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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서재입니다.

악의 문명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일반소설

완결

FromZ
그림/삽화
포타리
작품등록일 :
2019.02.22 23:57
최근연재일 :
2019.04.24 00:05
연재수 :
5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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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32,014

작성
19.03.03 00:00
조회
774
추천
38
글자
13쪽

1. 백화점 공략 (3)

DUMMY

***1***



지하로 향하는 문은 바닥에 박혀있는 형태가 아니다.


선 자세로 평범하게 손잡이를 당겨서 열 수 있는 문이었다.


전력이 마비된 탓에 수동으로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지하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어둠을 손전등으로 밝히니 지하는 생각보다 훨씬 멀쩡했다.

깨끗할 정도로 말이다.


"대기 오염도 매우 양호."


이곳도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폐쇄된 것 같다.

그렇다면 안에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남는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연구자 혹은 직원이다. 그 사람은 이 시설과 수경재배농장에 대한 지식이 있는 실무자일 것이다.


지하는 그다지 넓지 않다. 복도라고 부르기 애매하게 짧은 길이 나 있고 길의 우측에 문들이 나란히 있다.


손전등으로 비추어보니 연구실, 상황실, 창고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길의 좌측엔 투명한 유리창이 있고 창의 너머에 돔 형태의 처음 보는 구조물이 세 채나 있었다. 이 돔 형태의 구조물은 높이가 4층짜리 건물과 비슷해 보인다.


창고에는 읽기도 힘든 명칭의 화학 약품 상자, 뭔지도 모를 씨앗 상자, 비료 냄새가 나는 생물학적인 친환경 포대, 처음 보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다.


상황실에는 불 꺼진 모니터와 의자가 말고는 볼 것이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장 끝에 있는 연구실의 문을 열어본다.


책상, 책장, 컴퓨터, 사물함, 작은 냉장고가 있다.

이름만 연구실이지 개인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보인다. 구석에는 작은 침대도 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무언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이불의 끝자락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나와 있었다.


나는 제발 시체가 아니기를 바라며 검지로 이불을 콕콕 찌른다.


"저기요."


대답도 움직임도 없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에 윤기가 없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이불을 걷어낼까?


"일어나주세요···."


그러면 나는 무슨 광경을 보게 될까. 이불 밑에 숨겨진 이것은 무엇일까.


괜찮다. 익숙하다. 나는 이 정도로 망설이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런 나약함을 오래전에 버렸다.

밀폐되고 어둡고 비좁은 공간에서 시체와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오히려 처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비슷한 상황에 처해서 그때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때 그 상황에서 점차 두려움이 사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쨌든 나는 절대 겁먹지 않기로 끝없이 다짐했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이렇게 돼버린 세상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아 끝까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더 독해져야 한다.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게 살아남고 살아남아서 가족을 만날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다. 이런 사소한 일로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이불을 걷어낸다.


잠옷을 입은 여자가 쓰러져있다.


"음···. 건들지 마···."


쓰러지진 않았고 그냥 자고 있었던 것 같다.



***2***



이 사람은 겁이 많아 보인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거나, 자신 있게 말하다가도 목소리를 낮춘다. 자세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라도 겪은 것 같다.


"원래는 제가 없어도 자동으로 돌아가는 시설이었어요.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항상 시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죠. 그게 저였습니다. 지하에 있는 동안 밖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서 시신이 없던 건가요?"

"시신이 아예 없었어요?"

"아니요. 제가 여기로 들어오는 도중에 마주친 시신은 한 구밖에 없었어요."

"네···. 보셨군요."

"뭐를요?"

"아마 아까 마주치셨다던 시신은 제 동료일 겁니다. 저와 함께 지하에 있다가 잠시 마실 것을 사겠다고 나갔는데···. 갑자기 문이 닫혔습니다. 그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일이 터졌어요."

"···유감이네요."


그녀는 40대 정도의 관리인이다. 이 시설에 대해선 경험과 실력이 충분해 보여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녀가 활약할 수 있는 시설이 다시 예전처럼 멀쩡하게 작동한다면 말이다.


"전기도 물도 끊겼습니다. 바깥의 방사능 수치가 높다는 경고를 마지막으로 듣고 시설의 전력이 나갔고요. 역시 핵폭발인가요?"

"예. 군사기지 어딘가에 핵폭탄이 떨어진 것 같아요."

"이 도시는 전쟁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가···."


그녀는 내가 잠시 벗어둔 방독면을 집어 들어서 유심히 살펴본다.


"외부에서 이곳으로 오는데 이 정도 장비로 괜찮아요?"

"죽지 않을 정도로 버티고 있어요. 몸이 한계라고 느껴지면 방사능 제독기를 써요."

"방사능 제독기요? 그건 병원에나 있는 물건이 아닌가요."

"일회용이죠. 나중에 병원에 가서 챙길 물건이 있다면 더 가져와야 해요."

"병원, 경찰, 군, 정부···. 들어보니 당연하게 있었던 것들이 전부 없어진 모양이네요. 혹시 아포칼립스라는 개념을 아세요?"

"정확힌 모르지만 멸망에 관련된 단어였던 것 같아요."

"전 세계가 이런 상황인 걸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라디오 신호나 인터넷도 없고 도시의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어요."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시설을 이용해서 작물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그건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죠?"

"네."

"좋은 일을 하시네요. 좋은 사람이세요?"


보통 그걸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아니요.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에요."

"그저 혼자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시설에 올 필요도 없었겠죠. 아무래도 그쪽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순전히 개인의 목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력이, 영향력이, 사람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제 설명해주시겠어요? 이 시설의 무엇이 문제인지."


그녀는 내가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바다에서 퍼올린 물을 담수화하고 정화하는 시설이 있습니다. 도시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대규모 시설이 아니라 이 농장에만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구조물이에요."

"물이 오고 가는 독립적인 경로가 있다는 거네요."

"네. 이쪽의 파이프라인도 오염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어요. 그곳에서 이쪽으로 담수를 보내오면 그 담수로 수경재배농장에 물을 줍니다. 그러면 작물이 자연의 힘으로 정화한 천연의 식수가 완성돼요. 1년에 다섯 번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은 덤이죠. 옥수수, 감자, 밀과 같은 탄수화물이 개량된 종자로 다수 재배되고 토마토, 오렌지와 같은 작물은 다양하게 소량으로 재배됩니다."

"그 시설에서 보내오는 담수와 양쪽 시설이 사용할 수 있는 전기가 있다면 해결되는 건가요?"

"고장 나거나 파손된 부분이 있다면요. 시설의 주요한 부분은 이 건물처럼 대부분 지하에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백화점에는 축전지와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구형 발전기는 연료로 발전하고 그 연료는 도시의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축전지와 발전기 사이에 오가는 전력의 변환 효율도 좋다.


그래도 그 일련의 과정은 반드시 연료를 소모하는 활동이다. 앞으로 더 많은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발전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위치에 담수화 시설이 있다는 말이죠?"

"네.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조금 작은 하얀색 건물입니다."

"그 건물에도 축전지나 발전기를 연결할 경로가 있을까요?"

"해안에 있는 건물이라 파력 발전기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대학이 있는데 그 대학에서 학습을 목적으로 만든 소규모 태양광 발전소가 있죠. 태양광은 발전 효율이 떨어지고 관리도 까다로우니까 파력 발전기를 추천할게요."



***3***



나는 여분의 방독면을 그녀에게 건넨다.


"우선은 저와 함께 거주지로 가시는 게 어때요?"

"거주지요? 대피소가 아니고요?"

"우리는 백화점에서 살고 있어요. 그곳엔 전기, 물, 식량에 사람들도 있어요."

"다 좋은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별로네요. ···혹시 샤워도 할 수 있어요?"

"샤워는 수경재배농장이 고쳐지기 전까진 못해요. 물이 부족해서···. 그래도 최소한의 청결은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이곳이 고쳐진다면 다시 돌아오도록 해요."

"그러면 그때까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녀는 오래전에 부모를 잃고 남편과 이혼하고 낳은 자식도 없이 홀몸인 사람이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내가 넌지시 물어봤던 '가족 찾기'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인 편이다.


심지어 사람들과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그녀가 더 상대하기 쉽다. 그녀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시설에서 일하는 대가로 여러 가지 물품과 생존을 보장받는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동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날 밤, 그녀와 함께 의논을 하다가 로봇을 잘 다루는 아저씨도 불러들였다.


파력 발전기를 병렬로 연결하면 발전량이 꽤 높아지는 모양이다. 담수화 시설은 파력 발전기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므로 괜찮았지만, 수경재배농장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전력으로 담수화 시설과 수경재배농장에 전력을 공급하고도 전력이 한참 남는다는 말이 동시에 나왔다.


그렇다면 생산된 전기를 어떻게 백화점과 수경재배농장까지 옮길까.

그것을 고민하던 참에 신형 로봇이 그 답이 되었다.


여러 최신식 기능을 유지하는 신형 로봇은 사람과 비슷한 크기다.

그래서 모든 신형 로봇에는 그 기능과 몸체를 움직이기 위해 고성능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다.


파력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로 배터리를 가득 채우고 수경재배농장과 백화점까지 이동해서 배터리의 절반을 내준다. 그리고 남은 에너지로 다시 파력 발전기까지 이동하여 배터리를 가득 충전하고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 신형 로봇을 안정적인 전력 운반책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 후로 아저씨를 필두로 바깥에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끼리 조를 짜서 신형 로봇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담수화 시설과 파력 발전기가 있는 해안 지역으로 차를 타고 왔다.


자동차의 세 배 크기가 되는 파력 발전기가 대충 세어봐도 10개는 넘게 이어져 있다. 이미 병렬로 연결된 상태라고 하여 길가에 설치된 제어기만 손보면 되는 상태다. 제어기는 과거에 사라진 우체통처럼 생겼는데, 지금은 전원이 꺼져있다.


"차단기를 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을 것 같아?"

"경고. 대기 오염도 측정 불가 수준."

"이 제어기의 전력을 차단하는 요소를 찾고 싶다고."

"······제어기의 뒷면 패널에 차단기가 내장됨."

"안 보이는데, 이 안쪽에 있다는 말이야?"


바깥에 오래 있어선 안 된다.

나는 공구로 차단기의 철판을 신속하게 뜯어낸다. 손잡이로 전력을 차단할 수 있는 부분이 드러났다.


"이거야?"

"오류 감지. 요소를 식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조차 안 된다는 말인가.

나는 로봇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서둘러 차단기를 기존에 있던 모양의 반대 방향으로 조작한다. 그러자 제어기의 작은 단말기에 전원이 들어온다.


"···경로가 손상됨. 이라고 뜨는데···?"


내가 예상한 문구는 전력이 부족하다거나 어딘가가 차단되었다거나 방전되었다거나···. 그런 종류의 문구였다. '경로'가 '손상'되었다는 말은 이미 손쓸 수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 같아 어딘가 불안하다.


그리고 경로가 손상되었다는 문구 이외에는 어떠한 버튼도 없다.

···다시 말해 이 단말기를 통해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파력 발전기로 걸어간다.


파도는 핵폭발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예전처럼 밀려오고 있다.


조금 더 걸어가자 파력 발전기가 바로 밑에 내려다보인다.


그제야 경로가 손상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사고 현장 식별됨."

"저게 떨어져도 하필 저기로···."


모든 파력 발전기에는 굵은 케이블이 있다. 그 케이블들은 한곳에 모여서 다시 하나의 케이블이 되어 지하의 어딘가로 뻗어 나가는 형태다.


그리고 그렇게 지하를 향해 뻗은 한 줄기의 굵은 케이블은,

그 위에 떨어진 차량에 의해 처참하게 끊겨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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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4. 군중 속에서 울지 마 (1) +2 19.03.16 598 4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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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3. 올바른 길 (1) +1 19.03.11 627 43 13쪽
16 2. 사악한 것을 상대하는 방법 (5) +1 19.03.10 624 42 12쪽
15 2. 사악한 것을 상대하는 방법 (4) +1 19.03.09 632 39 13쪽
14 2. 사악한 것을 상대하는 방법 (3) +1 19.03.08 633 38 13쪽
13 2. 사악한 것을 상대하는 방법 (2) +2 19.03.07 658 35 15쪽
12 2. 사악한 것을 상대하는 방법 (1) +2 19.03.06 679 35 15쪽
11 1. 백화점 공략 (5) +1 19.03.05 696 38 14쪽
10 1. 백화점 공략 (4) +2 19.03.04 730 43 14쪽
» 1. 백화점 공략 (3) 19.03.03 775 38 13쪽
8 1. 백화점 공략 (2) +1 19.03.02 832 42 15쪽
7 1. 백화점 공략 (1) +1 19.03.01 872 47 12쪽
6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6) +3 19.02.28 944 50 13쪽
5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5) +2 19.02.26 959 49 15쪽
4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4) 19.02.26 1,086 51 13쪽
3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3) +1 19.02.25 1,317 64 14쪽
2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2) +3 19.02.23 1,606 66 13쪽
1 Prolog. 살아남은 선조들 (1) +5 19.02.23 3,002 7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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