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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땅 님의 서재입니다.

백작가 서자는 발경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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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고땅
작품등록일 :
2022.07.13 20:58
최근연재일 :
2022.08.15 14:2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5,684
추천수 :
63
글자수 :
83,785

작성
22.07.25 20:00
조회
357
추천
4
글자
12쪽

그럴 리가 없어

DUMMY

"푸팡 가루 없이 물로만 씻으면 어떡해요? 이리 주세요."


리엘이 들고 있는 천 옷을 빼앗다시피 가져간 보비가 소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바구니 안에 든 푸팡 가루를 집어 옷에 문질렀다. 그러자 물에 젖은 옷이 순식간에 거품으로 뒤덮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푸팡 가루라는 것은 이전 세계의 세제와 비슷한 물질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도련님은 귀족이니까 이런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저한테 맡기시고 그냥 거기 앉아서 구경이나 하세요."


볼을 잔뜩 부풀리고 새침하게 쏘아대는 모습에 리엘은 자신이 또 무슨 말실수를 했나 눈을 굴려 봤지만 딱히 짐작 가는 일은 없었다.


"둘이 해야 빨리 끝나잖아. 나도···"


"안돼요."


리엘이 다시 천 옷을 하나 집어 들자 보비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뺏어갔다.

리엘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겠네. 미리 돌아가 있을게."


리엘이 뒤돌아 걸음을 옮기려는데 무언가가 미약한 힘이 그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니 보비가 말없이 한 손으로 빨랫감에 거품을 문지르며 다른 한 손으로 소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리엘이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자 보비의 귀가 점점 빨개졌다.


"그, 그 사람들이 다시 올 수도 있잖아요."


작게 한숨을 내쉰 소년이 다시 보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보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빨래가 하나둘 줄어드는동안 리엘은 검푸른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칙칙한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얼굴의 윤곽은 저쪽 세계의 서양인과 비슷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얼굴의 선이 가늘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쩐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거 같아 조금 어색했다. 얼굴의 각도를 틀어 이곳저곳을 비춰보는데 그 모습을 봤는지 보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뭐?"


"머리 색이 달라도 도련님이 그린트 가의 핏줄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원래 소년은 아무래도 자신의 머리 색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린트가의 역대 가주들은 전부 붉은 머리를 갖고 있다고 했던가. 깃발의 문양도 붉은 사자였기에 어쩌면 머리의 색이 큰 상징성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린트 가에 대한 건 사실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보다 지금은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쭈그려 앉아있는 보비를 보았다.

칠흑같이 검은 단발머리에 새하얗고 조그마한 얼굴,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 속 빨간 눈동자가 눈앞의 빨랫감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인지 오뚝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지?"


"···예? 그게 무슨···"


"말 그대로다. 기억을 잃기 전 너와 나는 혹시 연인관계였나?"


리엘의 말을 듣고 있던 보비가 잡고 있던 옷을 잔뜩 구기며 얼굴을 붉혔다.

명백한 분노의 표출이었기에 소년은 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니 아닌 모양이군. 다행이야."


"다, 당연히 아니죠! 갑자기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뭐가 다행인데요!"


소년은 굳이 특별한 사이를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왜인지 이전 세계의 자신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타인과 감정적으로 소통하는 건 힘들었다.

한동안 리엘은 어색해진 공간 속에서 검게 물들어가는 호수를 구경하다 걱정이 돼서 찾으러 온 하쿤이 오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하쿤이 소년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왜인지 소년도 알 수 없었다.


*


따가운 불똥이 튀어 올랐다. 마른 장작을 삼켜 점점 크기를 불려가던 화염 덩어리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하늘로 도망가려는 불꽃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열기를 만들어간다.


카락톰은 단검의 날을 세우며 모닥불 건너편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활을 손질하고 있는 거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모닥불이 비추는 한정적인 시야로 거스의 행동거지가 눈에 들어온다. 큰 폭의 소매로 나온 가녀린 하얀 손이 활의 시위를 조정하고 있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안으로는 자그마한 얼굴의 윤곽이 보였지만 겨우 윤곽만 드러날 뿐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만한 뭔가가 있었다.

손질하고 있는 활 좌측으로 거스가 먹다 남긴 스프그릇이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둥그스름한 그릇 안으로 둥둥 떠다니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와 야채가 보인다.


역시 이상했다.


같이 다닌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거스가 음식을 남기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갑작스레 돌풍이 불었다.


밤이 되어서 쌀쌀해진 탓인지 돌풍은 순식간에 주변의 열기를 앗아갔다. 세상을 지워버릴 것처럼 촐랑대던 불꽃들이 순식간에 시들어버린다. 카락톰은 거센 바람에 겨우 반쯤 눈을 뜨며 눈앞을 보았다. 활을 손질하고 있던 새하얀 손이 로브의 끝자락 쥐고 있다.


그 순간, 카락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아아, 역시 아름답다.


거센 바람 덕에 잠깐 드러난 그녀의 맨 얼굴은 언제봐도 훌륭했다. 위로 찢어진 맹수 같은 두 눈 아래로 균형 있게 자리 잡은 코, 그리고 일자로 꼭 굳게 닫힌 입. 여느 여염집 아낙네처럼 여리여리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마치 사냥감을 씹어 삼킬 것 같은 맹수가 주는 위압감.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이었다.


어느새 돌풍은 다시 산들바람처럼 약해졌다. 카락톰이 제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녀가 다시 로브를 깊숙이 뒤집어쓴 뒤였다.


"말해라."


마치 목구멍에 스크래치를 그어놓은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카락톰의 욕정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때와 똑같다.


거스와 만나고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농담 삼아 몸을 섞어보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떤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잘못 본 건가 싶어 되물었지만, 대답은 역시 똑같았다. 다만 몸을 주는 대신 그의 투척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날 신이 난 카락톰은 평소에 안 하던 향수를 몸에 바르며 한껏 멋을 부리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상 실전에 놓이게 되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시선, 그리고 스크래치 난 음울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성난 아랫도리가 단숨에 죽어 소생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고 노력해봤지만 헛수고였다.


혹시나 해서 창관에 들러 시험해보고 여관의 여급에게도 남성성을 과시해보았지만 유독 그녀 앞에서는 기를 쓰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약속대로 투척기술을 알려주었지만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거스는 그가 만나본 여자들을 통틀어 가장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는 누군가 장난치며 가슴을 만져도 엉덩이를 쓰다듬어도 그 어떤 희롱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건 비단 카락톰 뿐만이 아니라 아둠이 해도 다른 별난 용병이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또 어느 날은 그녀를 희롱하고 있던 용병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어 즉사시켰는데 그가 왜 이 사람을 죽였냐고 묻자 그녀는 '거슬린다.'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날 이후로 아둠과 카락톰의 희롱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전까지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 했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냥 말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주일 넘긴 적이 있을 정도니 그녀가 얼마나 말을 아끼는지는 알만했다. 왜 그렇게 말을 아끼냐는 아둠의 물음에 거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드러냈다.


긴 흉터가 정확히 성대가 위치한 목 중앙을 길게 가로질러 나 있었다.


깨끗한 목에 남아있는 흉악한 상처. 궁금했다. 대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흉터의 크기로 보면 목이 반으로 잘렸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흉터였다. 과거에 대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있던 카락톰이 거스의 눈총에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그녀가 육성으로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이 쓰였다는 뜻이었다. 거스가 저녁을 먹을 때부터 불을 피우고 활을 손질할 때까지 끈질기게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으니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카락톰은 저만치 멀리서 자신의 도끼를 품에 안고 코를 골고 있는 아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뇌가 저 녀석만큼 단순했으면 얼마나 세상 살기가 편했을까.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말해줄 수 있어?"


잠깐 생각하듯 아래를 응시하던 거스가 화살 통에서 하나의 화살을 꺼내 그에게 보여줬다. 무슨 의미일까. 이걸로 자살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애초에 화살 하나 던져주고 할 말은 다 했으니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듯이 다시 활을 손질하고 있는 녀석이랑 무슨 대화를 나눌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카락톰은 생각보다 섬세했다. 아니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 화살이 어떻다는 건데? 다른 화살하고 별로 다른 건 없어 보이는데?"


"···아까 쐈던 화살이다."


아까라면, 하녀를 강간하기 직전에 난입한 그 쥐새끼를 노리고 쐈던 걸 말하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카락톰의 의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았다. 이게 그 화살이면 뭐가 다르다는 걸까? 화살촉부터 화살대, 그리고 깃대까지 찬찬히 살펴봤지만, 그녀가 원래 사용하던 화살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사용했다고 믿기 힘들만큼···


'깨끗하다고···?'


뭔가 이상했다. 화살을 쐈으면 분명 무언가에는 꽂히기 마련이다. 그게 나무가 됐든 땅이 됐든 바위가 됐든 뭐든 간에 어떤 대상에 꽂힌다면 이렇게 화살촉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이건 마치 아무것도 맞히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맞추지 못한 게 되려면···"


"화살을 손으로 잡는 방법밖에 없다."


음울한 거스의 목소리가 카락톰의 뇌리에 꽂혔다. 온몸으로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거스가 쏘아낸 화살을 맨손으로 잡았다는 말인가?


거스의 화살에 반응한다는 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니와 설령 만에 하나 그게 보였다 하더라도 화살의 빠름을 몸이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거스는 추방당한 마법사에게 몸의 일부를 맡겨 싸구려 회로를 이식해온 자신들과는 달리 전신에 양질의 마력회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한 초인 중의 초인이었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전사가 쏘아낸 화살은 단지 감이 좋다고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가능했다.

정말 거스가 쏜 화살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맨손으로 잡았다면 그 소년은 그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괴물이라는 소리였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우리 계획을 전부 수정할 수밖에 없어. 확실한 거야? 유물 급의 일회용 아티팩트, 뭐 그런 거라도 사용한 거 아니야?"


"모른다."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매몰찬 거스의 대답에 카락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건드릴 사람을 아주 단단히 착각한 것일 테니까. 얼굴이 창백해진 카락톰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차라리 뭔가 교묘한 트릭을 썼다는 것이 더 현실성 있었다. 고작 성인식도 지나지 않은 애송이가 거스급의 강자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과는 달리 화살을 쥔 카락톰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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