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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최근연재일 :
2021.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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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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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발렌슈타인의 복귀와 틸리의 항전

DUMMY





지난 편에서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은 최대한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올리는데에 크게 주력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제국군은 어떠한 행보를 했을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발렌슈타인 넌 도대체 누구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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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 세력은 스웨덴이 한참 잠잠할 때, 발렌슈타인의 진의를 두고 왈가왈부가 벌어졌습니다.





분명 전편에선 발렌슈타인이 구스타프의 선택을 받지 못하자, 구교 편에 드는 것 같은데도 이러한 태도를 보였을 까요?





이는 그의 평판에서 부터 확인해봐야 합니다.





발렌슈타인은 루터 전투 이후에, 쫒겨나고, 브라이턴 펠트 전투가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안좋은 소문이 정말 많이 퍼졌습니다.





그 소문에는, " 발렌슈타인은 틸리를 공격하려고 하고, 더 나아가서 구교를 배신하려고 한다. " 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 소문에는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았습니다. 발렌슈타인과 틸리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고, 때마침 틸리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상을 입었죠.





구교는 발렌슈타인을 내쫒은 경력이 있어, 시기적으로 구교가 불리하니 이러한 소문이 안생길리가 없었죠.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구교가 발렌슈타인이 다시 필요해서 쓸려고는 하는데, 이러한 안좋은 소문이 너무 많고, 또 자기들도 찔리는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끊임 없이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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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필요하긴 한데.... 정말 믿을 수 있어? ]





스페인(에스파냐)는 현재 팔츠를 빼앗겼기 때문에, 독일 내에 큰 힘을 가지고 있던 발렌슈타인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세력중에 하나였습니다.





황제를 비롯해서, 스페인등 여러 구교 세력에서 대사들을 보내서 만납니다.





모든 대사들이 발렌슈타인을 두고, 모두 물어봅니다.





" 그대가 구교를 위해 싸운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 당신을 믿기가 어렵다. "





" 도대체 그대와 틸리의 사이가 나쁜 것인가? "





라고 추궁하는 질문이 쏟아져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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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게 아니고요... ]







대사들의 질문을 받은 발렌슈타인은 아주 능글맞게 대답합니다.





" 세상 사람들이 내가 틸리 백작을 배신한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다. "





" 다만, 나같은 2등이 있어야 1등이 정신을 차린다. "





라고 답변합니다. 이 말이 참 애매하죠?





뭔가 구교 편을 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무언가 석연치 않는 꺼림직함이 있는 말이었죠.





근데, 이런 말을 하면서 발렌슈타인의 하는 행동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는 자기 말을 마치고, 재화가 담긴 상자를 대사들에게 건네준 것입니다.





발렌슈타인은 지금 구교가 돈이 없는 것을 아니까, 미끼로 던진 것인데, 구교 입장에선 이 달콤한 유혹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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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추궁하러 왔는데....뭐지? ]






대사들은 발렌슈타인을 떠보기 위해 왔는데, 도리어 군자금을 받으면서, 이렇게 서로 사바사바 북치고 장구치고 하다보니 어느새 다시 내쳐졌던 제국 총사령관 직위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펼쳐놓고 보니 참 유럽 정치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복잡하면 복잡하면서도 종 잡을 수 가 없군요.






아무튼 이렇게 발렌슈타인은 1631년 11월에 총사령관으로 복귀가 되면서, 모든 구교의 군사 작전 지휘권이 발렌슈타인에게 넘어갑니다.









2. 구스타프의 압박을 막아라. 레흐강 전투








9-1.png



구교에선 다시 발렌슈타인의 복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을 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도 다음해였던 1632년에 재정비를 한 후, 페르디난트 2세를 압박하기 위에 바이에른 지역으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만약 구스타프가 이 바이에른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합스부르크의 주요 영지였던 보헤미아 + 오스트리아 둘 모두를 견제 및 압박 할 수 있는 지역이였기에, 이걸 그냥 가만히 둘 수 없었죠.





그래서 스웨덴을 저지하기 위해, 틸리 군대가 바이에른으로 넘어가는 레흐강에서 막으려고 움직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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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2년 4월. 레흐강 전투 ]






두 군대는 1632년 4월. 레흐강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때 전투 지형은 수비를 하는데 아주 유리하였는데, 수비하는 군대는 틸리 군이었습니다.





반대로 스웨덴 군 강을 도하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불리한 여건이었죠.





그러나 전에도 얘기 했지만, 스웨덴의 군사 혁신중에 경량포와 빠른 배치를 사용하며 대응하죠.





레흐강 전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여태까지 틸리 군대는 공격하는 군대였는데, 이 전투에서 수비를 했다는 점입니다.





아마 틸리 군이 스웨덴을 상대로 수비로 맞선 것은 단순히 지형이 유리해서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스웨덴 군의 패배에 대한 회복이 안되고, 보급 사정도 그리 좋진 않았다고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 일례로 발렌슈타인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틸리를 지원하려는 움직임들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의 사정이 열악한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겠죠.




6.jpg



외적 요인 때문인지 군대가 약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을 도강할 때, 가장 중요한게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게 제일 중요한데,





틸리는 아주 예상 밖으로 강 뒤에 있는 언덕에 진을 쳤다는 점이죠. 왜 틸리가 이런 판단을 했는지는 여러 시각이 존재합니다.





강에서 결국 싸울 수 있는 방법은 대포 밖엔 없는데, 이때 틸리 군의 포탄이 얼마 없었다든지,





아니면 포병의 정예화가 떨어져서, 스웨덴 군에게 당할 수 있다라든지등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튼 틸리는 강의 일선에서 방어로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하를 허용해줍니다.




7.png

[ 나라 없는 설움은 이런데서 표출된다. ]






이때 스웨덴 군은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싣을 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임시 다리를 만드는 방법 밖엔 없는데, 이 다리를 만드는 작업이 아주 험한 일었죠. 그리고 이 험한 작업에는 당시 식민군이었던 핀란드군을 동원하죠.





다리 작업 외에도 험한 고지를 향해 선봉에 선다거나 등 아주 어렵고 희생이 크게 따르는 곳에는 핀란드 같은 식민 지역의 군대를 보낸다고 하네요.





뭐 이런 일은 스웨덴만 한 것도 아니였고, 1~2차 세계대전 등에서도 망국의 병사들이 일선에 보내는게 잦았죠.






아무튼, 핀란드인 400명이 있는 배를 이어서 다리를 만드는 작업과 그 앞에 교두보까지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이때 틸리가 포격하면 건너오는 병사들이 꼼짝없이 당할텐데, 이 좋은 상황을 그냥 두고, 언덕에서만 진을 치고 있다는 것에 많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만한 이유도 있었죠.





8.jpg

[ 빨간 동그라미 : 스웨덴 군의 대포 ]





레흐강 전투 지도에 스웨덴이 강 건너에 끊임없이 대포를 쏘고, 틸리 군대가 대포에 뒤로 물러나는 그림이 있죠.





아마 틸리 군도 어떻게든 저지해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스웨덴의 빠른 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빨리 쏘고, 백발백중 원하는 곳에 족족 맞추는 솜씨까지 있으니, 틸리의 포대도 섣불리 설치하기가 힘드리라 보입니다.






결국 스웨덴 군은 무사히 도강에 성공하고, 틸리군과 맞붙게 됩니다.





이때 스웨덴 군은 다시 한번 포병-보병의 동시 진격 공격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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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군의 장기였던 동시 공격에 의해, 틸리는 다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전투의 총지휘관이 부상까지 입을 정도로, 스웨덴 군과의 거리가 가까웠거나 아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틸리가 부상을 입을 정도로, 상황이 되자 지휘관의 부상 소식과 겹쳐 이미 전황이 스웨덴에게 유리하게 넘어갔기에 더 이상 틸리 군대는 싸울 의지를 잃고, 후퇴하고 맙니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틸리 군의 지휘관들이 빠르게 상황을 읽고 퇴각했기에 그나마 병력 손실이 적었다는 점이죠.









3. 틸리에게 찾아온 비극









9-2.jpg

[ 바이에른의 잉골슈타트 ]






브라이턴 펠트 전투 뿐만 아니라, 레흐강 전투에서도 스웨덴 군에게 다시 패배. 그리고 다리에 부상까지 입은 틸리.





이런 그에게 또 하나의 비극이 날라옵니다.





틸리 백작이 레흐강 전투의 다리 부상이 회복되지 못하고, 전투가 지난 50일 뒤, 1632년 4월 30일의 잉골슈타트에서 파상풍으로 전사하게 됩니다.







틸리가 죽게 된 사인에는 크게 두가지 경우를 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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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는 야전 의학이 크게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레흐강 전투에서 단순히 틸리는 붕대만 감고 몇 시간씩 전투를 치뤘는데, 다급한 전황에서 총 지휘관이 응급실로 가는 것도 무리였고,





제대로 절제술로 조치를 취하는 방식도 아직 아니였죠.






심지어 이때 포탄이나 총탄의 납 성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틸리가 부상을 입은 다리에 탄 조각을 계속 몸에 두고 싸우느라, 병이 악화된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10.jpg



2) 나이상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때 틸리의 나이는 70세가 넘은 노년으로, 이미 오랫동안 전쟁을 치뤄서 몸이 노쇠했는데, 이때는 항생제도 없었던 시절이였고,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자리를 비우면 안되는 특성상,





결국은 부상을 입으면 결국 순전히 본인의 면역력에 크게 의존했는데, 틸리는 이미 노쇠한 몸이었기에, 결국 병마가 악화된 것이라 판단됩니다.





역사를 쭉 훑어보면 장수들이 틸리처럼 부상을 입고, 결국 낫지 않아서 죽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위의 두가지 경우가 많이 대비된 것으로 보이죠.







결국 30년 전쟁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 구교에 하드캐리를 했던 역전의 명장이 막을 내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교를 위해 독일 전역에 종횡무진 했던, 다사다난한 일을 겪은 틸리의 최후로 인해, 스웨덴 군에 다시 설욕을 하고자 하는 명예 회복도 못하고 죽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라는 뛰어난 위인도 좋지만, 그래도 틸리에게 조금 더 호감이 가네요.





한편 틸리 백작이 루터 전투 이후부터,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이 모든 비극을 직면하게 만든 것은 어떻게 보면 페르디난트 2세의 행동 때문인 것을 감안하면, 제대로 된 주인을 모시지 못한 죄가 너무 큰 듯 보입니다.

12.JPG

[ 틸리의 동상 ]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틸리 백작은 훗날 뭔헨에 오데온 광장, 원수의 홀에서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지게 됩니다.








틸리가 사라진 30년 전쟁의 무대.





계속해서 이기는 스웨덴 군.





모든 것이 호재로 돌아간 것을 보이는 구스타프.





하지만 이제 발렌슈타인이 복귀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과연 발렌슈타인이 어떤 활약으로 승승장구하는 스웨덴의 승리를 막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변수가 생길 걸까요?






다음 이야기에서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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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발렌슈타인의 처참한 몰락 21.02.12 31 2 10쪽
28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完) 21.02.11 38 2 11쪽
27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3) 21.02.10 34 0 15쪽
26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2) 21.02.09 32 1 11쪽
25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1) 21.02.08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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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렌슈타인의 복귀와 틸리의 항전 21.02.06 28 2 11쪽
22 유리한 분위기 속에 불안한 스웨덴 21.02.05 2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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