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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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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
작품등록일 :
2022.02.16 20:35
최근연재일 :
2022.05.02 09:35
연재수 :
8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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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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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10,686

작성
22.02.18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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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제3화. 입문(入門) 무공을 배우는 길에 처음 들어섬.

DUMMY

홍의귀수와 무진은 윗사람이라고 아직 나서지 않고 상대방의 동정을 살피기만 하였다.


이들은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서서 관망하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손을 쓰려고 잔뜩 벼르는 중이었다.


창대에 올라서 줄타기를 하듯이 묘기를 부리던 무오가 기합소리를 지르며 주지교를 향해 뛰어올랐다.


이때 한 자루의 표창이 바람을 가르며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무오는 철선으로 표창을 쳐내며 발등으로 주지교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주지교가 입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쓰러지는데, 서유석이 다시 표창을 날리려 하였다.


노소자가 서유속을 향해 잽싸게 돌멩이를 던졌다. 날아온 돌멩이에 이마를 얻어맞은 서유속은 표창을 떨어뜨리며 뒤로 비틀거렸다.


비록 날아온 돌멩이의 힘이 그다지 센 편은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않게 얻어맞았으니 놀라서 정신을 차릴 재간이 없었다.


지주교를 걷어찬 무오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비틀거리는 서유속의 명치를 철선으로 찔렀다.


서유속은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옆에서 여유만만하게 뒷짐을 지고 구경하던 홍의귀수가 어느새 서유속에게 다가가 검지로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무진은 어차피 좋은 말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또 생사를 알 수 없는 셋째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허리춤에서 다섯 개의 바둑알을 꺼내 손에 쥐었다.


“홍의귀수! 암기를 조심 하시오.”


홍의귀수를 향해 손을 들면서 세 알의 바둑알을 던지고, 뒤이어 두 알의 바둑알을 더 던졌다.


처음 던진 바둑알은 홍의귀수의 머리와 배 그리고 다리를 향해 세 방향으로 날아갔다.


홍의귀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손을 들어 얼굴을 향해오는 바둑알을 잡고 다른 바둑알도 잡으려는데, 뒤에 던진 두 알의 바둑알이 갑자기 앞에 던진 바둑알을 제치고 가슴으로 날아왔다.


깜짝 놀라서 한 마리의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일학충천(一鶴衝天)의 수법으로 허공으로 뛰어올랐으나 바둑알 하나가 그의 발등을 때렸다.


순간 하반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한 발로 내려설 수 있었다.


평범해 보이던 암기술인데 깊은 내공을 실어 변화시킨 절기에 발등을 얻어맞자 놀라 등골이 서늘해 졌다.


상대가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무진의 이 한수는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절기로 눈으로 보지 않고도 암기를 던질 수 있는 불목비황(不目飛蝗)의 두 번째 초식이었다.


상대를 향해서 암기를 상중하로 던지는 기술은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뒤에 던진 돌이 앞의 것을 제치고 튀어나가게 하는 것은 심오한 공력을 가지고 수련하지 않으면 숙달하기가 매우 힘든 절기였다.


홍의귀수는 자신의 실력만 믿고 이들을 만만히 보다가 의외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그사이에 저어량과 주지교도 무오의 철선에 팔과 다리 등을 베어 옷이 피에 젖어 흥건하였다.


게다가 자신은 바둑알에 맞은 발등이 욱신거려서 재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홍의귀수는 자신의 약점을 노출할 수 없어 오히려 거만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바빠서 물러나겠지만, 다음에 꼭 보답하리다. 그리고 꼬마야, 너는 특별히 잊지 않고 귀여워해주마!”


홍의귀수는 노소자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한바탕의 소용돌이가 지나자 무진이 노소자에게 셋째가 있는 곳을 물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다행히 셋째의 맥이 가냘프나마 뛰고 있었다.


워낙 피를 많이 흘려 혼절하기는 했지만 젊고 강건한 몸이었기에 아직까지 숨을 붙이고 있었다.


무진은 품속에서 영단을 꺼내 먹이고 온몸의 혈도를 주물러 주었다. 잠시 후에 셋째 무유가 간신히 숨을 돌리자 무오에게 업도록 시켰다.


무오를 도와준 노소자를 보니 아직 어린아이라 차마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까 홍의귀수가 아이를 보고 눈을 부라리는 걸 보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무진은 은원(恩怨)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얘야! 네 이름은? 그리고 너의 집은 어디니?”


“노소자구요, 집은 산 밑에 있어요.”


“그래? 그럼 둘째야, 넌 먼저 가거라! 난 얘를 데리고 잠시 내려가 봐야겠다.”


“네, 형님! 빨리 오시우.”


무오가 무유를 업고 산위로 치달렸다.


노삼은 저녁밥을 지어놓고 노소자를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자 집 밖에 나와 먼 산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나무란 건가? 오면 좀 더 따듯하게 대해줘야겠다.)


종종걸음으로 서성이는데 노소자가 웬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섰다. 이 동네에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저 녀석이 혹시 뭘 잘못한 것이 있어서 따지러 온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굽실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저희 애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모두 제 잘못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들어가서 말씀 하시지요.”


노삼은 풍채도 좋고 말씨도 점잖은 사람이 자신을 예우해 주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방에 들어와서 무진은 자초지종을 대충 얘기하였다.


“강호에서 흉악한 명성이 자자한 만무방(萬武幫)의 패거리들에게 미움을 샀으니 그들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그들이 보복할까 두려우니 당분간 우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진의 말에 노삼은 절을 하며 고마워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대도시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삼이었다. 노소자가 한 일을 들어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변변한 선생이 없어서 영리한 노소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데, 지금 무진의 풍채와 말하는 것이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 무진에게 큰 절을 올리며 간절히 부탁하였다.


“선생님, 우리 아이를 거둬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노삼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일어나지를 않는다. 무진은 당황하였다.


그러나 셋째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그냥 얼버무릴 수 없었다.


“우리가 잘 가르칠 테니 안심하십시오. 더 늦기 전에 떠나야겠습니다.”


무진이 급히 서두르자 노삼이 몇 벌 되지 않는 노소자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노소자야! 선생님을 따라가서 제대로 배우 거라. 난 나대로 할 일이 있어서 너와 같이 갈 수 없구나. 난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마.”


노삼이 노소자의 손을 잡고 말을 잇지 못한다. 노소자도 갑작스런 이별에 눈물 젖은 눈으로 노삼을 쳐다보며 밀려오는 슬픔에 어깨만 들썩이고 있었다.


무진은 노삼의 병이 깊은 것을 알고 주머니에서 금덩이를 하나 꺼내 노삼에게 주었다. 노삼은 한사코 거절했으나 억지로 쥐어주었다.


무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노소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눈물을 훔치며 두 사람을 보내는 노삼을 뒤로 하고 노소자를 옆에 낀 무진은 나는 듯이 산 위로 올랐다.


노소자를 옆에 끼고도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눈앞에 바위며 나무들이 순식간에 멀어졌고, 귓가엔 바람소리가 휙! 휙! 하며 매우 사납게 스쳐지나갔다.


노소자는 평소에 뜀박질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마을 아이들도 노소자가 너무 빨라서‘망아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망아지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리마가 달리는 것 같아 약간 어지러웠다.


노소자는 오늘 당한 여러 가지 일들과 지금의 정황이 너무나 엄청났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한참을 달리던 무진이 멈춘 곳은 산의 중간쯤인데 깎아지른 절벽 밑이었다.


절벽은 중턱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겨우 숨을 내쉬고 위를 쳐다보니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지만 온통 바위투성이어서 금방이라도 바위가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해는 어느덧 서산을 넘어가 어두컴컴한 산속엔 바람소리만 처량했고,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도 둥지를 찾아 들어가 사방이 적막하였다.


한숨을 돌린 무오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느라고 힘들었지? 이제 여기만 올라가면 된다. 가볼까?”


무진이 다시 노소자를 옆에 끼고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뛰어올라 튀어나온 돌을 밟고, 다시 몸을 솟구쳐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위로 올라갔다.


밑을 내려다보던 노소자는 오금이 저려서 무진을 꽉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공과 경공술이 부족한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절벽 여기저기에 딛고 올라갈 수 있게 틈을 만들어놔서 이곳 지리에 익숙한 중원삼걸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 왔다.”


무진이 노소자를 땅에 내려놓았는데, 노소자는 그동안 오금이 저려 눈을 감고 있던 터라 한동안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절벽의 정상은 아니었다. 위를 쳐다보니 정상은 십여 장 위에 있었다. 마차가 대여섯 대 들어갈 만한 넓은 터에는 작은 암자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무오가 기척을 듣고 나와 반갑게 맞았다.


“셋째는 어떤가?”


“피를 많이 흘렸지만, 상처는 다행히도 급소가 아니라 괜찮아질 겁니다.”


“물건은 어찌 되었나?”


“안전합니다, 참! 저녁상을 봐 놨으니 어서 들어갑시다.”


방문을 열자 탕약 냄새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무유는 아랫목에 누워있었고 윗목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에 배고픈 줄을 몰랐는데 음식 냄새를 맡으니 갑자기 허기가 져서 허겁지겁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상을 물리고 나자 무진이 노소자에게 무유를 만나게 된 경위를 물었다. 노소자는 집을 나와 핏자국을 따라 간 것과 홍의귀수를 냇가에서 만난 일, 폭죽을 터뜨린 일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하하하! 일부러 산신령에게 물을 떠놓고 빌었다고? 네 꾀가 보통이 아니구나, 홍의귀수처럼 영악한 놈이 너에게 넘어갔으니 말이야.”


무오가 못 참겠다는 듯이 웃어대었다.


“하기야 나라도 넘어갔을 걸......”


무진도 빙그레 웃으며 기특한 듯이 노소자를 쳐다보았다. 노소자가 아까 제때에 폭죽을 터뜨려주지 않았다면 셋째의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의 폭죽은 서로 달랐다. 첫째 무진의 것은 노란색의 황매가 나타나고, 둘째는 붉은색의 홍매(紅梅)가, 셋째는 흰 매화가 나타나 서로 떨어져 있어도 누가 위험한 지 알 수 있었다.


무진은 노소자를 처음 산에서 봤을 때는 그냥 산에 나무나 하러 온 애인 줄 알고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나중에 조그만 것이 겁도 없이 악당에게 돌멩이를 던졌을 땐, 비로소 다른 애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노소자의 얘기를 듣고 지금 다시 살펴보니 근골도 튼튼하게 생겼고 어리지만 남다른 기상이 엿보였다.


무진은 앞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속으로 생각했으나 일단 셋째가 깬 후에 함께 의논하기로 하였다.


산속의 밤은 마냥 조용하기만 하였다. 가끔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멀리서 우는 부엉이 소리가 듣는 이를 쓸쓸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자, 오늘은 여러 가지로 힘이 들었을 테니 일찍 자거라.”


무진이 윗목에 자리를 펴면서 말했다. 오늘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은 노소자는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없었는데, 밥을 먹고 나니 더욱 피곤해서 잠이 몰려왔다.


그동안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일찍 자라는 반가운 소리에 눕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산속의 밤은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만무방 산채(山寨)로 돌아온 홍의귀수는 방주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자기 거소에 돌아와서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방안을 서성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에 하남삼걸이 무시하지 못할 놈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렇게 뛰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통쾌하게 복수하지 않으면 성을 갈겠다고 이를 갈며 부하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조를 짜서 그놈들이 있는 곳을 찾되 공격하지 말고 위치만 파악하고 돌아오너라!”


만무방에는 그 이름대로 갖가지 무술에 능통한 자들이 많았다. 내삼당과 외삼당이 있는데, 외삼당 중의 수색대는 특히 경신법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어 적을 은밀히 추적하고 염탐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덩치가 작은 송아지만한 매우 흉악한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고, 깜깜한 밤에도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적에게 다가가 상대가 알기도 전에 해치우곤 하였다.


크게 낭패를 당한 서유속과 주지교 등은 무오가 그나마 손에 인정을 남겼기에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산채(山寨)에 돌아와 상처를 치료하고 금창약을 바르자 견딜 만하였다.


그러나 홍의귀수에게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몸 둘 곳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홍의귀수는 일을 그르친 부하들의 손가락을 베어버린 적이 있어서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홍의귀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두려워 떨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아직까지도 두 귀가 멀쩡한가? 아니면...!”


서유속과 주지교, 저어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품속에서 날이 시퍼런 비수를 꺼내 자신들의 한 쪽 귀를 싹둑 베었다.


“다음에 또 일을 망친다면 그때는 귀 하나로는 어림없을 것이야!”


말을 마친 홍의귀수는 여전히 웃는 눈으로 훑어보더니 몸을 돌렸다.


“다, 당주님,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귀가 잘린 세 명은 홍의귀수의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꿇어앉아서 귀를 붙잡은 채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었다.


훗날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귀가 하나뿐인 세 명의 못난이 즉 독이삼추(獨耳三醜)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귀가 하나인 세 명의 영웅, 즉 독이삼웅(獨耳三雄)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튿날 아침, 노소자가 잠이 깨어 일어나니 무진과 무오, 무유는 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노소자는 무유가 걱정이 되어 쳐다보았다. 이미 상처가 다 나았는지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아침햇살이 방문에 비춰 방안은 훤했는데 이들 세 사람은 숨소리도 없이 꼼짝을 안했다.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중인데 노소자는 운기행공이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잠도 앉아서 자는구나 하고 더욱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홀로 우두커니 있자니 무료해진 노소자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은 나뭇잎들은 반짝이는 이슬을 달고 있었고,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산속의 공기는 말할 수 없이 청량(淸凉)했다.


기지개를 켜며 깊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절벽 밑의 작은 옹달샘에는 표주박이 있었다.


맑은 샘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니 잠자던 온몸의 신경이 깨어나는 듯 매우 상쾌해졌다.


잠시 후 무오가 나와 쌀을 씻고 아침준비를 했다.



밥 한 그릇에 두 가지 산나물 반찬이 전부였지만 정말 꿀 맛 같았다. 그러나 홀로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집에 없으니 아버진 어찌하고 계실까? 밥이라도 제때에 끓여 드셔야 할 텐데......)


노소자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밥을 먹는데 무유가 노소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오늘 아침 해를 못 볼 뻔했구나.”


옆에 있던 무진이 형제들을 보면서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애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군자는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갚아야 하고, 원한이 있으면 풀어야 하는데.....”


무유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큰형님께서 얘를 제자로 거두면 어떨까요?”


“이 애의 관상과 근골을 보니 매우 뛰어나서 나 같은 사람은 사부가 될 자격이 없지.”


무진이 사양하자 무오가 눈을 부라리며 말한다.


“아니, 형님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사부가 되겠소? 맘에 없는 소리 하지 마시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사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공연히 허명만 얻었지 배울 것이 많은데, 남을 가르치기엔 실력이 모자라네. 그래서 말인데......”


성질 급한 무오가 갑갑하다는 듯이 입에 침을 튀긴다.


“형님, 뜸 들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슈.”


“우선 우리 셋이서 기초부터 가르치고 제자로 삼을 것인가는 그 뒤에 논하기로 하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형님,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셋째 무유가 찬성하자 무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에선 한번 사부로 삼으면 다른 사람을 사부로 삼을 땐 반드시 허락을 얻어야 했다.


노소자의 자질을 아끼는 무진이 깊이 생각하고 말한 것임을 무유는 알 수 있었다.


“참, 큰 스님이 주신 그 물건 좀 보세.”


무진의 말에 무유가 품에서 하얀 자기로 된 조그만 병을 조심스럽게 꺼내 주었다.


무진은 뚜껑을 열고 살짝 냄새를 맡아보았다. 순식간에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냄새가 방안에 어렸다.


안에 있는 붉은 환약을 손바닥에 쏟아보니 모두 다섯 알이었다. 약에서 퍼지는 청량한 향기가 모두의 정신을 맑고 상쾌하게 해줬다.


무진은 환약을 다시 병 속에 넣고서 말했다.


“소림사의 소환단(小環丹)은 가히 신약이라고 말할 수 있지..., 큰스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주셨으니 정말 필요할 때에만 써야겠다. 셋째가 간직하도록 하게.”


“아니, 형님께서 간직하시지요.”


무오와 무유가 동시에 말하자 무진은 마지못해 품에 넣었다.


호남삼걸은 절에서 만났다. 당시엔 난신적자들이 임금을 시해하고 서로 정권을 차지하려고 다투어 나라가 극도로 어지러웠다.


또한 곳곳에선 도적들이 들끓어 가엾은 백성들을 약탈하고 함부로 죽였다.


이런 난리 통에 부모를 잃거나 헤어져, 울면서 헤매고 있는 아이들을 큰스님이 거둬 절에서 키웠다.


어려서부터 스님이 무공을 가르쳐 기본기는 갖추었으나 정식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어서 소림사의 무공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처지가 같았기에 친형제 이상으로 아끼고 보살폈다. 이들이 나이가 들자 절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오라고 장터에 보냈는데, 장터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랑자들을 죽도록 팼다.


그 뒤로 장터의 상인들은 이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은 물건들을 싸게 팔았다.


절에서는 이들이 좋은 물건을 싼 값에 잘 구입하자 계속 일을 맡겨서 이들은 가끔씩 장에 갈 수 있었다.


이들은 그때마다 시장에서 금품을 갈취하는 시정잡배들을 겨우 기어갈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서 다시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앙심을 품은 자들이 패거리를 작당해서 절에 와 난동을 부렸다.


절에선 망나니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귀찮아 적당히 돈푼을 쥐어줘서 돌려보내곤 하였다.


이런 일들이 자주 계속되자 큰스님은 이들을 절을 떠나 나가살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큰스님은 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항상 뒤에서 도와주고 있어서 지금까지도 큰스님에게 은혜를 입고 있었다.


이들은 소림사의 정통무공은 배우지 않았지만, 무공의 기초가 튼튼하였다. 셋이서 부단히 무공을 연마하여 근처의 악당들과 부랑자들을 시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협심이 강한 이들을 호남삼걸이라고 불렀다.


한참 젊은이들에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낭인(浪人)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패했다.


나중에 오해가 밝혀져 서로 웃고 헤어졌지만, 호남삼걸은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고,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무공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무공을 연마하려고 장가계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연히 지금 이 암자에 기거하던 기인을 만나 두 달 동안 무공을 배웠다.


자신의 이름을 사행도((史行道)라고 밝힌 노인은 무공을 전수해 주곤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 노인이 비록 호남삼걸을 제자로 거두지는 않았지만 호남삼걸의 마음에는 영원한 스승이었다.


사행도가 두 달 동안 절기를 전수해 준 뒤로 이들의 실력은 괄목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도 사행도가 가르쳐준 절기를 완전히 연마하지 못했기에 이곳 암자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날부터 무유는 글을 가르치고, 무오는 힘을 단련하는 법을, 무진은 내공의 구결(口訣)을 가르쳤다.


사람은 성인들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와 현인들처럼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와 일반인처럼 곤란함을 당해서 아는 곤이지지자(困而知之者)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노소자는 현인들처럼 배우면 바로 알 수 있는 매우 총명한 아이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더구나 기억력이 비상하여 한 번 읽고는 모두 기억할 수 있어서 무유의 강의를 듣고 모두 기억하였다. 무유가 강의를 할 때 노소자는 눈을 감고 들었다.


무유는 내용이 어려워서 눈을 감고 자는 줄 알았는데 어려운 구절을 물어보니 술술 막힘없이 대답하여 그의 영민함에 혀를 내둘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무진과 무오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고는 무오가 노소자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동쪽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는데, 팔과 다리 힘을 기르게 하기 위하여 그 바위들을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노소자는 처음엔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었는데 갈수록 힘이 들었다. 끙끙거리며 비지땀을 흘리면서 묵묵히 그 바위들을 모두 옮겼을 땐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었다.


결국 손발에 힘이 다 빠져버려 도저히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이튿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데 마당에서 무오의 고함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책을 읽던 무유가 방문을 박차고 몸을 날렸고, 무진도 뛰쳐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쥐새끼 같은 녀석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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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제82화. 노소자여 안녕히 +12 22.05.02 541 17 12쪽
81 제81화. 회자정리 會者定離 거자필반 去者必返 +2 22.05.01 447 14 11쪽
80 제80화. 제 버릇 개 주랴 +4 22.04.30 456 13 11쪽
79 제79화. 산중수복(山重水複) 갈길은 먼데 길은 보이지 않고 +3 22.04.29 491 15 11쪽
78 제78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투를 벌이다 +4 22.04.28 501 13 11쪽
77 제77화. 못된 제자와 사부의 결투 +2 22.04.27 468 15 12쪽
76 제76화. 또다시 스승을 배반한 신군 갈단 +4 22.04.26 485 15 11쪽
75 제75화. 용호상박 龍虎相搏 +2 22.04.25 505 15 11쪽
74 제74화. 무림의 운명을 결정짓는 비무대회 +2 22.04.24 504 12 12쪽
73 제73화. 갈단의 사부, 구유귀왕(九幽鬼王) 뇌진성 +2 22.04.23 493 12 11쪽
72 제72화. 화산 성채를 접수하다 +2 22.04.22 513 12 12쪽
71 제71화. 불구대천의 원수 +4 22.04.21 562 16 11쪽
70 제 70화. 금면악동(金面惡童) 상관마, 상관해 +2 22.04.20 627 18 13쪽
69 제69화. 파렴치한 갈단의 과거 +2 22.04.19 550 15 13쪽
68 제68화. 신군 갈단의 과거 +4 22.04.18 567 17 12쪽
67 제67화. 마침내 신비의 인물, 신군과 만나다 +4 22.04.17 579 15 12쪽
66 제66화. 사나이 대장부의 길 +2 22.04.16 581 12 14쪽
65 제65화. 노소자 사로잡히다 +4 22.04.15 580 11 13쪽
64 제64화. 흑랑채의 채주 금안랑군(金眼狼君) 호대랑 +2 22.04.14 578 14 12쪽
63 제63화. 인생이란 결국 빈손,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4 22.04.13 588 15 12쪽
62 제62화. 위기일발 (危機一髮)의 순간 +4 22.04.12 605 16 13쪽
61 제61화. 독 안에 든 쥐 +4 22.04.11 620 13 13쪽
60 제60화. 결국 꼬리를 밟히다 +2 22.04.10 625 16 14쪽
59 제59화. 도화곡(桃花谷)에서 +2 22.04.09 650 15 14쪽
58 제58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 +2 22.04.08 617 13 13쪽
57 제 57화. 태행산으로의 잠행 潛行 +2 22.04.08 664 16 14쪽
56 제56화. 솔바람 그늘아래 벽계수 흐르는데 +4 22.04.07 711 18 14쪽
55 제55화. 화산파의 멸문지화 滅門之禍 +2 22.04.06 716 19 13쪽
54 제54화. 갈소군의 과거 +2 22.04.05 697 17 13쪽
53 제53화. 이 파렴치한 놈아 +4 22.04.04 710 1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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