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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최근연재일 :
2021.02.16 14: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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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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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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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유리한 분위기 속에 불안한 스웨덴

DUMMY




1. 모든 상황이 좋아보이는 신교. 고민에 연속인 구스타프







1.jpg



구스타프는 브라이턴 펠트 전투의 승리로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황제군이 점령한 북부를 탈환합니다.





북부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지금. 그는 드디어 남쪽 진출을 하게 됩니다.





그가 어디로 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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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팔츠 지역이었습니다.





왜 팔츠으로 갔을까요?





30년 전쟁의 시작에 기점이 되는 상징 지역이었죠.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신교의 수호자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신교 세력을 계속 불려 나갈려면 이런 상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순전히 상징에만 목 맨 것이 아니라, 이 팔츠 지역을 점령하면, 개신교이자, 스페인(에스파냐)에 독립 전쟁을 벌이는 저지대 국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죠.





그는 황제군의 큰 저항 없이 팔츠의 아우스크스부르크등 여러 도시들을 구교로 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이때 해방된 도시마다 시민들은 스웨덴 군을 아주 열렬히 환영했는데, 아무래도 페르디난트 2세의 토지반환령등에 인한 민심이 얼마나 신교로 기울었는지 알아 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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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웨덴은 자선사업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하여 그냥 풀어준게 아니라, 해방 조건으로 군자금 지원이나 병력 지원등을 받았습니다.





그가 지속적으로 편을 만들고, 군사 지원을 받는데 계속 신경 쓰는 것을 보면 여전히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남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자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지고, 심지어 바다 건너 가야했기 때문에, 독일 내륙에 자급 자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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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계속 이렇게 신경쓰는 다른 이유는 비록 틸리가 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넉넉한 보급품을 가지고 있는 발렌슈타인이 다시 등장은 그에게 큰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지도 모를 일이죠.






외국 군대, 타국, 세력을 포섭했다지만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개신교 세력. 보급품을 뜯어 먹으려고 차단시키려는 이익에 눈이 먼 자들.




그리고 이런 위험에 언제 제국군이 와서, 붙어야할 지 모르는 상황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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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브라이턴 펠트 전투에서 얘기했지만, 요한 게오르크를 믿고 뒤통수 당한 게 컸기 때문에(마그데부르크 길 통제등)





그가 신교에 대한 영향력이 큰 영주이긴 했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인물. 그래서 여태까지 협상으로 끝을 보려고 했고, 구교와 신교 모두에 발을 걸쳐 있었죠.





그나마 파펜하임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 신교에 붙긴 했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구스타프가 믿지 못하게 된 이유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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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임을 끝으로 한동안 눌러 앉은 스웨덴 군 ]






이런 세력을 믿지 못하면, 지역을 점거해서 본인 영토로 만드는 방법밖엔 없는데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병력은 약 2만명 가량. 이 군대 가지고 전투는 치루는 것은 가능한 수준에 불과한 숫자이지, 영토 점령은 어림도 없었기에 편을 늘리긴 해도, 그 편이 완전히 자신을 전적으로 지원해줄 지는 미지수.





또한 신교를 도와주러 왔다면서, 오히려 점령하는 모습으로 순식간에, 침략자라는 오명을 씌울 수 있기에, 애초에 할 수 도 없었죠.





이 모든 압박감이 있었는지, 지금 진격해야할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팔츠에 있는 오펜하임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낸 후부터는 이동을 멈추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멘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스웨덴 군.





그들은 이곳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에 대한 일화 중에 하나가 " 헬멧에 포도주를 마음껏 부어 마셨다 " 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오펜하임에서 스페인 군을 몰아낸 것이 11월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까지도 스웨덴 군이 아무런 활동은 안한 것. 즉 1개월 동안 계속 눌러 앉았다는 것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위의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심히 여겼는지 다시끔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특히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갈 수록 더욱 불안해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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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스타프가 눌러 앉으면서도 그냥 한탄과 고민만 한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는 잠깐 쉬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나름 모색하려 했습니다.





그는 점령 지역 마다 확고한 개신교 동맹 세력을 만들어서, 부하들을 일부 관리 인원으로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으로, 바지사장을 내세워 실질적 통치는 자신이 하겠다는 생각을 굳게 됩니다.













2.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의 유럽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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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펠트 전투의 승리로 독일 내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북부 신교는 스웨덴의 편을 들었고, 독일 남부에선 신교의 움직임이 다시 울렁거렸죠.





그리고 프랑스는 한층 지원 규모를 늘려 지원해 줍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계속 호의로 계속 답해주는 시절은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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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슬슬 조여볼까? ]






리슐리외 추기경은 브라이턴 펠트 전투의 결과를 보고, 그 전까지의 태도가 몰라볼 정도로 달라집니다.





그는 스웨덴 군이 참전하기는 바랬지만, 이토록 스웨덴 군이 불패의 틸리를 상대로 아주 완벽한 승리를 해냈다는 것에 매우 경계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리로 인해, 독일에서 스웨덴의 입지가 강해지는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세워놨던 대전략에도 반하는 일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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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루이 13세. 절대주의를 꿈꾸고 실현한 프랑스의 왕. ]



[ 그의 치세 덕분에,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 불리며, 절대왕정의 정점에 오르다 ]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바로 루이 13세를 알련하여, 일련의 모든 상황을 전부 전해주자, 루이 13세가 이런 말을 합니다.





" (스웨덴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 한다. "





" 스웨덴이 유럽 본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





라며 리슐리외의 생각과 동의합니다.





그래서 그 전까지 스웨덴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던 프랑스는, 이후부터는 각종 여러 핑계와 조건을 붙어서 지원을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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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구스타프 2세 아돌프도 바보가 아니였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럴 줄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독일 내에 편을 계속 만들어서 각종 지원을 뜯으려고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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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장의 신교. 언제까지 이럴까? ]






한편 신교 내에서도 비록 스웨덴을 전적으로 밀어주자는 의견도 있지만, 상당한 의견에서는 회의적인 태도로 보인 세력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가 겉으론 스웨덴 편을 해주면서도, 순식간에 어떤 태도를 뒤바꿀지 모르는 행동처럼, 다른 신교 세력도 마찬가지였죠.





심지어 어떤 신교 영주들은 " 스웨덴의 뒤를 쳐주면, 구교가 날 안건드리겠지? " 라며 오히려 뒤에서 칼을 찌르려고 했던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론 모든 상황이 구스타프 2세 아돌프에게 돌아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너무 큰 승리를 하니까 순식간에 어그로가 끌리면서 각종 제한과 배신이 더욱 판을 쳤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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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좀 믿어라!!!! ]







그래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에서 인정받고 신뢰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점령 지역마다 종교의 자유를 주고, 약탈을 병사들에게 최대한 금지시키게 하며 명성을 쌓으려고 했는데....





심지어 그는 독일 사람들에게 이렇게 항소하며 다녔습니다.





" 나는 신교를 위해서 왔을 뿐이다! "




" 나는 욕심이 없다! "





이건 본인 생각일 뿐.





독일 사람들 눈에는 " 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을 어떻게 믿어? " 밖에 나오질 않았죠.





근데 저런 말 해도, 아까 위에서, 점령 지역마다 안정적 동맹을 세울려고 간접 통치 방안까지 하는등, 진짜 그럴 일이 없고,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안믿는게 당연한 것죠....





30년 전쟁을 계속 보다보니, 참 사람들의 동상이몽에 극치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독일 영주들과 프랑스에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11.JPG

[ 팔츠의 도시중 하나, 뉘른베르크 ]






다음해 3월. 스웨덴은 뉘른베르크로 이번에도 아무런 구교의 저항없이 해방시킵니다.





이때 시민들이 모두 스웨덴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한술 더 떠서, 집집마다 모든 초상화에 구스타프가 걸릴 정도였습니다.





독일 시민들 입장에선, 약탈도 최대한 안하고, 자치권도 보장해주고 치안도 확립시켜주려고 노력하는 스웨덴 군에게 거부할 이유가 없었죠.





가는 곳곳 마다, 독일 사람들이 스웨덴을 다들 환영해주자, 구스타프 본인에 일기장에도 " 이 정도면 프랑스 지원이 없어도 될 것 같다 " 라는 속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의 욕심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일전부터 계속 구스타프에 대한 독일 기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부터 구스타프는 한번의 전투로 위상을 올렸기 때문에, 이젠 전투보단 내부 단결에 크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그가 추진해온 일중에 하나가, 개신교 동맹의 연합 세력을 만드는 것에 주력합니다.





" 나는 욕심이 없다. "




" 그러나 내가 개신교 연합의 의장이 된 이유는 너희들을 지켜주고, 단합 시켜주려는 것이다. "




라고 하면서,




12.png

[ 북독일의 메클렌부르크 ]






자신의 딸과, 메클렌부르크 영주와 결혼을 시켜주려고 합니다.





그 대신 혼담 조건으로 항구 도시 하나만 할량에 달라는 것이었죠.(대륙 기반 욕심)





일찍히 도입부 편에서 제가 유럽의 결혼 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땅이 오고간다고 했는데, 여기서 다시 보여주게 되네요.





아무튼 이 태도를 보면 누가 과연 좋은 맘으로 " 이야~ 저 사람은 아무 욕심 없네! 정말 우릴 도와주러 왔나봐! " 라고 생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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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세기의 제국주의의 절정. 조선의 개항 ]






예를 들어, 19~20세기의 조선을 개항 할 때, 인천만 달라고 하면 누가 과연 인천에서 주고 끝이라고 생각할까요?




단순히 여길 교두보로 삼는다 밖에 하질 않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구스타프의 독일 참전이 순전히 좋은 마음에서 비롯되진 않으리라 봅니다.





특히 왕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직책.





근데 자기 백성들을 징집해서 군대를 만들어 외국에 보냈는데, 아무런 이익을 포기하고, 남을 돕겠다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왕으로서 그는 매우 실패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생각과 주장일 뿐, 실제로는 제 생각과 달리 정말로 도와주려고 왔을 수 도 있고,





이익 30%, 도와주려고 70%의 정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진실은 과거의 구스타프만이 아는 진실이겠죠.





이번 편에선 구스타프의 쾌속 진격이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의 온갖 제약에 대한 난관과 유럽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음 전투와 독일을 둘러싼 기나긴 전쟁의 뿌리를 박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인 것이죠.









다음 편에선 제국군의 동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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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후반부 : 스웨덴 - 프랑스 전쟁(1635~1648) 21.02.15 41 2 13쪽
31 스웨덴의 영혼의 한판, 뇌르틀링겐 전투와 후반부의 서막이 울리다. +2 21.02.14 36 0 17쪽
30 구 세대와 신 세대들의 세대 교체 21.02.13 37 1 8쪽
29 발렌슈타인의 처참한 몰락 21.02.12 31 2 10쪽
28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完) 21.02.11 38 2 11쪽
27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3) 21.02.10 33 0 15쪽
26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2) 21.02.09 32 1 11쪽
25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1) 21.02.08 2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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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발렌슈타인의 복귀와 틸리의 항전 21.02.06 27 2 11쪽
» 유리한 분위기 속에 불안한 스웨덴 21.02.05 2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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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스웨덴의 군사 개혁과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 상황 21.01.31 36 2 15쪽
19 라이프치히를 탈환하라! 제 5 라운드, 브라이턴 펠트 전투(1631년) 21.01.30 33 0 17쪽
18 구교. 한 순간에 대세가 뒤바뀌다. 21.01.29 27 1 11쪽
17 스웨덴 전쟁(1630~1635) 21.01.28 36 2 13쪽
16 다시 한번 거대한 전쟁이 몰아치다. 21.01.27 37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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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몰락하는 자와 떠오르는 자.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 21.01.21 3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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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새로운 신교 세력에 맞서기 위해, 구교의 새로운 인물 등장 21.01.19 76 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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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환장의 조합, 신교 군대(1) : 만스펠트의 만행 21.01.16 61 2 8쪽
7 구교의 무적에 진영. 테르시오 진영 21.01.15 46 2 16쪽
6 구교 vs 신교. 제 2 라운드. 빔펜 전투(1622년 5월) 21.01.11 54 2 9쪽
5 제 1차 보헤마아 - 팔츠 전쟁 이후, 독일과 유럽의 정세 21.01.10 76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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