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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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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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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글자수 :
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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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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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나도 억울하네(2).

DUMMY

인질극이라는 것은 기구하다.


인질을 잡은 쪽과 인질로 잡힌 쪽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한데 반해, 둘은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인질이 없어지면 범인의 생명이 위태롭다.

반대로 범인에게 화가 닥치면 인질의 목숨이 위험하다.


애초에 인질극은 이런 성질을 이용한 수법이다.


범인을 잡고 인질을 죽일 것인가.

인질을 살리는 대신 범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가.


해결하려는 이로 하여금 어느 쪽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양자일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언제나 예외라는 것이 있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해결하려는 이가 인질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는데 인질극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질이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인질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환하게 웃는 이는 상대로 천하의 어떤 멍청이가 인질극을 계속한단 말이던가?


머리가 멀쩡한 이라면 인질이고 뭐고 전부 버린 뒤 삼십육계줄행랑을 쳐야 옳았다.


‘하지만.’


애초에 도망칠 수 있었다면 뭣하러 인질극을 벌였겠는가.


설상가상으로 서균은 이 한 수에 내공을 모두 써버렸다. 인질극이 먹히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정군자는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서균을 향해 다가가며 고검의 손잡이를 하단세로 고쳐쥐었다.


“오지마라! 오, 오지 말란 말이다! 그만!”

“······.”


서균의 동공이 요동쳤다.


정군자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극도로 초조해진 서균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죽여버린다고 말했지!”


서균의 손날이 붙들고 있던 사내의 목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사내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동시에, 정군자가 무심하게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고검을 휘두르는 정군자의 몸동작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끄윽······.”


서균이 복부를 쥐어짜듯 잡았다.


허나 손가락 사이로 찐득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뱃가죽이 갈라지면서 서균의 뱃속에 들어있던 것들이 미끌거리며 쏟아져내렸다. 동시에 토해낸 붉은 선혈은 폭포를 연상케 했다.


“커헉······.”


피를 토한 서균의 몸이 허물어졌다.


서균이 인질로 붙잡고 있던 사내의 몸도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


정군자는 다가가서 서균의 시신의 앞에 섰다. 한참 동안이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서균에게 목을 꿰뚫린 사내가 죽어가고 있었다.


“사, 살려······ 주······.”


말하는 도중마다 피가래가 끓어올라서 문장을 끝맺지 못한다.


정군자는 무릎을 굽혔다.

죽어가는 사내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그리고 백팔십도 돌려버렸다.


우드드득!


사내의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완전히 끊겼다.


정군자가 무심히 말했다.


“대라신선이 와도 목이 꿰뚫린 이를 살릴 수는 없소. 가는 길이라도 편히 가시오.”


죽어가는 이의 목을 꺾는다.


이성적으로는 옳을지 모른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고통이나마 줄여주고자 하는 선의라고 해도 틀린 점이 없었다.

그러나 선의라고 해서 살인이 아닌 건 아니다.


정군자의 그 행동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미 극에 달한 공포감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어르신!”


장정들 중 하나가 냅다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산 아래 굶고 있는 처자식이 있습니다.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전부 죽습니다. 제발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러자 멀찍이서 사시나무 떨 듯 달달 떨고만 있던 장정들이 하나둘 농기구를 내팽개치고 부복하기 시작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족에게도, 은인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평생 무덤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당이 최선을 다했으나 저 악독한 사갈파 놈들이 세금을 줄여주지 않았다고 전하겠습니다! 돈은 저희가 어떻게든 마련해보겠습니다!”


하나 같이 간절한 말들이었다.

결코 마련할 수 없을 돈을 마련하겠다 약조할 만큼이나.


하지만 정군자는 되물었다.


“무엇이든 하겠다? 그대들이 무엇을 할 수 있지? 애초에 뭔가 할 수 있었다면 왜 이런 일을 벌였는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어렵네. 그대들을 믿을 바에는 이곳을 무덤으로 만드는 것이 쉽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대들이 돈을 어떻게 마련할 텐가? 또한 사갈파가 세금을 줄여주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걸로 납득할 성 싶은가? 진심으로?”


신랄한 반박에 사내들의 표정이 점차 거무죽죽하게 죽어갔다.


애초에 말로 어찌 해보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여기서 노인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이유 따윈 없었다. 그런데 누가 누굴 설득하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하나였다.


“어르신, 제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무당의 영봉을 오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빌겠습니다.”


누구는 파리처럼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누구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누구는 그것마저도 신경에 거슬릴까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 꼴을 가만히 듣던 정군자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들으시게.”

“······.”

“내가 그대들을 살려주는 것은 그대들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오. 사정이 딱해서도 아니고, 동정해서도 아니거니와 내 양심의 문제도 아니오. 내가 그대들을 살려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정군자가 고검을 들어보였다.


“나 또한 그렇게 구사일생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것은 내 개인적인 보은일 뿐, 그대들의 사정과는 관련이 없소.”


그 말을 끝으로 정군자는 등을 돌렸다.


“그러니 가시오. 허나 개인적인 보은은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만일 그대들이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지 않았을 시에는······.”


정군자가 말꼬리를 끌었다.


눈치 빠른 사내 하나가 빠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어르신!”

“살려주신 목숨, 새 삶을 살겠습니다!”


장정들은 염라대왕과 악수라도 하고 온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살고 싶다는 악다구니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가시오. 마음이 변덕을 부리기 전에.”

“예!”


장정들이 서둘러 일어나서 팽개쳤던 농기구들을 챙겨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고 할 것 없이 흙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금방 산 아래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농기를 챙기다니.’


이것은 저들의 생활이 정말로 쉽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씁쓸한 입맛이 감돌았다.


정군자는 죽은 사내의 시신 앞으로 갔다.


목은 피가 가장 많이 지나가는 신체 부위중 하나다. 뜨거운 혈액을 대량으로 쏟아낸 시신은 금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 온도 앞에 서 있었다.


“후회하세요?”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홍광이었다.


홍광의 물음에 정군자는 쓰게 웃었다.


“정말 못 당하겠군. 자네가 자객이었으면 방금 나는 죽은 것이 아닌가.”

“운 좋게 살아 계시네요.”

“그래 운이 좋군. 자네를 만났다는 것부터가 내 운이 트였다는 증거겠지.”


정군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후회하냐고 물었는가?”

“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영감님, 방금 인질을 죽이지 않고도 충분히 저 서균이란 놈을 제압할 수 있었잖아요.”

“······역시 알아보는군.”

“그렇죠 뭐.”

“경멸했는가?”

“그렇지는 않아요.”


홍광은 죽은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분이 죽어주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죽었을 테니까요. 오히려 퍽 자비로운 처사였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그랬다.


정군자의 입장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이 자리에서 전체를 살인멸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군자는 그 길을 원치 않았다.


허나 살려준다고 해도 문제였다.


과연 서균을 죽인 다음 장정들을 멀쩡히 마을까지 돌려보냈다면 그들이 지금처럼 입을 닫아주었을까?


결단코 아니다.


보상이 따르리라는 생각에, 눈치를 보면서도 사갈파의 관계자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실토했을 것이다.


‘역시 무당이 민초는 죽이지 않는구나’ 라는 얄팍한 생각을 방벽 삼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길 거란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사갈파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 안에 병력을 모아서 무당을 칠 것이고, 준비도 없이 사갈파의 본대를 맞이한 무당은 살아남을 가망이 별로 없었다.


사람이란 그런 동물이다.


남의 집이 불타고 있다고 해도 중간에 강 하나가 껴 있으면 너도나도 뒷짐을 진 채 구경하기 바쁘다.


결국 정군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모두의 입을 강제로 없애버리거나.

이 불길이 강을 넘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정군자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들과 같은 민초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경고한 것이다.

그렇게 나머지를 죽이지 않고 끝냈다.


정군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똑똑하군.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는데.”


홍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군자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후회하냐 물었는가? 그렇지는 않네.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걸세. 다만 안타까운 것이지.”

“뭐가요?”

“무엇이겠나.”


정군자가 허리를 숙여 사내의 시신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부릅 떠져 있던 사내의 눈을 감겼다.


“목숨이 안타깝네. 그리고 가장을 잃은 이 사내의 가족들이 안타깝네. 또한 그 가족들의 소재조차 묻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네.”


엄밀하게 말하면 정군자가 사내를 죽인 것은 아니다.

허나 정군자가 죽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되, 그의 선택으로 죽였다.


더 많은 이들을 놓아주기 위해 필요했다고는 하나, 이 사내가 그 희생의 대상이 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사갈파의 잡놈이 아무렇게나 휘어잡은 것이 이 사내였고, 거기에는 딱히 이유가 없었으니까.

재수없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을 뿐이다.


‘마치.’


마인들의 눈에 먼저 띄어서 정군자의 앞에 죽어간 아홉 명의 무당파 제자들처럼.


적어도.

이 자에게 가족들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었다. 사내의 이름은 무엇인지, 아이는 있는지 알아야 후에 지켜보며 작은 도움이라도 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군자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에 가족의 여부와 소재 따위를 물어서야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행세한 의미가 없어진다.

기껏 심어놓은 공포가 무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눈도 없으면서 엄청 물끄러미 보시네요. 봉분이라도 만들어 주시게요?”


정군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기껏 번 시간이네. 사갈파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금덩이보다 귀한 시간이야. 무덤이나 만들고 있을 수는 없네.”

“아, 그래서 그 대책 말인데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겐가?”

“네.”

“오오!”


정군자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 내가 뭘 하면 되겠나?”


그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사 홍광이 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라고 해도 그것이 무당에 도움이 된다면 일언반구도 토달지 않고 불사할 각오였다.


그러나 홍광의 말은 기어코 정군자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영감님은 여기 가만히 계시면 돼요.”

“응?”

“심심하면 방금 말했던 봉분이나 만들어주고 계시던가요. 참고로 급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아주 관을 짜고 경을 외워서 장례를 치러줘도 시간은 남을 테니까.”


정군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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