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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최근연재일 :
2021.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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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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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몰락하는 자와 떠오르는 자.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

DUMMY



1. 만스펠트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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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만스펠트.





전투에서 목숨을 보존하긴 했지만, 이젠 그의 용병대는 밑천이 온 유럽에 공개되었습니다.





몸집은 크지만, 정작 실전에선 전혀 쓸모가 없다는, 여지껏 만스펠트 용병대의 거품이 싹 사라진 것이죠.





결국 싸움은 좀 할 것 같아서, 온갖 약탈질을 해도 불구하고 고용했지만, 이젠 명성과 위상이 전부 사라진 그에겐 오직 악명만이 남았습니다.(고용주에겐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본 셈)






이런 상황에도, 그래도 그가 참 용병 관리하는 재주는 어디 가질 않습니다.








20.jpg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잃은 4천명을, 마을 곳곳에 돌아다니며 농민들을 끌어모아서 7천명을 모으는 기가 막힌 재주를 발휘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모아서 몸집이 또 불어야, 막상 적과 싸우는 세력 입장에선 많은 병력수에 궁해서 입찰을 붙기 때문이죠.


(내가 2천명 있는 것과, 내가 7천명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수준)





이렇게 데사우 전투때보다 더 많은 몸집을 불린 만스펠트가 유럽 각 세력과 영주들에게 다시 입찰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번 날들과는 달리, 과거에 꾸준히 쌓아온 악명 + 데사우 전투에서의 여파로 인하여, 이젠 아무도 입찰을 해주지 않게 되죠.





모든 세력들에게 신뢰를 잃은 만스펠트. 이제 독일에선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음을 느끼자, 다른 무대로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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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지역(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으로 먼 이동을 하게 된 만스펠트.(물론 가는 와중에도 약탈은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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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만스펠트를 완전히 격멸시키기 위해, 데사우 전투 후부터, 계속 만스펠트를 추격하는 발렌슈타인.





아무튼 두 군대가 독일 국경 근처까지 쫒고 쫒기는 추격전을 벌이느라, 구교 vs 신교의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됩니다.





이 황당한 추격전은 당시 사람들도 굉장히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황당한 것 같습니다.





당시 독일의 어떤 기록에 의거하면,





" 만스펠트 저 사람은 데사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발렌슈타인이 쫒아오는 와중에도 7천 명을 모으고, 심지어 입찰까지 붙쳤다 "





" 여태 신교와 싸울려고 병력을 모은 사람이, 갑자기 머나먼 딴 세상가는데, 대체 저기 가서 왜? 뭘하러 가는 거지? "





" 저렇게 먼 곳으로 가는 것을 보니, 독일은 틀려서 오스만으로 가는 게 아닐까? "






라며 온갖 만스펠트에 대한 모든 행동의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추측으론 역시 독일 및 유럽 지역은 이미 그의 악명이 퍼질 때로 퍼진 뒤라서, 유럽에서 한탕 해먹기는 이미 그른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오스만에 가서 새 출발이 나은 선택일 뿐더러, 오스만과 가까운 지역까지 이동한 것을 본다면, 아마 오스만으로 갔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19.jpg







이렇게 힘들게 이동한 만스펠트는 헝가리 국경에서 헝가리의 왕, 베슬렌 가볼리에와 만나서, 만스펠트의 뒤를 쫒아온 발렌슈타인에 맞서 같이 전선을 구축합니다.





헝가리 왕이 왜 같이 만스펠트와 전선을 구축했냐 하면, 초반부에 이야기가 빠졌지만, 헝가리도 신롬의 구교와 한번 투닥거렸던 사이였습니다.(그래서 백산 전투에서 헝가리 용병 기병이 온 것도, 이러한 이유가 섞인 셈)





그러다가 전황이 구교가 계속이기고 하다보니, 헝가리는 굳이 더 해봤자 이득이 없다는 생각과, 구교도 현재 너무 많은 적이 있어서, 최대한 적을 줄여야 했고,





신롬의 구교와 헝가리는 이런 이익적인 맥락이 서로 상통하여, 헝가리는 30년 전쟁에 이탈된 상태였죠.





그래서 구교의 발렌슈타인이 헝가리쪽으로 다가오자, 헝가리의 왕도 혹시나 해서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만스펠트와 함께 공동 전선을 펼친 것이죠.










15.jpg






한편 발렌슈타인은 끈질기게 추격한 끝에 결국 만스펠트가 있는 곳 까지 도착합니다.




그가 이렇게 악착같이 쫒은 이유는 구교에선 만스펠트 - 헝가리 - 오스만의 3개 군의 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명성을 드높히고 싶다는 야망에서 비롯된, 만스펠트를 무찔렀다는 명성까지 챙기고 싶은 맘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무튼, 만스펠트가 헝가리 군과 합류하여 자신의 군대에 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발렌슈타인은 굳이 섣부르게 공격은 안된다고 판단하고,





적들의 공동 전선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데사우 다리 전투와 동일하게 요새를 짓고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발렌슈타인은 요새를 짓고, 지금 상황에 대해 빠르게 파악한 뒤, 은밀히 헝가리 군에게 밀사를 파견하는 공작 작업을 펼칩니다.




"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만스펠트. 그를 헝가리에서 추방시키면, 더 이상 헝가리로 들어가지 않고, 깨끗하게 물러나겠다. "




라는 조건이었죠.




그리고 헝가리 왕은 이 밀사의 조건에 흔쾌히 수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헝가리 왕은 이미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땐 사람. 굳이 싸움을 안해준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죠.









22.jpg






헝가리 군이 하루아침에, 공동전선을 펼쳤던 만스펠트에게 창을 겨누고 당장 나가라고 합니다.




만스펠트는 당시 긴 추격전으로 몸이 상한 상태였는데, 당장 나가지 않으면 헝가리 군과 발렌슈타인 군이라는 두개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헝가리에서 추방되게 됩니다.





다시 혼자가 된 만스펠트. 그리고 다시 쫒아오는 발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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쫒겨난 만스펠트는 오스만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오스만으로 가는 길은, 만스펠트 용병대에게 죽음의 행군이었습니다.





데사우 전투 전부터 이어진 만스펠트 용병대의 긴 행군과, 바닥이 난 보급품. 그리고 뒤에서 열심히 쫒아와서, 충분한 약탈도 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자신의 아픈 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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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지역이 사라예보. ]







멈추면 굶어죽거나, 그들에겐 오직 갈 곳이 없이 오직 전진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었죠.




그리고 이 죽음의 행군이 이어지다가, 만스펠트는 지금의 사라예보 근방에서 병사로 죽게 됩니다.






만스펠트의 비참한 죽음과, 그의 용병대의 암울한 현실.





이건 비단 만스펠트 용병대에게만 해당 사항은 아닙니다.





항상 큰 전쟁이 벌어지만, 만스펠트 용병대처럼 몇천에서 몇만까지, 떨어진 군대가 있기 마련이죠.





이 군대도 처음엔 전쟁을 싫어하고 염증을 느껴서 전장에서 이탈했지만, 당장 갈 곳도 없고, 눌러 앉을 지역도 없다보니 계속 방황하고 떠돌다가, 그게 결국 약탈을 일삼고, 이게 계속 이어져 스스로의 직업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언가의 희망을 품습니다. 뭐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 땅과 이 정도의 먼 거리면 쫒아올 적은 없지 않을까? 이러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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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런 부분은 중국사에 굉장히 잘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주 일어난 전쟁과 내전. 드넓은 중국의 영토. 그래서 중국은 항상 군대중에 큰 무리의 이탈한 군대 혹은 이탈한 군인들이 농민등을 모아 반군이나 거대 도적 세력을 만들죠.




한국사에서 이 홍건적이 대표적인 세력입니다.




그들도 중국에 쫒겨나자, 이번엔 막연하게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자고 꿈을 꾸며 타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참, 난세라는게 언제나 두렵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만스펠트는 헝가리에서 쫒겨나며, 완전히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라진 빈 자리에 신교. 구교 할 것 없이 모두가 환영했습니다. 특히 신교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 드디어 골칫거리가 사라졌구나! "





이렇게 말이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이젠 얼마나 만스펠트의 입지가 좁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발렌슈타인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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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사우 다리 전투, 그리고 머나먼 지역까지 도망친 만스펠트를 완전히 격멸한 발렌슈타인.




그는 이것에 공적으로 높은 명성과 더불어, 북독일의 영주까지 됩니다.




이 당시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도합 12만명까지 있었던 시점이었습니다.




여태까지 고작 해봐야 양측 군대가 싸운 병력 수를 합해도 6만이 안넘어갔는데, 발렌슈타인은 혼자서 12만 병력을 통솔하고 있었으니,




그가 마음만 잘못 먹으면, 독일을 혼자 먹어도 될 정도로 큰 권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 2세도 일개 용병 대장으로 대하는 것, 그 이상으로 영주 하나를 줘야 자기한테 충성하기 때문에, 영지 하나를 수여한 것이기도 하죠.





이것을 보면, 틸리 백작이 우려한게 어느정도 대강 맞아 떨어지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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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독일의 메클렌부르크 ]






막강한 군대가 있고, 영지를 하나 줘야했기에, 페르디난트 2세는 독일 북부가 신교의 중심지에서 그들을 견제하고자 이 지역에 공작위를 임명.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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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시말리안 1세. 초창기 구교의 하드캐리를 하신 분. ]







제 1차 보헤미아 - 팔츠 전쟁부터 빔펜 전투까지 구교의 틸리 군대의 사용하게 했던 막시밀리안 1세가 구교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은 돈은 신롬 황제께서 주시는 것으로 틸리를 잔뜩 이용해서 팔츠 영지까지 먹고, 구교의 보호자로 가득 명성을 쓸어담은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역전됐습니다.




만스펠트 군대를 격파한 것도 모자라, 휘하 병력이 12만명인 것에 도저히 꼬리를 못내릴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는 아주 비통한 성명을 밝힙니다.





"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그대를 인정한다. 그리고 공작의 영주로도 인정한다. 그러나 군주는 되지마라 "





라고 최대한 베풀 것은 다 베풀고, 단 마지막 넘지 못할 선을 제시해준 아주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죠.





근데 그건 막시밀리안 1세의 생각이었을 뿐, 발렌슈타인의 본인 맘은 전혀 달랐죠.







이렇게 두 용병대의 흥망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전투가 남았죠. 바로 틸리 백작 Vs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의 전투가 남았습니다.





틸리와 크리스티안의 전투는 데사우 전투 이후에, 만스펠트의 기나긴 이동이 시작될 무렵에 맞붙었습니다.




이번 편의 이야기를 다시 과거로 넘어가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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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구 세대와 신 세대들의 세대 교체 21.02.13 37 1 8쪽
29 발렌슈타인의 처참한 몰락 21.02.12 32 2 10쪽
28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完) 21.02.11 39 2 11쪽
27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3) 21.02.10 36 0 15쪽
26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2) 21.02.09 34 1 11쪽
25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1) 21.02.08 3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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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발렌슈타인의 복귀와 틸리의 항전 21.02.06 28 2 11쪽
22 유리한 분위기 속에 불안한 스웨덴 21.02.05 28 1 11쪽
21 발렌슈타인의 선택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 +3 21.02.04 30 2 8쪽
20 스웨덴의 군사 개혁과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 상황 21.01.31 38 2 15쪽
19 라이프치히를 탈환하라! 제 5 라운드, 브라이턴 펠트 전투(1631년) 21.01.30 34 0 17쪽
18 구교. 한 순간에 대세가 뒤바뀌다. 21.01.29 28 1 11쪽
17 스웨덴 전쟁(1630~1635) 21.01.28 37 2 13쪽
16 다시 한번 거대한 전쟁이 몰아치다. 21.01.27 38 1 14쪽
15 승승장구 하는 구교. 폭주하는 페르디난트 2세. 21.01.26 49 2 14쪽
14 제 4 라운드, 틸리 vs 크리스티안 4세의 루터 전투 21.01.22 36 2 16쪽
» 몰락하는 자와 떠오르는 자.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 21.01.21 35 1 10쪽
12 제 3 라운드, 데사우 다리 전투 21.01.20 50 2 14쪽
11 새로운 신교 세력에 맞서기 위해, 구교의 새로운 인물 등장 21.01.19 76 2 20쪽
10 전쟁 중반부의 시작. 외국의 개입 : 덴마크 전쟁(1625~1629) +4 21.01.18 65 2 13쪽
9 환장의 조합, 신교 군대(2) - 크리스티안의 발악. 슈타트론 전투 +1 21.01.17 42 3 13쪽
8 환장의 조합, 신교 군대(1) : 만스펠트의 만행 21.01.16 63 2 8쪽
7 구교의 무적에 진영. 테르시오 진영 21.01.15 48 2 16쪽
6 구교 vs 신교. 제 2 라운드. 빔펜 전투(1622년 5월) 21.01.11 55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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