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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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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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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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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다 똑같은 무림인(2).

DUMMY

호북에서 중경까지 이레.


중경에서 또 서면산까지 열하루.


서면산에 도달하기까지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홍광은 단순히 뛰어다니기만 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달릴 때를 제외하면 먹을 때나 잘 때나 쌀 때나 운기행공뿐이었다.


충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무작정 운기행공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공을 단련하는 것과 같았다.


운동을 무작정 많이 한다고 근육이 붙는 게 아니듯이, 적절히 운기를 끝냈다면 단전과 기맥에도 휴식이 필요한 법이다. 휴식 없이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되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하지만 홍광은 계속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불안하단 말이지.’


어쨌든 마기를 흡수한 거다.

그것도 꽤 많은 양의.


그것도 홍광의 단전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게 커서 ‘꽤 많다’정도인 거지, 방사혁에게서 흡수한 마기의 양만 생각한다면 이류 무인의 단전 열 개쯤은 터트리고도 남았다.


그러니 아무리 당장 멀쩡하다 해도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언제 부작용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막말로 당장 손발이 검게 물든다 해도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너무 멀쩡하군.’


홍광이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놀랍게도 단전은 정말 멀쩡했다.


사실 그냥 멀쩡한 정도도 아니었다.


방사혁의 마기를 거의 대부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점차 마기의 존재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집중하면 느낄 수 있었던 마기가 가면 갈수록 사부의 항룡기와 섞이면서 중화되어가는 것이다. 종래에는 단전 안에서 도저히 마기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오징어가 뿜어낸 먹물이 바닷물과 만나면서 금방 사라지는 것과 비슷했다.


새삼 사부의 격체전공을 받았을 때 ‘조금 찼다’고 느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솔직히 방사혁을 열 명 데려와도 단전에는 기별도 안 갈 것 같았다.


이쯤 되면 홍광은 살짝 의구심이 일었다.


‘영기...... 진짜 필요한가? 굳이 정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홍광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언제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아직 멀쩡할 때 대비해둬야지. 안일해지지 말자.’


사부에게서 그토록 자만하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자기 능력을 과신해서 방치했다가 마기에 잡아먹히면 무덤에 새길 핑계도 없다.


“후.”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느냐?”


넉넉히 챙겨온 건량을 씹어넘기며 충자가 물었다.


홍광은 대답 대신 눈을 뜨고 주머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입에 넣었다.

맛없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다 왔다. 눈 앞에 보이는 산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가 서면산이다.”


서면산.


고개를 올려서 봉우리를 찾아보니 과연 영산은 영산이었다.


희뿌연 구름이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었다. 가파른 능선은 인간이 오르는 일을 감히 허하지 않겠다고 강력히 경고하는 듯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삼두사 같은 영물도 하나쯤 살 만했다.


제대로 된 경공도 없이 젊은 나이에 저런 산을 올랐다던 무곤진인이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목숨 내놓고 올라갔다고 봐야 했다.


잠시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홍광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충 다 먹었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가자.”

“그래.”


충자도 건량 주머니와 수통을 챙겨 일어났다.


며칠을 달리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뇌옥에 있었을 때에 비해 안색이 좀 나아진 상태였다.


둘은 다시 서쪽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 * *


서면산 중턱.


류씨세가의 방계 차남인 류소평은 안개구름을 찢고 나아갔다. 서면산의 험준한 산세도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류소평의 뒤를 식솔들이 따랐다.


이윽고 깎아지른 듯한 암벽 앞에 선 류소평이 짧게 명했다.


“열어라.”


그 말과 동시에 식솔들이 움직였다.


쿠르르르릉!


뇌우가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암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딱 사람 하나 지나다닐 틈이 생기자 류소평이 손짓해 암벽을 멈췄다.


식솔들은 밖에서 대기했고, 류소평이 혼자 멧돼지 한 마리를 어깨에 지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을 드나들어도 적응되지 않은 음슴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들어왔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분명 갇혀 있는 것은 상대고, 류소평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대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입장일진데 이곳에 오면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외려 상대가 언제든 자신을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류소평은 굶주린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반쯤 넣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기분만이 아니라 실상이 그렇기도 했다.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류소평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놈의 아가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심히 어그러졌다.


류소평은 계단을 따라 점차 지하로 내려갔다. 희미하게 쇠 냄새와 화약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러난 것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


그리고 사방에서 그 감옥에 갇힌 단 한 명의 사내를 향해 발파 준비를 하고 있는 수십 대의 화포들이었다.

지금이라도 류소평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즉시 화염을 토해낼 거였다.


그런 기관장치였으니.


“잘 지냈나?”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류소평은 신경쓰지 않고 할 말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식사 날이다. 확실히 먹어두도록. 네놈이 만들어내는 독은 세가에서도 상당히 유용하게 쓰고 있으니까.”


류소평이 그렇게 말하며 멧돼지를 감옥 안으로 던져넣었다.


그러자 시종일관 무시로 답하던 사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류소평은 속으로 질겁했다.


그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길쭉한 동공에, 황금빛 홍체.

뱀 같은 파충류에게서나 볼 법한 눈의 모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내의 피부 위에도 듬성듬성 비닐처럼 반딱거리는 부분이 보였고, 움직임도 뱀의 그것처럼 매끄러웠다.


한두 번 보는 모습이 아님에도 영 징그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어서 멧돼지 사체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각각 멧돼지의 머리와 꼬리를 잡고, 압축하듯이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멧돼지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과정이 두어 번 반복되자, 멧돼지는 한 알의 단약처럼 변했다.


몇 번을 봐도 소름돋는 광경이었다.


사내는 길쭉한 혀를 꺼내서 그 멧돼지 단약을 감싸더니, 곧 꿀꺽 삼켰다.


류소평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딱히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다.


“독은?”

“······여기 있다.”


사내가 현철로 만든 새끼손가락 크기의 약병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서너 방울 정도의 묵빛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류소평은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손을 뻗어서 약병을 받았다.


겨우 이 서너 방울로 삼천 개가 넘는 화살에 스치기만 해도 곧바로 절명하는 극독을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목숨이 세 개쯤 있지 않는 이상은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했다.


류소평은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줄 수 있는 맞춤 제작한 목함에 그 약병을 넣었다. 부패에 강한 전용 나무를 쓰고 기름을 백 일간 먹여서 만든 목함이었다.


그리고 그 목함을 같은 재질의 더 큰 목함으로 감쌌다. 그 목함을 또 커다란 목함에 넣었다.


이렇게 해도 세 개의 목함들은 한 번 이송하고 나면 전부 버려야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극독이었다.


류소평은 멧돼지 대신 그 목함을 등에 멨다.


“그럼 다음 달 식사 날에 또 오겠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묘한 생각은 하지 말도록. 네놈이 얼마나 대단하다 해도 여기서 나가는 순간 사천에 있는 네 딸자식의 목이 떨어지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말을 하면서도 류소평은 기분이 언짢았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딸자식 따위가 있으며, 부정(父情)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는 정말로 꼼짝하지 않았다.


천천히 알아들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감옥을 부수고 류소평의 목을 떨군 다음, 서면산을 나갈 힘이 있음에도.


“쯧.”


류소평은 혀를 차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사내의 태도도, 세가가 하는 짓거리도, 지금 자신이 하는 일도 전부.


인간이 아닌 사내는 인간처럼 행세하고, 인간인 자신은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일하는 현 상황에 매우 심기가 더러웠다.


그러나 류소평이 심기가 더렵다고 해서 자신을 키우고 가르친 가문을 배신할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정도 무게면 네 방울로 쳐주마. 앞으로 칠백육십이 방울 남았다.”

“······.”

“지금 속도로 이십 년이 좀 지나면 해방될 수 있겠군. 영물에게 있어서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니겠지? 그 정도면 인간도 늙어죽지는 않는다. 딸자식이 올해로 열여섯이지? 잘 생각하도록.”


경고를 날린 류소평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뇌까리면서 등을 돌렸다.


이 불쾌한 공간에서 나가고 싶었다.


헌데 이번에는 사내가 그를 불러세웠다.


“류소평.”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사내가 류소평을 붙잡은 것도, 그의 이름을 부른 것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칠 년 전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군.”


류소평은 작게 침을 삼켰다.


칠 년 동안 고작 한 번 말했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이름을 알고 있었음에도 줄곧 말하지 않다가 지금 말했다는 사실이 왠지모를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뭔가 심경에 변화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류소평은 사내가 입을 열기까지 기다렸다.


이내 사내가 류소평에게 물었다.


“당비연은 살아 있나?”

“······살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놈이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이십 년쯤 뒤에는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겹치자 류소평은 갑자기 전신이 그 시선에 관통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류소평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는 다시 감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하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제와서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제기랄.”


대꾸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물은 류소평이 기어코 험한 말을 지껄였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조차 없었다.


“후.”


류소평은 호흡을 다잡았다.


여기서 그가 할 일은 간단했다. 한 달마나 저것의 먹이를 챙겨주는 것과, 일정한 양의 독액을 받아내는 것. 그리고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


이것만 수행하면 족했다.


고작 사내의 말 몇 마디에 휘둘려서 이런 간단한 업무에 지장이 생길 수는 없었다.


그건 류소평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세가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맡은 바 일에 불평불만이나 의문을 품지 않고 우직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있어서였다.


류소평은 마음을 다잡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래도 앞으로 한 달은 이 기분나쁜 장소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별 일은?”


암벽에서 나온 류소평이 대기하고 있던 식솔들에게 물었다.


이런 오지에서 사내 외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마는 으레 하는 확인이었다. 그런데 식솔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소와 살짝 달랐다.


“웬 거지 둘이서 산을 오르려고 하기에 세가의 이름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거지라고?”


류소평의 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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