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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최근연재일 :
2021.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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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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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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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구교. 한 순간에 대세가 뒤바뀌다.

DUMMY






1. 신교가 마침내 눈을 뜨다.








백전노장의 틸리 군대에게 한방 맞은 스웨덴 군.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틸리 군대와 다시 대치하기 위해 진형을 정비하려고 하는데, 안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1.jpg

[ 빨간 동그라미 : 마그데부르크 ]



[ 파란 동그라미 : 프랑크푸르트 ]







틸리가 이끄는 제국군 주둔지 부근에는 마그데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가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스웨덴 군의 통과를 허용해주었지만, 마그데부르크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그데부르크 지역으로 갈려면 작센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작센에서 그걸 허용해주지 않았죠.





전 편에 작센 선제후가 스웨덴 편을 들었다고 얘기했을 겁니다. 근데 갑자기 왜 통과해주지 않았을 까요?





작센 선제후는 처음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경고성 발언등으로 편을 들긴 했지만, 막상 틸리 군대가 오자 맘이 바뀐 겁니다. 왜냐하면 루터 전투에서의 틸리 군대와 맞붙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다시 편을 고르는 것에 고민하게 된 것이죠.




2.jpg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틸리 백작과 붙어야하는 상황이란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에서, 작센의 통과를 불허하자 의외의 행동을 하게 되니, 마그데부르크를 포기한 것이었죠.





그가 마그데부르크를 포기한 것은 매우 의외의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전에 자신의 부하를 마그데부르크로 침투하여, 신교의 봉기를 유도했고, 그곳의 사람들은 스웨덴 군이 오길 학수고대 했던 사람들이었죠.





그리고 구스타프는 자신을 원하는 여론이 들끓는 지역을 통해 틸리와 상대하는게 최상의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가로막혀 가질 못한 상황속에서 결국 포기하게 된 것이었죠.




3.jpg

[ 라인리히 추 파펜하임 백작. 틸리 휘하의 기병대 대장 ]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마그데부르크를 포기하자, 틸리 백작 휘하에 있던 지휘관중에 과격한 인물이던, 파펜하임이 마그데부르크로 진입합니다.





그가 이곳이 진입한 이유는, 점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4.jpg



30년 전쟁이 늘 언제나 그랬듯이 약탈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파펜하임이 마그데부르크에 대 약탈을 벌이는 참사를 벌이게 됩니다.





제가 항상 틸리를 좋게 얘긴 하고, 틸리가 약탈을 방지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지휘관이 약탈하지마! 라고 하면 정말 다 안하는게 아니라, 그래도 상대적으로 덜 할 뿐.





약탈을 저지르고, 또 이 약탈을 정말 못하게 하면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조금은 허용은 해주는게 많았죠.





기껏 힘들게 적과 목숨을 왔다 갔다하며 싸우며 군대에 있는 이유가, 결국은 먹고 살고, 잘 살려고 하는데, 이 원천이 이런 약탈에 의해서 벌어들이는게 컸기 때문에 병사들은 이 약탈을 포기가 안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틸리는 이런걸 최대한 막으려고 했고, 좀 덜 했지만, 이 마그데부르크에서 대형 사고를 터트렸죠.





그 전에는 그래도 통제가 잘 되서, 덜 약탈을 이루어진 것은, 전에는 보급품이 잘 들어왔데 지금은 보급품 조달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그데부르크 당시 상업과 공업이 발달된 도시.





그러한 만큼, 얻어먹을 것이 넘쳐났다는 뜻이죠. 굶고 다닌 군대가 눈 앞에 먹을 게 있으니, 안 미치는게 이상할 것이었죠.





그러나 파펜하임 생각과 다르게, 틸리는 이곳의 신교 세력을 진압해서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고, 그래서 진격을 명령했는데, 파펜하임은 대 약탈이라는 악수를 저지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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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마그데부르크 약탈 당시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파펜하임이 일부로 한 것인지는, 사고인지 모를 일이지만,





어째든 곳곳에 불이나면 통제가 안되기 십상이죠.





병사들은 불이 난 것을 보자, 오히려 더 신이나서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또 화재를 저지르며, 마그데부르크를 미친듯이 약탈해갑니다.





얼마나 약탈이 심했는지, 마그데부르크 거주민 숫자 3만명중에, 살아남은 숫자가 고작 5천으로 무려 2만 5천의 사람이 약탈을 자행하는 파펜하임 군대에게 학살 당한 것이죠.





이런 참혹한 일을 저지른 파펜하임. 그러나 그는 일기장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마그데부르크의 약탈로 자신과 병사들은 한 몫 단단히 챙겨, 사기가 증진됐다. "





라고 저술했습니다.





참 이런 참혹한 일을 저지르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면, 30년 전쟁의 긴 시간 속에서, 전쟁으로 인간성이 상실하였는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이 참혹한 참변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대 약탈에서 살아남은 마그데부르크 사람들이 지하에 숨었다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6.jpg



지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본, 파펜하임 병사들은 이걸 보고 깨닫습니다.





" 아! 지하가 있었군! 그래, 뭐든 귀중품이나 식량들은 지하 창고에 저장하거나 숨겨놓지! "





하며 지상에서 한차례 약탈을 했는데, 이젠 지하 약탈까지 벌이게 됩니다.





병사들은 저마다 삽을 가져와서, 집들을 태운 재들을 다시 파내기 시작하죠.





이렇게 지상 지하. 모두 약탈해가고, 유일하게 온건히 남은 것이라곤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하나만 딸랑 남았습니다.






대 약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마그데부르크 대성당은, " 구교가 개신교에 대한 탄압의 상징 " 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틸리 군대는 여태껏 나름 적당한 선을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틸리 백작은 이런 약탈을 허용하는 지휘관도 아니였고, 그의 군대도 규율이 잘 지켜져, 약탈도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군대가 굶주리기 시작하자, 곧바로 돌변했다는 것.





이는 전쟁이라는 긴 시간으로 인해, 횡횡한 독일의 무질서한 환경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순식간에 돌변한다고 생각하니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가 없습니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인간성을 유지하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겠죠.





아무튼 마그데부르크 대 약탈은 파펜하임, 본인과 병사들이 행복에만 잠겨,약탈을 하는 짓은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지금 스웨덴 군대와 맞붙어야하는 상황에서, 마그데부르크를 거점으로 삼아서 대치해야하는데, 오히려 그 거점 지역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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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약탈로 황폐화된 마그데부르크에 황제의 서신이 담긴 사신이 옵니다.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 즉시 모든 군대를 해산하고, 황제의 명령을 따라라. "





불난 집에 기름 붙는 격도 아니고, 가뜩이나 사과와 보상을 해줘도 못할 망정, 이런 말을 해버리니 마그데부르크 사람들은 얼마나 분노에 차올랐을까요.





이것을 보면, 역시 페르디난트 2세는 참 어떻게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긴 합니다;;;






파펜하임의 대약탈과 황제의 한마디 덕분에 앞으로 틸리는 더욱 힘든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8.jpg

[ 신교 어쎔블! ]





이 사건을 계기로 단합이 안되고, 편 나누기 급급했던 신교가 이 일로 인해, 전부 각성해서, 구스타프 편으로 전부 돌아서게 됩니다.











2.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마침내 편을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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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측발. 전쟁이 벌어지려는 순간에, 파펜하임의 마그데부르크에 대한 대 약탈로 신교 세력이 전부 스웨덴 편으로 붙은 상황.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로 진입하고 나서,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린 일이 없었습니다.





신교를 도와준다고 왔는데, 정작 신교는 그 도움에 회의적인 태도. 이 태도 때문에, 그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남쪽으로 마구 진격했는데 신교 영주중 한명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서 퇴로를 끊을 수 도 있었고.





내부로 마구 진격해서, 어느 영지로 입성했는데, 그 영지의 영주가 보급로를 끊고, 협상으로 돈을 뜯거나, 점령 지역 일부를 내놔라등으로 이익을 챙겨먹으려는 짓도 할 수 있었죠.





이런 위험 요소 때문에 스웨덴은 맘놓고 구교를 박살내러 가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교는 이 약탈 사건으로 모두가 분노하고 있는데, 어떤 신교 영주가 이 상황에서 교섭해도 스웨덴 군을 삥뜯으려 한다면,





당연히 지탄의 대상. 모든 명상이 날라가고, 자칫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으니, 감히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런데 적이 자신의 골치 아픈 고민을 해결해주었으니, 그는 아주 박수치고 좋아했을 겁니다.




2.jpg



한편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며, 스웨덴군의 진입을 막았던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의 태도가 중요했습니다.





스웨덴이 틸리 군과 맞붙으려면 이 지역이 아주 중요했는데... 요한 게오르크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요상하게, 아직까지 편을 누구에게 붙을지 결정을 못했습니다.





요한 게오르크의 마음이 아직 갈대처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사신을 보내서, 마그데부르크 일을 꺼내며, 설득 작업을 합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이러한 설득에 어느정도 마음이 정한 요한 게오르크. 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고민이 있었습니다.(여기까지 왔는데 뭘 고민하겠냐 하지만.....)






그는 스웨덴 군의 지원을 두고 고심합니다. 영지 통과 정도까지만 허용할지, 아니면 자금이나 병사들도 지원 할 것인지. 이러한 요소에서 그는 깊게 고민합니다. 아무래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루터 전투가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요한 게오르크는 지원 수위에 대한 판단을 고민하고 있었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돈, 군대, 중간 이탈 없이, 전쟁이 끝날때 까지 함께등 무조건적인 지원을 바랬습니다.






요한 게오르크가 고민하고 있을 때, 또 한번 구스타프에게 연타석 홈런이 터집니다.




3.jpg

[ 빨간 동그라미 : 라이프치히 ]



[ 파란 동그라미 : 메르제부르크 ]







구스타프와 요한 두 사람이 협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파펜하임은 작센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라이프치히, 그리고 다른 지역이던 메르제부르크를 점령해버립니다.





이 점령할 때, 마그데부르크를 마구잡이로 약탈했던 그가, 온건하게 끝낼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는 이곳에 점령할 때, " 마그데부르크처럼 될래? 항복할래? " 라며 아주 강압적으로 점령합니다.






두 지역에 대해 폭압으로 항복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게 되자, 작센도 도저히 묵과할 일이 아니였습니다.





결국 가만히 있으면 구교한테 당하기에, 작센은 구스타프와 손을 잡게 되면서, 요한 게오르크는 이런 말을 합니다.





" 작센 최정예 군대를 보내겠소! "





작센의 지원까지 등에 엎은 스웨덴군.





스웨덴 + 개신교 동맹군은 라이프치히를 탈환하기 위해 진격에 나서게 되죠.










드디어 스웨덴이 제대로 된 한판을 준비하는, 제 5 라운드 전투가 벌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제 5 라운드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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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발렌슈타인의 처참한 몰락 21.02.12 32 2 10쪽
28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完) 21.02.11 39 2 11쪽
27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3) 21.02.10 36 0 15쪽
26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2) 21.02.09 34 1 11쪽
25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1) 21.02.08 3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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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발렌슈타인의 선택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 +3 21.02.04 30 2 8쪽
20 스웨덴의 군사 개혁과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 상황 21.01.31 38 2 15쪽
19 라이프치히를 탈환하라! 제 5 라운드, 브라이턴 펠트 전투(1631년) 21.01.30 34 0 17쪽
» 구교. 한 순간에 대세가 뒤바뀌다. 21.01.29 28 1 11쪽
17 스웨덴 전쟁(1630~1635) 21.01.28 37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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