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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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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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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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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해의 그림자 200

DUMMY

석정은 미간을 찡그리고 다시 석하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했다. 서종태는 성스러운 반궁과 왕궁에 수상한 계집이 드나드는 것이 께름칙하여 자신에게 논의차 왔다 쳐도, 또 박태보는 기껏 홍문록에 이름을 올려줬는데도 도성에 돌아오지 않는 게 미안해서 서찰을 보냈다 쳐도, 석하 이놈은 왜 또 홍만종에게 모종의 서한을 보내온 것인지. 왜 또 홍만종은 자신에게 가져온 것인지.


"유람遊覽이라...? 석하 이녀석 배멀미 때문에 유람의 유遊자도 싫어할텐데?"


석정은 석하의 서찰을 훑어보다가 별안간 두눈을 치뜨고 홍만종을 쳐다보았다. 석하에겐 유람이란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적응할 때도 되었는데 여태껏 배멀미가 심해지는 놈이었다. 그런 녀석이 유람이라?


석정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가슴 한구석이 조금은 켕겼는지, 홍만종이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서 등잔에 꽂힌 납촉에다 딴청을 부렸다.


"이건 육촉肉燭이 아니라 납촉蠟燭이군요?"


쇠기름으로 만든 육촉도 가난한 여염집에선 함부로 쓸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꿀 찌꺼기 기름으로 만든 납촉은 사대부나 왕족만 쓰는 물건이었다. 굳이 벼슬을 않더라도 노비도 몇 거느리고 서호에서 유유자적 뱃놀이를 하던 자신에게도 무리였다.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사대부들조차도 육촉을 더 애용했다. 검소한 최석정 성격에 호사스런 납촉을 살 리가 없었다.


"나으리, 아니 영감께서 납촉을 사셨을 리는 없고..."

"육촉이건 납촉이건, 난 독촉을 더 좋아한다오."

"네?"

"말해보시지. 석하 이놈이 유람을 다닐 리가 없대도. 병판이 뭔가를 시킨 게요? 대로大老의 주변을 감시하는 일이려나? 맞소?"


석정이 존대 반 하대 반 섞어서 대답을 보채자, 홍만종은 난처한 지 입가를 실룩였다. 말허리를 돌리려고 해도, 말머리를 찍어누르려고 해도, 최석정에겐 통하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최석정 주변에서 자신이 제일 정상인 것 같았다. 골백번씩 사기 백이전을 읽는 자공 子公 김득신이나 자신을 남들은 괴팍하다고들 하지만, 자신들은 그저 진득하게 책을 정독할 뿐이었다. 오히려 책 한권도 대충 얄팍하게 읽고도 행간의 의미를 꿰뚫어보는 최석정, 저 인간이 더 괴상했다. 잘 짜인 비단에서 단 하나 실마리를 찾아내듯, 한편의 글을 읽고 하나 뿐인 꼬투리를 잡아내는 능력이야말로 비정상이었다.


"저야 모르지요."

"뭐? 무슨 말이 그런가?"

"잘은 모르는데, 석하 이놈이 뭔가 나으리께 알리고 싶었나 보지요."

"..."


홍만종이 한숨어린 음성으로 얼렁뚱땅 답하자, 석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다니? 눈에 띄는 글이라곤 그저 송시열의 외손주가 우상의 질녀, 즉 호판대감의 딸과 가짜 혼담이 오간다는 얘기 뿐이었다. 반면에 박태보는 진짜 혼담이라 믿는 모양이니, 뭔가 곡절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됩니까? 관비가 집춘문을 드나드는 것이 워낙 해괴한 일이라 재회에 부칠까 하다가, 영감께 먼저 의논을 드린 것이라..."


서종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은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당상관의 반열에 든 최석정과 교류하는 것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세상은 자신들을 순수한 눈으로 보지 않을 터였다. 진즉 최석정과 교분을 나누었는데도.


최석정의 출세가 너무 빨랐다. 심지어는 적당인 남인이 정권을 가졌을 때나, 다시 서인이 정권을 되찾았을 때나...최석정은 햇살 사이로든 빗살 사이로든 거침이 없었다. 왕이 그손을 놓지 않은 탓일지도 몰랐다. 왕이 그토록 싫어하는 송시열을 비호하고 왕을 비난했는데도, 왕은 최석정에게만큼은 벌을 내리지 않고 한동안 참았다. 남인들이 열여섯차례나 계문을 올린 후에야 고작 문외출송의 영을 내렸다. 그마저도 사면령을 내려서 또 다시 남인들이 스무차례나 계문을 올린 후에야 철회했다. 그리고는 명안공주의 혼사에 최석정의 아들을 삼간택까지 올리고서, 그 핑계로 최석정을 사면시켜 버렸다. 그 정도로 왕이 집요하게 곁에 둔 탓인지 어심을 읽는 눈도 남달랐다.


그런 최석정이니 이번에 집춘문으로 무당이 불러들인 이가 왕실의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 일개 관비가 집춘문을 드나드는 것만도 찜찜한 일인데, 하물며 무녀라니, 최석정이 그 내막을, 그 흑막을 밝혀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서종태가 장지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서니 오뉴월 한여름인데도 어쩐지 금세 가을이 찾아들기나 한 것처럼 밤바람이 선선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밤이든 낮이든 서안 앞에서 가만히 책을 읽기만 해도 두팔 두다리 자개미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땀띠가 나고, 엉덩이는 온통 축축해지던 무더위가 어느새 이제는 밤에는 맥을 못 추다니. 물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년보다 더위가 극심한가 싶더니, 어느새 찬바람이 드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몇년 전 기근 때도 이랬던가. 어쨌든 코끝에 싸하게 닿는 밤공기 만큼은 상쾌했다.


"칠석제는 꼭 치르게나."


등뒤에서 들린 석정의 음성에 서종태는 섬돌에 놓인 자신의 흑혜를 찾아 신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간혹 남들은 뒤축을 꺾어 신기도 하지만, 서종태는 워낙 성품이 고아하여 뒤축조차 주름이 가지 않을 만게끔 조심했다. 놀라서 뒤돌아보는 순간에도 검지를 발 뒤꿈치와 흑혜 뒤축 사이로 집어넣어 뒤축이 접히지 않도록 펴는 참이었다. 서종태는 어느덧 대청마루에 걸터앉는 석정을 보고 씨익 웃었다.


"이제 보름 남았지요?"


서종태의 입꼬리가 점점 어색하게 굳었다. 석정이 자신을 뒤따라나온 뜻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주자학을 떠받드는 조선에서 무녀의 출입이라니. 진상을 확인하기 전엔 이 일이 외부에 새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속내를 감추고 석정은 칠석제만 거론하며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래, 담제禫祭(탈상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하는 의식)도 마쳤고, 이젠 급제及第만 남았으니..."

"급제가 뭐 애 이름입니까?"

"자네 실력이면. 전하께서 봄기운을 모으려 하시니 자네도 일손 보태야지."

"..."

"너무 방에서 책만 들이파지 말고. 밖에서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쉬엄쉬엄 쉬어가며, 몸을 잘 보살피게나."

"보름동안 말이지요?"


칠석제라 하여 반궁에서 유생들을 상대로 과거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을 치르는가 하면, 왕궁에선 고사를 지냈다. 어쩌면 벌써 집춘문을 드나드는 무녀가 그 칠석제에 관여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종태는 석정이 칠석제 운운한 것이 앞으로 남은 보름동안 무녀의 동태도 살피라고 넌지시 입김을 넣으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물론..."


석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섬돌에 놓인 홍만종의 신을 아무렇게나 꺾어 신었다. 뒤따라나온 홍만종이 왜 남의 신을 신냐며 푸념하였지만 못 들은 척 하고 사립문 앞까지 서종태를 배웅할 뿐이었다. 어느덧 안개인지 는개인지, 희뿌연 가루비가 사랑채 앞 마당에 자욱했다. 축축한 밤공기가 마음에 드는지 서종태는 가슴 깊이 흉골이 들썩거릴 만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자네 때문에 누룽지 태운 냄새 말인가?"

"아뇨. 그게 아니라..."


코끝에 묻은 냄새의 진원지를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서종태는 문득 울타리를 보고 방금 전에 석정이 한 말을 떠올렸다. 너무 방에서 책만 들이파지 말고 나무 그늘에서 쉬엄쉬엄 쉬어가며 몸을 잘 보살피라던 그 말. 책冊, 나무木가 합쳐진 말이 울타리柵니...어쩌면 아까 그 집춘문 주변을 잘 경계하란 얘기처럼 들렸다. 이제 보니 전하께서 봄기운을 모은다는 말도 단순히 인재를 모은다는 얘기가 아니라 집춘문集春門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춘문 자체가 봄기운을 모은다는 뜻이었으니.


"이제 보니 영감의 담벼락 아래서도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종태는 석정이 에둘러 했던 말들의 속뜻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석정의 집 울타리를 유심히 살폈다. 묘하게도 좋은 냄새가 났다. 노상 맡는 흙냄새, 잎냄새와는 확실히 달랐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꽃향이었다. 연꽃향과 혼동될 정도로 은은하면서도 싱싱한 이 냄새는...


"밤중이라 꽃도 다 지고, 맡을 거라곤 흙냄새, 잎냄새 뿐인데 무슨..."

"아니...꽃냄새도 납니다. 연꽃냄새 같은...아, 좀 다르군요. 이 냄새는 좀 다릅니다. 연꽃냄새는 아닌데..."

"아니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석정이 궁시렁대는 동안에도, 종태는 꽃향의 진원지를 찾아 한발짝 두발짝 담벼락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기어코 어린아이 키 만한 한그루 꽃나무 앞에 멈춰섰다. 이파리보다도 큰 꽃잎 다섯개로 이루어진 봉오리를 조용히 오므린 것이, 아침엔 활짝 피었다가 저녁엔 옴짝 옴츠리는 꽃들의 습성 그대로였다. 하지만 여느 꽃과는 달리 진한 향도 아니었고, 이렇게 는개를 흠뻑 맞고 냄새를 뿜어내야지만 맡을 수 있는 향내였다. 달면서도 시원하고,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이 냄새는...


"근화槿花(무궁화)로군요."

"근화?"


근화는 향이 없는 꽃이었다. 아니, 사람이 향을 맡지 못하는 꽃이었다.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 꽃이니 향이 없진 않을 터였다. 사람들이 꽃내를 맡지 못할 뿐이지, 아무도 모르는 단내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은일화隱逸花라 불리는 국화처럼, 국화보다도 조용하게 향이 숨은 꽃이었다. 그런 근화의 꽃내를 맡는 서종태의 후각은 너무도 예민했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근화라니, 새까맣게 잊어버린 터였다. 석하 그놈이 자신들의 만남을 자축하는 의미로 꽃가지 하나를 주었을 때...체건과 백광현이 했던 말이 어렴풋이 귀에 남았다. 더구나 홍만종 역시 부여에서 한마디 하다가 석하에게 입을 틀어막힌 적도 있었다.


- 그거 향기 나면 큰일 나요.

- 집에 가면 그 근화가지나 잘 심어놓게나.

- 이놈이 준 근화가지에서 꽃이 피는 규수는...이놈의 배필이 된다는 천옥대사의 저주가...읍...


석정이 주었던 꽃가지를 딸 이소가 여기 동쪽 어딘가에 심었던가. 하필이면 자기집 담벼락에서 근화향이 난다니 석정은 해괴한 기분이 들었다.


딸은 이제 열다섯이었다. 그리고 석하 그놈은 스물둘이던가. 병판대감을 따라 다니면서 기방에도 들락날락하는 놈이었다. 물론 기녀와 동침을 했다는 얘기는 없지만.


어쨌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석정은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끈적하고 찐득하게 달라붙은 무슨 허연 송진 같은 의혹을 떼어내야 했다. 뭘까. 예사롭게 넘길 얘기는 하나도 없는데 특히 신경쓰이는 얘기가 있었다.


"아까 집춘문이 열렸다고 했던가?"

"예, 영감."


석정은 굳어진 얼굴로 서종태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오도일과 홍만종도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저마다 목혜와 흑혜를 신는 참이었다. 석정은 오도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갑시다."

"뭐? 가자니? 술 더 마시러?"


오도일이 목화를 신다 말고 고개를 들고 두눈을 게슴츠레 떴다. 지금 석정이 자기를 데려갈 곳은 주막 밖에 없었다. 야금이 좀 뇌리에 걸리긴 했지만 자신의 노비 한두명 또 맡기면 될 일이었다. 경수소에서 고생 좀 시킨 후에 죽로주 한두병 노비에게 내려주고 속풀이를 시켜주면 그만이었다.


"이왕 맡긴 노비, 한둘만 더 맡기시지요."

"그래, 역시 술을..."

"아니, 당장 백어의를 좀 만나야겠습니다."

"뭐? 백어의?"


오도일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백어의를 만나겠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술 마시다가 또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생긴 건가, 아직 한창인 나이에 왜 저리 비실비실한 건지.


"또 어디가 아픈..."

"제가 아닙니다."

"뭐?"

"아무래도 중궁전하께...무슨 일이 또 생기려나 봅니다."


석정의 두눈이 음울하게 반짝였다. 괜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무녀가 드나든다고 중궁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것이 자신의 노파심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요사스런 무녀가 중궁을 드나든다면 만에 하나 중궁의 신변에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는 만큼 백어의를 통명전에 항시 대기시켜야만 했다.


"중궁? 중궁은 또 왜?"

"확실치는 않아서요."


석정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밤하늘을 보니 어느새 기울어 보름달과 그믐달 사이로 모슴을 바꾸는 달이 구름 속에 빛을 감추는 듯 했다. 보름만 있으면 칠석인가...아니, 하루가 더 모자란가...어찌 됐든 무당이 드나들 때 이 안에서 가장 신변이 위태로운 이는 태중胎中인 중궁이었다. 이 궁궐에서 무당을 부를 사람도 대비 김씨나 대왕대비 조씨 정도니. 둘 중 누구든 중궁에게 딱히 호의적이진 않았으니.



딸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은근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문중의 돌림자를 넣자니 출가외인이 될 아이였고, 그렇다고 빼자니 제 언니 오라비들과 마찬가지로 귀하디 귀한 광산김문의 혈통이 이어진 아이였다.


마침 술사 하나가 이 아이를 두고 주周 문왕의 모후이자 모든 여성의 본보기인 태임太任의 천명을 타고 났다면서 그 이름자까지 귀띔해 주었다.


- 꼭 넓을홍弘자를 넣어야 합니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장남한테나, 백번 양보해서 장녀까지나 붙여주는 글자였다. 장남도, 장녀도 아닌 아이한테 넣어줄 수는 없었다. 자칫 형제간의 부덕不德과 불화不和를 초래하고, 맏이의 앞길을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술사는 한사코 주장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보름달이 차기 힘들 것이라고.


왜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났을까. 김만기는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채 마당을 서성이다 밤하늘을 보았다.


달은 이미 차고 기울어 그믐달의 형태를 갖추는 참이었다. 다시 보름달이 되려면 스무날도 더 기다려야 했다. 괜히 켕긴 탓인지 꼭 저렇게 보름달이 기울기 시작하면 딸의 신상에 해로운 일이 일어났다. 넓을홍弘자를 넣어주지 못하는 그 대신에 붉을홍紅자를 넣어주었건만, 딸아이의 불운을 막아내기엔 그믐달처럼 한뼘이 모자란 걸까.


이미 이지러진 반달이 통명전 뒤편의 작은 우물 하나를 어슴푸레 비추었다. 아이 하나가 들어가서 두팔을 벌려도 우물 내벽에 손끝이 닿을 것만 같이 좁은 우물이었다. 우물 둘레로 쌓은 푸르른 돌 하나가 묘한 냉기를 머금고 달빛에 반짝였다. 연옥빛 당의를 입은 대비 김씨는 검푸른 우물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 우물은 원래 내것이었거늘.


처음엔 그저 통명전 뒤켠에서 솟은 손바닥 만한 옹달샘이었다. 자신이 내관에게 일러 이 샘을 넓혀 어린아이 두팔 너비의 우물로 만들었다. 그러니 이 우물은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중궁에게 빼앗겼다. 아들도 빼앗기고, 통명전도 빼앗기고, 우물도 빼앗겼다. 그 생각만으로도 대비 김씨의 눈시울이 짙어졌다. 눈밑으로 꾸물대는 엄상궁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이냐?"


대비 김씨가 나직이 물었다. 엄상궁은 우물 외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우물 외벽 바깥으로 끌어올린 두레박과 씨름 중이었다. 발치에 중궁의 나전칠기 목함을 내려놓은 채로 두레박을 묶은 동아줄의 매듭을 푸느라 낑낑대던 엄상궁은 화들짝 놀라서 상전의 눈치를 보았다.


"침침해서 잘..."


짜증으로 대비 김씨의 아랫입술이 실룩였다. 그녀는 서온돌 북쪽 장지문을 쳐다보았다. 대비김씨의 수행상궁과 나인들이 중궁전 지밀상궁들을 끌어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참이었다. 대비 김씨는 자신의 궁인들에게 신경질적인 손짓과 눈짓을 보냈다. 서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그중 젊은 상궁 하나가 냉큼 달려왔다.


"네가 하거라."

"예? 아 예, 마마."


의아히 반문하다가, 상궁은 운두 아래의 엄상궁을 발견하고 어찌 된 상황인 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엄상궁 앞으로 다가들어 재바른 손길로 두레박 매듭을 풀어냈다. 비로소 짜증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비 김씨는 엄상궁 발치의 목함을 가리켰다.


"그 줄에 저 함을 묶거라."

"예, 마마."


젊은 상궁은 얼른 두레박줄에 목함도 마저 묶었다. 나전칠기라서 표면이 조금 미끌미끌하긴 해도 제법 울퉁불퉁한 탓에 오히려 동아줄로 동여매기가 쉬웠다. 순식간에 목함을 두레박끈에 묶어버리고서, 젊은 상궁은 주도면밀하게도 줄을 흔들어서 궤가 확실히 묶였는 지, 쉽사리 풀리진 않는 지도 확인했다. 튼튼히 매인 줄을 보고서 대비 김씨는 비로소 흡족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태자방은?"

"저기 옵니다."


붉디 붉은 비단에 금사로 가슴과 등에 만卍자를 수놓은 법복을 입은 태자방이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감히 붉은 비단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것만으로도 왕의 눈에 띄면 참형 감이었다. 하지만 대비 김씨의 묵인이 있어서 가능했다. 대비 김씨는 눈앞으로 걸어오는 태자방을 보며 흡족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서온돌 북쪽 장지문을 흘겨보며 생각했다.


이제, 저 문이 열리는 일만 남았다.


이윽고 통명전 북쪽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어슴푸레 달빛만 비추는 툇마루엔 늙은 상궁들이 등허리를 문짝에 붙이고 기대어 서서 꾸벅꾸벅 조는 참이었다. 흰 버선발이 소리 없이 툇마루를 밟고서야 그들은 흘낏 문간을 돌아보았다.


빗치개와 빗까지 빼앗긴 탓에 가르마가 조금 흐트러지긴 했어도, 맑고 밝은 눈동자로 어둠 속을 직시하며 중궁이 걸어나왔다.


"..."


상궁들은 중궁을 보고도 그저 묵례로 고개만 조아리며 앞길을 터주었다. 이들은 어차피 중궁전 소속이 아니었다.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대비전의 상궁들로 바뀐 터였다. 한낮이었으면 왕은 서온돌을 지키는 지밀나인이나 상궁들이 바뀐 사실을 눈치채었겠지만, 어둠 속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동온돌에 틀어박혀 온갖 문건을 들여다보는 터라 더더욱 서온돌 뒤쪽으론 눈길을 돌릴 겨를도 없었다.


진홍은 사뿐사뿐 그들 곁을 지나치다 걸음을 멈추었다.


"왜...가시지 않구서?"


진홍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잠시 들숨을 멈추고서 문턱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어미는 참으로 모순이 많은 사람이었다. 좀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임신 석달째엔 결코 문턱을 넘어서는 아니된다면서 불호령을 내린 사람이었다. 물론 그 불과 반각 전에 서온돌 북쪽 장지문으로 따라나오라고 넌지시 호령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신의 아들 앞에서는 태중胎中의 며느리한테 문턱도 넘지 말라 타이르고서는, 아들 뒤에서는 이렇게 한밤중에 후미의 문턱을 넘게 하여 불러내는 그 이중성...어쩐지 께름칙했다. 한발한발이 물속을 걷는 것처럼 발꿈치를 서로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대비마마께오서 기다리시옵니다."


북쪽 장지문에 시립한 대비전 지밀상궁을 보는 진홍의 눈빛은 관찰하듯 섬세했다. 흑옥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들의 얼굴을 그대로 담아두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켕긴 얼굴로 상궁들이 진홍에게 묻자, 그녀는 말없이 복부를 두손으로 감싸안았다. 그리곤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상궁들은 슬쩍 어깨를 움츠리며 통명전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늦었습니다."


먼저 우물가로 와서 기다리던 대비 김씨가 웬 법복 차림의 무녀를 데리고 중궁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진홍은 여전히 두손을 복부에서 떼지 않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시어미가 기어이 무녀까지 데리고 우물가로 왔다. 그 사실에 진홍은 어쩐지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내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미리 언질을 두었거늘...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대비 김씨의 목소리는 겨울날 따뜻한 찻잔에 끼는 성에처럼 차디찼다. 진홍은 두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예상했던 것 보다도 이곳 우물가의 분위기는 참으로 스산했다. 시어미가 무녀까지 불러놓고 기다릴 줄은 몰랐다.


"송구하옵게도...소첩이 너무 늦어 감히 무당이 법복을 입을 시간까지 드렸나 보옵니다."

"뭐라?"

"조선의 하늘이신 전하께오선 그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서치 않으시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다시는 이런 참람한 일이 없도록 조관하여 주시옵소서."

"..."


이런 맹랑한 것을 보았나. 진홍을 보는 대비 김씨의 눈동자가 모난 돌처럼 뾰족하게 번뜩였다. 태생부터 왕가의 사람도 아닌 것이 지아비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니 기고만장하여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도 괘씸하여 치가 떨렸다.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어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래요...중궁이 원자만 진즉 낳았어도 이 시어미가 무당을 불러올 일은 없었겠지요, 아마?"

"..."

"복중태아를 원자로 바꾸려면 법복을 입어야 하더이다. 하여 내가 내렸으니 이 시어미 체면 좀 살려주시지요. 모든 게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니."

"..."


진홍은 창백한 낯빛으로 이를 앙다물었다. 오뉴월인데 오한이 일었다. 시어미가 직접 무당에게 법복까지 하사하셨다니, 더는 무당을 문책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태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빌미 삼아, 시어미는 지금 자신에게 주술을 부리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소리라도 질러서 지아비를 불러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어미에게 맞서서 도로 서온돌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 아무도 모르게 북쪽 장지문으로 나오라는 시어미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후회는 아무리 해도 늦었다.


"소첩이 어찌하면 되옵니까?"

"거기 우물을 한번 들여다 보시면 됩니다. 우물에 지아비의 얼굴이 비치면 아들을 낳는다지요?"

"우물에 제 얼굴을 비추면 제 얼굴이 비칠 뿐, 어찌 전하의 용안이 비치겠나이까."


진홍은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런 차분함이 오히려 대비 김씨의 분노를 한층 돋웠다.


"또, 또...! 왜 매번 중궁은 이 시어미의 말에 토를 답니까? 미망인이라 그리도 우습나 봅니다?"

"송구하오나...어디까지나 어마마마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중태아를 보호하려는 것이옵니다."

"중궁이 무슨 힘이 있어 복중태아를 지키겠나이까? 그간 세차례나 용종을 잃었지 않습니까?"

"..."


아픈 곳을 서슴없이 찔러대는 시어미의 신랄함에 진홍은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당의 아래로 조신하게 모은 두 손을 복부에서 떼지도 않았다. 정말로 세차례나 용종을 잃었다. 세번 다 열달을 뱃속에서 지키지도 못했다. 조산, 소산, 난산 끝에 아이의 운명은 늘 초승달처럼 가늘기만 했다. 이번 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토록 이슥한 어둠 속에서도 진홍은 보았다. 마치 자신의 뱃속을 난도질하는 듯한 시어미의 눈길을.


"그게 다 허약한 딸이라서 그런 겁니다. 아들이라면 죽지 않았을 터...이미 죽은 두 아이처럼 비실한 솔가지라면 금세 부러지지만, 튼실한 고추라면 부러지지 않는다지요. 솔가지를 고추로 바꾸는 길입니다."

"..."


솔가지를 고추로...시어미의 논리는 중궁이 잉태했던 용종들은 하나같이 부실한 여아라서 쉽게 목숨이 끊어졌으니 아들로 바꾸면 죽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뱃속의 공주를 원자로 바꾸겠다는 시어미의 집요한 집념이 엿보였다. 이번이 네번째 용종인 만큼 갑자기 마른 장작에 불붙듯이 시어미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진홍은 뱃속이 꽁꽁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로 한발두발 물러났다.


"어딜..."


그런 진홍을 보고 대비 김씨는 오히려 한발두발 다가섰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허리 뒤를 더듬으며 물러서는 진홍의 모습에, 그녀는 두손을 뻗었다. 아들을 뺏겼다고 믿는 탓인지, 이제는 며늘아이가 손에 쥐는 한줌 허공조차도 아까웠다. 저 손어름에 아무 것도 닿지 말아야, 저 손아귀에 아무 것도 쥐지 말아야 했다. 여긴 동온돌에서도 가까운 탓에, 귀 밝은 아들이 중궁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면 곤란했다.


"조용...조용히 해야지요?"

"..."

"쉬운 일이에요. 주상이 중궁의 수라상에 도끼자루를 숨겨놓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지요. 그냥 저 우물에 중궁의 얼굴만 비추면 됩니다. 그 우물에 주상의 얼굴이 비치면 떡두꺼비 같은 원자가 태어날 것이요, 중궁의 얼굴이 비쳐도 달두꺼비 같은 원자가 태어날 것이니...얼굴만, 얼굴만 비추시지요."

"..."

"종묘사직을 위해 그것도 못하겠단 말입니까?"


새된 음성으로 다그치는 대비 김씨의 두눈에서 맹렬한 독기가 폭발했다. 참으로 쉬은 일이었다. 그냥 서너발짝만 우물 앞으로 가서 고개만 숙이면 되는 일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손주까지 밴 중궁을 떠밀어 물속에 빠뜨릴 리도 없었다. 그런데 이 의심 많은 중궁은 자신을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기는 지 오히려 우물에서 멀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제 아무리 왕의 여인이고, 내명부의 안주인이고, 백성의 어미인 신분이라 해도, 대비 김씨 자신이 물려준 자리였다.


"참으로 시어미도 몰라보는 며느님이십니다."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중궁이 이렇게 나오면 내게도 생각이 있지요."

"무슨..."

"이 목함은 알아보겠지요?"

"..."


대비 김씨는 두레박끈에 묶인 채로 운두 밑에 놓인 목함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줄이 풀린 두레박에 가려져 있어 진홍의 눈엔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젊은 상궁이 목함을 안아들어, 진홍이 똑바로 볼 수 있게 하였다.


"..."


진홍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목함을 몰라봤을 리는 없었다. 대비김씨는 턱짓으로 우물을 가리켰다. 어서 우물 속에 목함을 던지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중궁전 소속도 아닌 탓에 상궁은 지체 없이 우물 속에 목함을 던져넣었다. 끈이 잠시 운두에 걸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마찰하며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어마마마!"


진홍이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 목함 안에 지아비가 붓두껍으로 만들어준 가락지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운두를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대비 김씨로선 뜻밖이었다. 평소 행동거지가 매사에 조심스런 아이라서 장신구에 이토록 집착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의외의 일면을 발견한 데다, 자신이 기싸움에서 압도한 기분이 들었다.


"자, 이제 중궁의 온기가 있는 물건도 제물로 삼았으니 어서 굿을 시작하거라."


대비 김씨는 자신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무녀 태자방을 쳐다보았다. 태자방의 얼굴에 언뜻 비릿한 미소가 스쳐갔다. 중궁과 주상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우물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하였더니 대비 김씨는 중궁의 머리 장식이 한가득 든 목함을 뺏아와서 중궁이 보는 앞에서 우물에 던져넣었으니...참으로 흡족했다.


반면 진홍은 충격으로 머릿속이 얼얼했다. 석달째에 뾰족한 물건은 안된다며 기껏 머리장식을 빼앗아가서 우물 속에 던져버리다니, 그저 기가 막혔다. 역시나 시어미는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대의명분을 중시한다면서 함경과 평안의 여인들에게도 화포를 익히게 해서 전쟁터로 보내자는 송시열처럼 뭔가 상식선에서 벗어난 사람 같았다. 하기야 사람은 가끔씩 궤도 바깥으로 일탈하는 법이니, 지금 시어미의 기괴한 행동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남위양이오여위음...칠성님하, 우물에 귀한 옥안 비추시어, 복중아기씨 공주거든 원자로 바꿔주시옵고...! "


태자방이 나직하게 주문을 외며,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홍은 태자방의 주술을 외면하고 우물 앞으로 다가가서 동아줄을 붙들었다. 저 차디찬 우물 속에 자신의 붓두껍 가락지가 잠겨 있어서는 안되었다. 진홍은 힘껏 동아줄을 그러쥐었다.


어떻게든 목함을 끌어올리려는데, 북두칠성과 함께 이지러진 달이 어슴푸레 우물 속을 비추었다. 밤중이라 우물빛이 검푸른 어둠에 잠겼다. 헌데 거무죽죽한 물빛 속에 흰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목함이 묶인 동아줄을 끌어올릴 수록 그 희디 흰 물체도 매듭에 끼여 윤곽을 드러냈다.


이건...


진홍의 두뺨에서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며 두눈동자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온몸의 핏줄까지 굳어버렸다. 허연 성에 같은 공포가 뇌리를 온통 덮었다. 고막이 윙윙 울리기 시작하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진홍은 두눈에서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백어의가 여긴 어인 일인가? 당직도 아닌데?"


까무룩 잠이 들 뻔했는데 불청객이 동온돌을 찾았다. 숙종은 익선관을 고쳐쓰며 눈앞의 백어의를 쳐다보았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꺼풀에 짜증이 묻어났다. 백광현은 난처한 얼굴로 홍단령자락을 비틀어쥐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이...천신도 잘..."

"무어라?"

"광통교로 행行 최응교가 오 부수찬과 함께 찾아와서...어서 통명전으로 가보라고 하기에..."

"사부가?"


숙종은 두눈을 치떴다. 여전히 고개를 조아린 백광현의 등줄기 뒤로 닫힌 장지문이 눈에 들어왔다. 장지문에 비치는 두광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매미관 그림자가 꾸벅꾸벅 하는 것이, 웬일로 졸음에 겨운 모양이었다.


"두광아!"

"예? 예?"

"들었느냐? 당장 최석정과 오도일을 들라 하라!"

"예? 지금요?"

"내 강목綱目을 읽다 막히는 곳이 있으니 소대召對(경연관을 따로 불러서 강론하는 것)를 하는 것이다, 그리 둘러대거라."


숙종은 두광이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목청에 털끝 만큼의 인정도 둘 수 없었다. 갑자기 최석정이 백광현의 등을 떠밀어서 이곳 통명전으로 보낸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예, 전하."


두광의 그림자가 장지문에서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소대를 핑계로 석정과 오도일을 부르고서 숙종도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동온돌을 나섰다.


"전하?"

"중궁을 봐야겠소."


문턱을 엄지발가락 끝으로 밟는 순간 숙종은 방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꿈자리가 영 사나웠다. 꿈속에서 새빨간 연꽃이 한닢 또 한닢 흩어지고, 연잎도 한이파리 또 한이파리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단잠을 백광현이 방해한 것이 아니라, 악몽을 깨워준 것이었다.


숙종은 성큼성큼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서온돌로 건너갔다. 졸음에 겨운 눈으로 어영부영 장지문을 지키던 지밀나인들이 채 문을 열기도 전에, 숙종은 두손으로 문을 살짝 열어젖혔다.


"중궁?"


중궁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기수를 덮고 깊은 잠에 빠진 참이었다. 숙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중궁이 워낙 평온하게 잠든 모습이라 그다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괜한 조바심에, 노파심에 최석정이 백광현을 보낸 건가 싶었다. 아니면 최석정이 불안해 할 만한 무슨 문제가 있었을 지도 몰랐다. 일단은 최석정을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마음이 급해서 장지문을 닫고 홱 돌아서는 순간 숙종은 대청마루로 따라 나온 광현의 불안한 시선과 마주쳤다.


"잠들었소."

"혹시 모르니..."

"아기처럼 자는데 어찌 깨우라고?"

"손발이 차거나 복부가 딱딱한지 만져는 보심이..."

"되었으니 이만 가보시오."


숙종은 손을 휘휘 젓고 백광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광현이 우물쭈물 꾸물대다 별 수 없이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그리고 그 붉은 옷자락이 드리운 그림자도 말끔하게 통명전 섬돌을 스치고 떠나갔다. 숙종은 자신도 동온돌로 건너가려 문턱을 밟다가, 걸음을 멈췄다. 등뒤에서 장지문이 닫히는데, 갑자기 두팔 자개미에 소름이 끼쳤다.


숙종은 서온돌쪽으로 홱 돌아섰다. 이번엔 지밀나인들이 황급히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한밤의 달빛이 문틈으로 어슴푸레 스며들었다. 숙종은 그 달빛을 따라 방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섰다. 숙종은 혹여 잠을 깨울까 싶어서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걸어서 진홍의 말간 얼굴 앞에 이르렀다.


여전히 진홍은 곤히 잠들어서 속눈썹이나 눈꺼풀조차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도저히 눈길을 뗄 수가 없어서 숙종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서 마냥 들여다 보았다. 한참을 들여다 보면서 손가락끝으로 진홍의 눈꺼풀을 쓰다듬던 숙종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궁?"


방금 전까지 진홍을 깨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끝부터 발끝까지 그대로 굳은 상태였다. 수년동안 자신의 손길로 그녀의 모든 것을 각인해온 터라, 손끝에 닿는 감촉과 손샅으로 비끼는 숨결이 얼음장처럼 느껴져서 숙종은 더럭 겁이 났다.


"중궁?"

"..."

"중궁! 중궁!"

"..."


아무리 불러도 중궁은 대답이 없었다. 숙종은 가만히 진홍의 가슴 위로 얼굴을 갖다대었다. 코끝이며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이며,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숙종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뻗어 진홍의 복부를 만져보았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감촉에 심장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좀더 아래쪽...손끝에 닿는 척척한 촉감은 온몸의 신경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가만히 손목을 들어 이 끈적거리는 액체의 냄새를 확인하니 비릿한 혈향이 코끝에 닿았다.


"배, 배...백어의! 백어의!"

"..."

"여봐라! 가서 어의들을 불러오라! 한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다!"


어명이 떨어졌다. 통명전이 발칵 뒤집히고, 내의원 수의 이동형을 비롯하여 퇴청하여 휴식을 취하던 어의들 일곱명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미 소대라는 명분으로 통명전에 불려온 최석정과 오도일까지 속속들이 도착했다. 어의들이 의식이 없는 중궁을 소생시키는 동안 숙종은 곧바로 통명전 바로 옆인 양화당으로 자리를 옮겨 최석정, 오도일과 대면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시오."


숙종의 물음에 석정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등줄기가 괜히 후끈거렸다간 이내 지끈거렸다. 자세한 설명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저 감感으로 알았다고들 말하지만, 석정은 그리 둘러대기도 겸연쩍었다. 그저 무릎맡에 구색 맞추기로 펼쳐놓은 강목綱目 글귀들이 어지러이 춤을 췄다.


"어서!"

"오늘 집춘문이...열리고, 웬 무녀가 드나들었다기에...혹시나 두분의 안위가 위태로울까 저어되어..."

"집춘문?"


석정이 머뭇머뭇 고하자 숙종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집춘문 석자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름 석자 역시 병조판서인 김석주였다. 저번에도 한번 집춘문을 무단으로 여닫은 전력이 있었다. 엄히 꾸짖었는데도 다시 제멋대로 집춘문을 열었다면, 게다가 그 집춘문으로 무녀가 드나들었다면, 그 배후가 자신의 어미인 대비 김씨라는 의미였다.


"설마..."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도리머리를 하다 말고 멈칫했다. 어미가 자신에게 도끼자루를 건네주고 중궁의 수라상 밑에 넣어두라 종용한 일이 생각났다. 감히 집춘문을 열고 무녀를 궐안에 들일 사람은 보나마나 어미였다. 한동안 막례가 없어서 잊었건만, 막례가 돌아온 건지, 또 다른 누군가를 들인 건지.


"이번에도 그 이사명이란 자가 연관되어 있소?"

"예, 전하. 송구하오나...이사명이 성균관 전적으로 있으면서 집춘문을 통해 김석주와 접촉이 잦았다고 하옵니다."

"이사명..."


숙종은 석정의 보고를 가만히 곱씹었다. 야심이 큰 자를 고작 성균관 전적에 눌러앉혀 놓았더니 이 모양이다 싶었다.


"전하, 영의정 김수항, 우의정 민정중, 병조판서 김석주, 그리고 가주서 윤덕준이 입시를 청하옵니다."


갑자기 장지문 너머로 들려오는 두광의 음성은 숙종 본인은 물론 석정과 도일에게도 뜻밖이었다. 숙종은 놀란 음색 그대로 두광에게 되물었다.


"뭐라? 입시?"

"예, 전하. 전하께오서 옥당의 두 관료들을 불러 강목을 강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마침 빈청에서 퇴청하기 전이라며, 함께 진강하길 청하옵니다."

"..."


숙종은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이도록 인상을 썼다. 인정이 울린 지가 언젠데, 여태 퇴청도 않고 버틸 리가 없었다. 필시 통명전에 심어놓은 끄나풀을 통해 중궁의 위급을 듣고 자신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최석정이 가져온 정보가 뭔가 치명적인 성격의 것이라 똥줄이 타도록 달려왔거나.


"들라 하라."


왕의 윤허가 떨어지고, 곧이어 김수항과 민정중, 김석주가 가주서 윤덕준을 앞세우고 차례로 입시했다. 발뒤꿈치를 슬쩍 들고 조심조심 장지문 문턱을 넘는 모습은 낯설지도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새삼스레 낯선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이들은 정이 가질 않았다.


"소대에 참여를 하겠다?"

"그러하옵니다."


숙종이 하문하기 무섭게 민정중이 냉큼 대답했다. 숙종은 가만히 실눈을 짓고 민정중을 흘겨보았다.


"요즘 다들 한가한 모양이오? 부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들 오고."

"..."


민정중이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을 심산인지, 석정이 고개를 조아리며 냅다 한마디 끼여들었다.


"천신이 듣기로는 우상대감의 질녀가 송시열의 외손자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 하옵니다. 그토록 바쁜데 소대까진 참석하지 않아도 될 듯 하옵니다."


순식간에 양화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민정중은 한순간 표정이 흐트러져서 한눈에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병조판서 김석주는 물론 김수항도 당황해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 석정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방안의 인사들을 쓱 훑어보았다. 이정도로 당황할 줄은 몰랐다. 꼭 작당을 하다가 현장에서 들킨 사람처럼 모두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참이었다. 살피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들 사이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시선들이 차례로 오갔다. 서로를 집어삼킬 듯이 치열한 눈길들이 오가는데도, 숙종은 짐짓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느긋하고 나른하게 운을 떼었다.


"인재가 부족하니 등용할 만한 자가 있으면 서둘러 등용하려 한다. 이사명은 평소에도 온갖 과시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였으니, 그 문재를 차마 이대로 썩힐 수가 없어 특별히 발탁하려 하니, 경들이 유념토록 하라."

"..."


김석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처조카인 이사명의 발탁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균관에 이사명을 남겨둬야만 했다. 이사명은 궐과 성균관을 이어주는 집춘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헌데 하필이면 왕이 갑자기 이사명의 문재가 아깝다면서 등용을 명했다.


"하오나 전하, 이사명은 세상에서 추앙하는 명문의 자손으로, 그 재주와 깜냥이 출중하여 별천別薦(고관대작들이 별도로 인재를 추천하는 일)에 들었으니, 순서에 따라 등용하면 될 일이고, 급할 것도 없사온데 어찌..."

"내 더는 그를 한산한 직책에 방치할 수 없어서요."


왕이 차갑게 말했다. 김석주는 계속해서 반대의견을 피력하려다, 좌우에서 날카롭게 관자놀이를 찔러드는 시선들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김수항과 민정중은 지금 자신이 뒤에서는 왕에게 이사명을 어서 등용해달라 보채고서 앞에서는 시침을 뚝 떼고서 오히려 반대를 하는 시늉을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억울했다. 자신이야말로 이사명이 좀더 음지에 있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이사명은 왕궁과 반궁을 이어주는 집춘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왕이 지금 음지에서 양지로 강제로 이사명을 끌어다 놓는 셈이었다.


급하게 먹는 떡이 체하는 법이었다. 최석정이야 왕이 충분히 곁에서 지켜보고 뜻이 맞으니 아끼는 것이지만, 이사명은 달랐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불안했다. 도대체 왜 왕이 갑자기 이사명의 발탁을 서두르는 건지, 어쩐지 불안하고 불길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꺽정이 때문이렷다?


저놈 밖에 없었다. 저놈이 뭔가 입김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자신이 최석정의 이웃에 심어놓은 비선秘線을 통해 조금 전에 서종태와 홍만종이 은밀하게 다녀간 사실을 전해들었다. 서종태와 홍만종이 먼저 집을 나서기도 전에 최석정이 서둘러 오도일을 잡아끌고 나왔으니 필시 최석정 저놈이 왕을 움직인 게 분명했다. 두눈이 벌개지도록 최석정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장지문 너머에서 귀에 익은 음성들이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글쎄, 금궤당귀산金櫃當歸散이래도요!"

"무슨 소리! 교애사물탕膠艾四物湯일세!

"글쎄 교애사물탕으론 안된대도요!"

"자네가 뭘 안다고? 오히려 침뜸은 지금 중궁전께 위험한 것이니 자넨 빠지게!"

"아 누가 침 놓는댔습니까? 전하께 아뢰어보자구요!"

"자넨 침의 주제에 왜 끼여들어서...!"

"저도 알 건 다 압니다!"


김석주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중에서 가장 의술에 밝은 이는 자신이었다. 단순히 왕의 외척이라서 약방의 제조提調, 도제조都提調를 맡아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탕약의 이름만 들어도 그 병세와 용법을 가늠할 줄은 알았다. 못 들은 척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왕의 의미심장한 눈길이 자신의 코를 꿰어버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수의 이동형과 어의 백광현인데...저들이 언쟁하는 이유를 약방 제조께선 아시겠소?"

"그것이..."


석주는 거무스름한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어차피 저들이 입시하면 논쟁의 이유가 밝혀질 터였다. 하지만 입시하기 전에 밝혀져선 안되었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자신도 살고 사촌누이도 살고...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복통이 없는 태루胎漏와 복통이 있는 태동胎動에 따라서 처방을 하는 것으로...지금 중궁전하께서 의식이 없으시어 복통의 유무를 알 수 없다 보니..."

"그게 다요? 복통의 유무?"


숙종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석주를 쏘아보았다. 석주가 움찔해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왕의 눈길을 피하니 석정의 손길이 옷자락에 닿았다.


"뭐, 뭐야!"

"머리카락을 흘리시어..."


석정은 시침을 뚝 떼고 석주의 허벅지에 묻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집어들어 입김으로 훅 불어넘겼다. 석주의 눈시울이 실룩거렸지만, 석정은 눈길도 주지 않고 이내 자세를 단정하게 바로하고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천신의 좁은 소견으론 추산墜産(3개월 이전의 유산), 반산半産(3개월 이후의 유산)의 차이를 두고 의견이 다른 것 같사오니...불러다 구문하시지요."

"추산과 반산..."


숙종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보통은 임신 석달째가 고비였다. 웬만해선 임신 석달만 지나면 산모들은 무사히 아이를 낳는 만큼, 석달만 지나면 한시름 놓는 법이었다. 그 석달을 기점으로 약재의 강약이 정해졌다. 백광현과 이동형은 지금 중궁이 추산의 위기인지, 반산의 위기인지를 두고 언쟁을 하는 참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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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8.14 17:44
    No. 1

    애 배기도 힘들지만
    애를 뱃속에서 잘 자라도록 놔두지를 않누만...
    이거 진홍이의 마지막 아기일텐데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8.14 18:02
    No. 2

    침울한 한 화군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8.14 19:34
    No. 3

    200회 축하드립니다^^
    항상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4.08.16 17:42
    No. 4

    정말 축하합니다.
    200회라니...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만 해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꺽정이가 이번엔 제역할을 해도 역부족잁것 같은데 불쌍한 진홍이를 어찌할꼬...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5.10.15 20:28
    No. 5

    저래놓고 대비는 자기 잘못이라 생각 안 할 것 같은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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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해의 그림자 219 +1 14.12.05 1,625 21 43쪽
219 해의 그림자 218 +3 14.11.30 1,350 29 41쪽
218 해의 그림자 217 +1 14.11.25 1,619 23 43쪽
217 해의 그림자 216 +2 14.11.20 1,573 28 43쪽
216 해의 그림자 215 +3 14.11.14 1,714 30 43쪽
215 해의 그림자 214 +3 14.11.10 2,370 30 35쪽
214 해의 그림자 213 +3 14.11.06 1,318 27 42쪽
213 해의 그림자 212 +3 14.11.02 1,612 29 43쪽
212 해의 그림자 211 +3 14.10.26 1,827 33 44쪽
211 해의 그림자 210 +3 14.10.20 1,629 26 42쪽
210 해의 그림자 209 +4 14.10.13 1,954 30 44쪽
209 해의 그림자 208 +3 14.10.07 1,492 28 43쪽
208 해의 그림자 207 +3 14.10.02 1,313 22 43쪽
207 해의 그림자 206 +4 14.09.25 2,690 34 43쪽
206 해의 그림자 205 +4 14.09.19 1,624 26 43쪽
205 해의 그림자 204 +3 14.09.12 1,709 26 40쪽
204 해의 그림자 203 +6 14.09.05 1,496 30 39쪽
203 해의 그림자 202 +7 14.08.30 1,732 31 41쪽
202 해의 그림자 201 +4 14.08.21 1,843 42 41쪽
» 해의 그림자 200 +5 14.08.14 1,382 30 42쪽
200 해의 그림자 199 +4 14.08.07 2,036 34 42쪽
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3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5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45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17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1 34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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