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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레아

[유럽史] 중세에서 근세로. 유럽 30년 전쟁

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완결

쥬레아
작품등록일 :
2021.01.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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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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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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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중세에서 부터 이어진 전쟁의 서막

DUMMY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를 거쳐 어느덧 그 중세라는 끝물에 다가온 16세기를 지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간 17세기.




유럽 판도는 거대한 지각 판도를 일으키며, 대 전쟁의 서막이 울리니, 그것이 바로 유럽 근세에 아주 중요한 전쟁이면서 역사의 큰 포인트였던 " 30년 전쟁 " 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본문에는 역사적 배경 + 개인적 견해도 함께 작성하며 진행되는데, 저의 견해는 100% 진실도 맞다고도 할 수 없으며, 제가 틀릴 수 도 있다는 점 유념해주시며, 단지 그런 해석의 여지도 있을 수 있다는 참조의 역할에만 초점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랜 기간 작성하다 보니, 어쩔때는 짧게는 몇 일에서 길게는 1주일 이상 텀을 두고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고, 오타가 있습니다.



이 점을 양해 해주셨으면 합니다.






1. 전쟁의 판도가 열리다 : 신성 로마 제국의 약화와 종교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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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지역과 북 이탈리아, 동유럽 지역(헝가리등)에 위치한 제국으로 오랫동안 유럽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던 제국입니다.




그러나 이런 강대한 제국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힘은 약화되어 갔는데, 이 약화된 이유중에 가장 근본으로 타 국가에 비해 " 단결력 " 이 점점 상실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전체적 역사로 이야기하자면 너무나 긴 이야기이고, 주제는 30년 전쟁이기 때문에 최대한 생략하면서 중심적 내용에 대해서만 접근해서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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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시면 신성 로마 제국(줄여서 신롬이라 지칭)은 동방의 제국처럼 황제에 대한 강력한 권위가 아닌, 시작부터 일종에 " 연합 " 에 가까운 모습으로 국가를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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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성 로마 제국하면 유명한 것이 바로 황제를 선거로 투표하는 방식이며, 이 선거권을 가진 강력한 영주와 영지를 가진 자들을 " 선제후 " 라고 불립니다.




신롬의 황제가 되기 위해선 이런 선제후들에 다양한 정치 라인을 통해 이루어야 가능했으며,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남아 영향력을 발휘할려면 이들에게 특권이나 혜택. 황제이지만 영주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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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노사의 굴욕. 사실상 신롬 황제와 가톨릭 종교의 수장 교황과의 선전포고 ]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롬 제국 황제도 황제 권력을 키워보기 위해 영주들과도 물밑 싸움과 교황까지도 대립하면서 어떻게든 발악을 해보았으나 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신롬 영주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긴 원했지만, 국가가 사라지는 것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많은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여러 내전은 있을지언정, 신롬은 존속했습니다.



왜 수 많은 영주들이 황제는 약하더라도 제국은 남아 있길 원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른 강대한 세력부터 지켜주기 위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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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바로 중동의 거대한 바람, 천년 제국의 비잔티움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지금의 세르비아,불가리아등 지역)를 넘어 동유럽 너머까지 닿으며 이른바 가톨릭 영토라 불리는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고, 그 위협은 곧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1) 빈 포위.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존속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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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포위.



16세기에 유럽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사건.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1세(대제)는 세르비아, 알바니아등 발칸 반도 지역을 서서히 점령.



결국에는 동유럽의 가톨릭 왕국이자 그쪽 동네에서는 최강국이다 자랑하던 헝가리 왕국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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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 창병, 그리고 뭉게 구름은 총병과 포병까지 대동하며 싸운 거대한 전장 ]



동유럽을 어느정도 평정한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신롬의 제후국이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침공. 그리고 수도 빈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포위합니다. (제 1차 빈 공방전. 1529년)



하지만 다행히 빈으로 이동 과정에서 역병 + 현지 보급(약탈) 차질로 군사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롬 군도 강력한 방어로 결국 공성은 실패로 퇴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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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색은 유럽 진영. 녹색은 오스만 진영. ]


[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레판토 해전에 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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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연합군 vs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전투 - 레판토 해전 ]





육지에서는 빈 공방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바다에서는 지중해에서 대 함대전, 레판토 해전(1571년)이 벌어져, 육.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성장에 가장 민감했던 신롬, 교황령 및 이탈리아 도시 국가(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등), 스페인등이 모인 유럽 연합국의 결사의 방어로 결국 육.해에서 모두 승리하며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완전히 저지됩니다.



다만 프랑스는 오스만 편이었는데, 이 당시에 스페인과 신롬은 같은 가문(합스부크 가문)으로 프랑스 왕가와 척을 지고 있어서, 두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위치가 스페인과 독일 지역으로 프랑스가 좌우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스만이 신롬을 흔들어 놓으면,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기 위해서 설령 종교가 다를지만, 오스만 편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중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오스만의 위협으로 인해, 신롬은 그 어느 때보다 단결할 수 있었다. 마치 라이벌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듯 말이죠..





하지만 만약 구심점을 잃게 된다면? 곧 분열을 야기하는 신호탄이었고, 17세기. 마침내 그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2) 라이벌 오스만의 약화.





중동의 패자로 보였던 오스만은 슐레이만 1세(대제)가 죽고 난 뒤에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약화된 원인중에 하나로는 끊임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빈 포위 이후 레판토 해전은 42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두번의 대 전쟁을 치루는 약 50년간의 공백속에서 오스만은 그리 평온하진 않았습니다.



오스만은 빈 포위 이후에도 유럽 국가와 끊임 없는 분쟁과 전쟁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오스만은 계속 전쟁을 이어 나갔고, 무엇을 위해 싸웠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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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빈 포위의 패전 원흉은 빈으로 육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역병 및 육로 수송에 대한 보급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육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가장 좋은 방편은 바로 " 배 " 였습니다.



지상과 해상이 함께 진군한다면, 힘들게 육로로 걸어서 올 필요 없이, 상륙으로 원활히 보급과 병력을 이동이 훨씬 편했죠.



그러나 당시 빈 포위에서 오스만이 해로를 사용하지 않는건, 해군력이 유럽 국가에 비해 빈약했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 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활용이 불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차후 다시 유럽 진출을 위해서는, 해상 확보는 필수라고 여겼습니다.




2) 1)번에서는 전쟁에 초점을 두었는데,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바로 지중해 해상권을 차지하려는 야망이었습니다.



이스탄불(전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은 지금도 거대한 무역 항구이지만, 당시에는 유럽에서 정말 부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일찍히 이스탄불이 있는 소아시아 지역은 동.서양이 만나는 교차점이었고, 그 중심지였던 도시는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았습니다.



오스만이 지중해 무역권을 차지하는걸 가만히 볼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국가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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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해상 왕국이라 불렀던 베네치아. 그러나 점점 해상 식민지를 잃다. ]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베네치아는 시간이 갈 수록 해상 식민지 지역을 상실해가며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썩어도 준치 답게 부가 넘쳐나는 곳이었으며, 아직까지도 무역로를 꽉 쥐고 있는 국가였죠.



그런 베네치아가 호락호락 지중해 무역로를 넘겨줄 일은 만무했기에 결국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치열하고도 오랜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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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은 위의 2가지 목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 결국 최후의 카드로 꺼내게 되니, 그것이 바로 레판토 해전.



오스만의 이른바 한방 러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패전을 하게 되면서 오스만은 본격적인 쇠락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스만의 쇠락기는 유럽의 또 다른 혼란을 주게 되는데, 신롬은 자신의 라이벌이 사라져 제국내에서 제후들과들의 단결력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3) 단결력이 없는 신성 로마 제국. 분열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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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얘기하는 시기는 위 지도의 세력과 다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는 넓지만, 그만큼 위험 요소가 존재하였으며, 위험 요소를 극복하지 못한 제국은 분열합니다.



신롬이 가지고 있던 분열의 위험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요?



바로 " 하나로 공통된 민족과 언어 " 였습니다.



저렇게 영토가 넓어지면 제국내에 사는 민족들이 다양해집니다.



이 민족들간에 이익과 문화, 지역등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 어떤한 정책 및 어떤 행동을 해도 모두가 불만이라 이걸 해결하기가 아주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신롬은 황제와도 그리고 영주들간에도 서로 단합이 안되는게 부지기수입니다.



언어도 마찬가지로 독일 지역은 그래도 엇비슷하게 쓰였지만(사투리등 감안), 이것도 그 동네만 벗어나도 외국어가 좔좔 해버리니,



제국이라는 국가는 하나이지만, 민족과 언어는 제각기 달라서 거의 남남으로 자기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건너편 지역이 뭘 하든 신경도 안썼답니다.




추가로 언어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면, 거대한 제국이면서 다양한 민족이 있었던, 동양의 중국(당,명,청,송등)이 있습니다.



중국도 신성 로마 제국처럼 거대한 제국이지만, 참 이상한게 이 거대한 나라는 이민족에게 침략받고 나라가 분열되는 일은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하나로 통합됩니다.



중국의 첫 통일 왕조가 진나라.



진나라 이후, 한나라등 수많은 중국 왕조가 탄생하고 국가가 분열되고 이민족에게 침략받으면서도, 다시 원래로 합해지는 이유가 신성 로마 제국이 부족했던 2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가 통일된 언어권 확정하고, 진-한 시기에 동일한 민족이라는 민족성을 가져다 줌으로 인해, 중국인들 본인 스스로가 하나라고 인식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반대로 신롬은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니, 신롬이 때때로 약해지고 영향력이 부족할때마다, 이탈리아 북부등 외곽 지역이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신롬의 구심점이 더 약화되는 악순환으로 돌아옵니다.



민족, 언어가 다른 신롬이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신롬을 하나로 묶어줄 유일한 구심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비로 종교였죠.



모두가 가톨릭을 믿었기에 이 하나의 힘만이 유일한 신롬 제국의 모든 지방과 연결된 단 하나의 공통 사항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오스만의 성장으로 라이벌까지 있었으니, 제후들은 굳이 신롬에서 이탈해서 좋을게 하나 없었지만...



오스만이 약화되어 더 이상 위협을 가할 세력이 되지 못하자, 이제 유일하게 신롬을 묶어주던 요소. " 종교 " 만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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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유일한 구심점이었던 종교마저 찢겨지게 되니...



그것이 바로 가톨릭의 종교 개혁(분열).



구교(가톨릭(천주교))와 신교(개신교) 였습니다.









(3) 가톨릭의 종교 개혁




16세기쯤 되면 유럽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비롯된 " 종교 개혁 " 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이 촉발된 마르틴 루터의 반박문도 그 역사의 줄기를 따라가 보면 이미 존재했는데,



예를 들어 14세기 중반 존 위클리프가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비판을 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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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 활자의 발달은 단순히 지식을 전파할 뿐 만 아니라 세상의 시야 마저 바꾸게 했다. ]





다만 마르틴 루터와 존 위클리프. 둘이 같은 비판을 했음에도 루터쪽이 더 알려진 것은 바로 " 인쇄술 발달 " 이었습니다.




존 위클리프 시기에는 인쇄술의 기술이 낮아 대외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교황을 위시한 종교 세력들이 빠르게 상황을 진압하고, 이를 재판을 할 경우 대외적으로 공개되는데, 그렇게 다면 존 위클리프가 선지자가 될 것이 뻔한 상황이라서 그냥 조용히 묻어두며 덮어놨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때에는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출판물이 등장하였고, 이 시기에 마르틴 루터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이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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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의 허영된 꿈. 신성 동맹(캉브레 동맹) ]



사람들과 성직자들이 교황령과 교황에게 매우 불신하던 상태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황령이 세속정. 거의 다른 국가와 똑같이 땅따먹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를 통일해보겠다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행동(신성 동맹(캉브레 동맹). 1508).



그리고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 국가처럼 많은 무역을 통해 버는 수익으로 전쟁을 일삼는 부정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쌓아 마침내 수 많은 문제가 시간이 지나, 결국 곪아 터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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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유럽은 무수히 많은 종교로 나뉜. 대 기독교 종교의 시대(?) ]




이런 가톨릭의 종교에 회의감과 불신이 팽패해지자, 유럽 각지에서는 성공회, 장로회, 청교도등 무수히 많은 종교 파벌이 스멀스멀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르틴 루터로 인해 정통 종교였던 기독교의 대분열은 하게 되면서, 이 여파는 유럽에 거대한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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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권을 가진 세력이 너무 많은 신롬 ]





유일하게 신롬을 지탱해주던 종교의 분열은 곧 신롬 안에서 각 세력으로 분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7세기에 신롬은 거의 독자적인 노선을 취한 네덜란드 스위스등과 다양한 군주들과 약 200~300여개의 자유시들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이게 국가라기 보단 거의 " 연합 " 가까운 형태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독자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 많은 종교가 난립한 유럽에서, 신롬 황제가 가톨릭 종교를 믿고 각 지방도 같이 참여해라 해라고 해서, 타 지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정통 가톨릭이 자신을 핍박한다는 반발로 불러왔다는 점은,



결국에는 신롬은 종교가 서로 갈라지면서 내부에 공통된 믿음이 부재 했음을 뜻합니다.



그럼, 왜 신롬 황제는 왜 굳이 가톨릭을 고수했을까요?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건국 기틀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랫동안 가톨릭의 수호자이며 교황의 보호자였고, 교황도 이를 인정하면서


로마 제국의 후손이 신롬이라고 공언합니다.(실상은 신성하지도 로마도 제국도 아닌)



그래서 신롬의 오랜 전통중에 하나가, 황제가 선거로 뽑히면, 황제의 인증을 교황에게 받으면서 제국 황제의 명분을 제시하게 해주죠.



비록 한때는 교황과도 치열하게 영향력 싸움을 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한들 신롬은 가톨릭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위의 이야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현재는 제국 근본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라 더 큰 문제였습니다.



반대로 신교를 지지하던 지역은 독일 북부입니다.



왜 독일 북부가 신교를 저지했는가 하면,


독일 북부의 자유시들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부강해져, 그 세가 강성해지면서, 자주성이 높아졌습니다.



이 사이에 전통적인 가톨릭 종교는 십일조등을 통해 해당 지역으로 부터 지속적으로 교황에게 돈을 상납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시들은 변해가는 시대적 메타로 인해,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에 대변되지 않음을 느끼고,



때 마침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등 다양한 시대적 사건이 겹치게 되면서, 독일 북부가 신교 지지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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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재산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종교를 넘어 자본까지 ]



그리고 변해되고 분열되는 종교로 인해, 각 종교 지지자들과, 지역 유지들은 지금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권은 누가 행사하는가?



신교인가 구교인가?



심지어 신교에서도 루터파와 칼뱅파등 또 분열되면서 더욱 혼란이 가중되면서,




해당 지역의 종파 이동은 곧 정치 + 경제적를 장악하며 어느 종교가 더 강력한지에 대한 유럽 내의 종교 세력간의 영향력에도 끼치게 됩니다..





추가적으로 왜 자유시에서 이른바 돈을 버는 사람(상인)들이 전통 교회가 자신의 이익을 해를 끼친 것으로 지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의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다.



1. 누군가 장례를 치를때, 옛날에는 교회에 돈을 상납하여 세례를 받아 평온한 사후를 기원했다면, 부의 발달로 인해 그 돈 한푼이 아깝다는 것.


누군가의 죽음으로 돈을 내야하는데 구조는는 상업이 발달한 지역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돈으로 가게를 차리는게 훨씬 낫다라는, 이른바 의식 성장을 통한 가치관과 관념의 차이가 발생.




2. 가톨릭이 천년 이상 지속되자 축제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



가톨릭은 성자를 위한 축제를 항상 여는데, 이게 천년 이상이 되니 그 성자가 너무 많아져서 축제가 많아지는데,


기록에 의하면 계란 성자를 위한 축제니, 인쇄 업자 성인을 위한 축제, 출판사, 갑옷 등등.... 이 성인이 어디 직군마다 있어서, 누구의 말에 따르면



" 이틀에 한번은 축제, 사흘에 한번은 휴일. 도대체 돈을 벌 수 가 없다. "



라고 했습니다. 이게 왜 돈을 벌 수 가 없는 구조인가 하면,



현대로 따지면 버스가 어제 쉬고, 지하철이 오늘 쉬고, 우체국이 내일 쉰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즉 해당 직군의 사람들은 그 하루를 쉬는 거지만, 소비자및 상공업자들이 어떤 일을 일궈나갈 수 없는, 사회 시스템망이 마비가 된 셈과 동일합니다.



이게 방식이 옛날에 농업 사회였으면 모를까, 이젠 장사와 사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의 시대가 되면서 발생된 괴리감.




그리고 신롬이 내부가 종교 개혁으로 인한 분열이 가속화되자, 스멀스멀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가 본격적으로 독립 전쟁을 일으켰죠.



그러자 이걸 그냥 볼 일이 없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아니였죠. 다들 지역 하나씩 뜯어 먹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며 외부에서 침공의 빌미가 시작됩니다.



이런 밑배경이 깔리기 시작하니, 곧 일어날 30년 전쟁의 양상에서 유럽 왕국들은 영토 확장을, 영주들은 독립을. 이른바 국가 확장 + 지역 독립 이라는 사태까지 겹치게 됩니다.,




위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짧게 다시 정리하자면




1. 신롬의 단결력 부재 : 라이벌 오스만의 약화. 단결된 민족성 부족. 하나로 통일된 언어 없음. 종교 분열



2. 자유시 발달 : 전통적인 가톨릭이 사회 괴리감으로 인해 신교로 편입.



3. 유럽 왕국의 영토 확장 야욕 + 제후국들은 독립




3가지가 함께 접목되면서 신롬은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3-1) 어째서 자유시의 상공업자들은 신교를 믿었는가?




이번엔 더 깊게 들어가서 왜 그들은 신교를 믿었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전쟁은 종교 분열로 인한 전쟁의 판도가 형성된 만큼,


종교 분열과 각 종교를 신봉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야 전쟁 세력간의 이해 관계와 목적성. 그리고 전쟁의 본질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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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상과 가까운 도시는 곧 무역의 원천. 돈을 벌어보자! ]





구교를 불편하기 시작한 상공업자들이 대부분 몰린 지역은 앞서 말했듯이 발트해와 가까운 독일 북부 지역입니다.



생각해보면 구교가 이익에 해를 끼친다고 해서, 굳이 독일 북부가 신교로 돌아설 만큼 메리트가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상공업자 세력들이 본인의 입장에 맞춰 종교를 " 특화 " 를 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은 너무 크고 보편적이지만, 이제 생긴지 얼마 안되어 교리도 부족하고 지지자들이 얉으면서도,



가톨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신교를 본인들의 환경에 맞춰서 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 거절 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앞서 인쇄술을 발달로 인해 성서가 마구 보급되면서, 곳곳에는 소규모 그룹의 종파들이 생기며,



더더욱 새로운 세력들에게 있어서 신교는 종교를 앞장세워 본인들의 의견을 밀어붙이고, 명분을 이용할 할 수 있다는 점이죠.(성자의 축제도, 누군 얜 이 교리를 보니 성자 아님등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보면 흔히들 십자군 전쟁처럼 종교가 세상을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 종교가 세상을 움직이는게 아니라, 사람과 돈이 움직였다. " 는 것이죠









(4) 30년 전쟁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의 정리





이제 마침내 전쟁의 판도가 형성됐습니다.



이제 갈등은 최고조가 되었고, 구교와 신교로 세력은 나뉘어진 상황.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30년 전쟁의 전쟁의 양상을 보면 공성 전투는 없어지고,



주요 대부분 전투는 양측의 군대가 정면에서 벌판에 승부를 치르는 형상입니다.



또한 양측의 군대의 세력이었던 구교와 신교에 대한 군의 명칭이 존재합니다.



구교의 군대는 황제군(Emperor Army) 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신롬 황제가 구교편에 있었기 때문이죠.(제국도 여러 제후 군대를 연합)



신교의 군대를 연방군(Federal army) 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제후국(필츠 보헤미아등) 과 자유시. 신교 편에 선 외국군들의 연합이죠.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이 시작 되었습니다.



다음부터 본격적인 30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작가의말

본 글은 소설이 아니라 30년 전쟁의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본 글은 제 개인적 소견이 짙으며, 글의 모든 이야기는 100% 진실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염두하여,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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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35 er****
    작성일
    21.01.07 02:59
    No. 1

    오타가 상당히 많네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후묘재
    작성일
    21.03.21 15:43
    No. 2

    이런 전쟁사 좋아하는데
    잉글랜드 내전에서 보고 넘어 왔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쥬레아
    작성일
    21.03.21 16:12
    No. 3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순한양
    작성일
    21.06.10 13:04
    No. 4

    지도가 있는게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30년 전쟁사 읽을 때 지도가 없어서 힘들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순한양
    작성일
    21.06.10 13:05
    No. 5

    그리고 오타는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eh 커가 한 말대로 이것 또한 미덕일것입니다. 일단은 기록을 생각을 남기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순한양
    작성일
    21.06.10 13:07
    No. 6

    개인적으로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을 확실히 먹고 네델란드는 놔주고 진짜 친한 동맹(예를 들어 명예로운 연대를 파견 받는) 을 하고 독일쪽 영지들은 의외로 영국에 넘겨서 힘을 보존하면서 영국힘을 뺏어야 하지 않았나 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순한양
    작성일
    21.06.10 13:08
    No. 7

    영국에 그냠주는게 아니라 전략적인 섬과 교환? 뭐 그렇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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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60 순한양
    작성일
    21.06.10 13:12
    No. 8

    개인적으로 카를5세는 비록 스페인말도 못하지만 마지막 신롬의 황제이자 최초의 에스파냐의 왕이라고 생각해서 주체가 헷갈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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