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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츄샤 님의 서재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전쟁·밀리터리

카츄샤
작품등록일 :
2020.04.22 04:51
최근연재일 :
2022.03.08 11:44
연재수 :
119 회
조회수 :
17,349
추천수 :
200
글자수 :
565,196

작성
20.10.20 15:21
조회
608
추천
3
글자
22쪽

(3) 2화.[큰누나의 결심]

DUMMY

왕녀라니, 그럼 여왕의 딸이라는 말인가?


“코델리아 왕녀 전하께선 여왕 폐하의 여동생 되는 분이십니다. 현재는 왕가의 호위를 담당하는 시크릿 서비스의 책임자로써, 오늘은 여왕 폐하의 직명으로 선생님을 왕궁까지 직접 모시기 위해 동행하시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지위가 있는 왕녀를 파견했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나름 신경을 썼다는 어필을 하고싶었던 건가?


“제 힘이 닿는 안에서 해 드릴 수 있는건 최대한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분께서는 왕녀의 신분이시기에 체통 문제가 있는 분이신지라... 부디, 빈약한 저의 귀와 꼬리로나마 참아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리안이 난처해하며 말하자 옆에 앉아있던 왕녀가 약하게 헛기침을 두어번 해서 리안을 제지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여보이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리안. 이런 저라도, 와, 왕국과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야... 그게 무엇이 되었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어요. 방금 전에는 그저, 이, 이전에는 그러한 강렬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노, 놀랐던 것뿐이니... 부디 원하시는 만큼, 마, 만져쥬시지여!”


마지막에 혀 씹었다. 으, 꽤 아플 텐데.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나마 어떻게든 왕녀의 체면만은 차려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듯 했다. 원래 성격인 건지 여전히 숫기없고 어딘가 불안한 표정과 말투는 전혀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안에게 소개를 받아 선글라스를 벗고 나서부터는 우리와 전혀 눈도 못 마주치고 있고, 심지어 우리 일행중 누군가 조금만 움직여도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것이 아까의 일 때문에 상당히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아 보였다.

이래서야 정말이지 숨 한번 쉬기에도 힘이 드는데...


“왕녀 전하께서는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신지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조금 힘들어 하십니다. 단순히 긴장하셔서 그러시는 것이니 부디 불편히 여기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아하. 그래서 대중 앞에 나설 일은 있어도 대화할 일은 별로 없는 경호직을 맡긴 건가. 왕녀라면 뭔가 창작물에 나오는 공주 기사처럼 다들 당당하고 도도할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도 내 편견이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웬일인지 아린이가 왕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당신...막내, 인가요?”


“네...네에... 큰 언니, 작은 언니가 계시고, 소녀가 막내이옵니다...”


“언니들의 키는?”


“저...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사오나, 아마...저희 자매들 중에서는, 소녀의 신장이 가장 높지 않을까 하옵니다...”


왜 서툰 영어로 저런 걸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왕녀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알려주려 노력하자 대강 알아들었는지, 아린이는 대뜸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뭔가 통했다는 듯 짠한 표정(이라고 해봤자 가족 말고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미묘한 표정 변화였지만) 으로 지긋이 왕녀를 바라보았다.


막내라는 점과 신장에서 무언가 서러운 동질감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남자 형제 하나가 없는 것만 빼면 형제 구조도 똑같긴 하네. 다만 아린이가 자신의 신장이나 남매관계에 대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크게 신경을 쓴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 와중에 갑작스런 아린이의 스킨십에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왕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이 하얘진 채 손을 붙들려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린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 혹시 통역해달라는 건가?


“어, 아마 이 녀석도 막내인지라 당신에게서 동질감 비슷하게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네요. 아린아, 이젠 덜덜 떨고 있잖아. 그만 놔줘.”


“...넌 몰라...키가 멀대같이 큰 여자의, 고통을...”


아린이가 날 쳐다보며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아, 그런 거였나. 하긴, 왕녀 역시 앉은 키가 저 정도면 적어도 아린이랑 비슷하거나 더 클 테니까, 못해도 한 177cm는 될 것이다. 그래도 아린이는 굳이 키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른 스펙이 화려하니까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나는? 나도 만져도 된대? 응?”


아 참, 이 누나가 있었지. 아까전부터 먹이를 눈앞에 둔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내 통역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작은누나는, 아린이가 왕녀의 손을 덥석 잡는것과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채원아...영훈이 입장이 곤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꼭 해야겠니?”


큰누나가 작은누나에게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작은누나는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이내 내 팔에 앵겨붙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뭐, 일단 하는 행동은 이래도 본 심성은 착한 누나다... 저 활발함과 친화력으로 나를 가장 먼저 가족 속에 녹아들게 해 준 장본인이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져도 된대. 그래도 저 사람 보다시피 잘 놀라니까, 적당히 해.”


“앗싸! 땡큐, 어...프린세스!”


...프린세스라는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에 그렇게까지 시간이 걸린 거야? 적어도 여기서 살려거든 영어 공부는 좀 하는 게 어떨까, 누나.


리안에게 유아용 영단어집을 추천받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운전을 맡은 경호원이 왕성의 도착을 알렸다.


그래서 다행히도 일개 이세계인이 무려 일국 왕녀의 귀와 꼬리를 탐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결국 미수에 그쳤고, 작은누나는 못내 아쉬워하며 차 앞에서 우리 일행과 악수하며 배웅하려는 코델리아를 마치 곰인형 안듯 끌어안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안으면서 슬쩍 꼬리 매만지는거 다 봤거든, 누나?


코델리아는 내일 있을 정식 접견을 위한 경호 인력 배치를 체크하기 위해 나중에 뵙겠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차를 타고 떠났고, 남겨진 우리는 리안과 함께 성의 후문으로 보이는 통로를 이용해 내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라면 환영 인파와 함께 못해도 국빈급의 대우를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이번 일이 원체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다보니 정보 비공개가 불가피해 일이 이렇게 된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리안이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런 대우는 받아봤자 우리가 부담스러워서 오히려 사양하고 싶다. 환영 인파라니, 말만 들어도 벌써 현기증이 나네.


물론 부탁받아 온 것 치고는 음침한 터널같이 생긴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는 모양새가 뭐랄까, 꼭 무슨 죄 지은 사람마냥 영 모양 빠지긴 하지만, 그래도 리안이 말한 환영인파보다야 이쪽이 내 성격상 백배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 저희는 여기서 호위 임무를 마치고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르티아 합중왕국의 경찰이자 한 명의 민간인으로서, 아르티아에 오신 것을 대원들과 함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찰 기동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늑대 수인 아가씨가 후문 통로 입구에서 대원들과 함께 일렬로 도열한 채 절도있게 경례하며 환영 인사를 건네주었고, 그런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던 우리는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를 돌아 그들에게 답례했다.


사실 환영인파는 좀 많이 부담스럽지만,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썩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위대장 아가씨가 말뿐만 아니라 진심어린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런 인사를 건네주었기에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경찰들을 뒤로한 채 앞서 말한 통로를 지나자, 그 건너편에는 어두운 통로 내부와는 전혀 딴판인 성벽 내부 정원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본 건물로 들어가는 타일이 깔린 아기자기한 길을 따라 양 옆으로 마치 미로처럼 정돈된 키 큰 나무들과 넓은 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어서 가시죠.”


그런데 곧바로 본 건물로 들어가는 것은 또 아니었는지, 리안은 타일로 된 길에서 벗어나 옆의 고운 흙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리안이 앞장서서 들어간 그 길은 마치 테마파크에서나 볼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미로에 의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고, 겨우 두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까싶은 좁다란 미로를 지나 마침내 중앙 지점에 도달하자, 좁은 미로와는 다른 꽤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티 파티를 할 수 있을법한 긴 테이블과 여러개의 의자들, 그리고 그 위에는 화려한 브런치 메뉴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곳곳에 배치된 시크릿 서비스의 경호원과 사용인들, 그리고 양산을 든 빅토리안 메이드의 시중을 받으며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코델리아와 닮은 주홍빛 머리칼을 가졌지만 체구는 좀 작은, 하지만 어디서 오는지 모를 기품이 느껴지는 그 사람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느릿하게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젓는 손동작 하나로 양산을 든 메이드 하나를 제외한 사용인과 경호원들을 모두 물렸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녀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무뚝뚝하고 샤프한 인상과는 다르게 인형같은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진한 것이 마치 사흘정도는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


“...어서 오렴.”


그녀가 짤막하게 한 마디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느리지만 우아한 손동작으로 우리에게 테이블에 자리할 것을 권했고, 메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우리에게 차를 한 잔씩 따라주며 말했다.


“...아라비카라는 커피란다. 비교적 부드럽지만 신 맛이 나는데,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구나.”


...차가 아니라 커피였군. 그래도 음료만 커피로 바뀌었을 뿐 모양새는 완전히 영국식 티타임인데, 생전 이런 고상한 걸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선 티타임 에티켓같은 건 전혀 모른단 말이지.


그런 내 의중을 알아챘는지, 여왕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어서 들라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격식같은 것은 차리지 않아도 괜찮단다, 어차피 이곳은 영국도 아니니...”


그러면서 찻잔을 들어 안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뭐랄까, 따지고 보면 미국에 여왕이 있는 셈이고, 미국의 모태가 된 초기 이민자들도 영국인들이었으니 영국식 티타임에서 홍차가 아닌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은가? 물론 영국식 티타임에서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만 말이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여왕은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했다.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너를 불러 전장이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내몰아야만 하는데, 힘없는 나로선 해줄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들밖에 없구나... 성에서 가장 큰 방과 사용인들을 배속해줄 터이니, 부디 오늘은 편히 쉬렴.”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정식 접견은 내일이니 부디 오늘만큼은 푹 쉬어 주시지요.”


하긴, 바쁘다고는 해도 지친 상태에서 첫날부터 바로 있는 정보 없는 정보 다 쑤셔넣으려면 머리 터지지. 더군다나 아까 우리 세계에 있을 때 배불리 먹었던 고기도 어느샌가 다 소화되어 버렸고, 여기 와서 먹은거라곤 기껏해야 아까 지휘 텐트에 구류되어 있을 때 리스와 에린이 떠다 준 물과 자신들의 배낭에서 꺼내 건네준 딱딱한 하드택이 전부였다.

당연히 배고파서 죽을 것만 같았고, 내일부터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뭔가를 먹어 둬야만 했다.


아, 몰라. 먹고 죽은 놈이 발색도 예쁘다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먹자.


그런데 앞에 놓여있던 빵을 집어들고 옆을 돌아보았더니 어째서인지 누이들이 영 풀죽은 표정으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함께 앉아있던 관장님 역시 팔짱을 낀 채 그런 누이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어서 먹어.”


“아...아냐, 아무것도...”


방금 전 코델리아와 만날 때까지만 해도 활기가 넘쳐흐르던 작은누나가 저렇게 이야기하니까 오히려 더 이상하네. 혹시 여왕이 언급한 전쟁이야기 때문인가?


“신경 쓸거 없어. 일단 먹자. 다들 배고플 텐데.”


“으...응...”


그제서야 다들 깨작깨작 먹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먹는 모습들이 영 시원찮았다. 그 바람에 나까지도 이런저런 생각에 식욕이 떨어져 버려서, 커피 두 잔과 빵 몇 조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그만 수저를 내려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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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부에서 받은 대접은 솔직히 뭐랄까, 여러 가지 의미로 상상 이상이었다.


바쁜 일 때문에 가정부를 들이겠다는 부모님의 말에도 가정일 정도는 스스로 하겠다며 극구 반대하던 누나들의 의견에 따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누구에게 시중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정통 빅토리안 메이드들이 하나하나 들어주는 시중을 받는 건 뭐랄까, 신기하면서도 좀 낯선 경험이었다.


“선생님, 물의 온도는 적당하신지요?”


“무언가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주저 없이 종을 울려 저를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네? 시중이 필요 없으시다니요? 저희는 짧은 기간이라고는 하나, 여왕 페하의 명을 받아 선생님의 모든 것을 보좌하는 일을 맡은 고용인입니다. 부디 사양 마시길.”


뭐랄까, 친절도 이런 과잉 친절이 없었다.

아무래도 당시 일반 가정에 흔히 있는 메이드가 아니라 여왕을 직접 보좌하는 메이드 집단이다 보니,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물론이고 여왕이 지정한 손님의 시중을 드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항상 산뜻하게 웃으며 추가적으로 부탁하지도 않은 일조차 눈 깜짝할 새에 같이 준비해두는 바람에 간단히 욕실에서 샤워만 하고 나오려다 하마터면 향초 피우고 거품목욕을 할 뻔했다.

특히 그, 목욕시중만큼은 끝끝내 거절하려 했지만...


“아마도 부끄러우신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저희들 역시 이 자리에서 함께 옷을 벗는다면, 부디 목욕시중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성에 있는 이틀간 내 전속으로 배치된 5명의 메이드 중 아밀리아라는 이름의 레이디스 메이드가 저런 말을 하자마자 나머지 네명이 동시에 옷을 벗으려는 자세를 취하길래, 황급히 말리고는 받을 테니 제발 그만하라고 했다.


다만 남자를 보좌하는 것은 처음인지 의외로 목욕시중이나 환복 시중에는 꽤 서툴렀고, 때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도 했으며, 시중을 위해, 혹은 본인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내게 사과를 하면서까지 뭐랄까, 그 왜, 꽤나 민망할 수도 있는 질문들도 해 오곤 했다.

예를 들자면 목욕시중 때...


“그...상당히 실례되는 질문임을 아오나, 한 마디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예...”


“이곳은...어떻게 씻겨드려야...”


“...안 씻겨줘도 돼요.”


“그...그럴 수는...”


아, 정말 쓸데없이 책임감이 투철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섯 명이서 나를 에워싸고 서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간 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진짜 혀 깨물고 죽고 싶단 말이다...


특히 릴리라는 이름의 단정한 인상의 메이드는 내 외견만을 보고는 사실상 그냥 아이 취급을 했다. 나쁜 의미로서가 아니라,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겠다는 둥, 옷장 안에 부기맨이 있을지 모르니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겠다는 둥, 레이디스 메이드보다는 오히려 너서리 메이드에 가까운 일을 자꾸 나에게 해 주려고만 하는 것이다.


자기 말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모성애를 자극하게 한다나? 하긴, 따지고 보면 원래 세계에서 반 여자애들에게 받던 취급이나 이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진심으로 화내도 치와와가 짖는 거로 본다던 그거 말이다.


“아이, 그런 것과는 다르답니다. 아무리 기르는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하여도, 그것과 자신의 아이를 대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랍니다.”


...이젠 그냥 자기 자식 취급하고 있네. 에이, 몰라. 맘대로 하라지.


잘 때 누가 옆에서 지켜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더 잠이 안 올 것 같았기에 메이드를 겨우겨우 설득해서 다 내보내고는 혼자 침대에 누워 있자니, 갑자기 바깥에서 똑 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드 중 누군가 물건이라도 두고 갔나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순간 문 밖에서 들려온 것은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영훈아, 혹시 자니?”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큰누나였다. 나야 메이드들이랑 실랑이를 벌인다고 아직까지 잠에 들지는 못했지만, 누나는 왜 이 시간까지 잠들지 않은 걸까? 벌써 새벽 1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 말이다.


“아니, 문 열려 있으니까 들어와.”


그러자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흰 파자마 원피스 차림의 큰누나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는데.”


“아, 영훈이 너한테 전해줄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침대에 잠깐 앉아도 될까?”


우리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고, 누나는 그런 내 옆에 올라와 앉았다.


“...여러가지로 걱정이 많지? 누나가 힘이 못 되어줘서 미안해...”


큰 누나는 내 두 손을 천천히 잡더니, 부드럽게 끌어당겨 나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어릴 때부터 큰누나는 이런 식으로 나를 자주 안아주곤 했는데, 친엄마의 얼굴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 품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져, 본의 아니게 자주 응석을 부리게 되곤 했었다.


“아냐, 늘 누나들이나 아린이한테 보호받다시피 하고 살았는데, 이럴 때라도 내 할 일은 해야지.”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팔팔한 누이 둘은 제쳐두고서도, 적어도 큰누나만큼은 특히 자기 몸조리만이라도 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큰누난 평소에는 맏이답게 가장 점잖고 얌전하지만, 동생 일이라면 자기 몸 신경 안 쓰고 일단 뛰어들고부터 보는 성격인지라

솔직히 전쟁터에 따라온다고 할까봐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응,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우리 셋 다 6개월간 아르티아 육군 사관학교에서 임시 부사관 교육을 받기로 했어. 관장님도 보호자 역으로 함께 입교해주신다고 하셨고.”


큰누나가 천천히 나를 놓아주면서 말했다. 역시나, 지금 당장 나를 따라가겠다고 하면 내가 안 된다며 뜯어말릴 게 뻔하니, 그걸 염두해서 낸 누나 나름대로의 타협책인 모양이었다.


“아린이와 채원이한테는 이미 동의를 구했어. 내 동생만 전쟁터로 내보내놓고 다른 애들이나 누나가 편히 있을 것 같니? 물론, 속이 쓰리지만 냉정히 말해서, 지금 우리는 네게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게 분명하니...적어도 짧은 기간이나마 학교를 거쳐 최대한 빨리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할게. 알았지?”


...하아, 예상 못한 반응은 아니지만 이렇게나 행동이 빠를 줄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당연히 지금 당장이라도 뜯어말리고 싶다. 혹여나 가족들 중 누군가가 전사해서 내 손으로 땅에 묻는 어이없는 장면만큼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데다, 그 후에 남은 누이들과 낮선 땅에서 이전처럼 잘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물론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스스로가 한심하긴 하지만, 지휘는커녕 나 자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나의 실수로 인해 가족을 잃게 된다면, 난 내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 집의 가장인 큰누나가 저렇게까지 결정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말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평소에 누구에게든 자기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다,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상대의 의견을 더 존중하는 편인 큰누나가 저렇게 통보하듯 의사 표명을 하는 경우엔, 반론으로 인해 그 결정이 번복되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누이들이 오기 전까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내 빈약한 지식을 동원해 살아남는 것뿐, 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니, 그나저나 각자 독방을 쓸 텐데 언제 셋이서 그런 이야기를 했대?


“아...아무래도 다들 혼자 자려니 좀 그래서 말이야...다섯이서 같은 방 쓰게 해달라고 했거든.”


아 그렇구나...응, 뭐? 다섯?


“응, 영훈이 너도 와서 같이 자자. 오랜만에 옛날처럼 다 같이 침대에서. 침대도 두 개가 붙어있는데다 사이즈도 커서 다 같이 잘수 있을거야. 그 이야기도 같이 할 겸해서 온 거거든.”


아니, 그거야 어렸을 때 일이고...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 먹고는 좀...


“...아린이나 작은누나는? 뭐라고 안해?”


“후훗, 채원이는 오히려 좋다고 하던걸? 그리고 아린이야, 표정으로 알잖니?”


“관장님은?”


“애기들 귀엽다고 깔깔 웃으시던데?”


“...일단 알았어. 그럼 메이드 분들한테 이야기하고 갈 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응, 그럼 이따가 보자.”


큰누나는 자상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발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누나가 나가고 난 뒤, 한 5분 쯤 지나서는 또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또 누나가 뭘 놓고 갔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연 나는 의외의 손님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잠깐 괜찮겠느냐?”


에린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빙긋 웃고 있는 리스도 함께 있었다. 아까 내가 여왕을 만나러 미로로 들어갈 때쯤 이 둘은 경호원 일부와 함께 본 건물로 먼저 들어갔었는데, 그 후로는 완전히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방금 여왕과 접견을 마치고 오는 길이니라.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만, 들어가도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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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5화.[심상찮은 부대] 20.11.22 327 3 14쪽
5 (5) 4화.[여왕의 선물] 20.10.25 361 3 14쪽
4 (4) 3화.[너희가 내 부관이라고?] 20.10.23 446 3 12쪽
» (3) 2화.[큰누나의 결심] 20.10.20 609 3 22쪽
2 (2) 1화.[사람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3 20.06.07 1,184 9 37쪽
1 (1) 프롤로그.[소환, 그리고 두 엘프 해병대원] +4 20.04.22 1,923 2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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