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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scient
작품등록일 :
2023.05.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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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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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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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4개월차 -2-

DUMMY

왕은 선대 왕들에 비해 무능했다. 그 선대 왕이 영조와 정조였으니 사실 그보다 유능한 왕이 되려면 최소한 세종대왕급의 성군은 와야 비벼볼 수 있었으리라.


사실 지금 왕도 비교적 무능한 것이지, 평범한 왕은 되고도 남았다. 환경만 도와줬다면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왕위에 오를 자가 아니기도 했고.


지금 왕은 정조의 적장자 문효세자가 너무 일찍 죽었던 때문에 고작 열 살의 나이로 보위에 올라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로 만 가지 업무를 떠안아야 했고, 결국 정순왕후가 뒤를 봐주게 되었으니 사실 욕 먹기엔 억울한 부분이 있으리라.


게다가 정순왕후가 지금 왕이 어릴 적 뒤를 봐주게 된 데에는 정조의 역할이 크기도 했다.


정조는 술 담배를 즐겼다.


“옛 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의 팔환은배(팔각형 모양의 은잔, 약 220ml)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과 각신 서영보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참고로 이때 왕이 내렸던 술은 도수 30~40퍼센트에 달하던 증류식 소주였고, 그것을 220ml 잔에 담아 원샷을 시키는 것이 정조의 취미였다. 그것은 아끼는 신하인 경우 더더욱 심했으니, 정약용에게 필통, 그것도 조선시대의 2~4리터씩 들어가는 필통에 소주를 가득 담아 먹인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담배처럼 유익한 것이 없다. 담배가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온 국민에게 흡연을 장려하던 골초에 '불취무귀' 즉, "취하지 않은 자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말술을 즐기던 정조는 자신의 생각보다 건강의 악화속도가 빨랐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다스리는 조선을 만들어 보고자 했으나,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정조는, 급히 세자비를 간택하고 후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가 그렇게 경계하던 외척 정치를 김조순의 딸을 세자비로 올리면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고야 만 것이다. 거기다 외척인 반남 박씨나 안동 김씨가 어디 보통 집안이었던가. 영조와 정조 시절 강대했던 왕권은 쪼그라들어 다시 신권, 그것도 몇몇 세도 가문이 주도하는 신권이 강한 조선이 된 것이다.


문제는 그 ”몇몇 세도 가문이 주도하는 신권“이었다. 조선 정치의 백미라고 한다면, 흔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라는 말로 유명한 자기 목숨을 걸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견제 장치가 매우 강했다는 것이었다.


사헌부, 사간원은 대놓고 왕과 의정부, 육조를 감찰하고 태클 거는 기관이었고, 왕권 또한 신료들에게 직접 태클을 당하는 것이 흔한 조선 정치 체계였다. 괜히 ”죽여줍시옵소서.“라던가 ”지부상소“ 즉 도끼를 등에 지고 임금 앞에 목숨을 내놓고 직언을 한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대신과 간관들만 왕과 서로를 견제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일개 기생조차도 왕에게 술 좀 작작 쳐먹고 계집질 좀 그만하라고 지부상소를 올릴 정도로 그른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직언을 하는 것이 흔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 몇몇 세도가문이 장악한 조정은 더 이상 정상적인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대간과 간관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문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 상대파를 공격하고 탄핵하였다. 의정부와 6조는 이미 비변사 아래로 들어간 지 오래라 삼정승과 육판서 위에 비변사 도제조와 제조가 있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실제로 김조순의 경우에도 직접 정승과 판서를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비변사 도제조도 당연히 맡은 바 없었으나, 비변사 제조에는 항상 자신 또는 자신의 가문 사람을 심어두었던 것이었다. 물론, 삼정승, 육판서, 비변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조선은 조선왕국, 즉 국왕이 최종 판단을 옳게 내리면 나라는 잘 돌아갔다. 그것을 증명한 것이 바로 영조와 정조였고.


허나, 지금 왕은 무능하기만 했을 뿐 아니라 정무에서 손을 뗀 지도 오래였는데다 이제는 자리에 몸져 눕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리고 견제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이번 왕의 치세에 미친 짓거리를 한 기록이 남은 바 있었다. 바로 홍경래의 난 때 보여준 뒤처리 과정이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전략-생포한 남녀 2천 9백 83명 안에서 여자는 8백 42명이고, 남자는 10세 이하가 2백 24명이니, 다스리지 않는 데 부쳐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그외 1천 9백 17명은 모두 적 중에서 이른바 친기(親騎, 기병)·장초(壯抄, 속오군 중 무예가 뛰어나 훈련도감에 번상하여 조련을 받던 자)·총수(銃手, 총잡이)·창수(槍手) 등으로서 적의 혈당(血黨, 생사를 같이 하는 무리)이 되었던 자들인데, 은유(恩諭, 은혜를 베풀어 용서함)를 여러 번 반포했음에도 끝내 감격해 뉘우치지 않고 더욱 사납고 완고하여 결코 한 시각이라도 천지간에 살려 둘 수 없는지라, 모두 진 앞에서 효수하였습니다.-후략-"


무려 공식 기록으로만 1천 9백 17명의 목을 잘라 가장 오랜 기간 수성전을 벌이던 정주성-지금의 평안북도 정주시-앞에 기둥을 세우고 머리를 걸어둔 것이었다.



이는 조선 역사는 물론,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경우였다. 조선 왕조가 반란을 몹시 두려워하고 주동자를 엄히 다스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나, 단순 가담자를 포함하여 무려 2천여 명에 달하는, 그것도 대부분 농민인 자들을 정예병인 것 처럼 꾸며 참한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반란이 거의 진압된 4월 중순경, 안주 목사가 국경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던 청국군의 지휘관과 접촉하여 나눈 대화 중에도 이와 모순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에서는 청국군이 국경 근처에서 훈련을 핑계로 계속 머무는 것이 껄끄러웠기에 지휘관에게 목사를 보내어 속내를 떠보라 한 것이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간 후 본론으로 들어간 청국 육군의 지휘관이 이야기하기를,

"황제 폐하께서 예의 그 이양선에 관심이 몹시 많으시므로, 조선이 안정을 되찾고 이양선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정주성의 흉적들을 평정하는 것을 지원하거나, 혹은 지원을 거절하더라도 평정된 뒤에 철수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저의 떠나고 머무름은 전적으로 적도들을 격파하는 것의 빠르고 늦음에 달려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


안주 목사가 답하기를

"이번의 토적은 날이 갈수록 점차 궁박하여 위축되고 있습니다. 적도 중에서 귀순하는 자가 심히 많이 있고 또 양초(粮草, 식량과 말먹이로 쓸 풀)가 점차 떨어지고 있으니, 형세상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컨대 오래지 않아 마땅히 사로잡힐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반란군이라 하더라도 일단 되도록 사로잡은 후, 형식상으로라도 그 연유를 국문을 거쳐 상소히 알아보고 나서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등, 일단 생포가 가능하면 생포하는 것이 법도였던 것이었다.


이어서 청국군 지휘관이 다시

"어찌하여 즉시 격파하지 않아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점차 피곤하게 합니까?"라고 묻자,


목사가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 백성이 우리 백성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께서 특별히 호생지덕(好生之德,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여 죽이지 않는 덕)을 베푸시어 수괴로서 반드시 죽일 자를 제외하고 협력하여 따른 무리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셨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감히 지나치게 살육을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시일이 조금 지연되게 되었습니다. 목책을 겁략할 때 도망해 흩어진 부류들은 이미 모두 뒤쫓아 잡아 그 정황을 조사한 뒤 혹은 참하기도 하고 혹은 용서하기도 했습니다."라고 하여, 분명히 주동자가 아닌 자들은 용서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김을 알고 있었다.


허나, 왕의 윤허를 구하거나 국문을 열거나 하는 일 없이, 정주성에서는 살아남은 3천여명의 반란군 중 10세 이하의 남자와 여자를 제외한 2천여명이 효수되었으며, 살아남은 나머지 인원에 대한 기록도 일체 남은 바 없었으므로 그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더욱 가관인것은, 그로부터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인정전에서 왕이 직접 반포한 교문의 내용이었다.


"-전략-이미 홍경래, 김창시, 이제초-중략- 등을 율에 의거해 정형하고 가산을 적몰하였으며, 나머지는 함거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마땅히 같은 법을 베풀 것이다. 비록 반란에 관한 율이 엄하나, 천지의 큰 덕은 반드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애를 앞세운다. 무릇 강개하여 충성을 바친 자는 차등을 두어 논상하고, 실수로 적에게 붙은 자는 모두 그냥 두고 묻지 말라."


이미 정주에서만 이천여 명을 참하여 효수하고, 죽은 자도 부관참시를 하였고, 오직 아주 어리거나 여자들만 살아남았고, 그나마도 죄를 면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왕은 현실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인정전에서 대소 신료들 앞에서 지껄여 댄 것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저 때는 왕이라도 있어 형식적인 보고라도 올리고 윤허를 받아 일을 처리하던 것의 상황이 저러했으니..


공충도의 이양선에 관한 일도 저 홍경래의 난때와 마찬가지로 싹 쓸어버리면 일석 이조, 아니 일석 오조는 될 법한 것이었다. 이양선과 통교를 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거기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리는 자들도 부지기수라니 참하여 일벌백계를 할 명분도 있고, 눈치를 볼 왕도 없었으며, 권력을 얻는 데 있어 문제 요소가 될 만한 저 이양선과 그에 연결되어 있는 반남 박씨와 정약용 일파, 그리고 저 공충 감사까지도 한번에 쳐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역풍이 두려웠으나,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청 황제의 눈에도 들어 조선의 실권을 잡기에도 무리가 없으리라. 이양선 자체도 금성 철벽과 같다고는 하나, 이미 모든 포탄을 써버렸고 다른 무장은 없다고 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비국에서는, 풍양 조문과 안동 김문이 주축이 되어 서로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원래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내부의 결속이 다져지는 법. 이번 기회에 이양선에 연결된 모든 끈을 떨구고, 그와 관련된 인연과 흔적을 지워 이양선이 아무런 미련 없이 청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해주기로 했다.


물론 다소간의 피는 흐를 것이었으나, 어차피 지금 마량진 근처에 모인 자들은 긴 흉년과 세금 징수에 지쳐 고향을 등지고 도망간, 무토불농층(無土不農層), 즉 자기 땅도 없고 농사 지을 곳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마디로 싹 다 죽여도 뒤끝도 없고, 농업 생산력에도 크게 영향이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무지렁이들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서북 지방의 광산에 일하러 갔다가 홍경래의 난에 휩쓸려 목이 잘린 수천여 명의 몰락 농민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결국 또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시기가 찾아오리라. 그들은 그렇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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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0개월째 -2- +2 23.05.26 39 4 15쪽
12 10개월째 23.05.26 35 4 14쪽
11 9개월째 23.05.25 33 3 15쪽
10 8개월째 23.05.24 40 5 15쪽
9 일곱달째 23.05.22 46 3 15쪽
8 여섯달 후 23.05.22 40 2 12쪽
7 넉달 후 -3- 23.05.16 46 2 18쪽
6 넉달 후-2- 23.05.15 44 5 22쪽
5 넉달 후 23.05.13 48 3 16쪽
4 백일 무렵 23.05.11 56 4 19쪽
3 공충도 마량진 앞 바다, 석달 후. 23.05.10 67 4 21쪽
2 4달, 조선 23.05.10 91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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