궁둥이를 툭툭 만져보며 소리쳤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아까 그 우물 맞지? 내 엉덩이, 궁둥이가 척척해졌다니까! 아직도 안 말랐어!"

"..."


두광이 이제는 광현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다. 괜한 걸음 했다고 광현이 궁시렁거리는 바람에 더 민망했다. 졸지에 최석정까지 혹으로 달고서 세사람은 길쭉한 물길을 따라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통명전 옆 연당을 지나서 후미진 후미後尾로 왔다. 온갖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언덕 능선을 따라 꾸민 화계花階를 뒤로 하고, 길쭉길쭉한 굴뚝 옆에 야트막한 운두를 벌린 우물이 거기 있었다.


"이건가..."


석정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우물 주변의 지형을 가만히 살폈다. 풍수설을 따라서 북쪽엔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언덕을, 왼쪽엔 청룡靑龍에 해당하는 물길인 연당을, 오른쪽엔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돌담길을 놓은 지형이었다. 통명전과 양화당 사이만 담장이 없는 대신, 양화당과 다른 전각들 사이엔 행각이 드높았다. 단순히 전란으로 담장이 무너진 탓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풍수를 따지고 보니 일부러 담장을 세우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다. 통명전 바로 앞에 주작에 해당하는 못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 자잘한 우물들을 파놓아서 풍수의 문제를 해결한 세심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쩐지 통명전과 양화당 사이의 담장이 아쉬워서 석정은 두팔을 뻗어서 담장의 위치를 가늠했다.


이쪽은 너럭바위, 저쪽은 우물...너럭바위와 우물 때문에 양화당이 좀더 옆으로 밀려나선지, 담장을 도로 쌓으면 모양새가 사나워질 것도 같았다. 아마 개국조엔 담장을 쌓았다가, 나중엔 철거했다가, 다시 쌓았다가를 반복했을까...


"요놈이 요 박등(조족등의 별칭)으로 도깨비 시늉을 하는 바람에 내가 놀라서 자빠졌는데, 궁둥이가 축축하더라 이 말이야. 바닥이 흥건한 게...누가 여기서 물을 길었다 이 말이지."


광현이 의기양양하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통명전 서북쪽 우물을 가리켜 설명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두광은 비웃듯이 입을 비죽이며 혀를 낼름거렸다. 하지만 석정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 운두 주변을 살폈다.


"누가 빨래라도 했나...비가 온 것도 아니고..."


장대석으로 야트막하게 쌓은 운두 주변에 흥건한 물기를 손으로 일일이 만져보고 쓸어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하는데, 통명전 대청마루에서 보았던 붓두껍 가락지들이 눈에 띄었다. 한 가락도 아니고 두 가락이나.


혹시나 싶어서 석정은 붓두껍 나무가락지를 손끝으로 주워들었다. 잘린 단면이 활깍지처럼 비스듬한 것이 아니라 가락지처럼 똑바른 것이었다. 크기는 조금씩 달라서, 중궁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둘다 중궁이 줏었던 가락지보다는 다소 컸다.


하지만 이 구중궁궐에서, 그것도 서온돌 근처에서 중궁의 붓두껍 가락지와 똑같은 모형을 보게 딜 줄이야.


석정은 붓두껍 가락지 두 가락을 오른손에 차례로 껴보다가 약지 윗마디에 걸리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 큰놈은 집게손가락 에도 헐거웠다. 그리고 작은놈은 왼손 약지에 맞았다. 도대체 몇명하고 가락지를 나눠 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석정은 문득 자신의 두손을 내려다 보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모두 펼치고서 가만히 내려다 보니 알 것 같았다. 큰놈이야 자의 가운뎃손가락과 검지엔 맞지 않겠지만 작은놈이야 새끼 손가락엔 맞을 것도 같았다. 자신보다 손이 더 가늘고 작은 여인에겐, 열손가락에 맞을 법했다.


논갠가.


석정은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논개는 열손가락에 열가락지를 끼고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함께 죽겠다며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지만, 왕과 중궁은 왜 열가락지를 한날한시에 죽겠다고 논개처럼 열가락지를 마련한 건지. 괜히 한겨울도 아닌 한여름에 살갗이 오돌토돌해졌다. 손가락 끝으로 어깻죽지를 긁다가 석정은 멈칫했다. 통명전 대청에서 중궁이 가락지를 하나만 주웠다. 분명히 하나였다. 어떻게 붓두껍 가락지가 둘씩이나 떨어져 있을까.


석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살폈다. 또 고개를 들어서 화계 위도 유심히 살폈다. 잎이 뾰죽한 소나무, 잎이 길쭉한 밤나무가 곳곳에 우거져 있었다. 특히 밤나무는 알을 품은 밤송이를 토실토실 맺어서 찬바람이 들기만을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여인은 따신 바람이 들 때 아이를 낳아야 좋지만, 밤나무는 찬 바람이 들어야 열리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헌데 황갈색도 아닌 연둣빛 가시털을 두른 밤송이들이 예닐곱개씩이나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 더운 오뉴월에, 여물지도 않은 밤송이가 이렇게나 많이 화계에 떨어져 있는 지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그중 몇몇은 뭔가 줄 같은 것에 스친 듯이 가시가 한줄로 살짝 눌린 것도 이상했다.


"최응교가 왜 여기 있는 건가?"


밤가시 만큼이나 뾰족한 음성이 세사람의 고막을 할퀴었다. 하지만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두광은 화들짝 놀라서 뒤돌아보다가 자라목이 되어 고개를 움츠리고, 광현은 흠칫 놀라긴 했지만 고개를 까딱 비끼고서 시선을 피하는데다, 석정은 어깻죽지를 들썩일 정도로 놀라긴 했지만 이내 유들유들한 눈웃음으로 대비 김씨를 마주했다.


"대비전하..."


가식적인 눈웃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비 김씨는 최석정을 볼 때마다 꼭 속눈썹이 뻣뻣한 가시가 되어 눈시울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 되었다. 처음부터 저자한테 부탁했더라면 아비를 살릴 수는 있었을까, 저자의 입김이면 그녀 아비에 대한 아들의 진노 쯤은 얼마든지 녹여낼 수 있었을텐데 왜...? 계속해서 회한과 원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멈추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다.


"왜 최응교가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네만?"


대비 김씨가 서릿발 어린 눈으로 추궁하며 한발한발 다가서는 순간, 오른쪽 당혜 앞바닥에 뭉클한 무언가가 미끄덩거렸다. 그 정체를 인식하기도 전에 그대로 발밑에서 굴러서 왼쪽 당혜 갑피를 뚫고 콕 찔러들었다. 따끔한 감총에 대비 김씨는 뇌리가 저릿할 정도로 놀랐다.


비명을 지르며 한발 뒤로 물러서니 어슴푸레한 달빛에 연두빛 가시투성이인 밤송이 한알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그녀의 왼발에 살짝 밟힌 채로.


"이건...이게 왜?"


대비 김씨의 두눈이 잘게 흔들렸다. 여기는 그녀의 통명전 뒷뜨락이었다. 지금은 통명전을 중궁에게 넘겼다 해도, 한번도 가슴 속에서 통명전을 중궁의 소유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다 자신의 소유였다. 자신의 눈길이 닿고, 또 손길이 닿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감히 여기서 자신의 화계를 밟고, 또 밤알을 따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작자가 이번에 제발로 무덤을 찾았다.


"감히..."

"에?"

"신하된 자가 밤중에 내전에 몰래 숨어들어 밤을 따다니? 도대체 목숨이 몇개기에 이리 방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 간큰 작자가 밤알을 요모양 요꼴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석정은 대뿌리로 만들어진 조족등 손잡이를 쥔 두광의 손을 맞잡더니 툭 뻗어서 전방을 환히 비추었다. 둥근 박처럼 생긴 갓으로 불빛을 모아서 빛을 내쏜다 하여 박등이라고도 불리다 보니, 주로 군영에서 쓰였다. 대비 김씨의 시선이 발치로 뚝 떨어졌다. 밤알의 상태를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조족등에서 몇번씩 새어나오는 불빛이 발치의 밤송이를 비추었다. 노르스름한 밤송이는 대비 김씨 자신의 발걸음에 눌리고 짓밟혀서 옆구리가 살짝 터진 꼴이었다.


"뭐? 그럼 자네는... 아니란 말인가?"


대비 김씨의 말투가 금세 뾰족해졌다. 신경도 쭈뼛 곤두섰다. 쓸린 자리가 선명한 밤알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최석정 이 작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 같이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어쩌면 우물 비방을 중궁에게 강요하여 강제로 주술을 행하다가 중궁을 유산의 위기로 몰고 간 것까지 알아차릴 지도 몰랐다. 헌데 뜻밖에도 최석정은 여느때보다도 공손하게 무릎울 꿇었다.


"최응교!"

"이 밤송이 말입니다."


석정은 얄궂게도 무릎을 꿇은 채로 대비 김씨의 오른발 아래에 짓눌려 점점 옆구리가 터지는 밤알을 물끄러미 주시하며 운을 떼었다.


"겉이 노릇노릇하니 익은 밤은 벌리면 속이 조금도 다치지 않지만, 푸릇푸릇하니 설익은 밤은 벌리면 속이 크게 다치지요. 구암선생께선 반산半産을 이 밤송이에 비유했었다지요."

"..."

"헌데 지금 대비전하께서 이 밤송이를 밟으셨습니다. 그 안의 밤톨도 다쳤구요. 우연치곤 참 절묘하지요?"

"..."

"여기 우물에 시체가 있으면 모를까, 정말로 귀신이 있다면, 그 밤송이로 뭔가 계시를 준 걸지도 모르지요."

"감히..."


지금 이 새파란 나이에 새빨간 관복을 입은 놈이 자신을 책망했다. 대비 김씨는 파르르 치가 떨렸다. 너무 떨려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 탓인지, 공포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그저 허연 안개가 꽉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오해는 마소서. 그저 중궁전하를 이 밤송이 보듯 하시어, 부디 밤톨이 다 익을 때까지만 통촉해 주십사 간곡히 청하는 것입니다."

"..."


뻔뻔하게도 최석정은 터진 밤송이를 두손으로 공손히 바치며 뼈 있는 말로 대비 김씨의 가슴 한켠을 찔렀다. 대비 김씨는 얼떨떨히 밤송이를 받아들고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마침 우물 운두에서 무언가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굴뚝 사이로 쏘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대비 김씨는 화들짝 놀라서 밤송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뾰족한 밤가시에 손가락끝이 찔렸지만,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그녀는 우물가만 주시했다.


"너...!'


굴뚝 옆에서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이 빼꼼히 나왔다. 두눈은 너무도 붉었다. 대비 김씨는 얼굴이 핼쑥해진 채로 손가락끝을 덜덜 떨었다.


"가, 가온!"


죽은 지 10년도 지난 이름인데, 너무도 빨리 입에서 튀어나와버렸다. 여느 궁인이었다면 그저 상궁김씨, 나인이씨, 이런 식으로 성만 붙여 불렀을 터였다. 구중궁궐에 갇힌 수백의 이름 따위, 어차피 기억하기도 힘들고, 굳이 기억하기도 싫었다. 그런데도, 가온이란 이름은 입천정에 들러붙은 김부스러기 같았다. 비 그친 뒤에도 차마 산보는 엄두도 못낼 정도로 처소 앞에 자욱하게 깔린 비거스렁이 같았다. 그런데 그 가온이 자신에게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팔을 내밀었다.


"저리...!"


대비 김씨는 두팔을 마구 휘저었다. 손안의 밤송이도 잊고 그저 휘두르기만 했다. 굴뚝 옆의 자그마한 얼굴이 두눈을 뎅그렇게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손안의 고통을 느꼈는지, 굴뚝 옆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는지, 대비 김씨는 겁에 질려 확장되었던 동공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파리했다. 대비 김씨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상체를 휘청였다. 그 등뒤에 있던 두 상궁이 황급히 부축했다.


"대비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우희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저 사나운 대비전이 왜 자신을 보고 가온이라 부르는지, 왜 새파랗게 질려서 손을 휘젓는지. 두 홍단령 나리들은 알겠거니 싶어서 돌아보는데, 그중 젊은 나리는 뭔가 살피는 듯이 두눈을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대비마마, 이만 돌아가시옵소서..."

"소인들이 모시겠나이다."


상궁들의 권고에 대비 김씨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최석정과 백광현에게도 아무 말없이 돌아섰다. 뭔가에 홀린 듯이 터덜터덜 걷는 그 뒷모습이 몹시도 불안했다. 우희의 눈엔 너무도 이상한 모습이었다. 대비 김씨의 뒷모습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마냥 쳐다만 보는데, 대비 김씨가 통명전의 그늘을 벗어나며 슬그머니 소맷자락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동글동글하면서도 뽀죡뾰족한 물체가 그 긴 자색 치맛자락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힘없이 통통 튀는가 싶더니 그대로 멈췄다.


아까 그 밤송이?


중궁전하를 이 밤송이 보듯 해달라고 하셨는데. 몰래 버리기까지 하다니. 우희는 몹시 약이 올라 두눈이 더욱 새빨개져서 대비 김씨를 쳐다보았다. 터져서 못쓰게 된 밤송이를 버렸다. 중궁전하도 버릴까. 우희는 울상이 되어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서온돌을 쳐다보았다. 우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석정과 광현이 서둘러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중궁? 정신이 드오?"


진홍은 복부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신음하며, 닫힌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서온돌 안 텅빈 허공엔 은금빛 햇살과 물결이 범벅이 되어 넘실거리는 것만 같았다. 진홍은 두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눈꺼풀이 제대로 떠지니 비로소 지아비의 걱정어린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그녀를 부르는 지아비의 옥음이 아득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아기는...


아기는 무사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두려움으로 꽉 차서 차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바들바들 떨리는 다섯손가락을 겨우 복부에 얹고 뱃속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미 넉달째인데다, 며칠 후면 다섯달째로 접어드는 터라 아기가 무사하면 가냘픈 발길질로 대답을 해줄 지도 몰랐다.


"아기는 괜찮소."


진홍의 속을 읽었는 지, 숙종이 빠른 어조로 답했다. 마음이 급해선지 평소보다 어조가 빨라졌다. 그제야 안도하고 진홍은 손을 내밀어 숙종의 손등 위에 살포시 손끝을 얹었다.


"전하...물..."

"물만 마시면 되오?"

"예에..."


아기가 살았다.


그 생각 만으로 의식이 멀어지고 정신이 늘어졌다. 백어의가 탕약을 가져왔다고 고하는 두광의 목소리, 안으로 들이라는 지아비의 목소리, 문 여닫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가 싶더니, 살금살금 들어오는 백어의의 발소리도 잇따라 귓전을 스쳤다. 백어의에게서 탕약을 건네받기 위해, 지아비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주저앉고, 또 팔을 뻗다가 또 빼고 말았다.


"아까 했던 얘기가 무엇이오?"

"예?"

"아까...간밤에...중궁이 우물 속에서 시체를 보았다 하였소."

"그것이..."


진홍은 대답을 하려다가 눈밑에 경련을 일으켰다. 복부가 너무도 아팠다. 복중 아기도 몹시 아플 터였다.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니 아기가 놀란 모양이었다. 숙종 역시 진홍이 고통에 신음하자 당황했다.


"되었소.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시오."

"황공...하옵니다."


백광현은 왕과 중궁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했다. 귀신이 아니라, 시체였나? 시체라면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헌데 왜 대비 김씨는 시체를 귀신으로 착각한 건지. 혹시라도 또 대비 김씨가 통명전에 들이닥칠까 저어되어 장지문쪽을 돌아보니, 도승지와 가주서가 대청 앞에 엎드려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대청마루 쪽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전하, 중궁전하께오서 한고비를 넘기셨사오니 이만 통명전을 납시어...저 옆 양화당으로 듭시어 주시옵소서!"

"전하, 윤대를 하실 시간이옵니다."


이만 납시어달라...? 숙종의 눈동자가 나른히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당장 서둘러야 할 일이 또 한가지 있었다.


작가의말

1. 아직은 6월인데...숙종 6년 7월 24일자 실록에 의하면 여러차례 발생한 통명전의 귀매鬼魅(귀신, 도깨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가 스포라 자세한 언급은 못하겠습니다. ㅠㅠ


2. 한여름에 손목이 아픈 건 저 뿐일까요? 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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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8.22 10:22
    No. 1

    참...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네요, 중전이
    숙종은 어찌보면 신하들보다도 어머니와의 싸움에서 지쳐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따로 떨어져있는게 아니고 얽혀있는 사연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서두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8.22 14:32
    No. 2

    집필하시느라 손목에 무리가 가서 그런건 아닐까요.
    에어콘 바람이나 선풍기 바람을 집중적으로 손목에 쐬시는 건 아니실 듯 한데..
    늦여름 건강 조심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8.23 11:29
    No. 3

    잘 봤습니다.
    참 모를 대비네요.
    저시대에 누가 당색에 얽히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만은 그것만으로 설명 안되는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파국이 다가오나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5.10.15 20:48
    No. 4

    아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자신이 필요하기 원했군요. 비슷한 욕망을 채워줄 가장 가까운 친인 중 하나였던 현종 사후에 심해졌을 갓이고, 아들이 병약했던 것도 이 정신질환에 한 몫 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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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해의 그림자 214 +3 14.11.10 2,370 30 35쪽
214 해의 그림자 213 +3 14.11.06 1,318 27 42쪽
213 해의 그림자 212 +3 14.11.02 1,612 29 43쪽
212 해의 그림자 211 +3 14.10.26 1,827 33 44쪽
211 해의 그림자 210 +3 14.10.20 1,629 26 42쪽
210 해의 그림자 209 +4 14.10.13 1,954 30 44쪽
209 해의 그림자 208 +3 14.10.07 1,492 28 43쪽
208 해의 그림자 207 +3 14.10.02 1,312 22 43쪽
207 해의 그림자 206 +4 14.09.25 2,690 34 43쪽
206 해의 그림자 205 +4 14.09.19 1,624 26 43쪽
205 해의 그림자 204 +3 14.09.12 1,709 26 40쪽
204 해의 그림자 203 +6 14.09.05 1,496 30 39쪽
203 해의 그림자 202 +7 14.08.30 1,732 31 41쪽
» 해의 그림자 201 +4 14.08.21 1,843 42 41쪽
201 해의 그림자 200 +5 14.08.14 1,381 30 42쪽
200 해의 그림자 199 +4 14.08.07 2,036 34 42쪽
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2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5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45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17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1 34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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