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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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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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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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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예선

DUMMY

※※※



“어찌 된겁니까?”


백연이 물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결코 여기서 보리라고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마주친 탓일까. 그의 질문에 풍백이 가면을 매만졌다.


“세상이 절 가만두지 않더군요. 쉴 날이 없습니다.”


웃음기가 미미하게 섞여있는 음성이었다. 모호한 답변이었는데,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 사이 곁에서 서 있던 유성이 잠시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 천천히 입을 벌렸다.


“풍백이라 하시면.”


그의 목소리에 옅은 경외감이 깃들었다. 놀란듯 한걸음 물러선 유성이 중얼거렸다.


“검성(劍星)?”

“이것 참. 버린 별호를 기억해주는 분이 이리 많으시다니.”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전혀 모르는 기척이었던지라......”


유성이 황급히 예를 취했다. 그러나 풍백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맞는 판단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때는 일단 제압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지요. 특히 무당의 경내에 침입한 괴한......곧바로 견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대가 지금 이곳에서 못 알아볼만한 기척의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


이윽고 그의 시선이 백연에게로 옮겨왔다.


“식사하러 가는 길에 붙들어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잠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을 것인지라.”

“하고 싶은 말이요?”

“우선은 환골탈태한것, 축하합니다. 이제는 육체가 무공의 반동을 감당할 수 있겠군요. 그 벼락을 보았습니다. 신강에서.”


가면 아래로 미소가 스친 듯 했다. 기특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느낌. 백연은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풍백은 그를 바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겉모습이 바뀌었음에도.


“풍백께선 괜찮으신겁니까? 그때 우호법과......”

“예. 덕분에 검을 두자루나 날려먹긴 했습니다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요. 다만 놈을 처리하진 못했습니다.”


우호법의 처리를 담담히 입에 담는 모습. 아직은 격(格)의 차이가 느껴졌다. 천하를 두고 논하는 괴물이니 그렇다. 일전 보았던 선극과 함께 천하오대검수에 이름을 올리는 검객이니 당연할 터.


“그때 무덤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몸을 뺏습니다. 그렇게 신강을 떠나고 좀 쉬려 했는데......”


가면 아래 입꼬리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어떤 노망난 거지가 일자리를 물어온 바람에.”


말투에 미미한 즐거움과 원망이 담겨 있었다. 백연은 그 노망난 거지가 누구인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개방도를 칭하는 듯 한데, 풍백에게 말을 전하고 저리 불릴 정도라면 높은 위치의 사람이다.


개방 장로거나, 그보다 높다면 개방주 본인이겠지.


“그 일자리라는 것이 이곳과 관련이 있나봅니다.”

“곧 알 수 있게 될겁니다. 모두가 놀랄만한 일인데. 지금은 입 밖에 낼수가 없군요.”

“곧이라면......?”

“비무제전 본선입니다.”


다음주였다. 그 말에 백연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여기 계속 머무시는건가요?”


풍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무제전 내내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곳에 머물게 될겁니다. 그래서 꺼내는 말인데.”


잠시 백연을 빤히 응시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무공중 안법이 검왕과 관련이 있다고.”

“그걸 어디서......”

“제 나름의 소식통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신강에서 당신을 보았을때부터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생긋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당신에게.”


화악-!


백연의 앞에 다가선 풍백의 몸에서 바람결이 휘돌았다. 찰나지간 소년의 몸으로 바람이 옮겨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온몸을 타고 휘도는 바람은 백연의 것과도 조금 달랐다. 부드럽고, 가벼우며, 동시에 거칠게 날뛰는 바람들. 마치 세상 천지의 바람결을 한데 모아 묶은듯이.


신공이었다. 기파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감각으로도 그 구성을 읽는 것이 더없이 난해했는데, 한 호흡마다 규칙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그 형태가 더없이 자유롭다. 정말로 바람의 주인이라도 된 양.


“무공을 한자락 남기고자 하는데.”


이어지는 말이 당황스러웠다. 곁의 유성이 숨을 짧게나마 들이킬 정도로.


그런 반응 앞에서 풍백이 고개를 살풋 기울였다. 가면 아래의 하늘빛 눈이 미소와 함께 휘어드는 것이 보였다.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무당산 천주봉(天柱峰) 금정(金頂).


천하 무당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건물들이 고매한 자태로 선산을 굽어본다. 구름 위로 들어찬 건물이 수십개가 넘었는데, 전부 쉬이 열리지 않는 곳들이었다. 태화궁(太和宮)이 자리잡은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 기거하는 곳이 아니었다. 도문의 사원이자 뭇 도인들이 우러러보는 장소.


허나.


“번잡스럽다.”


그곳에서 막 걸어나온 한 사내의 중얼거림이었다.


나른하게 뻗은 음성에 고절한 기파가 실려있다. 또다른 절세고수였다. 허공을 가늠하는 눈이 느릿했다. 주변의 모든것에 흥미를 잃은 양.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문득 물어보는 어조도 가볍다. 그러나 그 음성에는 명백히 힘이 실려 있었다. 세상을 눈 아래로 내리깔아보는 이의 숨결이다.


그럴법 했다.


사내는 짙푸른 청포(靑袍)를 입고 있었다. 금실과 홍실로 새겨진 문양이 더없이 화려했는데, 그 양 어깨를 타고 오르는 것은 한마리 금룡(金龍)이었다.


중원 천하틀 통틀어.


몇 없는 이들만이 입을 수 있는 복식이었다. 친왕(親王)의 상징이자 주(朱)씨 황실의 일원임을 알리는 옷자락.


“유왕께선 그리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허나 이 노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유왕(裕王) 주재후가 여상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외팔의 노인이었다. 백발 백미의 노도사.


선극이 하나 남은 팔로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고루한 규칙과 번잡스러운 의례......이것은 기둥입니다.”

“기둥이라? 하늘을 받치는 천주라도 되는가.”

“무당을 받치는 기둥이지요. 일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것이 필요합니다.”


유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른한 시선을 던지면서.


“그대의 고견이 궁금하다.”

“본디 처음 걸음을 내딛는 자들의 의지는 드높습니다. 그 마음이 곧 기둥이지요. 허나 세월이 흐르고, 뜻이 계승되고, 의지가 이어지고 이어지면 결국에는 그 본질이 흐려집니다.”


선극이 손을 뻗는다. 자연스레 내뻗은 손길. 어느 순간 그의 손에는 길다란 목검이 한자루 들려 있었다. 그 검을 원래 허리춤에 차고 있었는지, 대체 검을 언제 뽑아들었는지 알아챌 수 없었다. 모든 행동이 그의 인지를 벗어난 경지.


“이 태극(太極)또한.”


후욱.


물결같은 기파가 귓가를 스쳤다. 유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 천주봉 전체를 둘러싼 하늘 위로 희끄무레한 빛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채우는 옅은 깃털 구름 같기도 했으며, 투명한 물 위로 번져나가는 흐린 안개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삼봉께서 어떤 의지를 담아 엮어내셨겠지요.”


느릿하게 하늘 전체를 채워나가는 것은 검고 흰 자욱이었다. 비스듬히 걸친 햇살에 반투명하게 드러난 거대한 태극의 형상.


목검을 부드럽게 납검한 선극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것이 지금까지도 기둥이 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리했다면 무당의 검은 일인전승(一人傳承)의 검이었겠지요. 혹은 소실되었거나.”

“그래서 규칙으로 옭아맨단 말인가?”

“각기 스스로의 기둥에 닿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놓는 것입니다. 규칙과 갖가지 것들이 모여 한 문파를 엮어내는 실이 되지요.”


유왕의 눈길이 노도사의 얼굴을 스치고는 봉우리 저편의 하늘을 향했다.


“그러하군.”

“고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은 삶이 있겠나.”


나른한 미소가 뒤따랐다.


“번뇌가 없다면 이 몸이 이미 선자(仙子:신선)이며 부처겠지.”


하늘에서 시선을 뗀 유왕이 머리를 쓸었다.


“잘 들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본질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황실에도 기둥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


선극의 표정이 미미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썹이 가지런히 모였다. 방금, 유왕 주재후의 입에서 나온 말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왕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나른한 몸짓으로 손을 크게 휘저은 그가 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방 봉우리에 옅은 바람결이 스쳤다.


“전하.”


어느새 유왕의 앞에 가면을 쓴 무인이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는 풍백이었다.


“경은 산책이라도 다녀온겐가.”

“풍백이라 호칭해주시지요.”


자연스레 반발하는 풍백의 행동에 유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한두번 한 말다툼이 아님에도 두 사람다 각자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흐음.”

“군문의 소속이 아닌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강호 무림에 투신했으니 대명의 관료들과 같이 불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대명의 관료라 했나? 지금은 내 호위이니 나의 신하이자 관료지.”

“......전하.”


유왕이 나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만하지. 어디를 다녀왔나.”

“후인(後人)을 만들려 걸음했습니다.”


그의 말에 선극의 눈썹이 움직였다. 지고한 검객인 풍백은 그도 잘 아는 인물. 하지만 그는 결코 제자를 두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한참 무림에서 검성이라 이름을 떨칠때의 그에게 수많은 이들이 검식 한자락 배우고자 줄을 섰음에도.


뒷사정이 있다. 스스로의 검이 낭인의 것이라 하나, 본디 뿌리가 군문에 있기에.


유왕 또한 놀란 눈치였다. 언제나 나른하던 그의 음성이 살풋 올라간다.


“그대가?”

“예.”

“그리해도 되겠는가?”


물음에 날이 담겨있다. 후인을 남겨도 괜찮겠냐는 물음. 지금 풍백의 무공이 더 이상 군문에 남아있지는 않으나, 황실의 서고에는 남아있다.


다른 이가 배웠을때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소리다. 나라의 검을 훔친 죄로.


하지만 풍백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무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배울 녀석이 아닙니다.”

“그건 무슨 의미인가.”

“자기 좋을대로 뜯어 고치겠지요. 입맛에 맞게 취할것만 취하고.”

“......무공을 고친다고?”

“새로 만드는 쪽에 가까울겁니다.”


선극이 풍백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속에도 곧장 한 소년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암화 백연. 곤륜파의 신성 외에는 저런 짓을 할만한 인물이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풍백과도 인연이 있었나. 그야말로 천하의 기연에 여러번 닿고 있다 할것이다. 그가 알기로 검왕과도 연이 있음에.


반면 유왕은 미심쩍은 기색으로 풍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예. 헌데 그것 관련해서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을?”

“비무제전 기간동안, 몇차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련지......”


그야말로 황당한 청이었다.


유왕조차 당황섞인 표정으로 풍백을 바라볼 정도로.


“지금 그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나?”

“압니다.”

“허어. 그대의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아.”

“초야(草野)에 묻혀있던 낭인을 굳이 꺼내온 것은 전하십니다.”


말하면서 주지시킨다. 풍백은 지금 이미 군문의 사람이 아니었다. 유왕의 말이라곤 하나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유왕의 입장에서도 그가 이리 흔쾌히 달려오리라곤 예상치 못했었는데.


결국 유왕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나 들어보지.”

“후인에게 무공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미 알려주고 온게 아니었나?”

“그것이.”


풍백이 가면을 매만졌다. 그 아래로 옅은 미소가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 당장은 안배운다고.”

“......음?”

“바쁘다 하더군요. 별 수 없이 며칠 뒤에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남을때.”


황당한 답변이 연이어 튀어나온다. 눈매를 매만진 유왕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풍백이 대체 어떤 사람을 만났기에 저런 말까지 들으며 무공을 알려준단 말인가. 이쯤되니 오히려 그 상대방에 대한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그자는 그대가 검성인 것을 아는가?”

“예. 제 무위도 잘 파악하고 있을겁니다.”

“그런데 기회를 이리 날려?”

“그 아이는 제 무공 한자락에 그리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오성이 하늘에 닿았음에-라고 덧붙이는 풍백의 음성이 가벼웠다.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챈 유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아는 풍백은 말을 가벼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바람같은 인물이나 동시에 그렇기에 더없이 냉정하다. 그런 이가 저리 말하는 인물이라.


흥미가 일었다.


“좋다. 허락하지. 몇번이건 가도 괜찮다.”

“감사드립니다.”

“단.”


유왕이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 탓이었다.


“그때마다 나도 동행하지.”

“......예?”

“그리하면 호위를 내팽게치는 것도 아니게 될테고, 일거양득 아닌가.”


풍백이 유왕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뒤편에 선 백발의 선극이 살풋 입꼬리에 웃음을 건듯도 했으나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미간을 좁힌 풍백이 입을 열었다.


“......진심이십니까?”

“안될 이유가 있나?”

“그런건......없습니다.”


무공을 보여줄 수 없다는 핑계도 소용없다. 군문의 모든 무공은 황실서고에 이미 있다. 그가 익힌 무공도 마찬가지. 유왕이 볼 수 없는것은 없다는 소리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풍백이 고개를 젓고는 중얼거렸다.


“일단, 그렇게 입고는 안되십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나. 이 몸이 민정 시찰을 나가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뒷짐을 진 유왕이 슬쩍 웃고는 풍백을 지나쳐 휘적휘적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풍백이 머리를 짚었다.


“오지 말걸.”


그를 향해 고소한 표정으로 웃어대던 신개를 떠올린 풍백이 한숨을 뱉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한마디 해야할 성 싶었다.


“아니, 잘했네.”


그때 다가온 늙수그레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선극이었다. 어느새 풍백의 옆에 선 그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자네가 유왕께서 데려온 유일한 호위 아닌가?”

“그렇지요.”

“곁을 잘 지켜드려. 항상 조심하게.”


선극의 시선이 유왕의 뒤를 쫓았다. 아까전 유왕과 나누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황실에 기둥을 세워야겠다 하셨어.”

“......선극께 말입니까?”

“그래......음? 보니 그대도 무언가 알고 있는겐가.”


삽시간에 굳어든 풍백의 얼굴을 보며 선극이 중얼거렸다. 그에 풍백이 답했다.


“황실에 위험한 자가 너무 많습니다.”

“......”

“이 이상은 말씀해드릴 수가 없군요.”


풍백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선극이 그것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믿고 계신듯 하네.”

“그러실테지요.”

“이 노부는 강호 무림에서 구르다 죽을 운명인지라 도와드릴 수가 없으니 말이야. 근래 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교 뿐만도 아니야. 사마외도의 준동이 극심한 상태일세.”


선극의 눈이 서편을 더듬었다. 그의 나직한 음성이 천주봉을 타고 흩어졌다.


“전란의 불씨가 다가오고 있네. 그 시일이 언제냐만이 문제일 뿐.”


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나눴다. 이윽고 초월에 닿은 검객들이 느릿하게 천주봉의 아래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저 아래까지 내려간 유왕의 뒤를 따라서였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는 서서히 옅어지는 거대한 태극 문양.


무당파 장문인의 압도적인 무위를 상징하는 표식이다. 당금 호북을 수호하는 기치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파 무인들은 저것이 주기적으로 떠오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호북에 감히 발을 들이지도 못할 만큼.


“호오라.”


허나 같은 시간.


“그것 참 장관이로다.”


호북 운현의 한 전각 지붕 끄트머리. 한마리 거대한 까마귀처럼 수그리고 앉은 노인이 하늘을 응시했다. 탁한 흰빛의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있다.


대부분의 사파 무인이 아니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태극 문양을 보고도 태연히 평하는 모습이 그랬다.


“허나 세월은 무상(無常)하니. 세상을 발 아래 놓고 검을 휘두르던 늙은이도 이제 그 빛이 바래고 있구나.”


혈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점차 옅어지는 태극을 눈에 담으면서.


이윽고 하늘이 완전히 깨끗해진 그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승(神僧)은?”


여상히 당대 소림 방장의 행방을 입에 담는다. 그의 물음에 곧장 답이 돌아왔다.


“내일부로 무당산에 도착합니다.”

“천독은 어찌 되었나.”

“이미 사천을 비우고 이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청성장문과 아미장문도......”

“나머지 둘은 크게 의미 없네.”


혈선이 수염을 쓸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사천부터 시작할까. 수라궁주에게 기별을 보내게. 장주의 이름으로.”


그의 음성이 평이하게 이어졌다. 지극히 일상적인 어조였다. 그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움직일 때가 도래했다고.”


불씨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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