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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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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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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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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제 1차 보헤미아 - 팔츠 전쟁 : 백산(빌라호라) 전투

DUMMY

:: 제 1차 보헤미아 - 팔츠 전쟁 ::

1.jpg

[ 졸지에 황제에게 반역을 저지른 프리드리히 5세 ]




신롬 황제로 부터 프리드리히 5세가 반역죄로 몰린 상황.




하지만 전쟁의 명분에 대한 시기를 살펴본다면, 프리드리히 5세가 이틀 전.



아직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로 부터, 의회에서 적합하게 투표로 선출된 보헤미아 왕이 되었죠.



현재로 따지면 황제에게 작위를 뺏은 찬탈이긴 한데, 과거로 보면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황제보단 직분이 낮은 위치와 강제로 뺏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양측의 의견이 정말 많이 달랐습니다.



동양에만 명분과 법이 중요한게 아니라, 유럽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정말 중요했고, 또 정말로 많이 명분과 법률 싸움도 발생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 입장에서는,



" 난 신성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한 게 아니다. 어디 까지나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리고 난 적합하게 투표로 선출해서 보헤미아 왕이 되었다. "



이 의견을 끝까지 고집하였고, 보헤미아 - 팔츠 전쟁이 끝난 후로도, 계속 스스로를 변호했다고 하네요.





1. 전쟁의 판도

2.png

전쟁의 구도는 2개로 나뉩니다.



보헤미아 지방에서의 전투와 팔츠 지방의 전투입니다.



각 지방에서 어떤 군대가 충돌했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 보헤미아 지방 ::


- 신교 : 보헤마아 군 + 팔츠 군 + 영국 군 + a

- 구교 : 작센 군




:: 팔츠 지방 ::


- 신교 : 팔츠 군

- 구교 : 스페인(에스파냐) 군




각 전쟁 지역마다 전쟁의 목적성이 달랐는데, 보헤미아 지방은 신롬 황제의 보헤미아 탈환 전쟁이었습니다.



근데, 보헤미아 왕위 전쟁에서, 갑자기 왜 팔츠 지방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을까요?



이는 전편에 설명했듯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여파였습니다.



팔츠가 함락되면 스페인 본대가 네덜란드로 진입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팔츠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것이죠.



즉 보헤미아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동시에 네덜란드 독립 전쟁까지 함께 엮인 복잡한 전쟁 구도가 벌어진 셈입니다.



또 아이러니 하게도, 정작 전쟁 판도는 보헤마아 왕위 전쟁인데, 애꿎은 팔츠라는 영지가 두 전쟁의 양상에 중심지였죠.



또한 처음 구교와 신교가 전쟁을 벌이는 시점에서, 황제의 이미지도 정말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줬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제 황제가 됐는데, 전쟁을 할려면 군대가 있어야하고, 또 군대를 운용할려면 돈이 있어야하는데



황제가 둘 모두가 없어서 영주들에게 여기저기 발품하는... 참 모양 많이 빠지는 행세도 보이면서,



이미 전쟁의 판도부터 시작해서 구교와 신교가 서로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오는 모습.



벌써부터 30년 전쟁의 첫 전투부터 이미 국제전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과 기나긴 30년이라는 대 전쟁의 서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교 세력이 여기저기 병력을 모으면서, 흥미로운 기록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을 모으던 구교 군대 기록에 따르면, 모집하는 기병의 수가 꽤 부족했다는 사료가 보였니다.



독일.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운용하는 넓은 지방에서 기병을 징집이 부족했다는게 이상해서 이것 저것 찾아보았는데,



우선 군대 모집은 신교가 제일 빨리 했다고 하네요. 시대 정황상 아무래도 팔츠 선제후가 먼저 움직여 보헤미아를 접수할 때 부터, 이미 팔츠 뿐만 아니라 신롬 전역에서 다닥 긁어 모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입니다.(용병 포함)



그래서 구교(스페인 군 및 제국 군)에서 많은 기병을 용병으로 기용했습니다.



특히 기병 쪽에선 동유럽이 우수했기 때문에 구교와 신교는 동유럽 기병을 용병으로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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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유럽의 대표 국가.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등 ]



기병쪽으로 유명했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등 동유럽의 경우에는 유목 기병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많은 역사입니다.



특히 과거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했던 몽골 제국의 기병 전술과 중앙아시아의 유목 군대와 많이 싸워봤기 때문에, 기병이 아주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30년 전쟁 기점으로, 서유럽까지 동유럽 기병들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2. 백산(빌라호라) 전투 1막 : 구교와 신교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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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 전투(1620년 11월 8일) ]




보헤미아 지방의 프라하 인근 지역, 백산에서 구교와 신교가 마침내 전투를 시작합니다.



인쇄술을 발달로 백산에 대한 기록이 잘 나타나 있는데...



굳이 좋게 포장하면 상세하다라고 할지... 아니면 너무 쓸대 없다 라고 할지...



말단 병사부터 지휘관까지 남아 있고, 책으로 출간이 되어 서적에 남아있습니다.



백산에 대한 병사들의 말을 살펴보면,



" 백산이라면서 산이 백색이 아닌데? "



" 산이라고 올라갔더니 돌 밖에 없다. 나무도 없고, 온통 돌 천지... 그래서 백산인가? "



라고 한 기록이 인상적이어서, 한번 인용해보았습니다.




제가 이런 사소한 말 장난 같은 기록을 작성한 이유는,



본디 양피지로 글 쓰던 시절에는 소수의, 특정한 사람만 기록하여 책으로 출판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신분에 상관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어떻게 보면 유럽이 알게 모르게 수평적으로 계층이 이동 되어가는 신분 구조의 개혁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다양한 사람들의 출판으로 인한 서적의 다양성(참전.종군기)으로 지식 축적으로 이어지고,



특히 전쟁이 많았던 30년 전쟁의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전 경험을 체득하여, 무기 개발이나 전술 발전등까지 전반적으로 고려해보면서, 참 만감이 새로웠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동양사쪽에선 이런 아주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많은 부분을 주관적 시선이라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의견을 피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극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이런 부분운 역사적으로도 서양사랑 정말 많이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다시 백산 전투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투의 진영 구도에서,



구교 : 언덕 아래

신교 : 언덕 위



아무래도 보헤마아의 수도, 프라하였기 때문에 신교 군의 홈그라운드에서 신교군이 원하는 유리한 지역. 유리한 고지를 우선 선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형은 구교군이 다소 불리한 지점이었지만, 그렇다고 신교 군도 불리한 이점이 없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우선 가장 문제는 신교 군대는 " 연합 " 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하나의 군대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이 모인 군대라는 점은 구교처럼 하나의 군대보다 다소 지휘나 통솔력의 효율이 떨어질 수 밖엔 없었죠.



또한 지금 신교 군은 연합이라는 불리한 이점에서, 더욱 최악인 연합 형태였습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우선 지금의 신교 군대를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전쟁의 판도를 얘기하면서, 신교 군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보헤미아 지방의 전투에서는 " 보헤미아 + 팔츠 + 영국 + a " 라고 언급했습니다.



그 중에 보헤미아와 팔츠 사람들이 제일 의지했던 것은 바로 " 영국 " 이었습니다.



보헤미아 사람이 프리드리히 5세(팔츠 선제후)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한 이유도, 사실 따지면 팔츠 선제후를 본 게 아니라,



팔츠 선제후와 결혼 동맹을 맺었던 영국을 보고 선택했다는게, 더 올바른 표현일 겁니다.



그래서 백산 전투에서 두 영지의 사람들의 기대했던 대로, 영국군이 왔습니다.



어라? 근데 뭔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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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이 왔습니다.



근데 달랑 1개 연대만 왔습니다.



제가 이 기록을 보면서, 참 의문이 많았습니다. 영국이 이 전투에 이겨야 좋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근데 이 생각이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영국의 이러한 태도는 유럽 대륙 사람들이 참 싫어하는게 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영국은 항상 모든 일에 끼어 들기는 하되, 깊이 개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디 빠지지도 않고~



마치 유럽 정세를 바둑판 위에서 내다보면서, 한쪽이 유리할 것 같으면 그 쪽에다가 돌을 놓고, 반대 상황이 되면 다시 다른 쪽에 놓고,




가장 적은 노력으로 마치 유럽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가 옛부터 쭉 이어져 와서, 참 얄밉다고 하네요.


(근데 반대로 영국 사람에겐 처신을 아주 잘한 일이라, 영국 사람들은 흐믓)




또한 30년 전쟁에서 돈을 가장 짭잘하게 번 나라도 영국이라고 합니다.




영국 출신 용병이 진영 가릴 것 없이 전부 각 진영에 참전했기 때문이죠.



이른바 외화 벌이 + 영국이 용병들을 이용해서 균형자 포지션까지 덤으로 했으니 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얄미워 했을 지 뻔한 모습이었습니다.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사람들은 영국을 보고 기대했는데, 달랑 1개 연대만 온 것에 대해 망연자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보헤미아 + 팔츠 군의 수는 많이 되진 않았기 때문이죠.



다만 그래도 영국군이 양심은 있어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돈으로 용병을 구입했는데, 이 용병이 제가 앞서 말했던 a 였습니다.



이번엔 용병(a)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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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쟁에서 용병이 무엇인지 보여준, 킹갓엠페러 만스펠트 ]




영국이 지원한 돈으로 고용한 용병 부대는, 이 당시 유명했던 만스펠트 용병대 였습니다.



많은 서적에서 용병에 대해 설명하면 꼭 빠지지 않는 이야기.



근세의 마지막 용병의 전성기이며 몰락기를 30년 전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30년 전쟁 이야기하면서 이 레전설 용병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올 듯 싶어서, 다양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진행되는 30년 전쟁 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아무튼 신교측 군대를 다시 정리 하겠습니다.




- 보헤미아(투론 백작 지휘관)

- 팔츠(프리드리히 5세)

- 만스펠트 용병대

- 영국 1개 연대



총 병력, 약 1만 5천(4개 군대를 다 합쳐도 1만 5천 밖에 안된 것을 보면...)






​다음은 구교 군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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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로 넘어간 시대에. 변하는 시대에 맞춰, 시대에 맞는 지휘관을 보여준 틸리 백작 ]




작센(바이에른) 군을 이끈 지휘관은 틸리 백작(요한 처클라에스 틸리).



신성 로마 제국군의 사령관으로 프랑스 출신 부코에가 맡았습니다.




유럽은 정말 특이한게, 자기 나라 군대의 사령관이 다른 나라 출신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심지어 적국 출신이라도 상관이 없었는데, 이것은 정말 동양 시선에선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이렇게 쓰였다고 하니... 그냥 저 동네가 저런 곳이었나 싶습니다.




​군대 구성만 보자면 거의 하나의 세력 군대로, 군대 질도 제대로 된 군대였습니다.



숫자도 약 2만 5천명으로, 신교보다 1만명 더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옛날에 전쟁을 생각하면 삼국지 같은 이미지가 많습니다.



" 보병은 산을 빙 둘러서 적의 측면을 치고, 기병은 적의 시선을 끄는 척 하면서 후미로 치고, 동시에 통과하여 적을 밀어붙쳐라. "



아주 복잡한 형태의 작전 생각하죠.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작전과 진영은 고작 몇 년으로 훈련만 되는게 아닙니다, 수 년과 수 많은 실전 경험을 통한 최정예 군대만이 가능했습니다.



특히나 30년 전쟁같은 열병기가 등장한 시점부터, 병사들의 희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즉 죽은 병사가 많은 만큼, 신병이 계속 충원되기 때문에, 군대의 질이 갈 수록 떨어질 수 밖에 없었죠.



최대한 본인 군대의 역량에 맞춰, 조금 우수하면, 약간 복잡하게 하지만, 전반적으로 작전 형태가 매우 단순하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작전이 간단해진 만큼, 본인이 지휘하는 군대에 남들보다 특별한 특기가 있어야 했고,



전반기 구교 군대의 가장 큰 특기는 " 탱킹 " 이 가능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의이며 전세를 아주 유리하게 이끈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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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곽은 창병. 내부는 총병. 테르시오 진영 ]




구교 군대의 대표적인 대형 " 테르시오 " 를 아주 톡톡히 써먹습니다.




테르시오는 파이크 병과 총병이 섞인 대형으로, 종심을 깊게 & 두껍게 하며 진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테르시오는 결국 공격하는 포지션이 취하는 대형입니다.



즉 적이 니가와 전술을 쓴다면, 아군이 가야 한다면, 다가오는 적을 향해 대포와 총으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테르시오 하면서 오는 군대도 당연히 아퀘버스로 응사하며 진격은 할 수 있지만, 이러면 군대 진영이 뒤틀리고, 또 무엇보다 아퀘버스는 가능해도, 머스킷은 사격 방식이 복잡해서 공격을 할 수 가 없죠.




방어하는 쪽에서 상당한 화력망을 구축한 상태라면, 테르시오는 엄청난 희생 요구.



그리고 이렇게 두들겨 맞고도 군대가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진영 면에서 테르시오가 아주 알찼습니다. 서로 공격이 가능한 범위만 된다면, 창병과 총병의 완벽한 공격 포지션 때문에 방어적인 적에겐 아주 쥐약이죠.



또한 이번 전투에서 변수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 용병 " 이었죠.




근접 전투가 일어나면,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전투가 됩니다.



그러나 용병들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싸우진 않죠. 곧바로 도망 치는 걸 택합니다.



용병이 전장에 도망치는 것은 이젠 관례에 가까워서, 그러러니 합니다.



하지만 적이 가까이 왔을 때 도망친다면, 피해는 좀 더 줄 수 있을텐데,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도망쳐버리는 일이 워낙 잦았기 때문에, 용병들이 전쟁에서 큰 도움이 안된 경우가 부지 기수였습니다.




문제는 신교에 용병이 적은 수도 아니고 꽤 다수라는 점이었죠. 다만 구교도 용병들이 있지만,



신교는 만스펠트 용병대를 아예 하나의 진영을 묶어서 통솔하려고 한 것을 보면, 용병 의존도가 심히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구교의 정규군은 용병과 달리 목표와 전쟁에 대한 대전략 방침이 있는 목적성이 있는 군대. 그리고 오랫동안 군인을 봉사한 기간.



테르시오로 가는 동안, 피해를 감수할 수 있는, 정신이 무장된 군대라는 점도 빠질 수 없는 강점 요소입니다.



많은 군대가 이 정신 무장 단결을 제대로 못해서 붕괴하는 사례도 많고, 만들기도 쉽지 않죠. 지금 우리 시대에는 정신력만 운운하는게 매우 우습게 들리는 시기이지만,



이때는 이런 처절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나 정신력이 요구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력만 믿고 큰 희생을 낳은 것이 바로 1차 세계 대전이죠.





구교는 나름 철저히 조직이 잘 된 군대였던 반면, 신교는 엉성하기 그지 없었고, 무엇보다 용병이라는 위험한 변수가 컸습니다.



그리고 이 백산 전투에서 용병이 아주 큰 병크를 터트리게 됩니다.








2-1. 만스펠트의 배신. 용병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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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전투를 지켜본 만스펠트는 머리속에 판세를 읽습니다.



병력 수 도 적고, 2만 5천의 병사가 순식간에 테르시오 진영으로 바꿔서, 진격하는 자태.



반대로 신교는 서로 소속도 다르고, 군기가 빠져 있는 모습.



그의 생각에는 이 전투의 대세는 이길 수 없음을 판단하고, 프리드리히 5세에게 찾아가서 하는 말이....




" 계약 기간이 만료 됐습니다. "




라고 통보 하고, 미련 없이 백산 전투에서 떠나버립니다.




당시 용병을 고용할 때 선입금 + 기간제로 해당 일차마다 월급을 줘야하는 방식입니다.



일시불로 돈을 쥐고 몇 일 까지 싸우라는 방식이 아니라, 월급을 여러번 반복해서 줘야하는 방식이죠.



용병은 이 고용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진짜 엄청 돈을 뜯어 먹을려고 계약하는 수단이고, 고용하는 입장에선 용병이라도 없으면 안되는 형편이기에 가능했던 불평등한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즉 용병이 갑. 돈 많은 사람이 을이라는 형태로 하는 경우)




그리고 조금이라도 월급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바로 계약 해지 통보하거나, 아니면 어느 지역을 약탈하는 권한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러면 문제가, 용병이 그 지역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기 때문에, 평판도 안좋고, 나중에 그곳을 지배하는데, 오히려 재건 비용이 크기 때문에 위험한 수단이죠.




그리고 만스펠트 용병단이 전형적인 용병단의 모습의 교과서입니다.



용병단 주가는 올려야 하니까 싸우긴 싸우지만, 만약 큰 손실이 일어나면 큰일 이었죠.



단순히 병력 손실을 넘어서, 용병대 주가 하락 + 용병 대장 자질 의심등 온갖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만스펠트처럼 빤스런치는 치졸한 모습(?) 은 용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여기서 그대로 답습했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은 적은 손실 & 높은 수익 추구)





만스펠트 용병대에 대한 일화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 마을을 약탈하면, 숨겨놓은 부인이나 딸을 인질로 삼아서, 몇일 안에 돈 가져오라고 협박했는데, 하도 이런 짓을 많이 해서 자기들도 잊어버리고 그냥 같이 데리고 다녔다 "




라고 하며 악명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각 부대 지휘관마다 하인은 3~4명. 정말 많으면 18명까지 있었다고, 지휘관과 부하 그리고 하인의 부인이랑 자식까지 합치면 거의 도시 하나가 걸어 다닌 셈입니다.



심지어 만스펠트 용병단이 당시 규모로 아무리 적어도 5천 이상의 거대한 용병 집단이었죠.





이 많은 용병 숫자 때문에, 만스펠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내가 얼마나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줄 아는가?, 난 내 용병단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




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용병 월급 + 가는 길에 약탈을 하면서, 용병 사람들 맥이고 다녔기 때문에, 거의 이들이 지나가면 메뚜기 떼 마냥 싸그리 쓸고 다녔습니다.




인명 피해를 보기는 싫고, 그렇다고 전쟁은 오래 끌어서 월급은 타고 싶어하는 만스펠트와 여러 용병들은 제국군과 싸우기 싫어 했습니다.



제국군은 빠른 전투와 단기 접전 형태로 전투를 임했기 때문에, 고역스러운 군대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2-2. 안할트 대공과 틸리 백작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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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할트 - 베른부르크 대공. 크리스티안 1세. 프리드리히 5세의 재상 ]




만스펠트 용병이 도망친 최악의 상황.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었던 안할트 대공은 프리드리히 5세에게 가서, 프라하로 돌아가 자금을 해결하라고 조언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 전장에 이탈합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의회에서 돈을 지원해 달라고 설득시키는 동안, 전장의 신교 군대는 안할트 대공이 지휘하게 됩니다.




근데 안할트 대공은 지휘관 자질이 부족했습니다.



본인이 군사적 역량이 부족하면 지휘관들에게 인계해서 빠져야하는데,



전쟁을 자기가 주도적으로 이끌겠다고 하면서, 현장을 시찰하며 이곳 저곳 돌아 다니며 주목 받기 좋아하는 스타일로 행동하는데,



시찰을 하면 어떤 부분이 취약하고 문제인지 파악은 안하고, 주목 받기 좋아해서 하는 것이죠. 즉 전쟁 전에 철저히 준비해야하는데 그냥 허송 세월 시간만 보낸게 다 였습니다.




그러면서 적군의 판단도 자기에 유리한 것만 생각합니다.



" 우리만 용병있나, 저쪽에도 용병있지. 설마 싸우겠어? "



이렇게 말이죠.




전쟁사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


우리 실수를 생각해서 적도 똑같다 라고 착각하는 것. 세상 만사 이 오만 때문에, 다 이긴 전투에서 지거나, 명장도 오판으로 패배하게 된 원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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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할트 대공과 달리, 틸리 백작은 달랐습니다.



틸리 백작은 30년 전쟁에서 보기 드물게,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충신이고, 의지도 강직했던 귀족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의 지휘에 독특하게 두드러지는 것 중에 하나는, 귀족 출신 부하들에게 가장 선두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는 말이....




" 너희가 용기와 헌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병사들은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구교가 테르시오 진영을 사용하기 때문에, 틸리 백작은 이에 맞춰 행동한 것입니다.



그가 전쟁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던 장군인 이유.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귀족)가 앞에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기와 헌신이 보여줘야만 병사들이 신뢰하여 끝까지 버티는..



즉 테르시오 진영의 완성형을 보여줄 수 있다는 신념 하에 부하들을 이끌었습니다.




틸리 백작의 지휘관 성향은 이제 지금의 시대에 군대는 " 전문 군인 " 이 필요한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단지 신분이 높다고 달아주는게 아니라, 수 만명이 싸우는 전쟁에서 어디가 빈틈이고 어디가 무너져서 예비대를 투입해야하고,



먼 지역에서 싸우는 군대는 전령 몇명을 보내고, 전령이 어디로 보내야 적에게 안들키고 무사히 도착하는등 전장에 대한 전체적인 전황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며,



군대 편성 및 장교와 병사들을 이끄는데 있어서, 말과 행동도 먼저 보여 줘야 하는 것.



즉 삼국지 처럼 복잡한 책략과 계책이 아니라, 냉병기와 열병기의 전환기라는 시기와 희생이 더욱 많아진 전쟁을 이해해야 하는 시기에 등장한 가장 모범적인 지휘관, 틸리 백작이었습니다.




근세가 들어서고, 냉병기와 열병기가 혼합된 그냥 전쟁이 아닌, 대 전쟁은 아무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틸리 백작이 대단해보였고, 부하들도 그의 유능함에 이끌려, 명령을 충실했고, 그래서 병사들도 함께 따랐던 것 같습니다.








3. 백산 전투 2막 : 승리와 패배.





안할트 대공이 안심하고 있는 신교측 군대.



반대로 틸리 백작은 칼날을 갈며 진격을 하려는 구교측 군대



마침내 구교가 진격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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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교 군에서 질서 있는 진격을 위해 드러머(고적수) 양성 ]





구교 군대가 대형에 맞춰 신교 군이 있는 산 위로 질서 있는 진격을 시작합니다.



구교 군이진격을 시작하자, 아무런 대비를 못한 신교 군대도 빨리 공격 대형을 준비하면서, 구교 군을 저지 하기 위해 기병을 투입합니다.



하지만 전편에 설명 했듯이, 이 시기의 기병은 파이크 병에게 정면 공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구교 군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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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콜. 총을 가진 기병이 적에게 다가가 총을 쏘고 빠르게 물러나는 전술 ]






이번엔 카라콜로 구교측과 교전했지만, 여전히 소용히 없었습니다.



카라콜이 보기엔 말이 후다닥 달려와 총을 일제히 빵 쏘고 가는 모습이 꽤 효과가 좋을 것 같지만, 이때 쓰이던 피스톨 기술력으로는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이런 것에 맛 들려, 멋있어 보인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당하는 상대측에선 아주 비웃었다고 하더군요.)




한편 신교 군대의 지휘부는 옥신각신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카라콜 기병들이 떠나기 전,



창기병에게 " 총을 쏘면 적들이 대열이 흩어지니 그때 돌격 " 하라고 했지만,



정작 적군은 진영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창기병은 저길 가면 죽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 진열이 튼튼해서 못간다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카라콜 기병이 다시 여러 차례 출전하여, 무너트릴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죠.



신교 지휘부에서 하염 없이 설전이 오고 가는 와중에, 구교 군대는 신교 앞까지 거의 도착한 시점이 됩니다.





구교의 테르시오가 도착하자, 신교도 이젠 보병으로 맞상대 해야 했습니다.



당시 교전 기록에 보면, 총의 사거리는 길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효 사거리는 매우 짧았다고 합니다.



명중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20보 이내에서 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20보면 거의 코 앞이나 다름 없는 거리)




테르시오 진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선, 창과 총으로 보병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대포였습니다..




대포를 통해, 테르시오의 밀집 대형속에서 포탄이 안에 터져버리면, 병사 희생도 어마하게 컸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테르시오 대형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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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포는 전장에서 중요한 전략 무기였다. ]



신교 군대도 이제서야 뒤늦게 대포로 상대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안할트 대공의 안일함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 않아서 이제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틸리 백작도 테르시오의 약점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안할트 대공이 놀고 있었을 때, 틸리 백작은 미리 정찰대를 통해 신교 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대포 진영이 미리 배치가 안되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때가 바로 공격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철저한 계산과 준비를 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 신교 군대 코 앞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포는 여전히 공격 대형으로 배치가 안되어 있었고, 근접 전투가 벌어지니, 아군이 맞을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해서 더 이상 대포는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교는 다시 한번 기병을 활용하는데.....



신교측 기병이 하나의 단일된 세력의 기병이 또 아니다 보니, 남의 군대를 믿을 수 가 없었죠.



그래서 안할트 대공이 불안감을 느껴, 기병들을 각기 분산해서 보병들 사이로 투입 시켰습니다. (연합군이라서, 반란 및 이탈을 방지하기 위함)




그러나 이렇게 쪼개 놓으니, 독일 기병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단단히 뭉쳐진 테르시오 방진을 깨트리진 못했죠,



결국 독일 기병이라는 우수한 병과의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구교 보병에 의해 전부 갈려나가게 됩니다.



그래도 참전했던 병사들은, 전투 최후까지 돌격을 한 군대가 기병이었다 라고 할만큼, 그들은 귀족이었지만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 모습이었다 합니다.




이제 전황의 후반부입니다.



신교는 만스펠트 용병도 없고, 기병은 무너지고, 대포는 전혀 준비도 안되었고, 모든 면에서 신교 군이 처참히 깨지자,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전쟁이라는게, 누가 한명이라도 도망치면, 이 도망으로 인해 공포가 순식간에 확산됩니다.



거기다가 생판 남남 군대였던 연합군은 단합이 안되다 보니 누가 도망치기 시작하니, 그 영향력이 더욱 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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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 공작, 베틀렌 가보르 ]



도망치는 군대중 하나였던, 헝가리의 용병 기병대를 이끌던 베틀렌 가보르가 있었습니다.



안할트 대공이 연합군 보병에만 신경 쓰느라, 용병 기병을 신경을 못썼는데,


미리 명령으로 일부 기병들에게 적의 후미로 돌아서, 공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베틀렌 가보르는 정황을 보니 이미 패전이 짙어지는 것이 보이자, 순식간에 도망쳐버립니다.




보병보다 약탈을 5배 정도 가능하고, 도주는 순식간 가능한 것이 유목 기병의 특성.



그리고 동유럽 기병이 유목 기병이라서, 약탈은 최적화인 동시에, 또 튀는 것은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안할트 대공이 측면을 치라고 했더니, 측면으로 냅다 도망쳐버리니다.



측면으로 빠져서 이탈하면 되는데... 방향이 문제였죠.



퇴각 방향이 신교 진영이라서, 측면으로 아군 진영을 가로 질러서 퇴각해버립니다.




아군 용병 기병이 자기 세력의 진영을 그대로 관통해버리니까, 도망쳤다는 사기 저하 뿐만 아니라, 대열마저 흩어지게 만드는, 어떻게 보면 적보다 더한 깽판을 치고 맙니다.



심지어 이걸로 끝이면 좋겠지만, 웃기게도 베틀렌 가보르가 도망치면서



" 난 간다! "



이 한마디 남기고 가버려서, 남은 신교 군대는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맙니다.




.......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싶지만 어차피 자기들 싸움이 아니니, 상관이 없었나 봅니다.








4. 구교의 승리. 제 1차 보헤미아 - 팔츠 전쟁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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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안할트 대공의 실책으로 인해, 백산 전투는 틸리 백작이 이끄는 구교측 군대가 승리하게 됩니다.



그가 승리 후, 소감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신앙의 승리! 신념의 승리! "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이 전투를 네덜란드의 참관단이 참관하며, 백산 전투의 전황을 면밀히 살펴 본 뒤, 본국에 귀환해서 전술 개혁을 실시합니다.




네덜란드 전술 개혁은 이 전투 하나를 보고, 대포의 운용을 제대로 파악했습니다.




대포가 구경이 큰 것이 적을 사살하는데 큰 효력을 발휘 할 순 있겠으나,



군대는 전장에 들어서면, 빠르게 진영을 짜고 배치해서 돌격 해야 하는 돌발적인 일이 많은 만큼.

19.jpg

[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무거운 대포는 유연성이 크게 떨어져,, 차라리 가벼운 대포를 사용 하는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대포는 명중하지 않아도, 소리와 날라오는 모습 자체에 전장의 병사들에게 큰 공포로 다가왔는데, 가벼운 구경의 작은 포탄은 여러 발을 계속 쏠 수 있어,




못 맞출 확률이 높지만, 어차피 큰 구경도 못 맞추는 확률은 높았습니다.



그래도 많은 횟수로 포를 쏠 수 있기 때문에, 전장의 병사들에게 맞을 확률이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을 인식 시켜주고, 대포의 끊임 없는 탄막을 형성해서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파악했습니다.




백산 전투라는 한번의 전투 보고 전장의 골수까지 전부 파악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보헤미아 - 팔츠 전투에서 패배한 프리드리히 5세.



그는 훗날에, 독일에 대한 지지 기반을 완전히 잃고, 브란덴부르크 >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남은 여생은 부인이 영국 공주(엘리자베스) 였기 때문에, 영국 지원금을 받고 살게 됩니다.




한편 안할트 대공은 이 전투의 패배에 대해서, 자기 변명을 책으로 출판해서 자기 탓 아니야 라고 어필 했다고 합니다.

20.png

어째든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를 다시 완벽하게 수복함으로써, 보헤미아 - 팔츠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뭐 결국 돈을 가지고 있던 보헤미아 지역이 돈 없던 거지 신롬 황제가 먹으면서 돈 구멍 생기고,



선제후 지방이었던 보헤미아를 먹었으니, 구교 vs 신교 싸움 끝 아니야? 라고 하겠지만...






이것으로 30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작가의말

본 글은 유럽 30년 전쟁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서 저의 견해가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100% 진실이 아니며,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만 유념해주시고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료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서, 오타 및 문장 흐름이 잘 맞지 않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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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스웨덴의 영혼의 한판, 뇌르틀링겐 전투와 후반부의 서막이 울리다. +2 21.02.14 36 0 17쪽
30 구 세대와 신 세대들의 세대 교체 21.02.13 37 1 8쪽
29 발렌슈타인의 처참한 몰락 21.02.12 32 2 10쪽
28 대 격돌! 제 6 라운드 뤼첸 전투(完) 21.02.11 39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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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발렌슈타인의 선택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 +3 21.02.04 30 2 8쪽
20 스웨덴의 군사 개혁과 브라이턴 펠트 전투 이후 상황 21.01.31 38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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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구교. 한 순간에 대세가 뒤바뀌다. 21.01.29 28 1 11쪽
17 스웨덴 전쟁(1630~1635) 21.01.28 37 2 13쪽
16 다시 한번 거대한 전쟁이 몰아치다. 21.01.27 38 1 14쪽
15 승승장구 하는 구교. 폭주하는 페르디난트 2세. 21.01.26 49 2 14쪽
14 제 4 라운드, 틸리 vs 크리스티안 4세의 루터 전투 21.01.22 36 2 16쪽
13 몰락하는 자와 떠오르는 자.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 21.01.21 35 1 10쪽
12 제 3 라운드, 데사우 다리 전투 21.01.20 50 2 14쪽
11 새로운 신교 세력에 맞서기 위해, 구교의 새로운 인물 등장 21.01.19 76 2 20쪽
10 전쟁 중반부의 시작. 외국의 개입 : 덴마크 전쟁(1625~1629) +4 21.01.18 65 2 13쪽
9 환장의 조합, 신교 군대(2) - 크리스티안의 발악. 슈타트론 전투 +1 21.01.17 42 3 13쪽
8 환장의 조합, 신교 군대(1) : 만스펠트의 만행 21.01.16 63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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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교 vs 신교. 제 2 라운드. 빔펜 전투(1622년 5월) 21.01.11 55 2 9쪽
5 제 1차 보헤마아 - 팔츠 전쟁 이후, 독일과 유럽의 정세 21.01.10 76 2 15쪽
» 제 1차 보헤미아 - 팔츠 전쟁 : 백산(빌라호라) 전투 21.01.09 82 3 30쪽
3 구교와 신교. 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인가? 21.01.08 96 4 18쪽
2 30년 전쟁에 쓰였던 무기와 갑옷. 그리고 기술의 변화들 21.01.07 160 5 18쪽
1 중세에서 부터 이어진 전쟁의 서막 +8 21.01.06 394 5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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