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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츄샤 님의 서재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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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츄샤
작품등록일 :
2020.04.22 04:51
최근연재일 :
2022.03.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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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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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7) 6화.[상처입은 여자들]

DUMMY

(1937년 8월 17일)


“나는 아르티아의 국민의 자유와 안녕을 수호하는 숭고한 임무를 부여받아, 나의 직책의 무게를 알고 신념을 다하여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것을 여왕 폐하의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아침부터 리스 일행과 보급관 일행의 도움을 받아 청소를 끝내고, 점심때쯤 드디어 내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원래라면 전임 지휘관과 함께 인수인계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행정보급관이자 사실상 중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던 에일린 상사가 대신 진행을 도와주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중대원들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딱 불신에 찬 눈빛 반, 호기심에 찬 눈빛 반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사기도 많이 떨어진 건지 다들 어수선한 분위기에 복장조차 제대로 챙겨입지 않은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몇몇은 차량을 정비하다 온 건지 취임식이 시작하고 나서야 여기저기 해지고 검댕이 묻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정말이지, 왜 상급 부대에서는 이렇게까지 부대를 방치했나 싶다. 아침에 잠깐 서류를 살펴본 바로는 제 7기병여단 소속의 독립중대라고 하는데, 그냥 시골 구석에 처박힌 부대도 아니고 수도 워싱턴 안에, 그것도 왕성과 그리 멀지도 않은 부대를 이렇게까지 방치한다는 걸 보면 다른 부대들의 사정은 안 봐도 알만할 것만 같았다.


저것 봐, 벌써부터 서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네. 다른 부사관들도 주머니에 손 넣고 언제 끝나나, 하는 눈치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일린 상사 말마따나 지휘관에 대한 존중은 정말이지 1도 없구나.


원래는 연혁도 긴 부대이거니와 최근 신형 장비까지 들여오는 바람에 원래라면 장비 가동률부터 해서 취임식에서 전파받아야 할 사항들이 꽤 많았지만, 어차피 이런 분위기일 것 같아서 그냥 나중에 내가 따로 알아볼 테니 간단하게만 해달라고 미리 에일린 상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30분쯤이 지나고, 취임식의 마지막 파트인 지휘관 취임 연설 차례가 되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게, 첫 만남에서 중대원 모두에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부대 넘버 22가 새겨진 연단 앞에 서서 중대원들을 내려다보았다. 똘끼있어 보이는 몇몇은 같잖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몇몇은 호기심이 어리거나 시큰둥한 눈으로, 또 몇몇은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아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나는 이번에 22중대에 취임하게 된 한영훈 소위라고 합니다.”


내 첫 마디가 끝나자마자 중대원 사이에서 한숨과 비웃음이 섞인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씩 웅성거리는 사이에서 버터 바 자식이라는 단어도 들린 것 같았다. 그래, 한국어로 하자면 쏘가리란 소리지. 나는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침에 중대장실에 만들어놓은 작품이 꽤나 멋지더군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덕분에 아침 운동 좀 했네요.”


그러자 날 노려보던 사람들 중에서 눈에 띄게 내 눈을 피하려는 사람이 몇 보였다. 딱 봐도 누군지 알겠구만, 이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좋아요. 지금까지 이 부대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여기 있는 에일린 상사를 통해 짧게나마 전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난 이 부대를 바꿔나갈 겁니다. 그리고 간부든, 병사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관계없이 존중할 거예요. 물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값싼 정치인의 겉치레이자 사탕발림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지 아닐지는 직접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거기서 말을 멈추고, 나는 다들 나를 올려다봐야 하는 연단에서 내려와 바로 그들의 눈앞에 섰다. 내가 연단에서 내려와 바로 앞에 서자, 방금 전까지 대놓고 껄렁거리던 부사관들도 조금은 움찔하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여자들이었지만 다들 키가 커서 그런지 연단에서 서서 얘기하던 방금과는 달리 반대로 내가 그들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나는 그들 중 아까 내 눈을 피하던 한 하사의 손을 잡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서는 못해요. 보다시피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오늘 당장부터 날 믿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동안만이라도 좋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도는 지켜봐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손을 잡은 그 하사는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여우 수인이었는데, 손을 맞잡은 등 뒤로 산들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굉장히 예뻐 보였다. 적잖이 당황한 듯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읏 하고 숨을 삼키는데,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그녀의 의도대로 내가 계속 열받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란 건지, 아니면 갑자기 손을 잡혀서 놀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듭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연단 위로 올라왔다. 말주변이 없는 나로써는 이렇게 직접 가까이에서 내 뜻을 전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한 행동인데, 지금으로써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기를 바랄 수밖에.


마지막으로 에일린 상사의 구령에 따라 경례를 받은 후, 내 취임식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의외로 걱정한 것처럼 막 야유가 터져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그렇게 다시 중대장실로 돌아와 지휘관 의자에 걸터앉았지만, 어째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이대로 잠들고 말 것만 같았다.


“에린. 혹시 내가 처리해야 할 서류 작업이나 뭔가 있으면 갖다 줄 수 있어?”


“그냥 쉬고 있거라. 리스가 행정실에서 하나하나 인계받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부대 상태를 고려하면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게다. 나도 가서 일손을 도와야 하니, 넌 거기 앉아 눈이라도 좀 붙이는 것이 어떠냐?”


에린이 나를 배려해서 오침을 권했지만, 방금 전에 모든 부대원 앞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서 벌써부터 퍼질러 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소일거리나 부대에 관한 서류를 찾아보고 있는데, 에린이 계속 내 앞에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에, 뭐지?


“리스 도우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에린은 여전히 어딘가 쑥쓰러워하는 듯한 자세로 말꼬리를 흐렸다.


“아, 그... 연설 때 말이다만...”


응? 아까 한 연설 말인가? 그게 왜? 혹시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었나?


“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꽤, 꽤 괜찮아 보였다는 말이니라! 아...앞으로도 네 말처럼 더 정진하여 노력하거라!”


그 말을 남긴 에린은 급히 중대장실 문을 쾅 닫고는 호다닥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 뭐, 뭔가 갑작스러워서 좀 떨떠름하긴 한데... 나한테 뭔가 화난 게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에린 나름대로의 격려라고 보면...되려...나?


멀어져가는 에린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만 들으며 아직도 에린이 사라진 문 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방금 전 에린이 문을 닫은 충격 때문인지 꽉 들어찬 책장 위에 줄지어 세워져 있던 파일들 중 아슬아슬하게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한 개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다른 파일들에 비해 먼지가 거의 안 쌓인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최근 거 같은데...


“...아, 이게 그거구나.”


뭔가 해서 뒤집힌 파일철을 들어 표지를 봤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들어왔다던 그 신형 전차에 관한 파일인 모양이다. 파일 작성 일시를 보아하니 아마도 중대장석이 공석이 된 후 작성되어 행정병이 여기에 꽃아 둔 것 같았다. 파일 가장 앞부분에는 신형 전차의 이름이 작성되어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신형 11톤 전차 LT-35 인수 인계 보고서’


LT-35? 솔직히 이름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전차의 측면도와 함께 개발 국가, 그리고 간단한 스펙이 정리된 표가 눈에 들어왔다.


개발 국가는 체코, 2인 포탑을 채용했고, 무장은 37.2mm 주포에 부무장은 원래 7.92mm 기관총 2정이지만, 아르티아로 들여오면서 M1917A1으로 교체 작업을 하게 된다고 적혀있다. 음, 아마 지금쯤에는 이미 부대 내 정비 창고에서 여러 정비 작업을 거치며 함께 교체되었겠지.


포탄은 전차와 함께 총 1800발을 들여왔고 현재 추가적으로 가져오는 중이라고는 하는데, 이 전차의 포탄 적재량이 72발이라고 적힌 걸 감안한다면... 교전 시에는 거의 이틀치 분량도 채 안될 것이다. 근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포탄 수급이 어려워질지도 모르니 추가 물량이 완전히 확보되기 전까지는 좀 아껴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따 전차도 볼 겸해서 정비 창고에 한번 들러보는 게 낫겠군.


그렇게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창문 밖으로 웬 사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뭐 나한테 월클병이 있는 건 아니고, 진짜로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 밖으로 이 안쪽을 기웃거리는 듯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 안쪽에선 본인의 그림자가 다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아, 설마 또 중대장실 외벽에 페인트칠하러 온 건가?! 그런 거라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아침에 그거 지우느라 근육통 생길 뻔 했다고!


바로 뛰어나가 그대로 문을 확 열어 재꼈더니, 웬걸. 키 큰 여자 하나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 아, 그래. 아까 연설 중 내가 손을 잡았던 그 은발의 여우 수인 하사다. 현재 외벽 낙서의 주범 중 하나로 추정되는 인물이기도 하지.


“아...저...그...”


“...네? 저그요?”


주 종족이 저그이신가? 아니, 이게 아니고. 일단 왜 왔는지부터 물어보자. 아무래도 손에 뭔가를 들지 않은 걸로 봐선... 또 낙서를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일이신가요?”


내가 먼저 말을 걸자,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을 떼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러고서는 축 늘어뜨린 깍지 낀 두 손을 계속 움직였다. 마치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아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낙서 건에 대한 사과를 하러 온 모양인데.


“들어와요. 여기서 이러는 것도 뭐하니까요.”


나는 웃으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이유야 어쨌든 일단 부대원들 중 첫 번째로 나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이다.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아... 저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무시하고 책장 옆에 있는 작은 세면대 위 찬장을 열었다. 아까 유리 너머로 간이 티 세트가 있는 걸 봐두길 잘했네. 음, 직접 차를 우려내야 하는 찻잎통과 간편한 티백이 있는데, 아무래도 티백보단 직접 차를 우려 주는 편이 낫겠지?


“거기 앉아요. 그래도 일부러 와 줬는데,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도록 해요.”


나는 고개로 책상 앞에 있는 응접 테이블을 가리켰고, 이내 자연스럽게 다기 세트를 가져와 그녀와 함께 마주 보고 않았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물주전자는 얼마 안 있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끓으려 했고, 서로 눈을 마주보게 된 우리 주변의 소리는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와 보글보글 하고 물 끓는 소리만이 채우게 되었다.


음, 일단 앉혀 놓기는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낙서 건은 괜찮다고 해야 하나? 이대로 어색한 공기만 흐르게 하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운을 뗄 주제를 고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다행히도 그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우선 사죄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경직된 자세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내가 책망을 할 것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한 것만 같았다. 사실 아까 연설 때에도 그렇고, 이 사람은 다른 부사관들에 비해서는 반응이 그렇게 격하거나 공격적인 편은 아니었다.


다른 부사관들이 대놓고 나를 무시하는 자세로 다리를 떨며 껄렁거릴 때, 이 사람은 그냥 두 손을 모으고 원망에 찬 눈으로 연단에 선 나를 바라보는 정도였으니까. 내가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이 사람의 손을 잡은 것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다. 그 눈에서부터 원래 벽에 낙서를 하고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닌 것 정도는 바로 알 것 같았고, 그런 사람이 저런 눈을 할 정도면 그동안 얼마나 상처를 받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낙서, 말하는 거죠? 당신도, 당신과 함께 한 사람들도 책망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과거 부대 상태를 보면 당신들이 가질 지휘관에 대한 감정이 어떤 상태였을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반응이 시원찮은 걸 보니 아직 그것 말고도 할 말이 남은 것 같은데. 나는 그녀가 편하게 말을 꺼내는 걸 기다릴 겸 해서 물이 끓는 주전자를 가져와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양어머니께서 차를 좋아하셔서, 이 정도는 큰 무리 없이 끓여낼 수 있었다.


그러자 마치 중대장이 직접 차를 끓여주는 것이 엄청 부담되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자신이 하겠다며 다기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그새 잘 우려진 차 한 잔을 찻잔에 따라 건네주었다.


하긴, 이 사람의 반응도 이해가 가는 것이, 전임 중대장들의 만행을 생각해보면 그녀들의 인상에 중대장이라는 직책 자체의 이미지가 얼마나 막돼먹고 고압적인 사람으로 박혔을지는 안 봐도 뻔하니 이런 낯선 지휘관의 행동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부대를... 바꾸실 거라 하셨죠?”


그녀가 어렵게 한 마디를 꺼냈다. 아마도 이게 진짜로 묻고 싶었던 본 용건인 것 같은데, 이 한 마디를 꺼내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마음에 남아있는 일말의 불안을 감추치 못한 채, 마치 나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네. 바꿔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구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우리 모두 정말 바빠질 것 같아요. 그러니 좀 많이 고생하더라도 같이 해 나가봐요.”


나는 웃으며 아까 보던 전차 제원 파일을 그녀가 볼 수 있게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다는 듯,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상관께 드릴 질문으로는 너무 무례한 것 같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를 더 질문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너무나도 정중한 그녀의 말투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무릎 위에 올려준 주먹을 꽉 눌러쥐며 이야기했다.


“저희는 귀족 출신의 전 중대장들에게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도 처음에는 중대장님과 같은 좋은 말이 담긴 취임 연설을 했고, 결과는 늘 같았습니다. 이런 저희에게 중대장님께서는 행동으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지만, 그걸 믿기에는 저희가 너무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뭘 보고 중대장님을 믿어야 할까요?”


그녀는 이 질문을 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내게 뺨이라도 얻어맞을 것처럼.


하긴, 저 말은 곧 이전 지휘관들처럼 너도 우리 뒤통수를 칠 게 분명하니, 나를 못 믿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매우 직설적인 말이니까 말이다. 한 성깔 하는 지휘관이라면 당장 징계를 내리거나 뺨을 후려갈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저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어지간히도 이 사람들에게 남은 상처가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얻어맞을 각오까지 하고 최고 지휘관에게 저 정도의 직언을 바로 눈앞에서 하는 그녀의 한 마디는, 지칠 대로 지쳐서, 질릴 대로 질려서 말을 돌려 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사람의 말처럼 내 가슴에 와 꽂혔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쪽으로 건너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어제 내 큰누나가 나에게 해 주었듯이, 이렇게 누나가 날 안아주면 기분이 안정되었으니까.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그녀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는 와중에도 온 몸이 마치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것이, 맞을 각오를 단단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서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온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내 그녀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자, 왼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천천히, 그동안 꽁꽁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을 수 있게.


“뭘...뭘 하시는 건가요?”


쥐어짜내는 듯한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옛날부터 제가 힘들 때 누나가 이렇게 안아주면 진정이 되었었거든요. 조금은 진정이 됐어요?”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손을 풀어 살짝 떨어진 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앉아있는 그녀와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 눈높이는 거의 엇비슷해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길래, 나는 옷 소매로 살짝 닦아주었다.


“미안해요. 난 말재주는 별로 없어서, 여기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해자, 그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 계속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때리지 않아요. 당신뿐만 아니라 이 부대의 누구라도요. 이 부대에 들어온 순간부터, 당신들 모두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이 사람들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것도 나랑 똑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씩이나.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나를 믿게 하려면 도대체 뭘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나를 받아들여 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과 똑같은 놈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머리 나쁜 나에겐 답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되물어 보았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당장 당신들이 나를 믿어 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썩은 뿌리를 뽑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 결과가 보이려면 조금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거든요. 혹시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당장 나를 믿게 해줄 수 있는 행동이 있다면 부디 나한테 이야기해줄래요?”


솔직히, 부끄러웠다. 직접 보여준다고 당당하게 선언해놓고, 같이 바꿔나가자고 해놓고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야 이 부대 사정을 알았다고는 해도, 이런 계획도 뭣도 없는 무대포인데 도대체 그녀들이 내 어디를 보고 믿음의 여지를 가질 수 있겠어?


그 한심한 말을 끝으로 내리깐 시선의 끝자락에, 아까 연설 때 잡았던 그녀의 손이 보였다. 나는 그때처럼 다시 한 번 그 손을 잡으려고 천천히 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하고 중간에 손을 멈추어야 했다. 마치 그녀와 내 앞을 가로막은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을까?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주제에.


아까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만만하게 그녀의 손을 그렇게도 가볍게 덥석 잡아버렸던 걸까?


그녀 뿐 아니라 모두가 내 존재 하나만으로도 계속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부끄러웠다. 그녀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무작정 다가가 손부터 덥석 잡아버린 멍청한 놈 같으니. 수차례나 나같은 놈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날 봐달라 하다니. 도대체 뭘 믿고? 이름도 모르는 눈앞의 그녀의 얼굴을 도무지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안해요.”


마치 배터리가 끊어진 로봇처럼, 굳어진 몸과 어두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난 속사정도 모르고 무작정 당신들에게 다가가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벌려놓은 꼴이 된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난 정말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까? 다시금 리안과 만났던 처음의 그 의문이 마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다시 입을 떼었다.


“저는 이 부대에 꽤 오래 있었어요. 이미 소대와 분대 개념은 흐려진 지 오래고, 아무래도 병사들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이다 보니, 지휘관이 떠나고 또 새로운 지휘관이 오는 걸 반복할 때마다 늘 제 밑에 있는 병사들을 대표해 중대장실을 찾아갔죠.”


그녀는 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적어도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려고 했어요. 저, 17살에 입대를 해서 올해로 21살인데 상등병 계급을 떼고 하사가 된지는 겨우 두어 달 남짓이랍니다. 이유를 아시겠나요?”


어... 왠지 모르게 이유를 알 것만 같긴 한데, 에이, 설마...?


“처음엔 평민 주제에 자신과 면담을 하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두 번째에는 제 동기가 찾아갔지만, 한 시간동안 욕을 얻어먹고 감봉까지 당했죠. 마지막으로 제가 찾아갔다가 뺨을 맞고, 본보기 삼아 아예 부사관 교육을 받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따지고 보면 진급 누락인 셈이죠.”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당신이, 제가 4년간 군생활을 하면서 처음 면담을 해 보게 된 중대장이라는 거예요. 제대로 된 면담을요. 이 의미를 아시겠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내려와 나와 마주보고 무릎을 꿇었다.


“제가 원하는 건 이미 본 것 같아요. 아직 완전히 중대장님을 믿을 수 있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부대에 변화를 기대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도 당신을 믿고, 도와드리기 위해 노력해 볼게요.”


그녀는 살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방금 전과 달리 씁쓸한 웃음은 아니었다.


“아, 그리고 부대에 대해 궁금하거나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주세요. 적어도 병사들에 대한 부분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사실 상 부대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은 바로 병사니까. 전투력의 대부분을 담당하기에 부대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이들 역시 병사들이다.


“그럼, 먼저 부대 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요? 이걸 제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파일 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어도 나보다 부대에 오래 있던 그녀라면 시설 안내 정도에는 무리가 없을 테고, 무엇보다도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나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그녀가 동행하는 게 좀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지휘관으로써 좀 어떨까 싶긴 하다만, 그래도 린치는 무섭단 말이지.


다행히도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고, 이내 따라오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문가로 걸어갔다.


그렇게 함께 방을 나가기 전,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이름도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제 이름은 케이트, 케이트 폭스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중대장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밝게 웃어보였다. 정말이지, 들어올 때만 해도 어디 도살장이라도 끌려온 듯한 표정이었으면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록 모든 병사는 아닐지라도, 병사들의 대표인 그녀에게만큼은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직 한참이나 멀었지만, 앞으로 여기서 더 노력하는 수밖에.


그래, 이미 썩어서 문드러진 걸 원상 복귀시킬 수는 없으니 아예 새로 시작해야지. 그것도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시간이 헛되지는 않게 말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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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26 갈잎의노래
    작성일
    20.12.21 06:39
    No. 1

    주인공이 애송이넹! 모름지기 중대장이라면 연설의 시작은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로 시작하는게 국룰이죠 ㅋㅋㅋㅋㅋ

    찬성: 2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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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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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13화.[그녀들과 온천에서](1) +10 21.01.28 234 3 18쪽
13 (13) 12화.[너네 이거 성군기 위반이야!(...)] +4 21.01.19 239 3 15쪽
12 (12) 11화.[적 대전차포, 그리고...] +2 21.01.13 230 3 15쪽
11 (11) 10화.[첫 전투] +2 21.01.10 235 3 17쪽
10 (10) 9화.[드리우는 전운] +4 20.12.31 237 3 22쪽
9 (9) 8화.[무너지는 의지] +4 20.12.21 251 3 21쪽
8 (8) 7화.[정비반과 35(t) 전차] 20.12.11 278 4 23쪽
» (7) 6화.[상처입은 여자들] +1 20.12.03 295 5 25쪽
6 (6) 5화.[심상찮은 부대] 20.11.22 328 3 14쪽
5 (5) 4화.[여왕의 선물] 20.10.25 361 3 14쪽
4 (4) 3화.[너희가 내 부관이라고?] 20.10.23 446 3 12쪽
3 (3) 2화.[큰누나의 결심] 20.10.20 609 3 22쪽
2 (2) 1화.[사람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3 20.06.07 1,186 9 37쪽
1 (1) 프롤로그.[소환, 그리고 두 엘프 해병대원] +4 20.04.22 1,924 2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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