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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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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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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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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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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밥알 한 개도 안 남기는 주의(3).

DUMMY

철구광자가 열성적으로 설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충자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급작스럽게 ‘홍 소협이 방사혁을 죽였습니다’했으니 일단 까무러치긴 했으나, 설명을 들어보면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충자의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말이······ 안 되지 않나?’


충자는 머릿속으로 철구광자의 말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홍광이 무당파 제자를 중독으로부터 구했고, 그걸 명분으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전쟁에 참여해서 좌우사를 단신으로 격파했다. 이후 쉬지 않고 방사혁을 상대했고, 방사혁이 마공을 꺼낼 정도로 몰아붙였으며, 그 다음 마기를 미친 듯이 끌어올린 방사혁을 일격에 제압했다······ 이 말인가?’


물론 거기에는 살아남고자 발악한 철구광자의 아부가 섞이긴 했으나, 내용에 차이는 없었다.


충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홍광을 응시했다.


홍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맞는데?”


이쯤 되면 충자는 어이가 없었다.


방사혁이 누구던가?


호북의 북서부를 오로지 자신의 힘 하나로 재패하고 지배하던 사내다. 호북에 사갈파보다 강대한 세력은 있어도 방사혁보다 강한 사내는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질 정도였다.


충자가 이렇게 잠입한 것도, 만벽서고의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 일순위긴 했지만 이순위는 방사혁의 강함과 성향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충자는 패천회가 마교를 제외한 현 강호의 제일세력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런 패천회도 방사혁을 아예 무시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방사혁을, 심지어 마공까지 두른 그를 혼자서 이겼다고?’


아무리 충자가 홍광을 열렬히 지지한다 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차라리 방사혁을 견제하던 여타 세력이 끼어들었다거나, 혹은 방사혁이 마공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멸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라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었다.


하다못해 길 가던 은거기인이 실은 방사혁과 원한이 있어서 사투를 벌였다는 이야기쯤만 돼도 아주 불가능한 말은 아니었다.


방사혁은 그만큼 원한을 뿌리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단신으로, 그것도 열아홉의 무인이방사혁을 죽였다?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강해졌을 줄은 알았지만······.’


홍광은 용두방주의 가르침을 받았다. 천하제일 후지기수 급이 되어 돌아왔어도 충자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사혁을 이길 정도의 초절정의 고수가 되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쯤 되면 마교침공 이전의 대문파라 해도 한 세대에 서넛 이상은 품기 어려운 고수였던 것이다.


개방으로 따지자면 칠결개 장로들 중에서도 최고수에 해당하는 실력을 이미 갖췄다는 건데, 무공을 익힌 지 십 년이 되지 않은 청년이 가지기에는 말도 안 되는 무력이었다.


“못 믿는구만.”


홍광은 자기도 모르게 사부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다.


충가가 뜨끔했다.


“그, 그기 으느르.”

“아니긴 뭐가 아니냐. 마음대로 해라. 어쨌든 나는 볼 일 보련다.”


홍광은 손을 휘휘 젓고 관심을 꺼버렸다.


억울하게 갇힌 미인이라도 구해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뇌옥에는 죄다 인상 더러운 사내들 뿐이었다.


충자를 시원하게 패줬으니 이제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챙길 것 챙기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꺼내달라고 아우성이던 다른 죄수들도 충자가 처맞는 걸 본 이후로는 조용해진 뒤였고.


홍광은 혹시 몰라서 그래도 명색이 정보를 캐내는 잠행조장이라던 충자에게 물었다.


“혹시 이중에 억울하게 갇힌 놈 있나?”


-한 명도 없음. 전부 억울해도 억울하면 안 되는 놈들.


홍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사갈파의 뇌옥이고, 여기 갇혔다는 건 결국 사파와 관련되었다는 것. 충자처럼 잠입을 시도한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부 쓰레기들인 것이 당연했다.


“그럼 간다.”


홍광은 마련 없이 몸을 돌렸다.


만벽서고에 보고가 올라가고, 쫓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빠르게 도망쳐서 지원군을 구하든가, 아니면 영물이라도 발견해서 내단을 취해야 했다.


“즈, 즘끈믄!”

“왜?”


충자는 서둘러 집필물을 휘놀렸다.


-만벽서고에 쫓기고 있는 거라면 패천회에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만벽서고로부터 널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은 현 강호에 그다지 없다. 너 정도의 전력이면 회주께서도 환영할 텐데.


글을 다 읽은 홍광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더러 지금 마교랑 한 판 붙어보겠다고 벼르는 중인 집단에 들어가라고? 너는 이리 쫓아보겠다고 호굴로 들어가냐?”

“······.”

“어디서 약을 팔아. 쯧.”


충자는 억울했지만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만벽서고도 위험했지만 패천회도 그에 못지 않게 위험했던 것이다.


하지만 쉽게 보내줄 수는 없었다.


충자는 뭐 하나라도 자신이 홍광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혹시 뭐라도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말해줘라. 내가 이래뵈도 십 년 가까이 사생을 오가면서 정보원을 했다.


“음.”


이건 좀 솔깃한 제안이 맞았다.


“혹시 아는 영물 있나? 지금 내단이 좀 필요한 상황인데. 크기는 크면 클수록 좋아.”


이번에도 충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영단법을 알아?


“아니, 그냥 먹으려고. 근데 괜찮아. 내 배가 좀 튼튼해서. 사실 방사혁이 가지고 있던 마기도 전부 흡수하고 왔어.”

“······.”


충자는 이제 놀라는 일도 지쳤다.


* * *


몇 시진이 지난 뒤, 일행은 사갈파 본단에서 빠져나왔다.


홍광의 기대와는 달리 사갈파에 딱히 챙길 물건은 없었다.


철구광자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홍광과 충자는 금은보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마도천하에서 누가 호화를 부리겠다고 금붙이나 보석을 찾겠는가?


강호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거기까지 가져갈 일이 우선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소금이나 곡식, 찻잎, 주류가 더 가치 있었다.


충자는 소금과 각종 향신료, 건량을 챙겼고 홍광은 호리병에 담긴 술과 찻잎이 담긴 대죽을 허리충에 찼다.


“가볼까?”


운 좋게도 충자는 제법 쓸만한 영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만년화리나 만년금구처럼 대단한 영물은 아니었지만 삼두사(參頭蛇) 정도면 제법 내단에 축적된 영기가 크리라.


이것도 홍광의 기준이었기에 제법 큰 정도지, 사실 보통 사람이 그 내단을 먹는다고 가정했다면 영단법을 알아도 내공이 모조리 흩어질 위험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


“서면산(西面山)이랬나?”


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면산은 사천으로 가는 길목인 중경에 있었다. 목적지는 사천으로 유지하되, 중간에 샛길에 들리는 셈 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여유는 없다.


만벽서고가 얼마나 빨리 접근해올지 모르기도 하고, 영물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충자가 경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었다.


간자를 붙잡았는데 단전을 폐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사지근맥을 자르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마 뇌옥에 갇혔을 때 무인으로서 생명을 잃었으리라.


“한참 걸어야겠······.”


홍광은 순간 납득하려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근데 너 방금 처맞을 때 내공 쓰지 않았어?”

“······은 씃는드?”

“그걸로 더 안 팰 테니까 그냥 말해라.”

“응.”


충자는 바로 말했다.


그 뒤에 나온 말을 요약하자면, 파천회에서 간자로 키워지면서 터득한 기술이라고 했다.


단전이 아닌 온 몸의 경락에 내력을 쌓는 기술었는데, 단전을 폐해도 무공을 쓸 수 있고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기척을 완전히 숨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대가는 컸다.


단전에 축기하는 내력에 비해 쌓을 수 있는 총량이 일 할 정도로 줄어드는 것이다. 게다가 내력을 급하게 끌어 쓸 때마다 온 몸이 격통에 휩싸인다.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효율이고 성능이고 하단전 수련법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방법이었다. 하긴 그렇게 해서 강해질 수 있다면 모두가 같은 방법을 썼을 거였다.


충자는 잠행에 충실하기 위해 무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악착같이 살았다더니 정말이었다.


홍광은 잠시 간자의 삶을 상상해봤다.


들키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터질 듯한 긴장감과, 그 속에서도 정보를 캐내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날.


“······.”


사갈파를 다 뒤졌지만 끝내 잠행에서 실수했다던 조원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까.”


출발하기 전 홍광이 뒤돌아봤다.

아직 끝맺지 못한 일이 남아 있었다.


“이 아저씨를 어떡하지?”

“살려주십시오.”


철구광자가 철푸덕 쓰러지듯이 무릎을 꿇고 준비한 말을 쏟아냈다.


“깊이 반성했습니다 대협. 다시는 나쁜 짓하고 돌아다니지 않겠습니다. 저도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봐주시면 앞으로는 소작농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흠.”


홍광이 잠깐 고민하다가 충자에게 물었다.


“진짜야?”


-처자식이 있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 가정에 출실한 자는 아니었지. 내 추측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놈이 제 처자식을 못살게 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는데요?”

“아닙니다! 이번 일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돌아가면 아내와 자식에게 평생 은혜 갚으며 살겠습니다.”


철구광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충자를 노려봤다.


홍광은 잠시 침음했다.


“충자야, 좀 더 구체적으로 써봐.”


-이놈의 아내에게는 항상 멍자국이 있었고, 자식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말랐다. 반면에 본인은 언제나 취해 있었지. 술을 달고 살았다. 내가 정보를 캐려고 접근해보니 처자식에 대해서 막말을 했던 적이······.


그 뒤로도 한참이나 써내려갔다.


철구광자는 ‘네가 뭘 아냐’며 분개하다가 그 다음에는 홍광에게 모함이라며 해명했다. 하지만 자꾸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자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일어나면서 충자를 향해 손날을 날렸다.


‘내가 죽더라도 네놈 모가지는 가져가겠다!’는 생각이 엿보이는 한 수였다.


“저런.”


홍광은 철구광자의 공격을 가볍게 퉁겨낸 뒤 검지와 중지를 곧추세워 철구광자의 아랫배를 푹 찔렀다.


철구광자는 작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뒤늦게 밀려온 격통에 배꼽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홍광은 마저 철구광자의 손발목을 잡고 쥐어 찌부러뜨렸다.


“끄아아아악!”


홍광은 무심하게 말했다.


“단전을 폐했어요. 게다가 이제 손발이 불편할 테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밥도 먹기 어려울 거에요. 적어도 가족들이 아저씨를 다시 받아줄 여지가 있다면 살겠고, 아니면 죽겠죠.”


철구광자는 순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홍광의 눈에는 그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자기 가슴에 대고 생각해보세요. 과연 본인이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

“그럼 갈게요. 건투를 빌어요.”


홍광은 신형을 돌려서 서쪽으로 걸었다.


서쪽. 해가 지는 방향.

때마침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충자가 그 뒤를 따랐다.


충자는 해를 쫓아가는 듯했고, 철구광자는 그곳에 남겨졌다.


한 때는 같은 사갈파에 있었던 둘이었지만 그 말로는 너무 달랐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작렬하는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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