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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츄샤 님의 서재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전쟁·밀리터리

카츄샤
작품등록일 :
2020.04.22 04:51
최근연재일 :
2022.03.08 11:44
연재수 :
1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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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1
추천수 :
200
글자수 :
56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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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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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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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1쪽

(9) 8화.[무너지는 의지]

DUMMY

“그...당신들은 괜찮은 거예요? 뭐 억지로 하게 된 거라던가...”


내가 정비병들을 향해 묻자, 그녀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저희들은 규칙에 따르는 몸이기에, 저희가 인정한 리더의 결정이라면 불만 없습니다.”


처음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덤덤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들을 보니, 오히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일에 열중하는 정비병들을 보고서는, 나도 다시금 전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럼, 장비 가동률은 괜찮은 편인가요?”


“너무 괜찮아서 문제임다. 이 녀석이 들어온지도 벌서 두 달째인데, 아직 안쪽 기자재에 비닐조차 안 뜯은 놈들도 있으니까요. 정말이지 정비반이 이렇게 분주한 게 도대체 몇 달 만인지 모르겠슴다.”


케이트 하사도 그녀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훈련 스케줄이 다 뭐예요? 안 그래도 부족한 전차용 유류까지 빼돌려서 팔아먹는 바람에 저기 있는 M1도 달마다 겨우 시동 한두 번 걸어보는 게 다였는걸요.”


세상에, 아니 무슨 우리나라 윗동네도 아니고 하다하다 전차용 유류까지 팔아먹다니...


“군수품을 팔아넘길 정도까지 귀족들 사정이 어려운가요?”


그러자 캐서린 중사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같은 평민이 높으신 귀족님들 사정을 어떻게 알겠슴까? 다만 엘렌 공작가처럼 큰 집안이면 몰라도, 전임 중대장같이 고만고만한 지방 귀족들은 대공황 이후로는 거의 폭삭 망했다고 보면 될 검다. 그러니까 제대하고서는 엘렌 공작가에 붙어먹던가 아니면 이렇게 군대에 남아서 군수품이나 털어먹으면서 사는 거겠죠.”


“그 팔아먹은 군수품이란 건 도대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데요?”


그러자 캐서린 중사와 케이트 하사는 나를 쳐다보며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동시에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겠슴까?”


“당연히 엘렌 공작가죠.”



아, 그 막대한 사병을 유지하는 기반에는 밑으로 들어오는 군수품들이 받쳐 주고 있었던 거구나. 알아차렸다는 듯한 내 표정을 본 케이트 하사의 이어지는 보충설명에 따르면, 소문에는 어느 정도 이상으로 군수품을 싼 가격에 실수 없이 잘 넘기면 사병으로써 제대 후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 같다고 했다.


뭐 아무튼 그리하여 전 중대장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군수품을 넘기다 못해 하다하다 전차 유류까지 팔아먹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거의 일반적으로 부대원들 사이에 알려진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별안간 내 뒤쪽에서 웬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뭔데, 이렇게 X만한 새끼가 중대장이라고? 취임식 가서 시간 안 버리길 잘했네.”


말투가 특이해서 처음에는 클라라 하사인 줄 알고 돌아봤는데, 전혀 다른 사람 두 명이 바로 앞에 주차된 구난전차 위에 서 있었다. 두 명 다 도베르만 수인이었는데, 아무래도 생김새로 보아 자매인 듯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말을 꺼낸 사람은 앞쪽에서 나를 같잖다는 듯이 쳐다보던 단발에 한쪽 옆머리를 땋은 사람 쪽인 것 같았다. 그녀는 전차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적개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누구...세요?”


“나? 네가 탈 거기 있는 7호차 조종수지. 이름은 에리카고, 계급은 보다시피 하사.”


그녀는 스스로 하급자임을 밝힘에도 불구하고 태도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했다. 난 처음에는 그 기세에 눌려 분명 상급자일 줄로만 알았는데.


“왜, 하급자가 말 까니까 아니꼬와? 잘나신 상판 한번 보려고 부하가 직접 찾아왔는데. 뭐, 꼬우면 알아서 징계라도 때리시든가.”


당황한 내 표정을 본 그녀의 태도는 초면보터 시종일관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뜸 찾아와서는 초면부터 욕설 섞인 비하발언을 일삼고 있으니, 이건 뭐 말문이 막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전차에서 탁 뛰어내리더니, 대뜸 앞에 있던 내 멱살을 낚아채 오만상 찡그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야, 네가 X발 부대를 바꾸던 털어먹던 뭐 나랑은 X도 상관없긴 한데, 뭐가 됐든 나랑 내 언니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진짜로 죽여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고 행동해라. 알겠냐?”


말을 마친 그녀는 멱살을 잡은 그대로 나를 팍 밀쳤다. 다행히 뒤에 있던 케이트 하사가 급하게 받쳐주어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어디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내 가슴팍에 붙어있던 기병 병과장이 반동으로 떨어져 나가 바닥에 부딪히며 쨍! 하고 정비고 안에 날카로운 금속음을 울렸다.


그녀는 자기 생각보다는 너무 심하게 밀쳤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다시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홱 돌아서서는 일행으로 왔던 한 명과 함께 정비고를 나가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사라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케이트 하사와 정비반장이 나를 급히 부축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왜...왜 내가, 이런 꼴을...”


갑작스럽게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채 반짝거리던 금색 기병 병과장이 흐릿하게 보이는 걸 보니 눈가에 눈물이 맺힌 모양이다. 무언가, 겨우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던 실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부터는 이 모든 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애먼 사람을 불러들인 여왕도, 이런 병신같은 부대에 던져놓곤 알아서 하라는 리안도, 이놈도 저놈도 그냥 다 싫어지려 했다.


부대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연설을 할 때만 해도, 케이트 하사를 설득할 때만 해도 남아있었던, 누이들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얄팍한 사명감이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냥 길게 애기할 것도 없이 진짜 X 같다.


그래서 그냥 바닥에 엎어진 채, 눈앞의 기병도를 교차한 모양의 병과장에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쳐다보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고아원에서 부모 없이 자랐고, 입양이 되면서 좋은 누이들을 만나 이제 좀 행복하게 살 수 있나 했더니, 채 10년도 가기 전에 이런 이상한 세계로 떠밀려와 또다시 누이들과 찢어진 채 영문도 모를 사람들에게 개새끼 취급당해야 하는 내 인생이 너무 개같고 X같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 번에 터졌는지 울음이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커져만 갔고, 내가 쓰러져서 펑펑 울자 뒤에 있던 케이트 하사와 정비반장도 어쩔 줄을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애 같은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지금은 아무런 죄 없는 이 사람들도 별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는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케이트 하사의 손을 팍 뿌리치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터덜터덜 정비고를 빠져나와 중대장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커튼이란 커튼은 모조리 친 뒤 불을 끄고는,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손을 더듬어가며 구석에 있던 간이 침대에 털썩 누운 뒤 옆에 놓여 있던 모포를 뒤집어썼다.


침대와 모포에는 안 그래도 먼지가 쌓여 있었는지, 내가 드러눕자마자 훅 하고 먼지가 일며 주변에 역한 곰팡이 냄새를 날렸다. 그래, 뭐 나같은 놈한테는 딱 어울리네. 나는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먼지 덩어리들을 그냥 내버려둔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터치스크린을 조작해 갤러리에 들어가자, 가장 상단 카메라 항목의 앨범에 어저께 대회에서 우승하고 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을 보자마자 또다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지금 당장 누이들한테 달려가 안기고 싶다. 큰 누나는 분명 자상하게, 어제처럼 나를 안아줄 것이다. 작은 누나도 예외는 아니겠지. 내가 진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장난기 많고 나를 매일 놀려먹던 작은누나도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줄 거다. 아린이도... 아린이도 겉은 쿨해 보여도 나름 속이 깊은 애니까, 분명 마지못해 안는 듯 마는 듯하면서도, 건성으로 내뱉는 듯한 위로라도 해 줄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내 곁에 없다. 누이들이 힘들어할까 봐 내가 먼저 떠난다고는 했지만, 어쩌면 나 스스로가 가장 힘들 것 같아 그런 이기적인 행동을 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내 생애 마지막으로 누이들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르는 작별인사조차도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에 짤막하게 남겨둔 채 그들을 떠났다. 어쩌면... 날 원망할지도 모르지.


계속해서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엔 너무나도 외롭다. 사진 속 누이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이젠 괜찮은 척 하는 것도 너무 지친다. 이딴 건 17살짜리 꼬맹이한테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다. 어른들의 사정 따위 내 알바도 아닌데. 이 세계의 운명 따윈 내 알바도 아닌데. 더군다나 이런 푸대접을 받아가면서까지 이들을 도울 의무 따윈 뭣도 없는데...


“빌어먹을...”


너무 억울해서 울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건데...


그러던 중, 베개가 높아서인지 자연스럽게 내 몸을 바라보게 된 내 눈길이 허리춤에 있는 권총으로 갔다. 그래, 여왕이 건네준 M1900 말이다.


결국은... 이게 유일한 결론인가? 나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보았다. 어제 받았던 상태 그대로 홀스터에 들어있던 그 은색 권총은, 어째서인지 어제와는 달리 홀스터에서 잡아 뺄 때부터 무게가 천근은 더 늘어난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빼낸 권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몸집이 작아서인지 휴대성을 위해 소형화된 권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는 크기였다.


이상하다. 전에는 전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 인생 최고로 불행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에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었는데...


왜, 이 놈을 내 머리에 겨누게 되면 좀 편해질까, 란 생각이 드는 걸까?


-똑똑.


하지만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노크 소리에, 이상한 잡생각들은 한 순간 흰 연기처럼 싹 사라졌다. 아니지, 이건 아냐, 이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문 밖을 향해 대답하려 했지만, 잔뜩 울어서 잠긴 목소리로는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대답하기도 싫다. 누군지는 몰라도 날 일부러 엿 맥이러 온 게 아니라면 그냥 좀 내버려둬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한번 더 노크 소리가 울렸고, 그러고도 내가 반응이 없자 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이거, 돌려드리러 왔어요.”


문 밖에 서 있던 사람의 정체는 바로 케이트 하사였다. 아마도 아까 떨어뜨리고 간 내 병과장을 돌려주러 온 거겠지. 정말이지 원래 사람이 좋은 건지...


“...돌아가요.”


나는 둘러싼 모포 안에서 더욱 몸을 웅크리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것만 전해드리고 돌아갈게요.”


하지만 그녀 역시 이상하게도 고집을 부렸다. 비록 만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저 사람의 성격상 지금 안 열어주면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한참을 기다리고 있어도 그녀의 멀어져가는 발소리는 들릴 기미조차 보이지를 않자, 결국 포기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문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끼익.


나는 손만 보이게끔 문을 살짝만 연 채 그 사이로 팔을 슥 내밀었다. 분명 눈도 퉁퉁 부어서 꼴이 말이 아닐 텐데, 이런 한심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차가운 금속제 병과장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의 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맞댄 손을 펼쳐 깍지를 끼더니, 조심스레 나를 살짝 끌어당겨 문틈 사이로 내 얼굴이 보이도록 했다. 나는 크게 저항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마주보기 껄끄러워 그녀에게 잡힌 반대쪽 손으로 최대한 내 얼굴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더 크게 문틈을 벌리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자신의 가슴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갔던 병과장을 꺼내 손수 달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병과장이 달려있던 내 군복의 가슴팍은 아까의 충격으로 심하게 찢어져 나간 상태였고, 그걸 본 그녀는 조금 망설이더니 조금만 시간을 주면 바로 방 안에서 고쳐 주겠다고 했다.


물론 나를 생각해준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까 뿌리친 건 미안해요. 그리고 제안도 고맙지만,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어요.”


물론 이건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누이들의 사진을 볼 때처럼 지금 역시 외로워 죽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도 너무 무섭다. 특히 아까의 그 하사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지금 이 사람도 속으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활짝 문을 열고 웃으며 들어오라고 했던 아까와는 달리, 나는 그렇게 힘없이 문을 닫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직전, 케이트 하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위험하게도 문틈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문이 완전히 닫히는 걸 막았다.


...하아. 이젠 이 사람까지 날 갖고 노는 건가. 여기 사람들은 진짜로 지휘관에 대한 배려는 개나 줘버렸구나. 그녀가 문을 막은 이유가 그런 게 아니란 것 정도는 당연히 알지만, 지금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내 마음 속에서는 솔직히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가 않았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다시 문을 열고는, 조금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예요?”


약간 가치 돋친 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언가 애잔한 듯, 또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눈빛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요.”


“...그냥, 지금 당신을 혼자 저 어두운 방에 있게 해선 안 될 것 같아요. 부탁드려요.”


그녀는 살짝 고개까지 숙여가며 내게 부탁했다. 아, 진짜 끈질기네. 그냥 병과장 돌려주러 왔으면 돌려주고 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나한테 신경을 쓰는 거야? 어차피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이나 다름없는 나를...


“...”


하지만 나도 사람한테 너무 막 대하지는 못할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막연히 무서웠던 것 같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어두컴컴한 내 방을 되돌아봤더니, 꼭 아까의 사무치는 듯한 외로움과 나를 집어삼킬 듯한 저 어두운 방에 홀로 남는다는 두려움이 또다시 기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건 싫다. 어쩌면 나도 겉으론 아닌 척했지만 내심 누군가가 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 승낙의 뜻을 받아들인 그녀는 기쁘다는 듯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그녀 쪽에서 나를 살짝 끌어안았고, 이내 함께 중대장실에 들어온 그녀와 나는 다시금 아까의 소파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나는 옆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그녀가 바느질에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녀는 내게 받은 바늘과 실을 이용해 능숙한 솜씨로 떨어져나간 군복을 기워냈다.


“아깝네요... 보급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둔 상의에 병과장을 부착하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자, 그래도 이렇게 가려 두면 크게 티는 안 날 거예요. 여기요.”


그녀는 웃으며 수선이 완료된 옷을 펼쳐 보이더니 직접 내게 입혀 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함께 있던 언니가 전임 중대장에게 꽤 험한 꼴을 당해서, 아마 경고 차원에서 좀 과하게 행동한 것 같아요.”


그녀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흘리듯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악감정을 가진 이들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그 속내조차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솔직히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내 걱정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후훗, 그걸 해결하겠다고 하신 게 중대장님이시잖아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당신의 연설은 저와 반장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분명 그 연설을 들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내심 당신에게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계속 그렇게 풀죽어 계시면... 될 일도 안 된답니다!”


그녀는 정신 차리라는 듯 양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착! 소리 나게 잡았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도 도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자, 이리 오세요, ...읏차!”


그녀는 그대로 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가 나를 눕히고는 불을 껐다.


“그럼, 옷도 고쳤겠다, 아직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을 많이 피곤하실 테니 이만 주무시는 게 어떠신가요? 저는 더 이상 방해 안 하고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정말로 누워 있는 나에게 경례하더니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또다시 나 혼자 이 방에 남는다는 사실이 덜컥 두려워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가려고 하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말았다.


“어...? 저기..?”


무심코 한 행동에 나 자신도 화들짝 놀라 곧바로 손을 떼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의지와는 달리 쉽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채버린 나는, 결국 손을 놓기를 포기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나 바보같은 놈이라는 걸 안 그녀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무지 그녀를 쳐다볼 의지가 생기지 않아 마치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숙인 채 가만히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다시 내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응, 역시 그런 거군요. 자, 그럼 오늘은 잠이 드실 때까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 말에 고개를 들자, 그녀는 내 옆에 걸터앉아 자신의 하얗고 복슬복슬한 꼬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반쯤 누워 있던 내 머리를 그 위에 얹혔다.


“어떻게, 자세가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그래도 제 꼬리털은 부드러워서 잠들기에는 편하실 거예요.”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부끄러운데...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만큼이나 그녀의 허벅지와 꼬리털은 정말로 푹신하고도 부드러웠고, 나는 천천히 온 몸이 나른해지며 빠르게 수마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리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적어도 저는 당신이 노력한다는 걸 믿어드릴 테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잠깐만 이야기해 봐도 알 것 같거든요.”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려는 끝자락에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누워 있는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케이트 하사의 손길을 느끼며 금방 잠이 들었다. 불과 몇 시간 뒤 무슨 일이 생길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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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시곗바늘은 대충 그 정도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에 선잠이 깬 나는 블라인드를 걷어내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독립 제 22 실험 경기병중대의 지휘관 한영훈입니다.”


“아, 반갑네. 난 실험 기병부의 지휘를 맡은 로빈 준장일세. 취임식 때 잠깐 얼굴을 봤는데 기억할지는 모르겠군. 방금 여단 차원에서 자네 부대 쪽에 연락은 했는데 좀 급한 상황이라 자네를 연결해달라고 했어.”


로빈 준장이라면 어제의 취임식 이후에 잠깐 인사를 나눈 사람이었다. 내 중대를 포함한 실험 기병부대들을 총괄하는 실험 기병부 전체의 지휘관이며, 따라서 나의 상관이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며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보고를 했고, 그녀는 편하게 이야기하라며 웃었다.


“여튼, 상황이 급하니 우선 이야기해줄 것부터 빠르게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네.”


하지만 그녀가 헛기침을 한 후 입에 담은 것은, 당사자인 나로서는 절대로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네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아르티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네. 따라서 자네는 부대 이동 중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처리가 되었으니, 그리 알아두게.”


그 말에 순간 내가 벙 찌는 것과 동시에, 이윽고 방 밖에서는 상당히 급박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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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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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27 갈잎의노래
    작성일
    20.12.21 07:14
    No. 1

    라노벨이라곤 해도 밀리터리에 걸쳐지는, 그것도 기갑부대를 소재로 하신건데 주인공의 성격설정을 좀 단단히 잘못하신것 같네요. 운용면에서 가장 빡신 군기와 깡을 필요로 하는 기갑병과의 지휘관을 맡아야 하는 경우에 이번 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유리멘탈과 주변인물에 대해 의존적인 성격은 제 아무리 똑똑한 인물인 설정일지라도 아예 말이 안되는 정도로 필연성을 날려버리는 설정이라 보여집니다. 군대는 일반적인 단체가 아니라 규율로 움직이고 그걸 어기면 가혹한 벌칙이 주어진다는 원칙이 무너지면 절대 성립못하는 곳인데 하극상에 무력하게 반응했다는 자체로 이미 게임오버인거죠. 인덕으로 감화시켜가는 주인공을 염두에 두셨을지라도 이야기가 현실성과 너무 괴리가 크면 허황된 이야기로 전락해버리는거죠. 주인공 인격설정의 수위조절에 실패하셨다고밖에는 생각되지않네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카츄샤
    작성일
    20.12.21 07:49
    No. 2

    피드백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도 부대 운용에 관한 지휘관 상에 대해 독자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다만 저는 부대 운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고등학생이 지휘 체계의 부재 및 군 기강 자체가 해이한 군대의 지휘관직에 보임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며, 또한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고자 하여 초반에 이러한 연출을 시도하였습니다.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진심어린 충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g2******..
    작성일
    20.12.21 09:33
    No. 3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카츄샤
    작성일
    20.12.21 10:42
    No. 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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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마니아가 이세계의 전쟁영웅이 되기까지 (1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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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15화.[그녀들과 온천에서](3) +4 21.02.11 198 3 15쪽
15 (15) 14화.[그녀들과 온천에서](2) +6 21.02.05 204 3 14쪽
14 (14) 13화.[그녀들과 온천에서](1) +10 21.01.28 234 3 18쪽
13 (13) 12화.[너네 이거 성군기 위반이야!(...)] +4 21.01.19 239 3 15쪽
12 (12) 11화.[적 대전차포, 그리고...] +2 21.01.13 230 3 15쪽
11 (11) 10화.[첫 전투] +2 21.01.10 235 3 17쪽
10 (10) 9화.[드리우는 전운] +4 20.12.31 237 3 22쪽
» (9) 8화.[무너지는 의지] +4 20.12.21 252 3 21쪽
8 (8) 7화.[정비반과 35(t) 전차] 20.12.11 278 4 23쪽
7 (7) 6화.[상처입은 여자들] +1 20.12.03 296 5 25쪽
6 (6) 5화.[심상찮은 부대] 20.11.22 328 3 14쪽
5 (5) 4화.[여왕의 선물] 20.10.25 362 3 14쪽
4 (4) 3화.[너희가 내 부관이라고?] 20.10.23 448 3 12쪽
3 (3) 2화.[큰누나의 결심] 20.10.20 609 3 22쪽
2 (2) 1화.[사람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3 20.06.07 1,186 9 37쪽
1 (1) 프롤로그.[소환, 그리고 두 엘프 해병대원] +4 20.04.22 1,925 2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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