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하아.. 뛰어왔더니 힘들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세라는 아직 침대에 누워있던 상태였다.
“야, 이거 먹어.”
“웅..?”
내가 들고 있던 죽을 본 신세라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뭘 이런 거를.. 고마워.”
“됐어, 많이 아프냐?”
아까 전 그녀에게서 열이 좀 있는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놀랐다. 급한 대로 지오를 혼자 밥 먹게 두고 죽만 들고 바로 왔다.
“근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식당 아주머니께 부탁하니까 만들어 주셨어.”
“잘 먹을게.”
오늘 아침에 못 일어난 이유는 이거였나···.
신세라가 죽을 한 숟가락 떠서 내게 내밀었다.
“자.”
“응? 괜찮은데···.”
“너도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오늘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네.
“나중에 매점에서 사 먹으면 돼.”
“잔말 말고 빨리.”
어쩔 수 없이 죽을 한입 받아먹었다.
“응, 그렇지.”
그녀가 생긋 웃었다.
“먹고 쉬어.”
“응, 고마워···.”
“됐어, 아프면 미리미리 말해라.”
“헤헤, 응.”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그녀는 죽을 다 먹고 자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나는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에는 금색의 뒷머리를 묶은 한 소녀가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얼굴을 보니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엘핀, 뭐 사러 왔냐?”
“어?”
그녀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본 후 나인 것을 확인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냥, 필요한 게 좀 있어서.”
“그래? 머리 묶었네.”
“아, 기숙사에 있을 때는 이렇게 있거든.”
이어서 그녀가 내게 작게 말했다.
“묶은 거랑 푼 거 둘 중에 뭐가 더 좋아..?”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대충 먹을 것 몇 개를 집어서 계산을 한 후 매점에서 나왔다.
“엘핀, 기숙사로 갈 거야?”
“아, 응···.”
“그래? 데려다줄까?”
“아.. 아니, 괜찮아.”
“알았어, 그럼 가서 쉬어.”
엘핀이 손을 흔들었다.
“응, 잘 자.”
조금 걷다가 들어가야겠다.
오랜만에 저녁의 찬 공기를 맞으며 걷는 동안 기억을 정리했다. 1학년 때는 큰 사건은 단 하나. 2학기 때 일어날 사건, 2학년은···. 너무 많잖아. 그리고 3학년은 졸업식이 가장 큰 문제겠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미래를 생각하면 어두운 미래밖에 남지 않았으니.
벤치에 앉았으니 손을 펴서 인벤토리를 사용한 뒤 미르의 알을 꺼냈다.
“미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너라도 있었다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상대에게 나는 말을 건넨다. 미르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차원에서 쉬는 것이 아닌 내 몸 근처에서 있었다. 그림자 드래곤이라서 가능한 방법이지만.
미르와 계약하고 난 뒤에는 언제나 미르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미르의 빈자리는 더 커 보인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환수의 알을 부화시키는 법은 잘 모르겠다. 신세라에게 걸리지 않게 몰래 따뜻하게 둬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미동도 없었다.
“미르, 나 한편으로는 두렵다? 혹시, 너를 부화시켜도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면 어떡해?”
오랜만에 혼자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든다.
“나는 막을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나를 회귀시킨 것이 신이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죽게 해주는 것이 더 편했을 건데···.”
앞으로 또 사람들이 죽고, 결국은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을 하니, 힘들다···.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미르의 알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한눈에 들어와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은채원이냐.”
“응? 네가 왜 거기 앉아있냐.”
은채원이 모자를 쓴 채 운동복 차림으로 내 앞에 있었다.
“그냥 바깥공기 좀 맡고 싶어서.”
“그래?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왜?”
“아니, 어딘가 좀 슬픈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인생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평소에 너 같지는 않아.”
“그러냐.”
은채원은 평소에는 눈치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것은 잘 파악한다. 졸업하고도 2년을 같이 다녔으니,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뭐,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닌데? 어디 이 누나한테 말해 봐.”
“누나는 무슨···.”
은채원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너는 보면 뭐든지 혼자서 하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저번에 한민재 때도 그랬고 기념공원에서도 그래.”
“위험하잖아.”
“너는? 위험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한테 의지해 보는 게 어때?”
그 말을 들은 순간,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전생에 은채원이 죽기 직전에 내게 남겼던 말···.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다. 전생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보고, 내 눈앞에서 처참히 죽었던 사람을 보고, 막을 수 없는 미래를 또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 정신은 이미 무너져있던 게 아니었을까?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뭐야, 너 울어? 자, 이걸로 닦아.”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됐어. 나도 너한테 폐 많이 끼쳤으니까 이걸로 끝.”
폐를 많이 끼치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 많이 끼쳤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니 대충 진정된 느낌이다. 그리고 부끄럽다. 입학식 날 엘핀을 보고 길거리에서 눈물을 터뜨린 것보다 지금이 더 부끄럽다.
은채원도 평소랑은 다르게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여러 가지로 고맙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뭐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들어주긴 할 테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힘들어서인지 그녀의 얼굴도 약간은 붉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 맞다. 너 지금 내방 올래?”
갑자기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내게서 떨어졌다.
“뭐?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또 무슨 착각을, 내 방에 누가 한 명 더 있지 않냐?”
“아, 세라가 있구나. 근데 그게 어때서?”
“그 녀석 지금 열나서 누워있어. 병문안이라도 오라고.”
그러자 그녀가 놀라며 말했다.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너를 위로할 게 아니라 세라한테 가야 했네. 그나저나 너 설마 운 이유가 세라 때문이야?”
“그럴 리가 있겠냐.”
스마트 워치를 잠깐 확인해보니, 시간은 통금시간 10분 전이었다.
“은채원, 근데 시간이 조금 애매하다. 그냥 돌아가고 내일 오는 건..”
“그런 거 따질 때야? 얼른 가.”
결국 은채원을 데리고 방으로 왔다.
“세라, 괜찮아?”
신세라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으응, 괜찮아.”
“괜찮기는 아파 보이는데.”
“아니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래?”
은채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야, 은채원. 통금시간 됐어.”
“뭐?”
“어떡할래, 안 걸리게 돌아갈 수 있어?”
걸리게 될 경우, 교내봉사와 같은 벌이 있긴 한데, 그게 하필 체육대회 기간이라 팀 대전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말린 건데.
“으음···. 그럼 나도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지 뭐.”
그녀의 말에 신세라도 맞장구쳤다.
“응, 내 옆에서 자.”
“아니야, 아픈 사람 힘들게 할 수는 없지. 그냥 대충 아무 데나 기대서 잘게.”
에휴···.
“은채원, 내 침대에서 자라 그냥.”
“뭐? 그럼 너는?”
“그냥 바닥에서 자든지 할게.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아···, 아니 그럴 수는.”
내가 대충 포기한 듯 바닥에 누우니까 그녀가 말했다.
“그럼 너, 그냥 나랑 같이 자자.”
“뭐?”
귀가 의심되는 소리다.
“괜찮으니까, 허튼짓 하면 죽여버릴 거야.”
계속 거절했지만, 결국은 진짜 같이 자게 되었다.
“여기 넘어오면 안 된다.”
은채원이 가운데에 선을 긋는 듯한 시늉을 했지만, 애초에 1인용 사이즈여서 의미 없다.
불을 끄고 누우니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거리에서 새근새근하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이미 잠이 든 것 같다.
신경 안 쓸 수가 있겠냐고···.
결국 조금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
누군가가 내 앞머리를 만지는 듯한 느낌이 난다.
“으으···.”
잠이 덜 깬 상태라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뭔가 좋은 냄새가 났던 느낌이다.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오늘도 여전히 신세라가 깨워주지는 않았다. 옆에 은채원은 없는 것을 보아 아마 일찍 돌아간 건가.
조심스럽게 내 위층을 확인했더니 신세라는 아직 자고 있었다.
“신세라, 몸 상태는 어떠냐?”
그녀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아.”
혹시 몰라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아..? 뭐 하는 거야.”
“왜? 확인해봐야지.”
“그.. 그건 그렇지만.”
어쩐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느낌이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은 그냥 쉬어라. 교수님께는 내가 말해줄게.”
“뭐? 괜찮은데.”
“됐어, 점심시간에 한 번 올 테니까.”
“으.. 알았어.”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교실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다른 학생들은 거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침 은채원이 눈에 띄었다.
“야, 은채원 언제 갔냐.”
“어? 그.. 아침에.”
“그래?”
어째서인지 얼굴이 좀 붉어 보인다.
“너도 아프냐?”
“아니거든!”
“그래? 그럼 됐어.”
-띵띵띵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고 백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옆자리가 비어있으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
-띵띵띵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보통 월요일에 오후수업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오늘은 오후수업이 있다.
나는 은채원과 김지오, 엘핀을 모두 뒤로한 채 종이 울리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식당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 혹시 오늘도 죽 될까요..?”
식당 아주머니께 조심스럽게 묻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괜찮단다. 그 친구 아직 아프니?”
“열은 내렸는데, 몸 상태는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지금 방에 있어요.”
“다행이네, 그 친구를 많이 아끼나 봐?”
“네?”
아주머니가 미소 지으셨다.
“어제 밥도 안 먹고 엄청 다급하게 말했잖냐. 받자마자 또 달려갔고.”
“뭐, 친한 친구에요.”
“그러니?”
아주머니가 죽을 건네주셨다.
“여기 있단다. 가져다주고 너도 밥 먹으러 오렴. 준비해둘 테니까.”
“감사합니다.”
죽을 받은 뒤 내 방으로 향했다.
“신세라, 여기 죽 받아왔어.”
그녀가 힘든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응, 고마워. 또 폐 끼쳐버렸네.”
“뭘, 폐 끼친 거 아니라니까.”
내게 받은 죽을 먹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나, 가볼게.”
“어, 응. 오늘 오후수업 있었어?”
“응, 2개 있네.”
“알았어, 다녀와.”
다시 식당으로 향했더니 학생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주머니께 밥을 받았을 때 은채원과 마주쳤다.
“뭐야, 너 이제 밥 받는 거야?”
“넌 다 먹었냐?”
“아, 응 그렇지···.”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도 내 옆에 앉았다.
“왜?”
“그냥 기다려줄게.”
밥을 먹기 시작하자 은채원이 말했다.
“그래서 세라 상태는 괜찮아?”
“응, 열은 내렸어.”
“그래? 다행이네.”
“아침에 언제 간 거야? 몰랐는데.”
“6시쯤.”
“그래? 뭐 불편하지는 않았어?”
내 질문에 그녀가 약간 뜸을 들인 후 아까보단 작게 말했다.
“너, 나 껴안고 잤잖아.”
“뭐?”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약간 분위기가 많이 어두웠네요. 사실 주인공과 가장 오래 있던 게 은채원이라 그녀에 대해서 주인공이 다른 둘보단 그녀를 막대하는 것은 느끼셨을 겁니다. 은채원이 중심인 에피소드를 적었는데 조금 뇌절까지 간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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