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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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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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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0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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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해의 그림자 203

DUMMY

술시戌時(저녁7~9시)가 지나가는데도 대궐 빈청에선 불빛이 환히 새어나왔다. 천정 한복판엔 오색 유리구슬硝子玉을 꿰어 육면을 감싼 요사등이 매달려 탁자 위로 영롱한 불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바닥 구석구석엔 한지로 사면을 감싼 좌등이 놓여 어둠을 삼켰다. 하지만 탁자 앞에 앉은 고관대작들의 얼굴엔 여전히 그늘이 깔렸다. 저마다 미간을 찌푸린 탓에 주름도 마냥 깊었다.


북벽에 민정중과 함께 나란히 앉은 김수항은 이조판서 정재숭과 형조판서 김덕원 사이로 비어있는 동벽 두 자리와 또 그들 건너편의 서벽 한자리를 곁눈질로 흘겨보고선, 마뜩치 않은 눈빛으로 오른쪽의 민정중을 돌아보았다.


"병판과 호판, 그리고 대제학이 안왔소만."

"대제학은 몰라도, 저 둘은 오긴 할 겁니다."


민정중은 동벽의 두 빈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2각 전에 양화당을 나서면서 또 다시 김석주와 민유중이 나란히 뒤처져서 모종의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긴한 대화를 하다 보면 걸음이 느려져서 그렇지, 늦게라도 올 터였다. 아우 민유중이 양화당 월대에서 내려설 때 댓돌을 목화 뒤축으로 툭툭 차며 짜증스레 김석주를 돌아보던 모습만 봐도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두손을 허리에 얹고 한숨을 푹푹 내쉬던 김석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대제학은?"

"..."


대제학이란 세글자가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빈청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었다. 마침 문이 열리자 고관들은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병조판서 김석주와 호조판서 민유중이 사뭇 벌개진 얼굴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오는 길에 서로 언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수항은 그들의 어깨 사이로도 보이지 않는 대제학의 공백을 더 신경썼다.


"대제학은?"

"먼저 가던데, 여기 안 온 겝니까?"


김석주는 느긋하게 되물었다. 어차피 대제학 이민서가 껴 봤자 불편한 자리였다. 오는 길에 민유중과 서로 호조가 일처리를 잘했어야 했다느니, 병조가 잘했어야 했다느니 언쟁도 했다. 그러다가 이 모든 원흉은 대제학 이민서로 귀결되었다. 그 잘난 면상을 보면 어쩐지 좋은 말이 나가지 않겠지 싶었다. 그런데 다들 같은 생각인지 대제학 이민서의 존재가 언급되자마자 빈청 안의 공기가 더 싸늘해졌다.


"대제학이 쓸 데 없는 짓을 했어."

"..."


민정중만 홀로 코웃음을 쳤을 뿐, 나머지 신료들은 저마다 치를 떨며 침묵 속에 잠겼다. 어두운 어스름 속에서도, 조금전 양화당에서 있었던 일은 훤한 한낮의 풍경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반짝였다.


- 전하, 전한典翰 권언적이 잦은 병치레로 사수仕數(출근일수)가 열흘이나 모자라옵니다.

- 뭐라? 열흘?


대제학 이민서가 왕에게 올린 도력장엔 전임 전한典翰이 잦은 병치레로 사수가 모자란다는 보고가 있었고, 이조판서 정재숭은 미처 전한의 망단자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에게 질책을 들었다.


- 전한典翰이 사수가 모자라면 마땅히 체차遞差(다른 관료로 교체)하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이판은 망단자를 갖춰올리지 않았는가?

- 하오나 전하, 시일이 워낙 촉박하여, 사수를 다시 상고해 봐야 하여...

- 여기 홍문관 대제학이 올린 도력장을 봐도 전한 권언적은 이미 적합하지 않다. 체차하라.


이조판서는 다시 전한의 사수를 검토하자고 만류했는데도, 왕은 가차없이 전한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이조판서에게 삼망三望(망단자로 3인의 후보 이름을 올리는 것)을 받지도 않고 단망單望으로 최석정을 전한으로 올렸다.


- 대전大典에 빙거憑據(의거)해서 전한典翰이 결원일 땐 재직일수에 상관없이 응교應敎가 승진하여 맡는다.

- 하오나 전하...

- 법규대로, 절차대로 하는데 뭐가 문제요?


너무 빨라서 문제였다. 애초에 최석정에게 통정대부를 하사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 환수를 청했더니 왕은 최석정에게 겸직이자 준직인 사복정司僕正에 앉혔다. 어디까지나 편법이었다. 사복정은 사실 정3품 하계이자 종3품 상계인 중직대부中直大夫 품계였다. 애초에 그 품계가 통정대부가 아니라 중직대부라는 사실을 왕에게 다시 주지시켜 최석정을 끌어내렸어야 했다.


"그러게 진작 응교에서 끌어내자 했잖습니까?"

"험, 끌어낼 명분이 있어야지."


김석주의 푸념에 민정중은 갑자기 목에 생선가시라도 걸린 듯이 나직한 헛기침을 했다. 애초에 최석정을 홍문록에서 빼지도 못했고, 또 엄연히 응교에 앉은 최석정을 도목정이 오기 전에 끌어내리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도목정이 오기 전에 최석정을 응교에서 끌어내릴 것을. 하지만 도목정 역시 평소보다 무려 스무날이나 빨랐다. 왕이 중궁의 소산기를 빙자하여 선수를 친 것이었다.


"왜 없습니까. 애초에 전하께서 최석정을 통정대부를 내리시고 사복정에 앉히신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사복정은 곧 중직대부中直大夫의 품계인 바...그때 통정을 환수하고 중직으로 앉혔어야..."

"그랬다가 응교에서 전한으로 올릴까봐 중직 얘긴 입도 벙긋 안한 것이 아닌가?"

"..."


김석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신하들 모두 최석정의 녹훈을 반대하면서도, 중직中直의 중中자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중직대부 품계를 거론하면 왕은 바로 사복정이 아니라 전한으로 올릴 지도 몰랐다.


전한은 한번 오르면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 자리였다. 통정이나 통훈 품계를 내릴 수 없다면, 왕이 애초에 중직대부의 품계를 내리고 최석정을 전한으로 올려도 되었지만, 그 사실을 왕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김석주는 이내 교활한 웃음을 띠고 민정중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번에 다시 바로잡아야지요."

"바로잡아?"

"그때 품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고하고서 도로 중직으로 내려야지요. 지금 마침 전한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김수항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한마디 끼여들었다. 어쩐지 치졸했다. 왕이 최석정을 가자加資시킨다 하였을 때, 다들 준직準職 문제만 거론할 뿐 중직대부中直大夫의 중中자는 입밖에도 꺼내지도 않더니, 이제 최석정이 중직中直의 노른자위인 전한典翰이 되자, 이를 빌미로 원래 최석정의 품계가 중직이었어야 했다고 시정을 청한다니. 괜히 얼꿀이 뜨뜻해져서 김수항은 왼손바닥으로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어느틈에 콧잔등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는지, 검지손가락 마디마디가 축축해졌다.


"이왕 전한이 되었으니 품계라도 깎겠다?"

"뭐...그렇게 됩니까?"

"..."

"사실 품계品階는 당상이고 직계職階는 당하인 게 모양새도 영 좋지 않고..."


옹졸하고 옹색한 변명이었다. 애초에 석정을 중직대부 품계인 전한에 앉혔으면 모를까, 봉정대부奉正大夫 품계인 응교에 주저앉히고서, 석정이 기어이 전한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품계도 중직대부로 되돌리겠다니. 하지만 김석주 말대로 홍단령을 입고 당하의 관직을 맡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뢴다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일세."

"..."


영의정 김수항이 차분한 어조로 경고했다. 물론 반대의사는 없었다. 최석정의 승급이 너무 빨라서 발목을 묶어두고 싶은 건 그도 똑같았다. 그러자 다시 빈청 안의 신료들이 쓴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이번 도력장에서 문제가 생겼어야..."

"도대체 호조와 병조는 뭐 한 거요? 그물을 쳐서 꺽정이를 잡겠다더니."

"당청當廳(우리 관청)도 아닌데 공좌부와 도력장을 떠넘긴 우리는 뭐 무사하겠소?"

"오히려 전하께선 체제를 무시했다고 우리에게 제재를 가하실 거요."

"그러니 누군가 방울을 달아야지."


육경과 삼사의 수장들은 빈청 안을 둘러보며 쑥덕거렸다. 이런 일은 보통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떠넘기기 좋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곤 홍문관의 이민서 뿐이었다. 이민서는 물론 김만중까지도 최석정의 방패가 되어줄테니 이 자리에 있는 자신들 중 누군가가 손에 방울을 쥐어야 했다.


물론 내 손에 이미 방울쯤은 있지.


김석주는 음흉한 웃음을 애써 지우며 시선을 내리깔고 오른팔 자개미를 문질렀다. 자꾸만 땀이 차서 땀띠가 울긋불긋 올라왔다. 민정중과 김수항만 이 자리에 없어도 좀 편하게 품에서 부채를 꺼내어 실컷 부쳐볼텐데 내심 아쉬웠다. 그렇다고 당장 땀띠 때문에 참기 힘든 건 아니었다. 그저 시선을 감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정말로 그에겐 방울이 있었다. 하지만 쥐들에게 방울을 빌려줄 수는 있어도, 직접 고양이 목에 달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다. 석주는 빈자리를 흘끗 내려다보며 지금 자리에 없는 이민서를 떠올렸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팔꿈치를 가만히 주무르며, 석주는 차갑고도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이민서가 언제까지 최석정 편을 들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남구만이 언제까지 최석정의 뒤에 있으려고 들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석주는 배부른 미소 속에 굶주린 식욕을 번뜩이며 속으로 조용히 벼르고 별렀다.



"최응교! 최응교!"

"..."

"여시야! 여시야!"

"..."

"석만아! 석만아!"

"..."

"꺽정아! 꺽정아!"

"..."

"그만 걱정 시키고 좀 나와라!"


빈청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홍문관에 돌아온 이민서는 석정을 찾아서 옥당 안을 서성이며 큰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마음이 급했다. 종3품 전한典翰에 오른 사실을 알려줄 겨를도 없었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할 판이었다. 다른 관청에서 맡긴 공좌부와 도력장이야, 사실 최석정이 약간의 실수를 하더라도, 타관에 업무를 떠넘긴 저들을 문책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홍문관의 도력장은 터럭 한올 만큼도 틀려선 안되었다. 그래서 어서 석정을 찾아서 실수가 있었진 않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헌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벌써 한참을 이름과 호칭을 바꿔 불렀는데도, 석정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옥당이 아니라 옥당 행랑을 살펴봐야 하는 건지. 이민서는 옥당玉堂을 나와서 당하관들이 일하는 서행랑으로 건너가 보았다. 워낙 내부의 시야를 막는 담장까지 폐쇄적인 미로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청사라서, 이 안에서 관료들이 일을 하는 지, 잠을 자는 지도 알 수 없었기에 최석정을 찾아 행랑을 누비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 건지, 아무리 이민서가 행랑들을 한칸한칸 샅샅이 누비고 다녀도 머리카락 한올조차 볼 수가 없었다.


"최응교는?"

"여기 다락방 어딘가에..."


종6품 부수찬이 다락방으로 이어진 서행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민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눈도 못 붙이고 일만 하는 건가 싶었다. 밤새 뜬눈으로 육조와 삼사의 공좌부를 살피고 도력장을 써냈으니,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서 선잠을 자도 좋을 법한데, 좁디 좁은 다락방은 아니어야 했다. 두다리나 제대로 뻗고 잘 수나 있을까. 기껏해야 서안에 엎드려 팔을 베고 자거나, 팔을 베지도 못한 채로 꾸벅꾸벅 조는 게 고작일 터였다.


이민서가 사다리처럼 생긴 목조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온통 고서古書들이 빽빽한 다락방 안에서 서안에 엎드려 곤히 잠을 자는 석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좌등 불빛에 얼굴 정도는 식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딸을 시집보내야 할 나이인 놈이 철 모르고 잠든 얼굴 만큼은 어릴 적에 보았던 앳띤 얼굴 그대로였다. 어쩐지 흔들어 잠을 깨우기도 아까운 얼굴이었지만, 이대로 불편하게 새우잠보다 못한 쪽잠을 자다 보면 팔다리에 쥐가 날 수도 있었다.


"이놈아! 집에 가서 자라!"

"..."

"집에 가서 자래도? 최전한典翰!"


이민서는 석정에 대한 안쓰러운 기분을 떨쳐내려는 듯 힘껏 석정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하지만 이미 서행랑은 안팎으로 저녁 어스름에 물들었고, 고작 좌등 두개로는 어둠을 온전히 쫓을 수 없는 데다, 곤히 잠든 석정의 꿈속까지 비출 수도 없었다. 이민서의 고함도, 구타도 석정의 꿈속으론 파고들지 못했다.


- 아 집에서 한발짝도 안나오신다면서요!

- 안 나갔어 이놈아!

- 나오셨잖아요!

- 내가 언제!

- 나오셨거든요!

- 안 나갔거든!

- 이 댓돌 밟으셨잖아요!

- 뭐?

- 댓돌 밟으면 집 나온 거지!


꿈속에서 석정은 수락산 호원동 박세당의 집에 들렀다가 두 부자에게 시달리는 참이었다. 걸핏하면 자기가 옳다고 싸우는 두 부자는 아비는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우기고, 아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고 우겼다. 서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더니, 두 부자는 시뻘겋게 흥분하여 충혈된 눈으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 안 밟았거든! 밟은 건 내가 아니라 꺽정이야!

- 아버지도 밟았잖아요!

- 아 진짜! 저 꺽정이만 밟았대도!


둘의 시선이 이내 석정의 발치로 뚝 떨어졌다. 정말로 석정의 두발은 박세당의 사랑채 앞 시꺼먼 댓돌을 밟고 선 채였다. 그것도 댓돌을 오르려던 건지, 내리려던 건지 가늠하기 힘들 만큼 비스듬한 자세로. 석정은 자신이 딛고 선 까마귀빛 댓돌을 내려다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아니...전...

- 이놈이래도! 이놈! 이놈이 당상堂上으로 오르기에 난 마중 나온 거야!

- 아니 당하堂下로 내려서는 건데요! 여시 형은 아버지랑 같이 나오려던 거죠!

- 아 글쎄 아니래도! 발을 보면 모르냐!

- 아버지가 나가려던 거잖아요!

- 저놈이 들어오려던 거래도!


워낙 꿈속이 시끄러워서, 꿈밖이 시끄러운 줄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등줄기에 화끈한 고통이 덮치며, 이민서의 고함이 고막을 들쑤셨다.


"야 이놈아! 그만 집에 가서 자라고!"

"어! 어..."


잠결에도 화들짝 놀란 석정은 어깻죽지까지 들썩이며 고개를 쳐들었다. 어깨 뒤로 불긋한 것이 어른거리는 것이, 게다가 방금 들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것이, 아무래도 스승의 친우이자 친우의 이복형인 이민서인가 싶었다.


이민서. 어릴 적에 잠깐 뵙고 한동안 못 뵈었다가 장성에서 부여에서 만났을 적에도 자신이 이름 좀 바꿨다고 친우의 제자인 줄도 몰라봤던 양반이었다. 심지어 타관에서 공좌부를 떠안기며 도력장 업무를 자신에게 떠넘기는데도 역성을 들기는 커녕 오히려 산학 천재이니 얼마든지 맡기라며 오히려 하관의 고충을 방관한 몹쓸 상관이었다. 잠결에도 그 이름을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최전한, 집에 들어가서 자라고!"

"아 들어가려던 거라고요..."


석정은 졸음이 채 가시지 않고 입가에 침도 흥건한 채로 멍청히 대꾸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꿈속에서 밟은 댓돌은 유독 빛이 검었다. 너무도 생생하게 진했다. 말하다 보니까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서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코끝이 매웠다. 석정은 멍하니 손가락 마디마디로 코끝을 문질렀다. 그러다 보니 눈도 매워서 또 눈도 문질렀다.


"저 더러운!"


손바닥으로 침을 닦더니 이제는 코도 눈도 문지르는 모습에 이민서는 한순간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뿜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아직도 비몽사몽일까마는, 자신에게 내비친 반항적인 눈초리 만큼은 가만둘 수 없었다. 그는 이내 왼손을 뻗어서 엄지와 검지로 석정의 뺨을 힘껏 잡아당겼다.


"잠이나 깨고 말해라! 더럽게 침은 한바닥 흘려갖고!"


우악스런 이민서의 손짓에 석정의 고개가 좌우로 또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석정은 두눈에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졸음이 달아났다. 순식간에 석정은 콧시울이며 눈시울이 온통 벌개져서 이민서를 쏘아보았다. 눈동자에서 원망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아 왜 이러세요! 누구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누구 때문에 고뿔 들었거든요!"

"이놈이...전한에 올려줬음 됐지. 고마운 줄 알어!"

"뭘 고마워하라고요?"

"너 이제 전한이라고."

"네?"

"전한이라고 이제."


석정은 잠시 멍해졌다. 전한? 얼마 전에 임명된, 허울 뿐인 사복정司僕正과는 의미가 너무도 달랐다. 정3품 사복정이란 자리가 그저 돌계단의 댓돌 가장자리를 감싼 소맷돌 같은 것이라면, 오히려 한계단 낮은 종3품 전한은 발을 딛고 오르내리는 댓돌이었다. 방금 댓돌 밟는 꿈을 꾸었는데, 왜 대제학 서하공西河公도 하필이면 전한 타령인지.


"제가요?"

"몇번을 말하게 하냐? 진짜."

"..."


석정은 그저 얼떨떨했다. 자신이 전한典翰이라니. 조선에서 난다 긴다 하는 문필가들이 모인 홍문관에서 서열 다섯번째의 이름이 빛나는 그 전한에 자신이 올랐다니, 추운날 높은산에 오른 것처럼 귓속이 멍멍했다. 이렇게 빨라도 되나 싶을 만큼 발밑을 내려다 보는 것도 어지러울 것 같았다.


"어떻게..."

"권언적이 사수가 모자라서 체차되고, 결원이 생겼으니 경국대전의 율에 따라 네놈이 전한에 오른 게다."

"..."


석정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왕과 대제학 이민서가 사수를 핑계로 전임 전한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전한에 올린 것이 분명했다. 웃을 수도 화낼 수도 없었다. 사수가 모자라면 파출되어 마땅해도, 자신을 전한에 앉히려고 왕과 이민서가 술수를 부린 건가 싶으니 그저 면목이 없었다.


"저 하나 전한에 올리자고..."

"원래대로라면 네놈이 두달 전에 올랐어야 할 자리니, 괘념치 말거라."

"..."


지금도 빠른데, 두달전이면 더 빨랐다. 홍문관 벼슬이 그렇게 한달 건너 한칸, 두달 건너 두칸 오를 수 있는 자리도 아닌데, 수찬에서 부교리로, 부교리에서 교리로, 교리에서 부응교로, 부응교에서 응교로, 응교에서 전한으로, 그렇게 수찬에서 전한까지 2년여만에 오른 것만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녀석...이번에 수찬이 된 내 조카놈이나 잘 부탁하마."


이민서는 석정의 어깨를 툭툭 치듯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정은 한순간 이민서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 못알아들을 뻔했다. 하지만 어쩐지 왕의 옥안과 조금은 닮은 듯한 이민서의 옆얼굴을 보면서, 특히 귓볼이 조금 넓다 싶을 만큼 큰 귀를 보면서, 석정은 이내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포암蒲菴 이사명.


"수찬이요?"


석정의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자신보다도 확실히 빨랐다. 자신은 검열, 교리부터 출발했는데, 이민서의 조카는 수찬부터 출발했다. 왕실의 고귀한 혈통인 백강白江의 혈육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춘당대 별시別試의 갑과甲科 장원을 차지해서 그런 건가...김석주와 모종의 관계인 것만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기꺼워 했을 것을. 어쩐지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일 아침에 교지를 받으러 올 게다. 너도 얼른 집에 들어가서 발 씻고 자둬라. 푹 자둬야 고뿔도 안 걸리지."


석정에게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드는 느낌으로, 이민서는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떴다. 다락방 구조인 이곳 서행랑만 들어오면 어쩐지 허리가 아픈 기분이었다.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지금껏 허리를 똑바로 편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이민서가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석정은 자신도 집에 갈 심산으로 가만히 봇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석정이 서행랑을 빠져나와 보니 옥당의 쪽문 세군데가 모두 초롱불에 환히 비치는 참이었다. 평소보다도 문간이 훨씬 훤했다. 누군가 있었다. 그림자가 서로 얽히는 것을 보니 한둘이 아니었다.


"뭐야? 왜 안 나오셔?"

"먼저 들어가신 거 아냐?"

"아니 답은 가르쳐 주고 가셔야지."

"인간아, 양심 좀 있어봐라. 밤을 꼴딱 새셨는데, 그럼, 기다리리?"

"아니...난 그냥..."

"그냥 뭐? 뭐!"

"그냥 답만 써주고 가심 되지...뭐 얼마나 걸린다고?"

"아니 그분이 우릴 왜 신경써? 왜!""


석정은 세군데 쪽문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저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태 마방진과 씨름했던 모양이었다. 못내 궁금해서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석정은 저들의 대화에 흥미를 갖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대화를 엿들었다. 바람결에 일렁이는 초롱불에 비친 저들의 그림자도 조금씩 살랑였다. 쪽문 하나에 한놈씩이면 모두 세놈인가.


"그 나이에 벌써 전한典翰이래잖아, 전한!"

"또?"

"뭐가 또야?"

"뭔 한달 걸러 녹봉 나오는 거 만치 한달 걸러 관등官等이 바뀐디야?"

"몰러. 광흥창에 맡겨놨나보지."

"광흥창에서 벼슬도 나눠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어?"

"그렇게 출세가 빠른 양반이 우리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고."


산원들이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쪽문 안쪽에서 하품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말일세!"


ㄷ자를 눕혀놓은 듯한 쪽문 세개의 사이로 붉디 붉은 홍단령자락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석정이 연거푸 하품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졸려서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이."


다시 졸음이 내려앉은 눈꺼풀로 석정은 앞에 선 산원 셋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허리께로 또 하나의 머리가 보였다. 산원들 셋이 쪽문 하나씩 점거하고, 나머지 하나는 요 앞 행랑문 아래 계단 아래에서 댓돌에 한발 걸치고 선 모양이었다. 산원들은 저마다 두눈을 의심하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으리!"

"영감!"


산원들이 호칭도 헷갈렸는지 저마다 다른 칭호로 석정을 불렀다. 끈기 있게 마방진에 매달리다 기어이 자신을 찾아온 이들 산원들은 어슴푸레한 초롱불을 들고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불빛이 최석정의 얼굴을 환히 비추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석정의 얼굴에 움찔했다.


"어이쿠야, 자네들 눈밑에 숯을 발랐나! 왜 이리 시꺼먼가?"

"그러는 나으린 뭐 연지곤지 바르셨대요? 왜 이리 시뻘겋대요?"

"코가 좀 매워서...자네들이 하나도 도움이 안되다 보니 일에 치여서 이리 되었으이."

"..."

"난 이만 가서 자겠네. 자네들도 이만 들어가게."


산원들과 몇마디 주고 받다 보니 또 코끝이 매웠다. 석정은 이러다가 콧물까지 흘리는 추태를 보일까봐 저어되어 얼른 쪽문을 나서려고 했다.


"아니 나으리...답은 가르쳐 주고 가셔야죠..."

"책임지셔요. 나으리가 내신 문제 푸느라고 우덜 눈밑이 숯검댕이 되었응께."

"뭐? 책임?"

"보셔요. 이보게들. 나도 잠 좀 자자고."

"소인들도 잠 좀 자자구요. 이대로는 궁금해서 뒈질 것 같응께."


석정은 하도 고되어 온몸이 물먹은 솜뭉치 같았다. 하지만 행랑문쪽에 서 있던 산원놈이 어설픈 사투리로 대들면서 자꾸만 집요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그나마 다른 산원들은 엉거주춤 눈치만 보는데, 이놈은 또 왜 이리 엉기는지.


석정이 짜증이 나서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하며 노려보니, 산원들은 그제야 눈앞의 상대가 젊은 나이에 당상관 입성을 목전에 둔 실력자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산원들은 저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뒤늦은 축사를 건넸다.


"아참,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좀전에 전한이 되셨다지요?"

"그렇게 자꾸 벼슬이 오르시니 참 용하구먼요.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라고, 요로코롬 품계가 자꾸 오르면 우리는 워쩐대요? 우덜은 영감님 녹미 계산하느라 대갈통이 터질 것인디...벼슬이 머 달 바뀌면 딱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자꾸 중간에 품계가 바뀌면 진짜 짜증나걸랑요. 기껏 녹표 만들어 보내면, 또 바뀌었다고 광흥창에서 서리가 오고..."


한마디씩 인사치레를 한다는 것이, 또 저 코가 뭉특하니 발음도 살짝 뭉개진 듯한 사투리를 쓰는 산원 차례가 되니 푸념으로 바뀌었다. 석정은 호조 산학청에서 관리들의 녹표를 발급하여 광흥창에 보내는 일을 하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은 그저 때 되면 광흥창에서 녹미를 받아가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자꾸 중간에 자신의 품계가 오르는 일은 호조 산학청 산원들에겐 참으로 성가신 일인 모양이었다.


"아...자네들이 그 일을 하던가?"

"사실 지는 참을 만 한디, 여기 임별제님은 나으리 녹미 계산하다가 산판算板(주판) 내던진 적도 있거덩요. 와, 그 귀한 흑단목으로 만들었다고 자랑을 골백번을 했던 산판을 박살을..."

"내가 언제?"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무신. 그때 그러셨잖아요. 어쩌다가 산원이 되어서 개같은 어쩌고, 저쩌고...후회막급이라고..."

"구훈도!"

"개같은?"

"아니 개같이 고생을 한다 그말..."

"아닌디...그렇게 안 들렸는디..."

"야 이놈아!"

"아니...개 같은 나으리 어쩌고 저쩌고 하시는 게..."

"저..."

"뭐랬더라? 성총은 개나리 이파리처럼 혼자 봄이고, 벼슬은 개구리 뒷다리처럼 먼저 뛴다나..."

"아니아니..."


임별제가 화들짝 구훈도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구훈도의 입에서 온갖 몹쓸 폭로가 흘러나온 뒤였다. 임별제가 기미투성이 콧잔등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석정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석정은 석정대로 호조 산학청 산원들이 서로 입을 열고 막고 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승급이 어떤 이에겐 후회막급이 되고, 자신의 행운이 어떤 이에겐 재앙이 되는 사실에 가슴 한켠이 살짝 켕겼다.


"알았으니까 나는 가네."

"아니 답은 가르쳐주시고 가셔야..."

"숟가락을 줘도 못 떠먹는 친구들한테 뭘 떠먹여주나? 숟가락을 더 작은 걸로 바꿔줘야지."

"예에?"

"내일 아침에 이 자리로 다시 오게나. 내 더 쉬운 마방진 문제를 내주겠네."


석정은 산원들에게 손을 휘적휘적 저어보이고서 그대로 남쪽 쪽문을 나섰다. 갑자기 눈꺼풀이 끈적끈적해졌는지 위아래 속눈썹이 서로 달라붙었다. 눈곱이 탓인지, 졸음 탓인지 도무지 눈꺼풀이 떠지지가 않았다. 깍지손처럼 속눈썹이 풀리지도 않았다. 앞에 지팡이 짚은 사람이 오는 지, 말탄 사람이 오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당연히 옆으로 지나가는 반인 한명이 뭔가 겨드랑이에 낀 길쭉한 물건을 친친 감은 천을 푸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몽사몽으로 걷다보니, 반인이 천을 풀어낸 물체가 시뻘건 피가 묻은 칼이란 사실도, 그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자신에게 휘두르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심...!"


갑자기 날아든 물체가 반인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반인이 움찔하는 순간 단단한 돌멩이 같은 것이 팔꿈치를 강타했다. 고개를 숙인 순간 시꺼먼 먹물이 반인의 눈앞을 덮쳤다. 눈에 뭔가 들어갔다 싶은 순간 반인은 팔꿈치를 불쏘시개로 찍는 전율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반인은 애써 두눈을 깜빡이며 부릅뜨고서, 자신의 팔꿈치를 찍은 물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달려오는 적이 누구인지 정체를 확인했다.


행연行硯?


선비들이 평소 언제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도록 항상 몸에 소지하는 행연이었다. 시꺼먼 오석烏石을 엽전만한 크기로 둥글게 다듬어놓은 벼루와 손가락만한 굵기의 오동나무 붓통을 한일一자로 이어붙인 것이, 땅바닥에 떨어지고도 깨지지도 않았다. 반인은 두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돼.


고작 행연 따위로 자신의 팔꿈치를 정확히 가격하다니. 급한 순간에 손에 닿는대로 던진 물건이 하필이면 선비들이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니는 행연 따위라면, 자신을 방해한 손도 선비의 손이란 의미였다. 그 순간 눈앞으로 무섭게 달려드는 검푸른 그림자에 반인은 화들짝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붓 한필을 들고 자신의 코앞으로 덤벼드는 검푸른 행의 또한 선비의 행색이었다. 그것도 인정을 코앞에 둔 한밤중에도 희누런 얼굴이 눈에 띄는 샌님이었다.


"말도 안돼..."


반인은 귀신에 홀린 얼굴로 눈앞의 선비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자신의 오른 팔꿈치가 아릿하다 못해 저릿하여, 오른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손가락 마디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팔꿈치를 이꼴로 만든 게 선비 따위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려 했다. 하지만 그 눈앞에서 차갑게 번뜩이는 사내의 눈동자를 보니 이내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었다. 반인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를 느끼며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자신을 사주한 이가 말했다.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자니 결코 실수가 있어선 안된다고. 여의치 않으면 바로 내빼라고.


"비켜!"


반인은 칼을 왼팔로 바꿔들고 마구 휘저으며 그대로 내뺐다. 선비는 뒤쫓을까 말까 망설이며 반인을 쳐다보고 다시 석정을 돌아보곤 이내 기가 막혀 한발짝도 움직이질 못했다.


어떻게 이 와중에도 눈을 뜨지 않고 졸면서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건지. 선비는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이 나왔다.


"정말..."


선비는 별 수 없이 얼른 행연을 줍고 그 붓대에 붓을 끼우면서 석정의 뒤를 따랐다. 평소 수천번도 넘게 다닌 길이라선지, 졸며 졸며 가는데도 석정의 발은 정확히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심지어는 도로변에 있는 나무나 돌부리조차도 피해서 가는 것이,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나 있을 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까처럼 누군가 고의든 아니든 석정을 노리는 일만 막아주면 될 것 같았다.


선비가 석정을 호위하듯 가만히 한발한발 뒤따르자, 반인이 사라진 길 모퉁이에서, 흑혜를 신은 발이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반물빛 도포자락이 바람결에 소리없이 하늘거렸다. 졸가리만 앙상한 녹나무들 틈새로 붉은 매화 한송이를 피워올린 매화나무 한그루가 그려진 부채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부채살 틈새로 가만히 한숨섞인 음성을 내뱉았다.


"홍만종..."


석정의 목숨을 구하고 뒤따른 이는 만종이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선비는 부채 위로 쌍커풀이 뚜렷한 두눈을 드러내고 석정과 만종이 차례로 지나간 길을 가만히 쳐다보며, 눈빛을 냉혹하게 번뜩였다.


"송구함다."


등뒤로 다가들어 고개를 떨구는 반인의 그림자에 선비는 접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만 살짝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부채 사이로 스며들어 사내의 깎아놓은 듯한 옆얼굴을 어슴푸레 비추었다.


"자네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게나."


사내는 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석정과 만종이 사라진 길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희멀건 얼굴이 언뜻 부채 틈새로 비쳤지만, 이내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흔적 없이 묻혀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이사명을 정5품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삼는다."

"심유를 정5품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삼는다."

"최석정을 종3품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삼는다."

"김만중을 정3품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삼는다."

"남이성을 종2품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삼는다."


환한 아침햇살이 양화당 안팎을 속속들이 비추며 어둠을 어냈다. 바로 옆 통명전에 귀신이 출몰한다느니, 중궁의 침전에 출입한다느니, 그래서 중궁이 경끼를 일으켜서 반산 직전까지 갔다느니, 온갖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양화당의 아침은 마냥 평온했다. 물론 그 속사정이 평온할 리는 없었다. 중궁의 반산기가 불안하여 통명전을 한발짝도 떠나지 못하는 왕이 또다시 편전이 아닌 양화당에서 신료들을 불러 교서를 내리는 탓이었다.


석정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양화당 안의 공기가 썰렁하게 찬바람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이미 대서大暑를 훌쩍 지나 입추立秋를 목전에 두긴 했어도, 찬바람은 때이른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서를 맞을 무렵, 석정은 조정신료들이 자꾸 자신 주변 인물들을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을 목도했다. 아예 스승의 친우인 이민서, 숙부인 남이성을 체차하라는 사헌부의 계문이 왕의 서안에 쌓이는 참이었다. 그런데 왕은 홍문관을 온통 석정의 인맥으로 빼곡하게 채워놓았으니 등줄기를 훑는 찬바람 속에 섞인 가시가 느껴졌다. 도승지가 자신에게 교지를 전하는 순간에도, 그 손끝에 가시가 닿는 기분이었다.


"호판이 말씀 좀..."

"병판이 하시게."


뭐 마려운 개들처럼 서로 옆구리를 쑤시고 팔꿈치를 잡으며 귓속말도 하는 참이었다. 귀가 밝은 왕은 이미 어탑에서 저들의 미묘한 움직임을 읽어내고 심술궂은 표정이 되어 노려보기까지 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는가?"

"..."

"있는가?"

"아니...옵니다."


최석정의 품계를 회수하는 문제가 남았다. 신료들이 차마 말도 못하고 목젖만 출렁일 정도로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가운데, 김수항이 청아한 자태를 잃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송구하오나 충분히 시일을 두지 않고 준비한 터라, 혹여 도력장에 실수가 있었을까 저어되어 신료들이 걱정이 많습니다...도력장에 실수가 있었을 시엔 해당 관원은 물론이고 그 수장마저 관복을 벗어야 하는 것이 법도인지라..."

"그 얘기요?"


숙종은 미간을 찡그리고 김수항을 노려보았다. 육조와 삼사에서 무슨 일을 했는 지는 이미 이민서에게 들어서 알았다. 공좌부를 살펴서 도력장을 정리하는 일조차도 최석정에게 떠넘겨 놓고서, 이제 와서 도력장에 실수가 있을까 걱정된다니. 이럴 거면 최석정에게 공좌부를 떠맡기지 말고 직접 맡지 그랬냐고 따지고 싶은 말이 치밀어, 목구멍이 근질근질했다.


"그 얘기라면 도력장을 다시 확인하고나 거론하시오."

"..."

"이만들 물러가시오."


숙종은 나른한 눈빛으로 손을 휘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신료들은 뜨악한 눈빛으로 김수항을 흘겨보며 저마다 홀이나 관복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엔 얼른 어전을 떠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원망이 가득한 눈초리로 김수항을 보니, 조금도 겸연쩍거나 무안하거나 하는 기색이 한점도 없이 오히려 두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김수항은 지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배를 올리고 일어섰다. 민정중은 의혹어린 눈빛으로 김수항을 쳐다보곤 자신도 엉거주춤 사배를 드리고 뒤따랐다. 일단 김수항에게 무슨 속내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았다. 석정은 자신을 에워싼 공기가 자꾸 변하는 것을 느꼈지만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왕의 서안 위를 내려다 보니, 왕은 아무런 신호도 없이 두손을 가지런히 서안에 놓아둔 채였다.


석정은 그저 손안의 교지를 그러쥐고 양화당을 물러나왔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시야를 덮었다. 너무도 강렬하여 눈을 똑바로 뜰 수도 없었다. 아침부터 해가 강렬한 가을빛이라니. 손그늘을 만들어봐도, 손샅으로 파고드는 햇살에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한발한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서 내려다 보니, 발치가 월대 댓돌이었다.


전한典翰...


석정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간밤에 꾸었던 그 꿈 그대로 댓돌을 밟았다. 올라가면 집안이고, 내려가면 집밖이었다. 올라가면 당상堂上이고, 내려가면 당하堂下였다. 하지만 전한은 사간司諫, 집의執義와 더불어 더는 밑으로 내려갈 일이 없는 자리였다.


석정은 교지를 부여잡은 채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서 홍문관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세개의 쪽문 중 아무데나, 특히 가장 가까운 동쪽 쪽문으로 들어가고 말 것을, 아침 댓바람도 아니고 댓돌바람이 분 탓인지, 석정은 가운데 행랑문으로 향했다. 그것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또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댓돌 한복판에 서서 가만히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어디, 약속을 지켜볼까나..."


석정은 맨위 댓돌에 궁둥이를 걸치고 앉더니 품에서 붓통과 벼루가 일체형으로 이어붙은 행연을 꺼내었다. 그리고 붓통에서 붓을 빼어 조그만 벼루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들어있던 먹물에 붓털을 묻혔다. 대여섯단의 계단을 이룬 댓돌들은 먹물로 그리기엔 너무 시꺼매서 마땅치 않은 것도 있었고, 또 반대로 허여멀개서 마땅한 것도 있었다. 특히 맨 아래에 놓인 댓돌은 재질은 반질반질 맨들맨들하니 윤이 감도는 게, 발을 딛다 미끄러질 법도 했다. 한겨울에 눈이 내려 얼어붙기라도 하면 자칫 미끄러져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나마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갈라진 균열이라도 있으니 덜 미끄러지기야 하겠지만.


석정은 허리를 숙여서 맨 아래의 시꺼먼 댓돌 대신 그 위의 희멀건 댓돌 위에 붓을 가져가더니, 마흔개의 동그라미를 열십十자로 배열해서 그려넣었다. 지난번 문제의 배열에서 9개의 동그라미 중 정가운데의 동그라미를 뺀 형태였다. 그 대신 이번엔 한칸한칸, 즉 한궁한궁이 아홉개가 아니라 여덟개였다.


●●●○○○●●●

●●●○●○●●●

●●●○○○●●●

○○○○○○○○○

○●○○●○○●○

○○○○○○○○○

●●●○○○●●●

●●●○●○●●●

●●●○○○●●●


四十子 共積八百二十

40자를 모두 더하면 합이 820이다.


八子各得一百六十四數

8자는 각각 164를 얻는다.


(40개의 흰동그라미의 배열을 그리다 보니 부득이하게 검은동그라미도 같이 표시했습니다. 흰 동그라미에 40개의 숫자를 넣는 문제입니다.)


"아 너무 쉬워졌단 말이야."


누가 들으면 약이 오를 얘기였다. 달랑 마흔개의 동그라미들만 그려놓고, 1부터 40까지 각각 숫자 8개씩 다섯궁宮의 합이 164가 되도록 채워넣으라니. 풀다가 골치가 아플 문제를 만들어놓고도 문제가 너무 쉬워졌다며 한숨이라니. 하지만 석정은 정말로 진지했다. 문제가 너무 쉬워져서 불만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발치를 내려다 보던 석정은 문득 그 아래의 시꺼먼 댓돌에 시선을 못박았다.


"그러고 보니 꿈에 보았던 거기 댓돌이 이렇게 생겼는데..."


꿈에선 서계西溪 스승님의 집 댓돌을 밟았는데, 지금 보니 여기 홍문관의 댓돌이었다. 꿈이란 원래 의식의 수면 아래로 침잠한 것들을 닥치는대로 끌어올려 자신이 만드는 이야깃거리인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서 석정은 댓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정말로 자신이 전한에 오르려 이런 꿈을 꾸었단 말인지.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붓을 행연의 붓통에 대충 꽂아서 행연을 품속에 넣었다. 계단에 낙서를 한 죄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물로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뭐 흉서나 괘서도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석정은 궁둥이에 묻은 흙을 탈탈 털며 일어서더니, 그대로 홍문관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석정은 불과 반시진 후에 대제학 이민서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이민서 조차도 발치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댓돌을 딛고 행랑문을 오르내린 터라,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당장 지우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야 이 미친놈아! 당장 가서 지워 당장!"

"아니 왜요. 그냥 숫자문젠데."

"야 이놈아, 효자孝子 두글자를 적어도, 아무데나 쓰면 그게 자효子梟(새끼 올빼미) 두글자로 둔갑하는 걸 모르냐? 효도효자가 뒤바뀌어 올빼미효梟가 되면! 네놈은 뒈진다."

"그래도..."

"당장 가서 지워 이놈아!"


이민서의 닦달에 못 이겨서 석정은 물이 가득 든 세숫대야와 걸레를 들고 홍문관 행랑문을 나섰다. 벌써 산원들이 모여들었는지 행랑문 바깥은 온통 시끌시끌했다. 어제의 산원 넷이서 열심히 문제를 푸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으며 행랑문 밖으로 나선 순간, 석정은 네명의 낯익은 얼굴들 외에도 또 하나의 낯익은, 하지만 느낌은 낯설은 얼굴을 보았다.


"이거 너무 쉽군요."


청단령을 입은 젊은 관료 하나가 손에 든 붓을 산원 구씨에게 툭 떠넘기며, 무릎맡에 놓아두었던 접선을 집어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발치에는 아침에 석정이 그렸던 마흔개의 동그라미에 1부터 40까지의 숫자가 공백도 없이 적혀 있었다. 숫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했다. 단숨에 정5품 수찬에 오른 사내, 이사명은 손안의 접선을 반쯤 펴서, 그림에 그려진 붉은 매화를 내려다 보며 하얗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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