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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땅 님의 서재입니다.

백작가 서자는 발경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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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땅
작품등록일 :
2022.07.13 20:58
최근연재일 :
2022.08.15 14:20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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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3,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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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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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생존자들

DUMMY

세상이 하얗게 점멸했다. 어둠에 가려있던 리엘의 실루엣이 잠깐 비추고 여지없이 사라진다. 콰쾅, 뒤늦게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던 소년이 빗소리 너머로 들리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겨우 걸음을 옮기니 마차의 잔해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보비."


가까이 다가가니 질척한 걸음 소리에 놀라 흠칫 몸을 떤다. 고개를 들어 올리다 리엘과 눈이 마주친 보비가 작게 탄식했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도련님···"


"보비, 다친 데는···"


와락

리엘이 입을 떼기 전부터 이미 달려오고 있던 보비가 그대로 리엘의 품에 안겼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잘게 떨려온다.


"도련님··· 련님···"


작게 소년을 부르던 보비가 끝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세상이 떠나갈 듯 절규하다가 이내 제풀에 지쳐 맥없이 주저앉고 만다. 보비를 따라 무릎을 굽힌 리엘이 떨고 있는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어색하게 들어 올린 두 손을 내려 품에 안긴 보비의 등을 작게 토닥였다.


"저 때문에 죽었어요, 하녀장님이, ···다른 분들도 모두··· 저 때문에, 저를 지키려다···"


보비의 시선이 잠깐 구석에 널브러진 하녀들의 시체를 향한다. 습격을 받기 직전 토라진 그녀를 달래던 나이 든 하녀들이었다.

마리네뿐만 아니라 다른 하녀들도 그녀를 감싸고 있었는지 그녀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적지 않은 화살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보비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그때, 음울한 눈으로 아래를 보고 있던 보비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잔느! ···잔느는 어디 있죠? 분명 마차에서 떨어지면서···, ···도련님?"


"···"


불현듯 떠오른 좋지 않은 기억에 와락 얼굴을 구긴다.

소년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를 짐작한 걸까 보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런··· 그럴 리가··· 미, 믿을 수 없어요. 잔느가··· 마차가 전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 몸을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었는데···어떻게···"


소년을 옷자락 놓고 취한듯한 걸음으로 주변을 배회하던 보비가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럽혀진 선홍빛 머리카락,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과 닮아있었다. 몸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항상 어린애처럼 놀리던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는 계속 감겨있어 더이상 작은 소녀를 보고 웃어주지 않았다.


리엘은 잔느의 시체 앞에 주저앉은 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쩐지 이대로 놔두면 그녀마저 사라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보비, 잠깐. 보비! 보비!! 나를 봐."


회색빛으로 죽어가는 보비와 눈을 맞추며 어깨를 잡고 흔든다. 그 작은 몸은 미약한 힘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풀잎처럼 흔들렸다. 조용히 내리깐 두 눈이 겨우겨우 초점을 잡아 소년을 본다. 검게 그늘진 눈동자는 마치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촛불 같았다.


"···"


막상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 걸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소년에게는 이 순간이 풀지 못할 난제와 다름없었다. 결국, 소년보다 텅 빈 눈을 한 보비가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왜 제가 살아남은 걸까요. 저 같은 고집불통보다 차라리 잔느가, ···다른 분들이 살았어야 했는데."


"···"


"···저 대신 그분들이 죽는 게 정말 옳은 일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을까. 그제야 보비의 텅 빈 눈동자가 리엘의 얼굴을 담는다.

충혈된 눈동자, 관자놀이를 가로지르며 요동치는 핏줄.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보비가 멍하니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 누구도 죽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짓씹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를 토해내듯 뱉어낸 소년의 말에 보비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는지 죽은 물고기 같았던 눈이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거대한 낙석 너머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살아있는 사람 있습니까!!"


보비와 시선을 교환한 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위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목소리 기억에 있어요. 분명 이름이 ···더글라스라고 했죠?"


"설마 ···리엘 도련님?! 맙소사,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독살의 진범으로 의심했던 삼인방 중 가장 말이 없던 남자였다. 그는 그린트가에 정식으로 속해있는 병사 중 하나였다.


"우리 병사들은 모두 행렬의 앞쪽에 있지 않았나요?"


"그게, 저는 파비르님의 지시로 돌아오지 않는 하쿤 님을 찾아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쪽에 혹시 다른 생존자는 없습니까?"


"···이 주변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와본 거라 확실하진 않습니다. 행렬 앞쪽으로 가면 생존자가 더러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틈 사이를 찾아 그쪽으로 건너가겠습니다."


더글라스가 끙끙대며 바위틈 옆으로 지나 리엘과 합류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많은 낙석들의 범위에서 운 좋게 벗어나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더글라스는 하녀 마차 주변의 참상을 보더니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역시 이건 사고가 아니었군요."


"용병들이 화살을 쏘아대며 우리를 협곡 아래로 몰아넣더군요. 십중팔구 낙석도 그들이 꾸민 짓이겠죠."


"감히 그린트 백작가를 건드리다니 그놈들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일단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몬스터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게 뻔하니 서둘러 파비르님을 찾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라곤이 있어야 마을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은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몰아치는 장대비 사이로 사내들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더글라스가 얼굴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굽힌 자세로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겨 마차의 잔해를 등지고 앉는다. 더글라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리엘이 작게 눈을 빛냈다.

리엘과 보비가 볼 수 있도록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댄 더글라스가 조용히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그의 지시대로 자세를 낮추고 자릴 옮기니 보비도 다급히 리엘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잔해의 틈 사이로 무기를 든 용병들 몇몇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습격한 용병들이군요. 아직 거리가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따돌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더글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용병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중에 소년의 앞으로 마차의 잔해조각들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눈을 돌리니 진동의 원인이 더글라스가 잡고 있던 나무 조각임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새하얘질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는 주먹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나와 나무 조각을 적셨다.

붉게 충혈된 눈은 용병들의 행동거지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고 악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하지만 리엘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서 가시죠. 저들은 언제가 지금 웃고 있는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더글라스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리려 하자 리엘이 그의 어깨를 잡아 만류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두르지 않으면 저들이 곧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보비와 함께 여기 숨어 있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게 무슨··· 도련님 설마?"


"안돼요!"


옆에서 듣고 있던 보비가 소년의 팔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소년이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저도 보비와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저 녀석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자살행위입니다. 죽여달라는 거랑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더글라스, 저는 당신이 지금 다리를 다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뭔가 설명할 말을 찾고 있던 더글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 아닙니다. 도련님이 무언가 착각하신 것···"


"당신이 이쪽으로 와서 계속 앉아 있던 것도 힘들어서가 아니었군요. 방금도 이동하면서 계속 오른 다리를 절었고요. 혹시 저희가 도망가는 동안 혼자 빠져나와 미끼가 될 생각이었습니까?"


리엘의 팔을 붙들고 있던 보비의 손아귀 힘이 점점 약해졌다. 내리깔았던 눈을 겨우겨우 들어 올려 더글라스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더글라스는 보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보비의 커다란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울고 있는 걸까. 빗물이 쏟아지고 있어 울고 있는 건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할 수 없다.

외면하고 있던 더글라스가 결국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지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도련님이 지금 해야 하는 건 제가 다쳤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다리를 못 쓴다고 지금 도련님 혼자 수십 명이 넘는 용병들을 상대하겠다는 겁니까? 그들은 모두 수년간 생사를 넘는 전투로 다져진 사람들입니다. 승산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도련님이 죽으면 저도, 지금 여기 있는 보비도 끝장입니다. 그러니 고집부리지 마시고 당장 보비를 데리고 여길 떠나십시오."


"...더글라스 씨. 저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리엘 일행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어느새 용병들의 농담 섞인 웃음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글라스가 다급히 리엘을 밀어내려 했지만, 소년의 몸은 돌덩이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번쩍


다시금 세상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희미하게 보이던 리엘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주체할 수 없는 흉포한 광기가 넘실거렸다.

흠칫 소년과 눈이 마주친 더글라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소년의 눈동자에 비친 평생 본적 없는 폭력성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거슬리는 벌레들을 찢어 죽이러 가는 겁니다."


콰쾅

뒤늦게 요란한 천둥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곧이어 하얀 세상이 다시 검게 물들었지만, 머릿속에 박힌 선명한 장면이 더글라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보비도 할 말을 잃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끊임없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지만 끝내 그 입술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리엘이 천천히 일어서자 팔을 잡고 있던 보비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리엘은 그저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더글라스도 보비도 걸어가는 리엘을 말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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