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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3.05.19 16:52
최근연재일 :
2024.02.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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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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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하오문(下五門)

해당 소설은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으로, 특정 종교/단체/인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DUMMY

양양성이 함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삼교맹 창립이 중원 대부분의 문파는 물론이고 원과 남송의 황실까지 전달되자 온 무림은 물론 남송 황실까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특히 육수부를 비롯한 일부는 황실에 대한 반역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승상 가사도는 삼교맹을 반란 세력으로 취급할 경우 남송의 삼교들까지 등을 돌릴 수 있다며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두는 수 밖에 없다고 황제를 설득했고, 진세걸 또한 가사도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남송 황실은 삼교맹을 인정하며 임안의 정일교 도관을 통해 옥검 2자루, 비단 10필, 금실로 수놓은 삼교맹기를 하사했다.



사실상 이번 삼교맹 창립의 배후인 원 황실은 기다렸다는 듯 황금으로 된 삼교맹주패와 삼교맹주옥인(三敎盟主玉印), 보도 스무 자루, 북방마(北方馬) 백마리, 맹주의 시종을 들 100명의 구구(驅口, 노예), 백금 삼천냥, 고려의 인삼과 향차 등을 비롯해 온갖 금은보화를 내렸으며, 특히나 중요한 것은 원 황제의 하사품이 아닌 삼교의 창립을 축하하는 축례품으로서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삼교맹이 온도차는 있으나 양국 황실로부터 인정까지받자 화북의 문파들 역시 앞다투어 예물을 보내며 삼교맹에 들어오고자 했고, 안서의 삼교맹부는 끝을 모를 정도의 행렬로 진풍경을 이뤘다.



반면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화북이 아닌 강남에 있는 삼교의 문파들이었다. 삼교맹 창단을 주도한 문파들에 속한 강남의 분파나 지부들도 곤란했기 했지만 그보다 해당 문파들에 속해있지 않은 삼교의 문파들은 처신을 어찌해야 될지 고민이었다.



소림과 아미, 전진, 정일, 공동 등 정파 무림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삼교맹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양성이 함락되었다한들 남송 황실이 버젓이 임안을 차지한 상황에서 당장 삼교맹에 들어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 문파는 화북으로의 이동을 택했고, 이도 저도 못하는 다른 문파들은 봉문을 택했다.



반면 백련교는 분노했다. 그간 삼교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몇몇 소규모 분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혈투를 벌인 적도 없었고 되려 백련의 뿌리는 불교의 미륵사상인 만큼 최대한 삼교와의 마찰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백련교는 그 교세는 대단했으나, 황실이나 정파가 우려하는 만큼 체계화 된 조직이 아니었다. 백련교의 교리는 단순하여 살생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사음(邪淫)하지 말고, 헛된 말(邪淫)을 내뱉지 말며, 음주하지 말라는 것 다섯까지 뿐이었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십선업도(十善業道)를 백성들이 알기 쉽게 단순화한 것으로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였고, 때문에 교세가 뻗어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중앙화된 교단을 만들 여력이 부족했다.



결국 점조직을 바탕으로 지역별로 단주들이 해당 지역을 통솔하고 있었으며, 미륵불 성지인 설두산에 연종참당(蓮宗懺堂)을 비밀리에 짓고 네 명의 호법을 단주들이 직접 선출하여 모자원을 위한 재단을 지켜오는 정도였다. 한때 각지의 단주들이 모여 교주를 선출한 적도 있었으나 조정의 탄압으로 총교단이 해체된 후 교주 자리는 내내 공석이었다.



삼교맹이 백련교를 백련마교라며 무림의 공적으로 삼자, 따로 교주가 없는 백련교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인다. 화북의 단주들은 원 황실이 지원하는 삼교에 맞서느니 차라리 원 황실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자는 의견이 우세했고, 강남의 단주들은 이 참에 남송 편에 서서 원황실과 삼교맹에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결국 백련교는 둘로 쪼개져 화북의 백련교는 원 황실에 접촉하며 삼교맹과의 화친을 도모한 반면, 강남 일대의 백련교는 삼교맹에 대항하기 위해 기존의 조직을 좀 더 체계화함과 동시에 화북의 백련교와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 백련명교(白蓮明敎)라 칭하니 이것이 훗날 중원에 명교(明敎)라고 알려진 백련명교의 실체이다.



한편 기지성은 삼교맹주에 오른 뒤로 쏟아지는 문서와 접견에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문파들이 삼교맹을 찾아 쏟아져 들어왔으며, 수많은 문파와 사찰, 서원의 장(長)들과 접견을 해야만 했다. 그만큼 전진교의 위상이 올라가니 마다할 수는 없었지만 참선을 할 시간조차 모자란 형국이었다.



게다가 삼교맹부 공터에 유불선을 상징하는 삼교전(三敎殿)을 신축하는 문제나, 삼교맹을 이끌어 갈 각 문파의 인원을 선별하는 것, 대도를 비롯해 화북부터 지부를 설치하는 문제들까지 산적한 문제가 한 두개가 아니었다.



아마 복유와 지온이 미리 삼교맹의 설립을 주도하지 않고, 또 망갈라가 삼교맹부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삼교맹은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을 것이라고 기지성은 생각했다.



그렇게 기지성이 바쁜 하루 일정을 끝내고 맹주전의 서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노라니 원황실 태사 주제가 기지성을 찾아왔다.



"삼교맹주를 뵙습니다."



"어서오십시오.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요새 정신이 없으시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종남산으로 돌아가 도나 닦을 것을 그랬습니다."



"허허허, 동명자께서 이런 대업을 맡아주지 않으시면 누가 맡겠습니까?"



"태사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나저나 오늘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들어오게."



그러자 문을 열고 건장한 체구에 유독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비단옷을 입고 읍을 하며 나름의 예를 취했으나,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삼교쪽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하문월(賀文月)이라 합니다."



기지성도 들은 적 있는 이름이었다. 바로 어부 출신으로 기연을 만나 분수아미자[分水峨嵋刺) 한 쌍으로 장강의 수로채 다섯 곳을 박살내고 장강수로채의 채주이자 흙색 피부 때문에 흑수룡(黑水龍)이라 불리던 하문월.



수적이라고는 하나 주로 남송의 조운선을 주로 약탈하고, 일부를 인근의 백성들에게 약탈한 물건을 나눠줌으로써 장강 일대에서 영웅으로 포장되기도 했었다. 이후 세력이 커지자 장강 일대의 기루와 도박장, 투기장까지 손에 넣으며 그 명성이 중원 전체로 퍼져갔다.



원나라 군대가 양양성을 포위할 즈음 행적이 묘연해졌는데 기지성은 그런 자가 어찌하여 지금 삼교맹에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제를 바라봤고, 주제 역시 예상했다는 듯 하문월을 다시 내보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금 그 자가 누군지 알아보신 모양이군요?"



기지성이 살짝 언짢은 표정으로 답했다.



"설마 삼교맹에 받아달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것은 아니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대선사를 만나 개과천선하고 불자의 길에 들었다고는 하나 지은 과오를 생각하면 지금 막 대업을 시작한 삼교맹에 들어오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이 자 또한 그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만 황실이 그 자에게 큰 빚이 있습니다. 황제께서 친히 챙기라 저에게 지시하셔서 이리 데려온 것이구요."



"큰 빚이라 하면?"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지요. 부탁드릴 것은 그 자가 이제 수적 생활을 접고 작은 문파를 만들어 어부들에게 무술이나 가르치면서 지내겠다고 하고 황제께서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이를 용인해주기로 했으니 하문월 그 자를 삼교맹으로 받아주는 것은 불가하다해도 사파가 아닌 정사지간에 둬 달라는 것입니다."



기지성은 주제가 황실을 자꾸 언급하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삼교맹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닌 사파 취급을 유보해 달라는 부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이렇게 주제까지 나서 장강의 수적 출신인 하문월을 싸고 도는 데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양양성 함락의 일등 공신이 하문월이었기 때문이다.



가사도에게 핍박을 당하던 중 상사벽과 조세웅이 가사도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원나라로 귀순한 항장(降將) 유정(劉整, 1212~1275)은 6년전 입조 당시 쿠빌라이를 알현한 자리에서 양양만 함락되면 남송 정벌은 식은 죽 먹기라며 진언했고, 그의 진언을 받아들인 쿠빌라이는 유정은 도원수에 임명하고 10만 대군으로 이듬해 양양성 공략에 나선다.



유정이 도원수에 부임한 직후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바로 장강의 수적이었던 하문월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남송의 장군으로 있을 적부터 유정은 몇차례나 하문월을 토벌하고자 남송 수군을 출진시켰으나 장강의 지리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그 지역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 있는 하문월을 끝내 토벌하지 못했다.



원나라 항장이 된 유정은 몽골 수군이 장강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남송의 수군을 막으려면 누구보다 장강의 물길이나 지리를 잘 아는 하문월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사실 유정은 남송에 있을 적에도 몽골과의 전투로 여력이 없어 하문월을 토벌하는 것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차라리 벼슬을 내려 포섭하자고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가사도를 비롯해 진의중, 장세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이 어찌 수적에게 벼슬을 내릴 수 있냐며 반대했다.



쿠빌라이에게 이 같은 내용을 함께 진언해 하문월 포섭에 대한 전권을 받은 유정은 하문월에게 백금 오백냥과 비단 백필 등을 보내 그의 환심을 샀고, 하문월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설득한 끝에 하문월을 원나라 편에 서게 만든다.



유정의 생각대로 하문월은 지도에 나오지 않는 장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고, 복병이 위치할 만한 장소, 양양성으로 남송의 연락책이 숨어들만한 경로, 남송 수군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시기 등을 모두 귀신처럼 맞췄다.



결국 남송이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했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고, 남송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6년을 버티던 양양성과 번성을 끝끝내 함락되었다.



양양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는 엄청나게 기뻐하며 대도에서 어마어마한 연회를 열었다. 이때 쿠빌라이는 하문월이 양양성 정복에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문월을 대도로 불러들여 연회에 참석토록 했는데, 쿠빌라이는 하문월을 만난 자리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벼슬이든, 금은보화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내 너의 공은 익히 들었다. 당연히 그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 법. 원하는 것이 있거든 뭐든 말해보라."



"폐하, 소인 장강에서 생선이나 잡다 이리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배운 것이 없어 벼슬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청이 있사옵니다."



그러자 쿠빌라이 옆에 서 있던 유정이 대노하며 다그쳤다.



"네 이놈, 벼슬이야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것이지 네 놈이 받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더냐? 폐하, 이 놈이 작은 공을 세웠다 하여 이리 주제 넘는 말을 할 줄을 몰랐습니다. 당장 이 놈의 목을 치소서."



그러자 하문월을 더욱 땅에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했고 쿠빌라이는 손짓으로 유정을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다. 그만한 공이 있는 자의 청인데 들어줘야지. 어서 말해보라."



"소인은 벼슬이나 금은보화보다 제 부하들과 함께 작은 문파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폐하."



"문파라? 무림의 문파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그러자 쿠빌라이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연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예전부터 정파라 으스대는 놈들과 남송의 관리들로부터 쫓기며 짐승 대우를 받다보니 이제 부하들과 함께 제대로 사람 대접 한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리 하라. 문파의 이름은 정하였느냐?"



"장강 이남에 수채 다섯 곳을 가지고 시작할 요량이라 하오문(下五門)이라 지을까 하옵니다, 폐하."



"이름 짓는 재주도 있구나. 과연 그럴 듯 하다. 이보시오, 태사."



그러자 태사 주제가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네, 폐하."



"이 자가 문파를 세우고 싶다하니 태사께서는 각별히 신경 써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얼마 뒤 쿠빌라이는 주제를 통해 하문월에게 하오문주패와 하오문주인, 그리고 옥검을 하사했고 하사품을 받아든 하문월은 눈물을 흘리며 대도를 향해 절을 올렸다. 무림의 역사에서 정사지간에 자리하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하오문의 시작이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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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남송(南宋)에 가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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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옥추보경(玉樞寶經) (1) 23.06.30 68 1 9쪽
28 유백문(劉百文) (2) 23.06.26 58 0 10쪽
27 유백문(劉百文) (1) 23.06.25 56 0 12쪽
26 청룡검(靑龍劍) 23.06.23 54 0 13쪽
25 병상첨병(病上添病) (3) 23.06.22 51 0 10쪽
24 병상첨병(病上添病) (2) 23.06.20 64 0 9쪽
23 병상첨병(病上添病) (1) 23.06.19 62 0 10쪽
22 화산파(華山派) (2) 23.06.19 112 0 11쪽
21 화산파(華山派) (1) 23.06.18 57 0 14쪽
» 하오문(下五門) 23.06.12 67 0 13쪽
19 삼교맹(三敎盟) (4) 23.06.11 65 0 11쪽
18 삼교맹(三敎盟) (3) 23.06.11 69 0 14쪽
17 삼교맹(三敎盟) (2) 23.06.10 78 0 12쪽
16 삼교맹(三敎盟) (1) 23.06.08 99 0 13쪽
15 수도 임안(臨安) (4) 23.06.06 99 1 9쪽
14 수도 임안(臨安) (3) 23.06.06 84 0 12쪽
13 수도 임안(臨安) (2) 23.06.03 97 1 13쪽
12 수도 임안(臨安) (1) 23.05.24 112 0 12쪽
11 문천상(文天祥) (2) 23.05.23 99 0 10쪽
10 문천상(文天祥) (1) 23.05.23 109 0 10쪽
9 백련교(白蓮敎) (2) 23.05.22 108 0 10쪽
8 백련교(白蓮敎) (1) 23.05.22 126 0 10쪽
7 전진교(全眞敎) (3) 23.05.21 122 3 14쪽
6 전진교(全眞敎) (2) 23.05.21 135 3 11쪽
5 전진교(全眞敎) (1) 23.05.20 178 3 15쪽
4 남송(南宋) 명주(明州) (3) 23.05.20 176 5 10쪽
3 남송(南宋) 명주(明州) (2) 23.05.19 199 5 12쪽
2 남송(南宋) 명주(明州) (1) +1 23.05.19 283 6 18쪽
1 위기의 삼별초 23.05.19 473 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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