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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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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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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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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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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다 똑같은 무림인(3).

DUMMY

사실 서면산에 사람이 오르는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에도 산행객은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먹을 걸 원하고, 산에는 동식물들이 있었으니까.


산 아래서 먹을 걸 구하려면 직접 농사를 짓거나 그에 상응하는 노동 혹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건 정말 쉽지 않았다.


일단 일자리가 없고,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급여를 받을 수가 없고, 설령 일한 대가를 알맞게 받는다 쳐도 그 재산을 지킬 수가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산을 찾았다.


개중에서 류소평이 관리하는 영역까지 들어온 산행객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 거지 둘이 왔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식솔 또한 별 것 아니라는 듯 보고했다.


하지만 류소평은 께름칙함은 느꼈다.


‘하필 지금 말인가?’


지하의 사내에게서 느껴진 묘한 낌새.


하필이면 오늘 이곳에 들어온 거지 둘.


“확실히 돌려보낸 게 맞느냐?”

“예. 순순히 하산했습니다.”

“······흠.”


‘그저 우연인가.’


하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다. 오랜만에 사내를 만나고 와서 예민해진 류소평의 과민반응이었던 것 같았다.


식솔들이 직접 하산을 확인했다고도 하고······.


“그럼 됐다. 돌아가자.”

“예.”


목함 지게를 진 류소평은 그 길로 서면산을 내려갔다.


이제 이 목함을 사천에 있는 류씨세가 본가로 보내고 나면 그의 할 일은 끝이었다. 이후로는 한가로이 무공 수련이나 진법 공부를 하면서 지낼 수 있으리라.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말이다.


산길을 내려가던 류소평은 고개를 돌려 높게 솟은 암벽에 눈길을 줬다. 다시 한 번 굳게 닫힌 것을 확인하고 시선을 거뒀다.


* * *


“······갔나?”

“간 것 같다.”


류소평이 떠난 암벽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무 뒤에서 거지새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물론 홍광이었다.


홍광은 곱게 내려가란다고 내려갈 위인이 아니었다.


류씨세가 식솔이라고 자처하는 자가 돌아가라고 경고하기에 괜한 마찰을 빛기 싫어서 하산하는 척 하긴 했지만, 오히려 더 삼두사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몰래 따라붙은 것이다.


그만큼 지금 홍광에게 있어 영물의 내단을 얻는 건 꽤 중요한 과제였다.


잠입 자체는 식은 죽 먹기였다.


충자는 명색이 잠행조장이고, 홍광은 칠 년 동안 사부에게서 생존에 관한 기술은 모조리 배워놓았으니. 기막을 펼쳐서 존재감을 지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뭔가 숨기는 게 있을 줄은 알았는데 생각 이상이네. 저 만한 암벽에 기관까지 설치했을 정도면, 저기가 세가의 비동이라도 되는 건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어떡하겠느냐?”

“뭘 어떻게 해.”


홍광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돌아가자.”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저게 정말로 가문의 비동이라면 우리는 발각되는 순간 류씨세가와 척을 질 수도······.”


충자가 말을 하다가 말고 멈칫했다.


“그, 그냥 돌아가자고?”

“응.”

“아니, 왜?”


충자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단전에 마기가 침투해서 그걸 정화하기 위해 내단이 필요한 것 아니었던가?


그럼 한 시가 급할 텐데?


“위험하니까.”


홍광은 딱 잘라 말했다.


“저놈들이 뭘 하고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 규모의 일이면 세가의 최고기밀 사안이겠지. 걸리면 우린 류씨세가가 멸문할 때까지 쫓겨야 할 걸?”

“그, 그렇긴 하지. 헌데 네 마기는?”

“아직 여유 있어.”

“······.”


충자는 방사혁의 마기를 전부 흡수했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방사혁이 아니라 철구광자의 마기를 흡수한 거였나······.


“아무튼 가자. 당장 내단이 없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영물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들 필요는 없지.”

“그, 그런가?”


충자는 떨떠름했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고집을 부리기도 뭐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돌아가나 싶었던 순간.


-기다려라.


귓속으로 파고드는 전음에 충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흡!”


충자는 귀신인 줄 알고 숨이 멎을 뻔했다.


그만큼 목소리에 실린 기기묘묘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척 들어도 범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중후함을 담았으면서도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낮지 않은 음성이었다.


‘대체 누가?’


충자가 굳어 있는 동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음이 들려온 장소를 본 것은 홍광이었다.


암벽.


목소리의 근원지는 류소평이 나왔던 그 암벽 아래였다.


‘말도 안 돼!’


홍광은 경악했다.


그들이 지금 암벽과 떨어져 있는 거리는 성인 남자가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소통할 수 없을 거리였다.

전음으로는 결코 이어질 수 없다.


그러나 홍광은 수긍이 빠른 사내였다.


좀 더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판단을 내리지 못한 자신을 마음 속으로 욕할지언정 겉으로 하는 대처는 침착했다.


말할 수 있다면 들을 수도 있을 터.

홍광이 나지막이 말해보았다.


“누구세요?”

-연자에게 영기를 내어줄 수 있는 자다.

“!!”


이건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대는 이미 이쪽의 목적을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홍광이 암벽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듣고 계셨던 거에요?”

-산 아래서부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왜 못하지? 이 정도는 인간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


홍광은 잠시 멈칫했다.


“······혹시 인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 나는 당령산(唐靈山) 산주(山主) 뱀이다. 너희들의 말로 하자면 오래 묵은 영물이 되겠군.


역시 인외(人外)였다.


인외지물에 대해서는 사부에게 몇 번인가 들은 적 있었다.


영물이 오래 살면서 지성을 갖추게 된 경우.

그보다 더 희귀하게는 술법에 의해 자아(自我)를 부여 받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전자인 듯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인외지물을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나이였다.


인간과는 달리 수련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묵었느냐가 힘과 지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홍광이 넌지시 물었다.


“산주 뱀 님은 구체적으로 몇 살쯤 사셨나요?”

-정확히는 모르겠군. 하지만 꽤 전에 이 땅이 당(唐)이라는 국호를 썼던 것은 기억한다.


당?


‘내가 아는 그 당나라?’


홍광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최소 오백 년 넘게 살아온 희대의 영물이었던 것이다. 나름 백 년 넘게 산 사부도 이 영물의 앞에서는 어르신 하며 큰절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 이 먼 거리에서 전음을 쏘았는지 바로 이해됐다.


영물이 오백 년을 살았다면 신통력 대여섯 개쯤 갖추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연자들에게 부탁이 있다.

“······.”


홍광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차라리 유폐된 무림 고수라면 몰라도, 오백 년쯤 산 영물이 대체 무슨 부탁을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부 왈, 백 년 묵은 영물은 절정고수를 공 굴리듯 한다는데 오백 년 묵은 뱀이 굳이 부탁까지 할 일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산주 뱀의 청은 간단 명료했다.


-내 새끼를 이곳으로 데려와다오.

“새끼가 어디 있는데요?”

-사천에 있는 류씨세가에 있다.

“좀 더 정확히는요? 구둘장 아래라든가, 처마 위라든가.”

-오해가 있었군. 영물은 번식을 하지 않는다. 새끼라는 건 뱀이 아니라 내가 아끼는 인간 소녀지.

“인간이라고요?”


영리한 홍광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류씨세가에 인질이 잡혀서 거기 계신다는 거에요?”

-연자가 이해력이 좋군.

“아니, 왜요?”


상식적으로 어떤 인간이든 산주 뱀 정도 되는 영물과 원한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산주 뱀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같은 인간이라면서 그 부분은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원래 무림인들이란 다 똑같지 않은가.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고, 가두려 하고, 통제하려 하고, 종래에는 이용하려 하지. 이들도 내게서 사독(蛇毒)을 받아간다.

“······모든 무림인이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가?

“예를 들면 저라던가.”

-······.

“······.”

-걱정 마라. 나는 인간의 그런 본성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또한 종의 생래인 것을 어쩌겠는가. 다만 나는 내 새끼를 돌려받고 싶을 뿐이다.

“아 그래요? 휴.”


홍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 혐오를 가진 영물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 보였다.


-그럼 대략 알아들은 것 같으니 새끼를 데려오겠나? 그리하면 연자가 원하는 만큼 영기를 내어주도록 하겠다.


그러자 어떻게 원한을 만들지 않고 빠져나가야 하나 궁리하던 홍광의 얼굴이 반색했다.


이러면 할만했던 것이다.


“정말요? 원하는 만큼 영기를?”

-그렇······.


망설임 없이 대답하려던 산주 뱀이 말끝을 흐렸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어주겠다. 아무래도 그 무식하게 비대한 몸뚱아리를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아······,”


홍광이 살짝 탄식했다.


무작정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아직은 단전에 여유가 좀 많았기 때문에 아쉬웠다.


-그리 실망하지 않아도 내 영기가 적지는 않다.

“실망한 적 없는데요?”

-그리 둘러대지 않아도 내 심기는 불편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기분이 조금 불쾌하다고 해도 연자들을 해칠 만큼 내가 포악하지도 않지. 옛날이었으면 몰라도.

“옛날이었으면 어땠길래요?”

-흠, 애당초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만, 연자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 순간 휘감아 한 입에 삼켰을 테지. 감히 영물의 내단을 탐하여 산을 오른 인간이니.

“······.”

-두려움이 느껴지는군. 어째서지? 옛 이야기라고 말했거늘. 연자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산주 뱀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게 더 무서웠다.


홍광은 늘어지려는 긴장의 끈을 확 당기고 감각을 더욱 벼렸다.


“산주 뱀 님. 부탁을 들어드리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몇 개 있어요.”

-뭐지?

“우선 산주 뱀 님이 저흴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과······.”

-산신께 맹세코 잡아먹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다치게 하지도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맹세하지.

“털 끝 하나도, 정말 피부에 가벼운 생채기 하나라도 내지 않겠다는 맹세가······.”

-산신께 맹세코 연자들에게 접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 직접 닿는 걸 포함해서 독이나 술법 같은 것도 쓰지 않을 것이고, 위해를 끼치는 어떤 행동도 일절 안 하겠다. 이제 됐나?

“네. 헤헤.”

-겁이 많은 연자로군.


그제야 홍광은 생글생글 웃었다.


옆에서 충자가 오백 년 묵은 영물 상대로 베짱 장사를 하는 홍광을 미친놈 보듯 봤다.


-그럼 들어와라. 내 딸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을 내어주겠다.


그러자 저만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흡사 우렛소리를 내면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홍광이 뺨을 긁적였다.


“어······ 그냥 이대로 말씀하시면 안 되나요? 뭐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밀폐된 공간은 좀.”


충자는 그렇게까지 해놓고 또 발을 빼려는 홍광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헤헤, 뱀 님을 못 믿는 건 아니고요.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보니까. 아시죠?”

“······.”


이쯤 되면 화가 안 나던 사람도 짜증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충자는 홍광이 돌다리를 두들기다가 부숴먹지는 않는 건지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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