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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룡(旦龍) 님의 서재입니다.

기연 첫날에 무림이 멸망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단룡(旦龍)
작품등록일 :
2023.09.23 06:39
최근연재일 :
2023.11.13 19:20
연재수 :
5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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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4
추천수 :
455
글자수 :
26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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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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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나도 억울하네(1).

DUMMY

길이 거칠다.


같은 길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무당산을 오르는 중에는 길이 나쁜 줄도 모르고 올라왔는데, 내려가는 길은 유독 잔뿌리가 걸리고 길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거슬렸다.


무당을 찾는 향화객들의 발길이 끊긴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 와서 길이 거칠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했다.


길은 그대로다.

지나는 사람의 심경이 변화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서균이었다.


서균은 눈높이까지 뻗어온 식물 줄기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었다.


“감히······.”


다 망한 문파 주제에 사갈파의 칙사인 그에게 그런 모욕을 줘?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무당은 정말로 망한 줄 알았다.

처음 나타난 허겸이라는 대제자부터가 너무나도 약해 보여서 놀란 서균이었다. 그런데 이어서 나타난 장문인이라는 작자까지 손을 섞어보면 쉽게 이길 것 같지 않았던가?


장문인이 그 수준이면 문파 전체의 수준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남존무당은 죽었다.


서균 따위는 쳐다도 볼 수 없는 고수들을 매일 매시 양성해내던 명문은 이제 그곳에 없다.


‘그랬어야 했건만!’


서균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강렬한 통증이 아니었음에도 생생하다.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짜증을 내면서도 산을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빨리빨리 안 와!”


서균이 뒤를 돌아보며 호통쳤다.

그를 따라 산을 올랐던 애꿎은 호북민들에게 성질의 화살이 돌아갔다.


“네놈들 시간이랑 내 시간이랑 같은 줄 알아? 길도 없는 산중에 버리고 가줘?”

“죄, 죄송합니다!”


장정들이 데인 것처럼 놀라면서 허겁지겁 비탈길을 내려왔다.


“쯧.”


짧게 입소리를 낸 서균이 다시 앞을 보고 산길을 헤쳐나갔다.


‘그래도 건진 건 있다.’


명 받은 바는 수행하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실패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무당의 힘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니 나름대로 큰 성과였다.


실패는 이미 만회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공을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할 이유가 없었다.


‘신속하게 보고를 올려야겠어.’


초조하게 입술을 핥은 서균이 발걸음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순간 서균의 눈이 번뜩였다.


“어느 놈이냐!”


소리침과 동시에 서균이 꺼낸 부채에 공력이 실어 휘둘렀다.


파사사사사삭!


서균의 부채는 단순한 부채가 아니었다.


강호의 병장기 중 하나인 철선(鐵煽).


독특한 병기지만 그 특유의 풍압을 활용한 공격과 형태가 변화하는 변칙성이 위협적인 무기였다.


서균이 펼쳐졌던 철선을 탁 접었다.


“······산짐승인가.”


기척이 느껴진 수풀에서 청설모가 나왔다.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과민반응을 한 것 같았다.


서균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간다.


“어지간히도 얕보였나보군.”


접혔던 철선이 한 순간에 반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동시에 서균의 등 뒤에 있던 나무가 사선으로 베여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나무 뒤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 역시 몸뚱이가 사선으로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따라오던 장정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들짐승의 기척과 사람이 내는 인기척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나를 무시한 것이 네가 죽는 이유겠군.”


서균은 천천히 걸어서 쓰러진 나무의 뒤편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어?’


서균의 미간이 좁아졌다.


적어도 급하게 도망쳤다면 바닥을 박찬 흔적이라든가 공격에 스친 핏방울 정도는 남았어야 했다.

공격이 엇나갔다는 증거였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무당의 무학이 원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성질인 건가? 방금 전의 어린놈에게서도 아무런 특이점을 보지 못하였거늘, 이외에도 이만한 실력자가 있었을 줄이야.”


무당의 무학에 대한 정보까지 알아냈다.


이만하면 실패를 어느 정도 변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서균이 비죽 웃었다.


“내 앞에서 숨는 일 따위가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서균의 소매에서 철선 하나가 더 나왔다.


양손에 부채를 펼친 서균이 예(乂)자로 그것들을 휘둘렀다.


슈카카카카칵!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예기가 서린 광풍이 나무 기둥을 두부처럼 썰어버렸다.

수백 조각으로 썰린 나무 기둥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자신만만했던 서균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에도 나무 뒤에 사람은 없었다.


“우습구나.”

“!!”


목소리가 들린 곳은 서균의 귓전이었다.

정확하게는 등 바로 뒤.


서균이 발작하듯 뒤돌았다.


그의 등 뒤에 서있던 것은 체격이 외소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눈에 있는 커다란 흉터로 보아 장님인 것 같았다.


노인의 손에는 날 없는 칼자루가 들려 있었다.


날이 없는.


칼은 베기 위한 무기다.


그런데 그 칼에 날선 쇠붙이가 달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과연 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칼자루를 휘두르는 일에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서균은 다음 순간 사력을 쥐어짜내서 철편을 들어야 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칼자루에는 분명히 서슬퍼런 날이 붙어있다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아무것도 없는 칼자루가 우에서 좌로 한 차례 훑고 지나갔을 뿐이건만, 서균의 철편은 한 쌍은 마치 무 썰리듯이 서걱 하고 잘려나간 것이다.


분명 공력을 주입해서 쇠보다 단단해졌을 철편이었다.


“크으윽!”


서균이 복부를 쥐어잡고 물러났다.


횡으로 길게 베인 의복 위로 시뻘건 선혈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깊었으면 즉사였다.’


만약 본능적으로 막지 않았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절되었을 것이다.


서균이 숨을 몰아쉬며 노인에게 물었다.


“귀하는 무당에서 오신 게 아니오? 무당에 아직 연배의 고수가 남아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만.”

“무당에서 왔냐라.”


어려운 물음이었다.


정군자가 무당의 소속이냐 하면 아니지만, 정군자의 행동원리는 분명 무당에 있었다.

허나 대답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곧 죽을 놈이 알아서 무엇하겠느냐. 죽은 거나 진배없는 이에게 진실을 말해줄 이유는 없지. 그렇지 않나?”


정군자가 무당고검을 겨눴다.


그러자 서균의 뒤편에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뒤늦게 굉음을 내며 기울기 시작했다.


산짐승들이 일제히 도망친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곧이어 울창했던 산속의 정경은 깔끔한 벌판처럼 트였다.


횡베기 단 한 번의 결과였다.


그것도 날 없는 검의.


만약 저 칼자루에 진짜 날이 달려 있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정군자가 무심하게 한 걸음 다가왔다.


서균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그 작은 행동이 지금 서균이 느끼는 공포의 크기를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죽는다.

여기서.


이 대낮의 산중에서.


서균의 머릿속에서 공로니 실패니 하는 단어들은 이 순간 전부 깨끗하게 지워졌다. 오로지 살아남는 일만이 서균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째서 물러나는가? 자네의 바람대로 숨는 것 따위는 불가능한 지형을 만들어 주었건만.”


정군자의 걸음은 마치 마실을 나온 듯한 가벼운 걸음이었다. 그는 사박사박 흙길을 걸어 서균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마!”


서균이 정군자를 향해 길이가 짧아진 철편을 마구잡이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정군자가 암기처럼 쇄도한 철편을 피하는 동안, 남은 내공을 전부 발바닥의 용천혈로 돌려 폭발적으로 달렸다.


정군자에게서 도망치는 방향이 아니라 파고드는 방향이었다.


도중에 칼을 맞으면 죽는다.


서균으로서는 목숨을 건 도박수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내공을 모두 끌어다 쓴 보람이 있었다.


“하하, 하하하하!”


서균이 달려간 방향은 정군자의 뒤편.

그가 선동해서 데려온 마을의 장정들이 있는 쪽이었다.


서균은 재빠르게 장정들 중 하나를 붙잡고 손날을 세워서 목에 갖다 댔다.

날붙이 하나 들리지 않은 손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아는지, 인질로 삼아진 사내가 덜덜 떨었다.


반대로 서균의 몸은 화끈 달아올랐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움직이지 마라!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이놈들의 목숨은 없다!”

“······.”

“알고 있겠지? 병장기가 없어도 양민 서넛쯤 눈 깜짝할 새에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걸. 흐흐흐.”


됐다.

이대로 빠져나가면 된다.


산 아래까지만 가면 완전히 사갈파의 손바닥 안이다. 이 노고수도 사갈파의 인원이 사방에 쫙 깔리면 별 수 없으리라.


무모한 도박이긴 했지만 승리의 대가는 톡톡했다.


서균이 회심의 미소를 지은 순간이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

서릿발같은 경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다.


정군자의 우묵한 안와가 서균의 방향을 물끄러미 향하고 있었다.


“그게, 인질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정군자의 손가락이 천천히 들려서 서균이 붙잡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마치 사물을 가리키는 듯했다.


정군자가 인질로 잡힌 사내와 떨고 있는 호북민들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는 말게. 딱히 그대들의 잘못을 탓하는 건 아닐세. 세금을 다섯 배나 올린다는 건 자네들에게 있어서도 생사가 걸린 문제였을 테니까 말이야. 힘 있는 자들이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데 그대들에게 별 수야 있었겠는가?”

“마, 맞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사내가 살고 싶다는 듯이 소리쳤다.


정말로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정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하지.

억울할만하다.


정군자가 저 억울함을 알아주지 못하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저들이 사갈파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군자도 마교의 침공에 날벼락을 맞았다. 자고 일어나보니 난데없이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의 억울함을, 정군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질릴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대들도 이해해주길 바라네. 나라고 어쩔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쥐새끼를 살려서 보내면 무당에 화가 닥치네. 피차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니 나의 불가피함 또한 알아주길 바라네.”

“······.”

“과거였다면 내가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들을 구하는 길을 택했겠으나, 그대가, 그대들이 방금 알려주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불가항력인 일이라고.”


자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매마른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내가 정군자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봤다.


정군자는 푸근하게 웃었다.


“나도 억울하네.”


웃는다.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는 듯이.


그 미소는 속세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벗어던진 도사의 허허로운 미소와도 같았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찡그리거나,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면 이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으리라.

최소한의 인정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정군자는 그들이 죽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말이 농담처럼 들리는 거냐! 다가오면 이놈들 전부 죽여버린다니까!”

“······.”


정군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멈출 생각 없는 걸음이 통렬하게 그의 의사를 전하고 있었으니까.


서균의 얼굴색이 퍼렇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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