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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scient
작품등록일 :
2023.05.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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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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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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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넉달 후 -3-

DUMMY

“안 되겠소, 튑시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으나, 습격을 당한 것 자체가 이미 큰 일이었던 터라 박규수와 가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과 한양 외각에 남아있던 일가 친척들과 함께 급히 공충도로 향했다.


안동 김문의 감시자들은 이 상황을 보고는 있었으나, 예의 그 쌍열 산탄총을 경계하여 멀리서 감시만 할 뿐, 들이치지는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 책을 최대한 회수하여 사람들의 이목이 이양선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워낙 책의 양이 많았고 여기저기 뿌려진 때문에 완전히 회수하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박규수의 책이 먼저 뿌려졌던 공충도 마량진 일대에는 살 길을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조선 팔도는 요 몇 년간 기상 이변으로 인한 이상 저온 현상과 천재지변이 겹쳐 몇 년째 흉년이 지속되고 있었다. 여기에 정치 불안정과 삼정의 문란이 겹쳐져 기근이 시작되었고, 그 참혹함이 매해 신기록을 달성하고 있었다.


유난히 춥고 배고픈 겨울을 어찌어찌 버텨내더라도 봄까지는 또 어떻게 버틸지 고민하던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서로 모여 도적질을 하는 무리가 되거나 아니면 세금이라도 피해보고자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었다. 사정이 심각한 곳에서는 서로 자식을 바꾸어 삶아먹거나 입이라도 하나 줄여 보겠다고 젖먹이나 노인을 강에 던지거나 산에 버리는 일도 종종 들려오던 때였다.


그러니, 먹고 살만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공충도 마량진 근처에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단순 소문뿐 아니라, 언문과 한문, 그리고 간단한 삽화가 들어간 책자가 뿌려졌으니 배고픈 사람들이 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쌀이나 잡곡이 아닌 벌레와 녹말가루, 감자를 먹이기는 했으나, 배 부르고 등 따시게 지낼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이기엔 충분하였으리라. 문제는 인구 늘어나는 속도가 어마무시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가린데..."


그래서 사영은, 원시적인 제련소와 발전소, 화학공장을 짓고 배 복구에 필요한 물자들부터 뽑아내려던 계획을 틀어 가장 기초적인 상하수도부터 만들고 식량과 연료를 추가로 생산할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배에 있는 원전을 돌려 나오는 전기와 열 에너지로 포도당을 합성하고 녹말을 만들고, 질소 고정 남세균과 녹말을 써서 효모를 배양하고, 효모에서 알콜과 아미노산을 뽑고, 증기를 전기분해하고 고온 고압 조건을 만들어 탄소와 수소를 합쳐 연료를 뽑고, 나오는 효모 찌꺼기와 녹말로 밀웜을 키우고 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사람들의 식량을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 남자 1명이 얼마나 먹는다구요?"

"7~10홉 정도면 하루를 그래도 버틸 수 있습죠."

"한 홉이 얼마나 됩니까?"

"이게 한 홉입니다요."


이 시대의 한 홉이라는것은 대략 소주 한잔 반 정도의 양인 듯 싶었다. 문제는 쌀로 7~10홉이면 밥으로 따지면 최소 20~30홉은 될 것인데, 거의 1.5~2리터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이만큼을 하루에요?"

"조금 적지요? 대풍이면 그보다 반 곱절은 더 먹습니다요."

"...그렇군요."


조선 사람들의 식사량을 듣고 사영이 우려했던 대로,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원에 슬슬 한계가 온 것이었다. 가뜩이나 굶주렸던 사람들이었고, 원래 어마어마한 식사량을 자랑하던 한민족이었다. 먹을 것에는 항상 진심인 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식량을 받게 되자, 그만 그동안 억눌려있던 식탐이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다 먹었니? 언제 더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더 먹어라.”


집도 짐도 없이 아들 딸 한 무리를 끌고 온 할머니 같은 엄마는 자식의 배를 꾹꾹 눌러보면서 속이 꽉 찼는지 가늠해가며 억지로라도 찐 녹말 떡을 밀웜 가루를 반찬삼아 더 못 먹을 때까지 눌러 넣었다.


“더 못 먹겠어요.”

“그래도 먹어야 한다. 언제 또 먹을 것이 떨어질지 몰라.”


그런 광경이 흔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영은 중얼거렸다.


“그래도 원자로라도 있어 다행이지..”


사실상 배는 구동계가 대부분 맛이 간 상황이라 항해는 어렵지만, 발전소로서의 역할은 꽤 잘 해 내고 있었다. 초고온 가스 증식로 방식의 원자로는 다행스럽게도 핵연료 증식과 재활용이 가능했고, 핵종도 크게 가리지 않앗다. 사용한 핵 연료가 장전된 탄소구를 깨고 적당히 녹여 내용물을 원심분리하자, 양질의 플루토늄을 포함한 온갖 뜨거운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처럼 원자로 한 개만을 가동한다고 한다면 덕분에 적어도 연료 걱정은 한 백여년쯤 할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구동계를 복원시키고 나머지 원자로를 다 돌린다고 한다면 지금 있는 핵 연료로는 부족하지만.


‘저것을 복원시킬 기술력을 쌓는 데도 아마 백여년은 걸리지 않을까...’


덕분에 인력은 충분해졌다. 전기나 경유 등의 에너지도 그럭저럭 쓸 만큼은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자원이 모자란 상황이다. 철, 나무나 볏짚은 물론이고, 똥, 오줌까지도 버릴 상황이 아니었다. 완전 밀폐 가능한 정화조를 제작해서 사람들의 분뇨까지도 모아다 유용한 균을 키워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배에는 생물학 실험실과 창고들이 있었고, 액체질소가 가득 채워져 있는 그 창고에서 사영은 당장 쓸 만한 몇몇 세균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식량과 연료로 사람을 부렸다면, 이제 똥오줌과 각종 찌꺼기로 세균들을 일 시킬 차례였다. 아울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이상, 전염병을 무시할 수 없으니 상하수도는 무더위가 찾아오기 전에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상하수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공사를 시작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첫날, 마을 사람 장돌석이 보고 가서는 어떻게 소문을 내었는지는 몰라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소문이 퍼졌고, 한겨울이었음에도 10마력짜리 경운기 엔진으로 땅을 까고 구운 토관을 길 좌우로 깊이 경사를 주며 상하수도관을 구별해서 묻고, 중간중간 유지보수용 구덩이를 파고 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은 침전조와 염소 살균조를 거쳐 도기 관을 통해 몇 군데에 있는 마을 공동 취수장으로 들어갔고, 하수와 똥오줌은 토관을 거쳐 한 곳으로 모이게 되는 구조였다.


해수 배터리를 통해 필요한 염소와 수소는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전력이 남는 경우, 해수 배터리에 전기를 공급하면 음극에는 소디움(Na)이온이 석출되고, 방전시에는 물 자체가 양극으로 작용하는 방식의 배터리는 부산물로 염소 가스가 나오는데, 이를 끌어다 상수도 소독에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오랜 굶주림에 면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이질이나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없었다. 덤으로, 우물이나 냇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수고도 각 마을의 일정 지역별로 공용 수도망을 만든 덕분에 노동력이 절약되는 효과도 있었다.


“어, 시원하다!”

“이걸 모르고 어찌 살았을까?”


간단한 위생 교육과 함께, 물을 쓰기 쉬워지자 사람들은 일이 끝난 후 당연하게 몸을 씻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적어도 이 지역에서만큼은 역병이라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역병 뿐 아니라 자잘한 상처가 심하게 덧나 봉와직염과 같은 심각한 감염으로 악화되는 경우도 크게 줄었다.


“아오 시발 냄새, 좀 씻고 다녀라 미개한 놈아.”

“아니 언제부터 그렇게 씻고 다녔다고 지랄들이야 지랄들이.”

“개밥 썩는내가 나서 같이 말도 못 섞겠다.”


상하수도가 생기기 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냄새가 사실은 심한 악취였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고 나니, 점점 씻는 사람들이 늘었고, 갑자기 배앓이하다 죽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더더욱 사영이 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농사가 한창 바빠질 때 즈음,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일로 돌아가 낮 동안 일하고, 밤에는 한두시간씩 한글과 산술 외에도 기초적인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밤에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흉년에 세금에 농사일로 평년같으면 지쳐 해 떨어지면 죽 한그릇이나 겨우 먹고 주린 배를 쥐고 잠들었던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경운기를 몇십여 대 뿌려 농사에 쓰도록 하고, 수업 후 적게나마 식량을 공급하자 겨울동안 경험했던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까지 더해져 온 가족이 모두 오거나 아니면 적어도 아이들이라도 보내는 집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홍희근이나 박규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두었고, 박규수가 이야기하였던대로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이 합류한다면 사람들을 가르쳐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아마 10년 안에는 어느 정도 결실을 보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분뇨와 하수를 모은 처리장도 몇몇 세균은 배양에 실패했으나, 일부 정화조 겸 배양조에서는 생산물을 뽑아내기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폐수가 섞인 배양조에 녹말, 효모찌꺼기를 추가하여 아미노산을 포함한 질소화합물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여기에 톨루모나스라는 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본격 분뇨에서 적은 양이지만 톨루엔을 뽑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 이제 페놀과 자일렌 합성도 소량이지만 곧 가능해지리라.


그 외에도 뻘밭에 투석식 굴을 뿌리고, 바다에도 케이블을 띄워 부착식 패류 몇 가지를 시험삼아 양식하는 것을 시도하였으며, 가마를 만들어 유리 배양조를 크게 만들기도 하고 있었으니, 이것들 중 몇 가지만 성공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인구를 늘리고, 연료를 더 뽑고, 필요한 물질을 합성하는 데 필요한 원료 수급도 어느 정도는 가능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한 내후년쯤이면 기초적인 분자생물학 실험을 하고, 플라스미드 조작이나 효모인공유전자 정도는 도입할 수 있을수도...’


라며 행복 회로를 돌리던 사영이었다.


한양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조 이후 급성장한 경강상인들은 1800년대 초중반에 이르면 서울에 반입되는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한 운송과 유통을 장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숯, 얼음, 건어물 등등을 매점매석과 독점을 통해 가격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여 재미를 본 그들은, 그렇게 매점매석을 하고 큰 돈을 벌었음에도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돈 일부를 상납하여 세도가들과 끈끈한 커넥션을 형성하게 되었으니 권력까지 빌려다 쓰게 된 그들은 더욱 선을 넘게 되었다. 풍부해진 자본을 바탕으로 권력을 등에 업고, 검계라는 폭력 조직까지 거느리게 된 그들은 더 나아가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에 대해서도 이 짓거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쌀과 보리에 대해 매점매석을 하고,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른 것이었다.


저장 가능한 모든 곡식 물량을 한양과 그 근처 미곡 창고에 쌓아두었으며, 창고가 꽉 차서 더 이상 쌓아둘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멀쩡히 올라오던 곡식을 오래 된 배와 함께 일부러 침몰시키고, 묵은 쌀을 물과 모래를 타서 유통시키는 짓 등등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또한 곡식을 파는 큰 가게 주인끼리 결탁하여 한번에 한 두 가게만 판매를 하고, 나머지 가게는 닫는 식으로 유통을 줄여 저질 쌀을 높은 가격에 팔게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가게 주인은 검계를 동원하여 두들겨 패거나 목을 따는 식으로 유통을 막았다. 한양 근처의 쌀값은 일주일 새 하늘로 솟구쳤으며, 사람들의 불만은 점차 쌓여갈 수 밖에 없었다.


아기고개(현 애오개)는 도성에서부터 마포나루, 인천까지 오가는 주요한 길목 두 개 중 하나였다. 따라서 평소에도 이 길은 사람의 왕래가 매우 많았으나, 박규수를 잡기 위해 세도가들의 주문을 받은 검계와 검계로 위장한 무관들이 아기고개를 막자, 이 길을 오가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길을 돌아가거나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날씨도 점점 더워져 가고, 쌀값도 오르는 데다 그렇게 오른 쌀조차 불량품임에 불만이 가득하던 사람들은, 칼과 몽둥이가 무서워 일단 참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와 그 가노들, 그리고 소들에 의해 검계 무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자, 마침내 분노가 폭발한 그들은 흩어진 검계들의 뚝배기를 두들겨 깨며 그들을 뒤쫒았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아기고개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한 소들과 그 뒤에 매달린 우마차에서 사방으로 뿌려진 책자들은 쌀을 사기 위해 언제 열지도 모르는 싸전 앞에 모여 긴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좋은 심심풀이가 되었다.


언문과 한문이 같이 씌여진 그 책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아는 사람이 소리내어 읽어주게 되었다. 하염없이 줄을 서서 쌀을 사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 내용을 듣기 위해 무리를 지어 둥글게 섰고, 그러한 풍경은 한양 여기저기에 있는 싸전 앞마다 흔한 모습이 되었다.



처음에는 재밌게 듣거나 읽던 사람들은 책의 내용이 끝나갈 때 즈음, 분노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양에서는 곡식을 구하지 못해 이렇게 길게 줄을 섰는데,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이양선이 곡식과 연료를 풀어 사람들을 구휼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끓어오르던 분노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하였고, 혼자 방에서 읽은 것이 아니라 무리지어 들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논쟁이 벌어진 때문이기도 했다.


현대로 치자면 키배가 오프라인에서, 그것도 같은 주제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거기다가, 검계들을 따라가던 사람들이 보았던 것에 대한 썰을 풀면서 한양에 마침내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글세 그 검계라는 놈들이 알고 보니 군관이더라니까?”

“정말이야? 기생집하고 장사치들 뒤 봐주던 한량들 아니었어?”

“환도에 쇠사슬로 된 갑옷 입은 놈에, 쇠도리깨 쓰는 놈도 있었다니까? 게다가 그 소끌고 온 양반이 글쎄 ‘너 군관이지!’이러니까 어버버버 하더라니까?”

“참말이야? 아이고 말세네 말세여.”

“게다가 어제 아기고개에서 총통에 맞고 도망가던 놈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아?”

“기생 기둥서방놈들이 많을테니까.. 청계천쪽으로 도망갔나? 아니면 남촌?”

“글세 그 싸전놈들 창고쪽으로 도망가더라니까? 게다가 거기서 물이 뚝뚝 흐르는 가마니 수십 가마를 한참 소 달구지에 싣고 있는 것 본 사람도 부지기수고.”

“뭐야? 보관을 잘못해서 습기먹은게 아니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쌀이었다고?”


소문은 삽시간에 한양 도성 전체를 돌았다. 가뜩이나 한 줌 쌀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이 많던 시기였다. 소문의 확산은 빨랐고, 분노가 퍼지는 속도는 더더욱 빨랐다.


애초에 조선 사람들은 쌀에 무척이나 예민한 사람들이었다. 쌀로 짓는 밥에 관해서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사람이 밥을 잘 짓는데 밥알이 부드럽고 기름지며 윤기가 흐른다."라던가 "조선 사람은 식사 때 항상 쌀밥이 있어야 밥을 먹은 것으로 친다."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고, 임진왜란때 기록된 "쇄미록"에도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할 정도로 쌀을 대량으로, 맛있게 소비하는 것이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런 쌀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 걸렸으니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힘든 일이었다.


성난 군중들은 처음에 쌀 가게로 쳐들어가 잠긴 문과 창고를 부수고 쌀을 끄집어냈고, 무리가 커지면서 닥치는 대로 근처 가게와 상점들을 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태는 방화로 절정에 이르렀다.


“불이야! 불이야!”


한양 시내 여기저기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검계거나 왈자같이 밥 먹고 칼을 휘두르는 자들, 혹은 무관이 제압을 시도해 보려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양의 성난 사람이 모여 무리를 짓자, 그들을 막을 수단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성난 무리는 횃불에 짱돌만 들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무리를 지어 던지는 짱돌은 검계고 무인이고 가리지 않고 대가리를 터뜨리기 충분했다. 가뜩이나 단오를 앞두고, 석전을 한창 연습하던 때라 다들 기량이 잔뜩 올라 있던 때였다. 성난 무리들이 초반에 몇몇 미곡 창고를 부수고, 그 안에 가득한 곡식을 보자 눈이 더더욱 뒤집혔고, 분노한 사람들이 추가로 참가하여 무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다. 싸전마다 불을 지르고, 창고 문을 부수고 닥치는대로 약탈을 시작한 무리들은, 정종근의 싸전에도 불을 지르고 김재순의 창고도 탈탈 털었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한 정종근과 김재순, 그리고 그 일당은 자신의 뒤를 봐주던 세도가들의 집으로 피신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의 집 대문은 단단하기 닫혀 열리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성난 군중에게 잡혀 죽기 직전, 마침내 출동한 금위영 군관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렇게 사태는 사흘이 더 지나서야 간신히 진정되었고, 그동안 옥에 갖힌 자가 부지기수에, 도성 내 거의 모든 상점은 파괴되었고, 마포나루에 있던 배도 절반 이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돌에 맞아 죽거나 다친 관원도 수십이 넘었고, 도성 내외에 화재로 죽은 자와 다친 자, 집을 잃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사건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아기고개에서 서대문으로 넘어오는 길 옆에 모화관이 있는데, 이 소동 와중에 모화관이 불타고 칙사가 돌에 맞아 쓰러진 일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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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1개월째 +2 23.05.29 40 2 18쪽
13 10개월째 -2- +2 23.05.26 39 4 15쪽
12 10개월째 23.05.26 35 4 14쪽
11 9개월째 23.05.25 33 3 15쪽
10 8개월째 23.05.24 40 5 15쪽
9 일곱달째 23.05.22 46 3 15쪽
8 여섯달 후 23.05.22 40 2 12쪽
» 넉달 후 -3- 23.05.16 47 2 18쪽
6 넉달 후-2- 23.05.15 44 5 22쪽
5 넉달 후 23.05.13 48 3 16쪽
4 백일 무렵 23.05.11 56 4 19쪽
3 공충도 마량진 앞 바다, 석달 후. 23.05.10 67 4 21쪽
2 4달, 조선 23.05.10 91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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