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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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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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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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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걱정마세요(2).

DUMMY

아침은 매일 찾아온다.


새벽이 지나면 동녘하늘에서 여명이 밝는 법이다.


굳이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당연한 이치다. 세 살배기 아이도 잠을 자고나면 아침에 해가 뜬다는 사실은 안다.


오늘이 지나면 반드시 다음 해가 뜬다.


적어도 무곤진인이 삶을 살아가면서 이 규칙이 깨진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름 때문에 햇빛이 가린다거나, 날이 흐려서 해가 잘 보이지 않는 날은 있어도 아침이 오지 않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무곤진인은 만 번이 넘는 아침을 겪었다.


항상 상쾌하고 쾌청한 아침이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 아침부터 죽상을 쓰고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연코 오늘보다 기운이 빠지는 아침은 한평생 맞아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제자들을 하산 시키는 날이었다.


“후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무곤진인이 인자한 눈웃음을 짓고 입꼬리를 빙긋 올렸다.

이제는 전처럼 기운 없는 날이라고 해서 힘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특히 오늘은 그렇다.


‘내가 마지막까지 울상으로 보낸다면 아이들의 어깨가 너무나 무거울 것이다.’


무당은 망한다.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장문인의 마지막 얼굴이 침울해서야 되겠는가. 아이들이 평생 무당을 어떻게 기억하고 떠올리겠는가.


무당이라는 이름이 곧 죄책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당이 망하는 것에 아이들의 책임은 단 일 푼도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떠올리기조차 껄끄러운 인물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내 욕심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변할 것은 없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제자들을 보내야 했다.


무당의 마지막 장문인으로서.


무곤진인은 의복을 정제하고 가볍게 운기조식을 마친 뒤, 자신의 얼굴 모양이 어떤지 계속해서 의식하면서 장원으로 나갔다.


“다들 모여 있구나.”


무곤진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동이 트자마자 나왔건만, 이미 제자들은 모두 의복을 정제하고 연무장에 도열해 있었다.


‘빨리 하산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


당장 무당파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한 시라도 빨리 도복을 반납하고 산문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도 헤아릴 수 있었다.


무곤진인은 연습한대로 가볍게 웃었다.


“제자들은 들어라. 다들 알다시피 무당은 바로 어제부터 사갈파와 완전히 적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의는 우리에게 있을지 모르나, 힘은 저들에게 있다.”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저민다.

애둘러 말하긴 했지만 결국 무당은 사갈파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한 차례 짓씹었다.


“너희는 아직 젊다. 아니 어리다. 아직 꽃피워보지도 못한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무곤진인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나는 제자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자 한다. 끝까지 무당에 남겠다는 이는 지금 거수하라. 손을 들지 않은 이들은 조속히 하산을 인솔할 터이니.”


떠나는 이를 거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겠다는 이에게 거수를 요구한다.

별 것 아닌 차이지만 무곤진인은 구태여 이렇게 말했다.


제 의지로 손을 들어서 무당을 버렸다는 죄악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었다.


이 순간, 아직 앞날이 펼쳐져 있는 제자들이 되도록 많이 떠나길 바라는 마음과 마지막까지 함께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한 심경을 내보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모두 눈을 감아라. 너희가 마지막 순간이나마 무당의 제자라면, 지금 눈을 떠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둘러보아 한 명도 빠짐없이 눈이 감긴 것을 확인한 무곤진인은 화덕에 달군 돌을 삼키는 심정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거수하라.”


침묵이었다.

무곤진인의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바람대로이기도 했다.


그는 제자들이 올곧길 바랐지만.

그 이상으로 살기를 바랐다.


희미한 미소가 무곤진인의 입가에 걸렸다.


그런데.


손이 올라온다.

슬며시. 허나 망설임 없이.


가장 처음은 허겸이었다.


허겸은 무당파의 대제자다. 이 아이라면 이렇게 선택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안타까움도 공존했다.


‘이런 소담에서 끝날 아이가 아니었거늘.’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좀 더 제대로된 환경에서 검을 휘둘렀다면 대성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성정도 대협의 자질이 있었다.


자신 같은 반푼이가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곧잘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겸의 선택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 손이 올라왔다.


공진이었다.


자신의 대사형을 존경해왔던 공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다음.

그 다음.

연이어서. 계속해서 손이 올라온다.


‘아직도 올라온단 말인가?’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오는 손은 멈출 기세가 없이 계속되더니, 어느 순간 일거에 결심을 굳힌 듯이 많아졌다.


서른일곱 명의 제자들 중 스물여덟의 제자가 무당파에 남기 위해 거수했다.


그것은 무곤진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숫자였다.


기쁘다.

화가 난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무곤진인은 지금 실감할 수 있었다.

무곤진인이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실망스럽다. 더 없이 통탄스럽다. 제자들은 본도가 눈을 감으라고 명한 이유를 모르겠더냐? 타인에게 휩쓸려서 자신의 결정을 맡기지 말라는 의미다. 헌데 이리도 줏대가 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내가 너희를 잘못 가르친 모양이구나.”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비율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선택은 기쁘지만, 무곤진인은 해야 할 일을 했다.


지금은 화를 내야 한다.


“한 번만 더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 너희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구나. 덧없는 것이 아니다. 허망한 것이다. 아직 주어진 삶의 반의 반도 살지 못한 너희가 도저히 알 수 없을 만큼 허망한 것이다! 이렇듯 가벼이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결정에 한 점의 미련이라도 있다면 그냥 떠나는 것이 옳다.


무곤진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떠나라. 작금의 사태에 너희의 잘못은 단 한 줄도 없다. 너희가 정말로 본문을 생각한다면 한 점 부끄럼도 없이 떠나라. 지금 손을 내릴까 잠깐이라도 고민한 이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부탁이니라.”


실로 처절한 외침이었다.


무곤진인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나.


올라왔던 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제자도 한 번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리지 않았다.


‘아.’


무곤진인은 그제야 보았다.


거수한 제자들의 손을.


하나같이 여기저기 울퉁불퉁하게 박힌 굳은살에, 거칠고 투박하기 짝이 없다. 칼에 베인다고 해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한 손들.


그것은 분명,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자신의 손과 닮아 있었다.

무당의 장문인이 된 그날부터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수련. 그 수련으로 만들어진 손의 모양을, 제자들도 똑같이 빼다 박았다.


손바닥에 멍이 들고 피가 터질 정도로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저런 손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검수의 손이니까.

부단히 노력한 자만의 증표니까.


“정말······ 싸우겠느냐?”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무곤진인이 말했다.


“질 것을 알면서도?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하겠다는 말이더냐?”

“장문인.”


대답한 것은 허겸이었다.


허겸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장문인의 말씀을 틀리지 않았습니다. 생은 더없이 중요하지요. 죽음이란 저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허나, 때로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

“바로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경우, 평생을 죽음보다 더한 후회와 괴로움 속에 시달려야 하는 경우입니다. 장문인, 저는 이미 사형제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그 일을 겪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강직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지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었고, 죽더라도 동귀어진을 노리겠다는 각오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뜻을 꺽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무곤진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왜 몰랐는가.’


이 아이들도 마교의 침공 당시 무곤진인과 똑같이 사형제들을 잃으면서 자라왔음을.


이대로 무당을 떠나면 사형제들의 죽음을 다시 한번 실감해야 한다. 비록 눈 앞에서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일 터였다.


“장문인, 싸우겠느냐고 물어보지 마십시오. 싸우라고 명해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장문인의 그 명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곤진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이들은 선택을 굳혔다.

더 이상 그가 설득할 가망은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아깝다.’


여기서 더 말을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무리 제자들이 살기를 바라도, 제자들에게 평생토록 괴로움 속에 살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었다.


“이대제자 허겸.”


무곤진인이 말했다.


“예, 장문인.”

“거수하지 않은 아이들 중에는 아직 어린 제자들이 많다. 그들이 무사하도록 산길까지 인솔하거라.”

“알겠습니다.”


허겸이 즉시 눈을 뜨고 움직였다.


남은 것은 무당에 끝까지 뼈를 묻겠다고 생각한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이만 눈을 떠라.”


말이 떨어지지마자 제자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하나 혁혁한 총기가 깃든 눈들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무당의 전력은 사갈파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다. 우리가 무당이고 저들이 악적인 한, 나는 끝까지 검을 휘두를 것이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무곤진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싸워라! 너희가 무당의 제자라면! 정녕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면! 가슴에 당당히 태극의 자수를 새긴 검수라면! 저 악적들에게 무당의 저력을 보여주어라!”


챙챙챙!


제자들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져 나온다.


이윽고 스물여덟의 날카로운 검끝이 하늘을 가리켰다.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왔다.


“예, 장문인!”


어느 때보다 우렁찬 대답이었다.


그때 산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오.”

“홍 소협?”


짝짝짝짝짝짝짝.


어느새 돌아온 홍광이 물개박수를 치면서 복귀하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남은 건가요?”

“그, 그렇습니다만.”


연무장을 둘러본 홍광이 물었다.


“의외로 대사형이라는 놈은 나갔나보네요? 걘 남을 줄 알았는데.”

“······허겸은 하산하는 어린 제자들을 인솔하러 갔습니다.”

“아하.”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짝 치는 홍광을 보면서 무곤진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홍 소협,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분명 사갈파가 다시 찾아오기 전에 산을 내려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 저도 사정이 있어서요.”


홍광이 뺨을 긁적였다.


“사부님께서는 저더러 더럽고 치사해도 살아남으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협을 찾으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상반되는 두 가지를 유언으로 남겨서 참 난감하긴 하지만 어느쪽이든 허투루 여길 생각은 없어요.”

“아······.”

“그리고 어떤 분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고요.”


홍광이 멋쩍게 볼을 긁던 손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거수할게요. 저도.”


무당 역사상 최고의 원군이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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