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연재수 :
288 회
조회수 :
1,507,438
추천수 :
30,254
글자수 :
2,199,617

작성
24.01.23 18:10
조회
2,706
추천
75
글자
20쪽

세월의 무학(2)

DUMMY

담담한 사제의 음성이었다. 이결 자신보다 대여섯 살은 더 어린. 지금은 어째선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제 나이같지 않은 녀석이다.


절벽 끄트머리 위로 침묵이 바람에 섞여 휘돌았다. 이결은 멍하니 산등성이를 응시했다.


그렇게 이결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호리병의 주둥이를 매만지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난 본래 서녕에서 살았었어.”


청해 서녕. 황량한 산맥과 벌판으로 뒤덮인 청해의 가장 큰 대도시다. 청해호를 옆에 끼고 번성하는 도시는 중원의 변방임에도 작지 않았다.


“다섯......아니 여섯 살이었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을만큼 어렸을때였는데.”


청해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관아의 힘이 닿는 도시였다. 대명의 보호 아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중원의 가장 서편.


“여름에 역병이 돌았었지.”


도움은 오지 않았다. 십 몇여년 전. 마교가 한창 소요전을 벌이던 시기다. 청해에 자리한 변방의 도시 하나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눈을 뜨면 옆집 사람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명부(冥府)의 손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부자와 가난한 이도 가리지 않았다. 고립된 도시는 서서히 죽음으로 빠져들었다. 이결은 운이 좋았다. 아니, 나빴다고 해야할까.


제 부모를 제 손으로 묻어주었다. 몇달에 걸친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서녕을 무작정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어. 도시는 초토화 되었고, 먹고 살길도 없고. 상행마저 몇년간은 그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으니까.”


관(官)이 서녕을 버렸다.


청해는 완벽히 사마외도의 땅으로 변모했다. 대지를 휩쓸고 다니는 마적(馬賊)떼가 수백에 달했다. 인신매매를 하는 작자들이 반, 살육을 저지르는 자들이 반이었다.


이번에도 이결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살육자들에게 붙잡히지는 않았으니까.


“얼굴 반반한 애들은 남녀 가릴것 없이 새외의 노리개로 팔려가고......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나봐.”


나직한 웃음을 흘린 이결이 호리병의 곡차를 한모금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사파 무문에 팔렸어. 무슨 사술(邪術)을 쓰는 곳이었는지. 하루에도 수십구씩 사람 시체가 쌓이는 곳이었어. 피를 닦고 내장을 정리하고......그런게 내 일이었고.”


역병을 겪은 뒤 사람 죽은 모습에는 익숙하다 생각했다. 이결은 그곳에 들어간 첫날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도 수십, 수백일씩 맞아가며 일하다 보면 익숙해졌다. 이결은 일주일만에 그곳에 적응했다. 덕분에 그는 다른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새로운 아이들이 여러차례 들어올때까지도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내가 질긴게 장점이라.”


그 말에 백연의 시선이 살풋 움직였다. 이결을 비스듬히 응시하는 소년의 표정이 노을 빛살에 가려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 뒤는?”


답하는 백연의 음성은 평이했다. 묘하게 편안하기도 했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


“본래라면 그곳에서 죽었을 것 같은데, 어찌 일이 풀려서 살아나왔어.”


어느날 갑자기 그가 노예로 살던 사도 무문이 몰락했다. 살아서 나갈 수 없었을 지옥에서 벗어났다. 허나 그렇다고 그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음은 노역이었다. 산속에서 약(藥)을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일했다. 평범한 약은 아니었다.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중독시키는 극악한 약. 독이라고 봐도 좋았다.


시체 만지고 치우는 일보다 편했으나, 더 위험했다. 이결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발악을 했다.


그렇게 어찌 또 다른곳으로 가게 되었다. 체질이 튼튼한 축에 속해서였을까. 이번에는 그의 몸을 눈여겨본 어떤 문파에서 그를 사들였다.


“거기도 술법을 다루는 문파였던 것 같아.”


갖가지 이상한 실험을 당했다. 주술을 업으로 삼는 자들. 이제와서 돌아보면 혈교의 일종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이결은 그때의 기억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더 이상 그곳에 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무작정 도망쳤는데.”


추격이 붙었다.


사파 무림인들의 경공은 그가 떨쳐낼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고, 붙잡히면 백이면 백 죽음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이결은 여전히 그날의 발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입에서 핏물의 맛이 배어나오고, 깊숙하게 베여서 피를 뚝뚝 흘리는 다리가 아픈지도 모른채 산속을 하염없이 내달리던 기억. 습한 비가 내리던 어두운 산길을 뒤따라오는 조용하고 재빠른 그림자의 기척들. 실수로 걸음을 잘못 디뎌 비탈로 굴러떨어진 그때까지.


그날 흐릿한 정신 속에서 이결은 문득 바람을 느꼈다.


직후 먹구름이 갈라지며 청명하게 드러나는 맑은 하늘까지.


“지금도 긴가민가 해. 헛것을 본건지. 아니면 정말로 길을 지나가던 은거기인이 구해준건지.”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결은 다친 몸을 끌고 기다시피 걸어 산을 내려왔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초로에 접어든 흰 옷의 도인이었다. 처음에는 또다른 사파 무인인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다친 그를 치료하고, 옷을 가져다 주고, 한달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운결은 근처의 작은 마을에 머물며 이결을 보살폈다. 그 사이사이 어딘가 나가 또 다친 아이들을 주워오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갈 곳이 없더냐. 그럼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어디로 말입니까?

-곤륜산이다. 작은 문파가 있으니 먹고 자고 할 정도는 된다.


그렇게 이결은 곤륜파에 들어왔다.


곤륜파도 그리 여유로운 곳은 아니었다. 다 쓰러져가는 전각과, 추운 겨울. 언제나 부족한 식량과 거지꼴의 아이들.


하지만 그럼에도 살만 했다. 이결은 그곳이 마치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 몇년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네가 들어오고 또 많은게 달라졌지.”


어투가 담담했다. 서서히 군청색으로 덧칠되는 하늘을 보며 이결이 중얼거렸다.


“일년만에 이전은 생각도 안날 정도로 바뀌는게 꿈만 같았어. 나는 어지간히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도 했고. 그런데......”


이결이 호리병을 내려놓았다. 그가 백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무진, 소홍, 단휘. 셋은 원래도 특출난 사람들이었어. 재능도 출신도 그렇고. 네가 없을때도 백자 배 아이들을 이끌던 사형들이니까.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빠르게 발전하고 나아가는데,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서.”


그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받은것만 있는 문파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가 말했던 대로 끈기는 그의 유일한 장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설향은 물론이고 도현도, 연청도, 연비도 전부 앞서간다.


이결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같이 걷던 사람들의 등이 눈앞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보니 조금은 초조한 것 같기도 하네.”


그는 자질이 부족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오늘의 패배가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이결에게는 단순한 일패가 아니었다.


“네가 신경쓰지 말라고는 했는데......”

“이결 사형은.”


소년의 음성이 울렸다. 백연이 호리병을 매만지며 이결을 차분히 응시했다.


“백자 배에서 열명 안에 드는 실력자야. 다른 문파의 경우라면 이대로 성장하면 문파의 기둥이 되겠지.”

“그런가?”

“화산이라면 매화검수, 소림이라면 나한(羅漢) 무승......낮다고 할 수 없어. 비무제전에 오지 못한 사형들이 몇명인데.”

“그건 맞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마음이 초조한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의 옆에서 달려나가는 사람들이 다른 문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출난 재능들이기 때문일까.


“앞서가지는 못해도 뒤쳐지는건 싫었나봐.”


잠시 침묵이 감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연히 군청색으로 물든 하늘을 힐끗 쳐다본 백연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

“무슨 의미야?”

“대게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고 하면 세 사람이 거론되지. 달마 대사, 천마, 그리고 지금 이곳, 무당파를 일궈낸 삼봉 진인.”


이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보통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금제일의 이름은 저 셋. 사마외도의 무인이라면 천마를 가장 위로 치고, 정파무문의 무인이라면 달마와 삼봉을 위에 놓는다.


“그 중, 천마와 삼봉은 많은 면에서 대비가 돼. 정(正), 사(邪), 마(魔)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데 그게 갑자기 왜?”

“모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고 했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정확히 그랬어. 세간에 천마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백연이 말을 이었다.


“천마가 처음 그 무위를 드러내었을때 그는 아주 어렸어. 천고에 둘도 없을 무재(武才). 소년의 나이에 신위를 일궈내었고, 약관 언저리에 무의 정점에 닿았지. 반면 삼봉 진인이 무림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드러낸 것은 이미 아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였어.”


그럼에도, 화려하게 삶을 불태운 천마는 이른 나이에 무림에서 종적을 감췄고, 삼봉은 무당을 개파하고 대명의 건국 이후로도 수십년간 세상을 거닐었다.


천마가 죽었느냐, 죽지 않았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으나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외도와 정도무문의 차이점. 정파의 무공은 세월을 쌓는 무학이지. 스스로를 닦아 하늘에 이르는 무(武). 빠르게 강해지는 것은 정도의 목적이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해. 그중에서 칠룡처럼 특출나게 빠르게 강해지는 이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들이 특출날지는 알 수가 없다.


“끝에 서 있을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게 나라는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사형 스스로 사형의 장점은 끈기라면서.”


웃는 백연의 모습이 가벼웠다. 덧붙이는 음성도.


“곤륜은 정파야, 태청신공 또한 억지로 세월을 건너뛰어 거머쥔 것이지, 본디 오랜기간 몸을 만들어야 하는 무공이니까. 어차피 조만간 다들 벽에 부딪히게 될거야.”

“벽이라면......”

“태청신공은 적양공이나 현음공과 달라.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전수를 하지 않겠지. 그리고 그건 단지 재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고.”


꾸준한 운연동공의 단련과 신체를 만드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과를 비튼 백연의 방식은 엄밀히 따지면 정도(正道)를 벗어난 것이었다. 특수한 경우.


인과를 비틀어 힘을 억지로 쥐는 것은 그 하나면 충분했다. 필요했기에 그리했고, 후회는 없었으나 백연은 다른 사형들까지 그리 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길게 봐도 괜찮아. 삼봉 진인도 사형 나이때는 무공은 커녕 잡일이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하핫.”


이결이 웃었다.


위로라고 하는 말인지. 가져다 대는 예시가 터무니없다. 삼봉 진인이라니.


그럼에도 이결은 마음 한켠이 부쩍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녀석이 내뱉는 터무니없는 소리들은 가끔씩 진짜로 이뤄질까 기대하게 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예선 탈락은 안된다? 그러면 진짜 죽기 직전까지 수련시킬거야.”

“하하.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지.”

“좋아. 슬슬 저녁 시간인가. 들어갈 때가 된 것 같네.”


벌떡 일어나며 말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이결이 바닥에 내려놨던 호리병까지 챙겨든 백연이 생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자. 자리 없겠다.”


바위를 걸어 내려가는 소년의 모습에 이결이 한숨섞인 웃음을 뱉었다. 누가 사제고 누가 사형인지 모를 일이었다.


‘천마와 삼봉이라.’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결이 백연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문득 이결의 머리에 물음이 스쳤다. 백연의 등을 보며 입을 열려던 그가 생각난 질문을 속으로 삼켰다.


‘세월을 쌓은 삼봉과 반대로, 화려하게 불태우던 천마는 단명했다면.’


눈앞에 걸어가는 소년의 재능은 어디쪽일까. 강호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지 일년여만에 저리 이름을 떨치는 소년은 현재 가장 화려한 불꽃일 터인데.


“......그냥 이야기니까.”


미간을 좁힌 이결이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예선 사흘차의 밤이 무당산 위로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



한밤중. 무당파의 외진 수련장 위.


파바바박!


거친 검격이 허공을 잘라냈다. 뒤이어 휘도는 바람결의 경파가 희끗하게 이지러지는 벼락을 찢어발기며 전진했다.


쩌엉! 쩡!


두자루의 바람과 한자루의 벼락이 찰나지간 섞여들었다가 물러났다. 고개를 떨군 백연이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빠르군요.”


중얼거리는 음성에 아쉬움이 묻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풍백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한때 검성이라 불렸는데, 체면이 있지요.”

“사실 거의 놓치고 있습니다. 속도가 무슨......”

“그런 것 치곤 검이 따라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감으로 때려 맞춘겁니다. 인지하고 따라붙은게 아니라.”


풍백이 고개를 기울였다. 눈앞의 소년. 터무니없는 말을 태연하게 한다.


백연이 요청한 대련 연습을 풍백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가 엮어낸 운해비영이라는 신법을 확실히 다듬고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의 일환. 후인을 가르치는 일은 풍백의 예상보다도 즐거웠다.


그리고 동시에 매 순간 놀람의 연속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가 내치는 검격을 뒤늦게나마 따라붙는다. 그의 이검 궤적에 따라오는 자색 안광을 보고 있노라면 흠칫흠칫 놀라게 되고 만다.


아무리 그가 힘을 조절하며 봐주고 있다 해도 그렇다. 풍백은 초월에 닿은 검객. 한낱 후기지수가 그의 검격을 인지하고 따라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쩌엉!


이어지는 검격이 재차 섞여들며 맑은 소리를 흩뿌렸다. 그 속에서 풍백은 백연의 움직임이 점차 다듬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처음보다 수월하게 그의 검격을 따라온다.


‘말도 안되는 속도야.’


매일매일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다. 그와 검을 맞대는 지금 이 순간, 시시각각 백연의 무위는 상승하고 있었다.


“어떤 감각을 지녔길래......”


풍백이 중얼거렸다.


직전 내뱉은 말도 그렇다. 감각으로 풍백의 검격 궤적을 예측하는 것 또한 사람이 할 짓이 못되니까.


가장 놀라운 부분이기도 했다. 무공 풍신은 예측불허의 움직임이 특출난 장점중 하나. 풍백 자신도 무공을 펼치기 전까지는 검로를 미리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백연은 그것을 예측해내고 있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감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 자신이 영물이라도 되는지.


카가가각!


검격이 얽혀들고, 밀려난 소년의 신형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검을 짚으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 백연. 그 모습을 보며 풍백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하아. 그게 좋겠군요.”


몰아쉬는 숨결에서 힘겨움이 묻어난다. 백연은 온몸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풍백은 압도적이었다. 쉴새없이 그의 검을 쫓아가는 것 만으로도 정신력과 내공이 막대하게 소진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얻은것도 많았다.


‘신법. 조금만 더 다듬으면 되겠어.’


움직임이 점차 유려해지고 있다. 풍백을 상대로도 원하는 움직임을 자유로이 가져갈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적을 상대로 통한다고 봐도 좋았다.


“내일은 더 강하게 부탁드립니다.”

“......이보다요?”

“예.”

“알겠습니다.”


근처의 바위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앉자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푹 적신 솜마냥 늘어진게 극도의 긴장감이 막 풀린 여파인듯 했다.


“대단하군.”


그때 낮은 음성이 울렸다. 백연의 근처에 걸터앉은 흑포의 사내였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풍백을 따라나온 모양.


‘대체 뭐하는 사람이람.’


그의 기파와 몸짓을 읽으려 해봤으나 쉽지 않았다. 스스로를 숨기는 것에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말투 하나 뿐이었다. 부리는 것이 익숙하고, 무위가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 뿐.


풍백의 지인이라니 악의를 지닌 사람은 아니겠거니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풍백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가끔 봤다만, 그쪽만큼 특출난 건 처음이야.”

“......칭찬으로 받겠습니다.”

“혼자 깨우쳤나?”


뜬금없는 질문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스승의 여부에 대해서 묻는거다. 곤륜파......나쁘게 듣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본디 그런 문파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대만한 실력자를 키워낼 능력은 없었어.”


나른하게 늘어지는 어투 속에 뼈대가 있다. 백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과거의 곤륜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니. 정보력이 뛰어난건가.


“곤륜파 외의 사문이 있다 보이지는 않으니, 따로 그대를 가르친 스승이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검으로는 없습니다......만.”


두번의 생애를 통틀어서도 그에게 검을 직접적으로 가르친 스승은 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검으로는?”

“다른 쪽으로는 뭐.”


백연이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스승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합니다.”

“호오.”


하령의 이야기였다. 지금쯤 무엇하고 있을련지. 철야방을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달되면 좋아할 하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흥미롭군.”

“그렇습니까.”

“그대의 무공은 이질적이야. 심법부터 보신경까지......그러고 보니 경공은 보지 못했었나.”

“다른건 전부 봤습니까?”

“비무제전 예선에서 보여준 것은 잘 보았네. 그리고 다른 곤륜파 무인들의 무공도. 그게 전부 그대의 무공이 아니겠나.”


사내가 말했다. 백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곤륜파의 무공이지요.”

“내 눈에는 지금의 그대가 곤륜으로 보이는데.”


말끝이 조금 올라갔다. 웃음기가 섞인듯이. 백연이 반박하려 입을 열려 했으나 사내가 조금 더 빨랐다. 이어지는 음성이 나른했다.


“그래. 경공만 빼면 다 본듯 하군.”

“......경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가?”


묻는 어투가 무심한 듯 가벼웠다. 백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하다면 엮어내겠지요. 아직은 아닙니다.”

“좋군.”

“백연. 이만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기요? 내일 경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끼어드는 풍백의 목소리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야겠습니다.”

“내일 봐요.”


옅은 웃음을 지은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의 신형을 응시한 풍백이 한숨을 뱉었다.


“재후님.”

“왜 그러지?”

“무슨 꿍꿍이십니까.”

“무공을 주려면 뭐가 필요한지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어느새 가면을 벗은 주재후의 얼굴에 웃음기가 드리웠다. 경공이라. 나쁘지 않은 것들이 여럿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부족했다.


“과천성(過天星)은 어떤가. 능파미보(凌波微步)나.”


황실 무공서고에서도 보배로 취급되는 절세의 경공술을 언급하는 주재후의 언행에 풍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애를 황실 무공을 훔친 죄로 죽이기라도 하시려는겁니까? 아니, 애초에 반출도 안되는 비급을......”

“나쁘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부족한 듯 싶기도 하군.”


주재후가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무공의 목록들이 스쳤다. 수많은 무공과 비급. 황실 무공서고는 전 중원에서 가장 귀중한 보고(寶庫)였고 그 안에는 별처럼 많은 신공들이 있었다.


“즐거운 고민거리가 생겼어.”


주재후가 웃음을 흘렸다. 그가 전해준 무공으로 새로 엮어낸 경공은 어떤 형태를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마음에 들어찼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2 본선(10) +7 24.03.02 2,487 73 16쪽
201 본선(9) +6 24.03.01 2,288 69 16쪽
200 본선(8) +14 24.02.29 2,319 73 15쪽
199 본선(7) +9 24.02.28 2,282 70 15쪽
198 본선(6) +6 24.02.27 2,342 78 17쪽
197 본선(5) +7 24.02.26 2,353 72 14쪽
196 본선(4) +7 24.02.24 2,435 73 14쪽
195 본선(3) +6 24.02.23 2,478 74 15쪽
194 본선(2) +5 24.02.22 2,390 64 16쪽
193 본선 +5 24.02.21 2,415 73 16쪽
192 창염(蒼炎)(2) +6 24.02.20 2,420 72 16쪽
191 창염(蒼炎) +7 24.02.19 2,418 74 16쪽
190 만천(滿天)(4) +6 24.02.17 2,555 79 19쪽
189 만천(滿天)(3) +9 24.02.16 2,476 76 19쪽
188 만천(滿天)(2) +8 24.02.14 2,492 76 15쪽
187 만천(滿天) +6 24.02.13 2,474 71 15쪽
186 성장(13) +6 24.02.12 2,465 70 21쪽
185 성장(12) +6 24.02.10 2,594 73 21쪽
184 성장(11) +7 24.02.09 2,488 69 19쪽
183 성장(10) +6 24.02.08 2,457 72 15쪽
182 성장(9) +5 24.02.07 2,495 69 17쪽
181 성장(8) +7 24.02.06 2,591 69 16쪽
180 성장(7) +6 24.02.05 2,570 68 17쪽
179 성장(6) +6 24.02.03 2,687 71 16쪽
178 성장(5) +6 24.02.02 2,671 71 16쪽
177 성장(4) +4 24.02.01 2,759 67 15쪽
176 성장(3) +7 24.01.31 2,757 72 17쪽
175 성장(2) +4 24.01.30 2,689 72 17쪽
174 성장 +7 24.01.29 2,725 72 17쪽
173 음모(3) +5 24.01.27 2,785 77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