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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scient
작품등록일 :
2023.05.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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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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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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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4개월차

DUMMY

그렇게 지독히도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조선 조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반역향(反逆鄕, 반란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한 공충도로군.”


공충도의 원래 이름은 충청도였으나, 역모에 휘말리는 일이 잦았던 탓에 이름이 현재의 공충도로 바뀐 것이었다. 그 외에도 충공도, 청공도, 청홍도, 공홍도, 홍청도 등등 홍주-현재 홍성군-와 공주, 그리고 원래 이름에 들어가던 충주, 청주를 합쳐 4개 고을의 명칭으로 나올 수 있는 12가지 조합(4!)중 청충도와 홍공도를 제외한 모든 이름을 다 가져본 지역이었다.


“반역의 땅 충주를 강등하여 유순현이라 하고, 충청도는 청홍도라 불러라!”

“청주목을 현으로 강등하고 충청도를 충공도라고 불러라!”

“충주목을 예성군으로 강등하고 청주와 공주를 합쳐 청공도라고 불러라!”

“청주, 충주, 나주, 원주를 모두 현으로 강등하고 공주와 홍주를 넣어 공홍도라 불러라!”


특히 이번 왕이 다스리는 기간 동안에는 충청도에서 공충도, 다시 충청도가 되었다가 공청도, 이후 다시 이름을 복원했다 공충도로 바뀌는 일이 세 번이나 있는 요주의 지역이었다.


원래 조선 왕조 자체가 쿠데타로 시작되었으니 역모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군사 반란을 어찌나 두려워했는지 조선군 편제에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자리도 없고 장교도 모자랐으며, 지휘권 또한 문신이 행사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심지어 반란 진압때는 서로 다른 소속 군영에서 몇 개 중대급 부대를 뽑아 섞어 새로운 부대, 즉 순무영을 만들어 진압하러 가는 지경이었다.


애초에 훈련도가 높지도 않은 조선군이 원 소속 부대를 떠나 손발을 맞춰본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묶인 후 부대로 재편되어 난을 진압하러 가는 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지휘 체계나 명령이 개판이 나더라도 반란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선 왕실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번 왕의 집권 초기에는 홍경래의 난이 있었고, 이후에도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산발적인 반란과 봉기가 있었던 터라 이후 비슷한 소문만 들려도 그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지워버리는 것이 현 시국이었다.


실제로 지금 충청도가 공충도로 불리게 된 까닭도 청주목 관아 건물에 괘서, 지금으로 치면 익명 게시글이 두 차례 붙었는데, 그 내용이 불경하다 하여 관련 인물을 참하고 청주목을 강등하여 서원현으로 바꾼 때문이었다. 청주의 이름을 써서 충‘청’도였는데 청을 쓸수 없으니 공주와 충주를 써서 공충도가 된 것이었다.


실제 반란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홍경래가 죽지 않았고 진인이 홍하도에 있어 이름은 정재룡이더라.’라던가 ‘군복을 짓기 위해 면포를 사고, 혜성이 자주 나타나고 유성이 은하를 범하였다.’는 불길한 이야기를 한다던가 하는 식의 헛소문을 익명으로 적어 붙이는 것만 하더라도 역모죄로 다스려 삼족을 멸할 정도였으니, 실제 역모를 모의라도 하는 날에는 피바람이 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왕이 쓰러지고 오늘내일 하는 터라 효명세자의 외아들이 사실상 다음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왕은 고작 10살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왕권을 논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다. 그 독서광에 똑똑하고 말빨 좋고 활 잘쏘고, 하여간 다방면에서 천재라 불리우던 정조조차 영조의 손자로 권력을 이어받은 초기에는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니, 파란만장한 권력 투쟁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치열하고 처절하리라. 정조는 자객의 습격을 받았으나 살아남았으며, 척신을 밀어내고 대비의 오빠를 귀양보내고 측근을 숙청하였으며 홍국영을 팽하고 배다른 동생에게 사약을 내리고 또 다른 배다른 동생은 유배를 보내는 등 파란만장하다는 한마디로 요약하기에는 숨막힐 정도로 치열한 권력 다툼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강력한 왕권을 쥘 수 있었으니, 이제 갓 10살짜리 꼬마에게 저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물론 정조는 임오화변으로 자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정조 나이 11살때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직접 본 바 있었으니 상황이 다르기는 했다. 게다가 정조는 제 아버지가 양극성 장애로 의심되는 정신질환을 통해 미쳐가는 모습을 봐 왔으니 지금 10살짜리 세자와 비교하기에는 일렀다.


산전수전 다 겪고 그것을 극복해 낸 정조와는 달리, 지금 그 10살짜리 꼬마 세자는 아직 어렸고, 몸져 누운 아버지 외에는 자기 편이라고는 없는 상태였다. 정조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커져버린 신권, 후대에 세도정치 시기라고 불리는 그 시기가 한창 진행중이던 것이다.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가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동갑 세자빈은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이었다. 세자의 할머니 순원왕후 또한 안동 김씨로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조순이였다. 김조근이 김조순의 재종질으로 7촌이었으니 좀 멀기는 하나, 결국 같은 안동 김씨인것은 마찬가지라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기에는 큰 힘이 되었다.


왕이 쓰러지고 권력에 큰 공백이 생겼다.


왕세자와 세자빈은 열살짜리 꼬맹이인 상황에서 왕실의 어르신이자 실세라면 대비, 즉 할머니와 중전, 즉 어머니가 각각 안동 김문과 풍양 조문의 타이틀을 걸고 권력 쟁탈배 결승전을 한창 진행하며 싸우고 있는 상황이 왔느냐 한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평화로운 조선이라면 자기들끼리 박터지게 권력 다툼을 하거나 아니면 서로 손을 잡고 나라를 반 갈라 나눠먹는 것이 현실적인 모습이었으나... 외부 요인이 너무나 큰 것이 많았다.


그것들 중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 ‘이양선’이었다.


단지 좀 과하게 큰 이양선이겠거니 했던 공충도 앞바다의 그것이 해를 지나고 나니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변수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아둥바둥 한양에서 서로 사이좋게 권력을 두고 싸움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한양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상점이 박살나고 조운선이 불탔으며, 그 와중에 칙사가 다치고 청국이 개입하여 이양선의 나포를 명하고, 위쪽에서는 그 두려운 팔기가 이름을 바꾸어 무력 시위를 하고 있었다.



조정이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 기간동안 공충도에는 철길이 놓이고 쇳물이 흐르며 유민들이 모여들어 과거의 그 공충도가 맞는가 할 정도로 천지가 개벽하는 중이었다.


한양은 사실 한양 나름대로 사정도 있었고, 바쁘기도 했다. 한양에서 일어났던 쌀소동과 모화관 전소 사건 및 칙사의 부상, 그 이후 황제의 경고와 무력시위, 그로 인한 왕의 혼절로 인해 조선 조정은 사실상 가용한 행정력에 비해 들어오는 일거리가 너무나 많았고, 그로 인해 행정이 마비된 상태였다.


가뜩이나 일처리가 늦었던 조선 조정의 업무는 대부분 정지된 상태였고, 그나마 급한 식량난과 역병, 기상 이변을 어찌어찌 처리해가면서 그 와중에 또 뒤로 챙길 것은 챙기기에도 바쁜 시간이 흘러갔다. 사실상 평시 업무도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한양의 관료들은 공충도에 온 이양선에 관한 문제도 어찌저찌 청국으로 떠넘겨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사실상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았기에, 물 밑으로야 치열하게 안동 김문과 풍양 조문간의 눈치싸움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적어도 실질적인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덮어 두기에는 공충도의 상황이 날로 심각해져갔다.


공충도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통한 보고와 세도가들이 풀어둔 정보원들이 전해오는 정보가 점점 급박해진 것이다


게다가 공충 감사가 해미 현감, 서산 군수와 연명으로 올린 장계는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마량진 앞바다의 이양인 사영이 왜구가 조만간 침노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마량진 주변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데 경운기라는 기물을 제공하고, 철조망과 참호라는 것으로 이중 삼중으로 해안가를 방비하였습니다. 또한, 양선의 대포를 먼 바다쪽으로 총 3회 쏘아 시험을 하였는데, 한 번에 열여섯근짜리 장군전 4백여 발이나 200여관의 조란환, 혹은 별대별진천뢰를 쏘아 낼 수 있었는데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오는 위력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포탄을 뒤로 재는 포를 써서 1각(15분)에 포 1문당 30여 발을 방포할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비록 양이의 문물이라고는 하나, 우리도 저와 같은 포를 만드는 법을 익히고 배워 각 진마다 한 문이라도 배치할 수만 있다면...(후략)’라고 장계를 올린 것이었다.


원래 법도나 전례에 따른다면, 공충 감사가 저런 식으로 이양선과 접촉하고 통교를 하는 것 자체가 오랑캐들과 내통하였다고 몰려 효수까지 당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지금 조정은 한양의 사태를 진정시키기에도 행정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굳이 강대한 세력을 자극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왕도 쓰러진 상황이라 무엇을 나서서 하기에도 애매했다.


공충 감사인 홍희근 본인도, 대사간, 호조참판, 관찰사, 그리고 청나라에 두번이나 정사 및 부사로 다녀온 거물이었는데다 가문인 풍산 홍씨 또한 현재 세도 가문은 아니었으니 만만치 않은 명문가인 것도 건드리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풍산 홍씨에는 선조때 공주와 결혼한 부마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왕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그 유명한 혜경궁 홍씨, 즉 정조의 친모가 난 가문기도 했던 것이었다. 최근으로 따지자면 홍희근의 조부와 아버지도 만만치 않은 벼슬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었고.


또한 저 이양선이 겨울동안 많은 유민을 구휼하여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게 하였고, 해안의 방비를 도왔으며, 양철-좋은 철-도 상당한 양을 공납하였기에 조정에서도 좋게 좋게 봐줄 명분도 어느정도 있었다. 허나 마량진 코앞에서 포를 쏘았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연히 비변사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 날짜가 열흘 뒤로 잡힌 상황이었는데...


또 다른 장계가 올라왔다.


‘마량진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던 이양선과 마량진에 청국과 왜구의 연합 해적 수천여 명이 백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한밤중에 들이쳐 노략질을 하려 하였습니다. 허나 이양선이 이를 알아차리고 빛을 쪼이며 경고를 하자, 먼저 수십여 발 방포하여 이양선을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해적들은 서역의 최신 화포를 가진 배도 있었음에도, 갑철로 둘러친 이양선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양선은 사태가 급박함에도, 배에서 가까운 해적이 아니라 마을을 향하던 해적선단을 향해 연거푸 방포하여, 마량진과 서천에 도착한 적선은 세 척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고기밥이 되었으니 비록 이양선이라 하나,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도착한 세 척의 적선에서 뭍에 오르던 적들도 새로 중수한 보와 참호, 철조망에 걸려 죽었으니 그 수급이 도합 칠십 네 개입니다.


허나 이양선은 한 척인데 남은 배는 수십여 척, 중과부적이라. 남은 포탄을 모두 쏟아낸 이양선에 해적들이 승선하여 이양인 사영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사영의 화공이 성공하여 해적들의 배가 대부분 불살라 없어졌고, 천운까지 도와, 해적들 사이로 독한 역질이 돌아, 살아남은 자가 백에 하나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장계까지 받은 비변사의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청국에 줄이 닿아있던 안동 김문과 김문을 부추겨 청국한테 이양선 문제를 떠넘기게 했던 풍양 조문 모두 예상하지 못한 흐름에 당황한 때문이었다.


이양선이 공충도 앞바다에 1년 넘게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것도 껄끄러웠지만, 딱히 그 이양선을 어쩔 수단이 없는 것은 더더욱 불쾌한 일이었다. 두 가문 모두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였으나, 그들이 잡고자 하는 권력은 ‘조선’의 권력이었지 청국이나 이양선까지 쥐락펴락할 힘을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고, 조선 외의 힘은 솔직한 말로 크게 관심도 없었다.


거기다, 인조 이래로 시간이 오래 지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조선은 청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나라였다. 비록 김문이 청에 줄을 대었다 한들, 그 줄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청나라 그림이나 글, 서적이나 그 외의 문화 교류 및 밀무역으로 보는 이득 약간으로 이어진 끈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끈을 따라 청 황제의 요구가 내려오고, 이어 이양선에 대해 황제의 관심이 매우 높다는 것이 알려진 마당이니 섣불리 무언가 하기도 두려웠다. 그런데 청 해적이, 비록 왜구와 손을 잡고 왔다고는 하나, 그 이양선을 들이쳤고 크게 깨졌단다. 비변사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단순한 해적이었을까? 지난 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왜구가 습격한 일이 없었는데 하필 이 시점에? 이양선에 대한 허실을 알기 위해 해적으로 위장한 자들을 보내 탐색전을 벌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또 들이친 해적의 규모가 너무 큰데?’


그렇게 비변사에서는 다시 긴 고민과 탁상공론만이 이어지고, 결국 상국에 또 사신을 보내 뜻을 물어보기로 결론을 내릴 뻔 했다. 황제가 보낸 ‘칙서’가 아닌 ‘편지’가 비변사로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전의 칙서와는 달리, 미사여구도, 형식도 없이 담백하고 짧게 용건만 쓰인 편지가 비공식적인 루트로 빠르게 북경에서부터 한양으로 전해졌다. 내용도 간결했다.


“황제의 밀사단이 직접 사영을 만나 교섭중이며, 청국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와 그의 배가 조선을 떠나 청국으로 갈 마음을 먹게 하고, 이동을 지원하라.”


비국 제조 조인영이 이야기했다.

“청 황제가 저 이양선이 탐이 나기는 엄청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영길리에게 지금 심하게 수탈을 당하는 중이라 하니, 강대한 수군력이 필요하긴 필요하겠지요.”


제조 김기은은 일년 새 많이 기가 꺾여있었다. 비록 안동 김문의 세가 더 강대하다고는 하나, 풍양 조문의 조만영, 조인영 형제만 놓고 본다면 지금 조선에 이들보다 더 경륜이 풍부하면서 권력을 가진 자가 드물었던 때문이었다.


“어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차라리 청국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면 보내는 것이 편하겠지요. 변수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테니 말입니다.”

“어찌 말입니까?”

“그 이양선이 조선에 머물 이유를 없어지게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국의 다른 신료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조인영이 부연 설명을 했다.


“그 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인력과 기술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철을 생산하며, 요사스러운 기물을 만들어 공충도에 뿌리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몇몇이 깨달은 듯 눈이 커지는 자, 고개를 끄덕이는 자, 무언가를 적는 자 등등이 있었다. 조인영은 그것을 보고 잠시 말을 끊었다 빙그레 웃으며 다시 이야기했다.


"이양선은 다른 나라의 배들로, 사사로이 타국과 교류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하고 있소이다. 허나 최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화응하여 그 속에 들어간 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 조국을 버리고 무모하게 다른 나라의 배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헤아려본다면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요사이 감사나 수령 노릇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가혹한 정사를 실시하면서 포용하여 안정시키는 방법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낙담하여 망명한 무리들이 마침내 구차하게 살고자 해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변방 방어가 허술한 것에서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니 국법을 다시 상기시키고 특별히 잘 탐색하고 살펴 종적이 수상한 무리들은 나타나는 대로 체포하여 모두 효수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며 다른 풍속을 철저히 막는 뜻을 보여 줍시다. 사람이 없으면 그 배도 떠날 수 밖에 없을 터, 마침 그 이양선에 포탄도 모두 떨어졌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화공을 걸어 반격할 수도 없을 터이니 배를 직접 치지는 못하더라도 배와 통교하는 인원을 모두 멸한다면 조선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외다.“


”허면... 또 저번 홍경래의 난 때와 같이 그 근방 마을 사람들을 모두 참하자는 말씀이시오?“


”그렇소이다.“


조인영은 차가운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시 말했다.


”국운이 경각에 달렸소. 어떤 희생도 과도하지 않으며 어떤 반역도 가볍게 취급할 수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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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곱달째 23.05.22 46 3 15쪽
8 여섯달 후 23.05.22 40 2 12쪽
7 넉달 후 -3- 23.05.16 46 2 18쪽
6 넉달 후-2- 23.05.15 43 5 22쪽
5 넉달 후 23.05.13 48 3 16쪽
4 백일 무렵 23.05.11 56 4 19쪽
3 공충도 마량진 앞 바다, 석달 후. 23.05.10 67 4 21쪽
2 4달, 조선 23.05.10 90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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