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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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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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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거지로 돌아오셨네요(3).

DUMMY

방금 전 홍광에게 모든 설명을 들은 정군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천하제일인의 내공을 모두 받고, 방사혁의 마기를 전부 흡수해도 아직 텅텅 비었다던 단전이다.


영기나 마기가 안에서 좀 다툰다고 과연 터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고래가 싸운다고 바다가 터지지는 않지 않던가?


“거봐요. 안 터지죠?”

“······그렇군.”

“헤헤. 제 배가 좀 튼튼하거든요. 제가 거지였을 때는 나무 껍질도 갉아먹고, 썩은 과일도 주워먹고, 남의 집 개밥그릇도 훔쳐 먹고······.”

“그,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비슷하죠 뭐.”


홍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군자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 이상으로 홍광의 단전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문제는 영물을 찾는 거로군요.”


무곤진인이 불쑥 말했다.


영물은 웬만한 강호인들이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희귀했다. 운이 나쁘면 아무리 홍광이 빨빨거리며 강호를 돌아다닌다 해도 찾지 못할 수 있었다.


설사 찾는다 해도 영물의 격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기껏 배를 갈랐는데 콩알 만한 내단이 나오면 낭패였다.


다행히 무곤진인이 대책을 갖고 있었다.


“영물은 영기가 짙은 곳에서 나오지요. 소싯적에 탐구심으로 강호의 영산을 모두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도를 닦는 자라면 신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무곤진인이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영물이 나오는 산 몇 군데를 점찍어주었다. 홍광은 영특한 머리로 그 지도를 대강 기억했다.

무곤진인은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잠시 턱을 문지르다가 물었다.


“홍 소협은 어느 곳으로 가십니까?”

“아마 서쪽으로 갈 거에요.”


모르긴 몰라도 동쪽에는 방사혁이 말했던 만벽서고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는 사천을 추천합니다.”

“거기에 영물이 많나요?”

“아뇨. 호남, 귀주, 중경은 사도천하라서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자는 사이 도적들에게 찔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천으로 가도 도중에 중경을 가로질러야 하긴 합니다만······.”

“아.”


홍광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사천으로 가는 게 맞았다.


“사천은 사정이 좀 낫나보네요? 하긴, 구파일방이 두 개나 있는 지역이니까. 아, 사천당가도 있고요.”


아무리 망했다지만 그 정도 전력이 합심했다면 사천에 법과 질서가 남아 있다는 것도 말이 됐다.


그런데 무곤진인의 반응은 묘했다.


“아······.”


무곤진인이 머쓱하게 수염을 어루만졌다.


“사천의 사정이 다른 곳보다 나은 건 사실이지만,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사천당가는 망해서 이제 없습니다.”

“······.”

“그, 그래도 근방에서는 유일하게 정파가 득세한 곳이지요.”

“오, 그래요?”


그제야 홍광의 표정이 좀 밝아졌다.


“어떤 곳인데요?”

“류씨세가라는 명가인데, 아직 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정파 세력입니다. 듣기로는 가풍이 매우 부드럽다 하더군요. 특히 가주는 이전부터 식솔들을 잘 챙기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홍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세력이 득세했다면 사천의 치안은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홍 소협, 서쪽으로 가시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방사혁이 죽기 직전에 강소의 만벽서고를 조심하라고 했거든요.”


그러자 무곤진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벽서고라. 솔직히 방사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지는 않지만, 설득력이 있는 말임을 부정할 수 없군요. 그들은 금지된 지식도 가지고 있었을 테니, 책에 홀린 자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홍광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은 힘이다.

그리고 힘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만벽서고가 정말로 중원에서 가장 책이 많은 집단이었고, 그 안에 금서나 마서의 종류가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정군자도 한 마디를 보탰다.


“나로서도 서쪽으로 가길 권하네. 어차피 강소라면 서북이고, 지금 동북부로 가는 건 자살행위니까.”

“네? 왜죠?”


동굴에서 나와 곧장 무당파에 일에 간섭하게 된 홍광이다.


현 강호의 사정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동북에 뭐가 있나요?”

“아, 모를 수도 있겠군. 마교가 있네.”

“······.”


마교라는 말에 홍광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동북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말아야겠다.’


괜히 재수 떨어질라.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데요?”


홍광은 보신주의의 차원에서 물었다.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꼭 그 지역은 피해가기 위함이었다.


“그렇군······ 정확히는 옛 황궁이 있던 북경에 있네. 마교 전체가 황궁에 처박혀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

“처박혀서 뭘 하는데요?”

“그야 나는 모르지. 확실한 건 마교가 침공 이후로 딱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는 걸세.”

“으음.”


중원을 다 정복해놓고 쥐구멍 만한 황실에 처박혀 있다니.


사부에게 들어서 이미 마교가 통치나 지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여전히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였다.


일단 황궁을 점거했으니 내부를 단단히 다지는 중인 걸까?

그렇다 해도 칠 년 동안이나 조용하다는 게 말이 되나?


홍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직접 천마와 부딪혀 본 사부조차 그놈들의 머릿속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인생이 마교와 얽히는 순간 골치아프게 꼬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요.”


홍광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방사혁이 한 말로 봐서는 만벽서고가 그놈한테 마공을 제공한 것 같단 말이죠? 그럼 제가 아무리 피해도 만벽서고쪽에서 절 추격해오지 않을까요?”

“······.”


예리한 발언이었다.


만벽서고와 방사혁 사이에 모종의 연결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만벽서고가 이번에는 방사혁을 쓰러뜨린 홍광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겠는가?


“어쩌죠?”


졸지에 알지도 못하는 만벽서고라는 미치광이 집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홍광이 물었으나, 이번만큼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뭐 어쩌겠는가?


저들이 쫓아온다는데.


부정하기에는 목격자가 이미 너무 많았다.

이런 사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사, 사천까지는 저희가 좀 따라다니면서 호위를······.”

“호위는 얼어죽을. 발목이나 안 잡으면 다행이지. 당장 싸움 나면 짐짝될 게 뻔한데.”


홍광의 뼈있는 말에 조심스레 열렸던 허겸의 입이 다물어졌다.


현실적으로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무곤진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홍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홍 소협, 죄송합니다.”


자신들을 구해주려다가 이렇게 된 거다. 무곤진인은 통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홍광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결국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책임도 제가 지는 게 맞죠.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고요.”


홍광은 영리한 제자였다.


무림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거지였을 때 들은 소문들과 사부가 설명해준 것 것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무림의 생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무림은 은혜와 원한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혔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원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알고 행한 일이니 누굴 탓하랴.


탓할 거라면, 무림의 이런 생래를 알면서도 자신에게 무거운 유언을 남기고 간 사부를 탓해야 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받든 자신도.


무곤진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홍 소협, 지금 저희가 함께해도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싸움이 벌어지면 모래주머니가 되겠지요.”

“······.”


홍광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홍광이 고전할만한 적이라면 무당파는 몇 수레가 와도 짐덩이였다.


“그러니 강해지겠습니다. 언젠가 소협의 등을 떠받칠 수 있도록.”

“······좋아요.”


홍광이 손짓해서 정군자를 포함한 무당파 제자들을 불렀다.


제자들이 가까이 오자 홍광은 한 사람씩 차례대로 가리켰다.


“너는 아까 보니까 중심이 너무 뒤로 빠져 있더라. 앞으로 당겨. 회피도 좋지만 힘이 실리지 않은 검을 휘두르는 편이 훨씬 위험하다.”


“넌 악력이 문제야. 검수가 검을 놓치면 끝이다. 안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손을 올려쥐어. 놓치는 것보다 백 배 나아.”


“어깨에 힘이 들어갔어. 긴장하는 건 좋지만 너무 경직되어 있으면 반응이 느려진다. 차라리 거리를 벌리고 심호흡을 해.”


“영감님은······ 나이 먹고선 그것밖에 못해요? 반성하세요.”

“아니 왜 나만?”


정군자의 항변을 가볍게 묵살한 홍광이 이후에도 다른 제자들에게 한 마디씩 조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였다.


본래부터 중원에 무학을 배울 기회가 많지도 않았지만, 마도천하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했기 때문이다.


왜인가 하니, 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마교도들이 침공해서 열에 아홉을 죽였을 때, 보통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숨어 지냈지만 무림인들은 굴하지 않고 다시 덤비는 경우가 많았다.

혹자는 이를 보고 미친놈들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맞다.


기본적으로 이성보다는 호승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족속들이 고수들인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생각은 가진 고수들이 협객이라며 칭송을 받았지.


‘하여간 무공이 문제라니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이 이성적으로 삶을 살겠는가? 절제심이 강한 사람은 분명 있지만, 대부분은 충동과 욕망에 몸을 맡기기 마련이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점점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면역이 없어지고,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며, 그러다가 마교도들한테도 열이 뻗치면 칼 뽑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홍광의 가르침은 매우 희소했다.


“감사합니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무려 방사혁을 이긴 고수의 조언을 허투루 들을 만큼 무당의 제자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좀 더 자신감 있게 굴어. 수련할 때도 마찬가지야. 네 앞에 있는 사형제가 네 부모를 죽인 원수라고 생각하라고.”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나는 항상 우리 사부님이 개방을 개같이 운영하셔서 내 인생이 꼬였다고 생각하면서 수련했는데?”

“······.”


물론 전부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대충 할 말을 다 끝내고 나자 작별의 시간이 왔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무양하기시를.”

“네. 그쪽도요.”


대표로 인사한 무곤진인이 빙긋 웃었다.


그 뒤 저마다 인사를 건네고, 무당파는 황무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무곤진인도 성장했고 정군자도 있으니 어디가서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문제는 나지.’


홍광은 체념했다.


강호에 출두한 지 불과 한 달만에 대적을 만들어버린 것 같았지만, 그럼 그렇지 거지새끼 인생에 팔자 필 일이 있겠냐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에휴.”


어쨌든 이리하여 무당도 거지로 돌아왔고.


홍광의 녹록찮은 인생도 거지같이 돌아왔다.


“······우라질, 내가 다시 누굴 돕나 봐라.”


슬며시 뒤돌며 이루어질 리 없는 다짐을 하는 홍광이었다.


홍광은 발밑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 멀리 던졌다.


“다 끝난 거 봤으면서 뭘 꾸물대고 있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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