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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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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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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0. 일탈-(4)

DUMMY

102호와 대판 싸우고 나서는, 나는 다시는 그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약을 아예 끊어버렸다. 그것을 완전히 갖다버리진 못했지만 옆에 두고도 찾지 않는 것이 참으로 용했다. 누군가가 또다시 나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니 차마 그것과 다시 손을 잡을 용기가 나질 않아서였다.


한편으로는, 나는 102호가 죽도록 걱정되었지만 찾아가지는 또 못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내가 약을 먹지 못하는 이유와 같았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나는 매일 망설이고 고뇌하기는 해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는 내가 자살을 할 조짐을 보이자 나의 만류에도 내 집에 매일 찾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결국엔 그는 내 자살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왜 담력이 없다는 핑계로 그를 구해주지 못했던 것인가. 내가 매일 찾아가서 빌고 빌어도 그가 한 번 내뱉은 결정을 번복할 리는 없었다.

하물며 나는 찾아가지 조차 않았지 않은가! 나는 내 허락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게 떠맡기려 하는 그를 원망했고, 더불어서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도, 허락도 못하고 앉아있는 내 자신을 원망했고, 이런 원망을 하게 만드는 세상도 원망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계약 날 당일, 나는 그제야 그의 집에 찾아가는 중이었다.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계약이 해지되는 것보단 그가 죽지 않고서 멀쩡히 살아있는 것을 더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늑장을 부렸던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왜 처음부터 그의 집을 뛰쳐나올 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혹한에 몸서리치며 겉옷을 더 세게 여몄다. 그의 집 앞에 다다르자 나는 미치광이처럼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불행하게도, 문고리는 더는 잠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땐,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책상 아래에 엎드려서 잠을 자듯 죽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표정도 짓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천하의 마인드 리더도 결국엔 패배하고야 말았다. 그는 이것이 끝까지 승리라고 믿으면서 몰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가 나를 놀래 주는 것이라면 화가 덜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가 살아나서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들어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제 명이 다한 몸뚱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행여나 그의 마지막 잠언이 있을까 그의 주변을 찾아봤지만 내가 찾아낸 것은 저주스러운 계약서들이 다였다. 그는 내게 일말의 유언도 남기지 않고 무책임하게 세상을 뜬 것이다.


나는 늘어져버린 그를 안아들었다. 또다시 나는 이가 시릴 정도로 싸늘하게 굳은 시체를 껴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내 온기는 이젠 더는 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 때와는 달리 더는 눈물이 나질 않았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친구를 팔아먹은 기분이 어떤가. 너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심해에 잠겨있던 네가, 그를 딛고 올라서서 산소를 들이마실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나를 변호했다. 아니다, 나는 종당에는 돌아왔지 않은가. 내가 어딜 봐서 이기적이란 말인가. 내가 재반박해왔다. 그것은 중요치 않다. 어차피 그가 죽었다는 것, 그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던가…….



며칠 뒤, 나는 텅 비어버린 그의 집을 재차 방문했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갔던 발자취라도 내가 정리해주고 싶었다. 고인이 되고 나서야 그를 알아 모시는 내 자신을 한껏 비웃으면서, 나는 그가 주식으로 삼았던 책장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나는 양피지에 둘러싸여 있던 낯익은 책을 발견했다.

그가 내게 절대 보여주지 않던, 그가 어릴 적부터 써왔다는, 바로 그 책이었다. 그간 나는, 그가 내게 일러준 대로 그것이 공상 소설인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펼쳐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상 소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장르에 속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인물의 생애를 그려온 소설이었다. 그 인물은 나와 똑같은 시대와 처지에 붙박여 있었다. 이름도 외모도 그 속에선 직접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았다. 다만, 성격이며 행동이고 말투가 틀에 찍어낸 것처럼 나와 닮아있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러니 그가 꼭 내게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했던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드디어는 그가 사체로 팔려나갔을 때도 나오질 않던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괴로움의 눈물이기도 했고, 수치의 눈물이기도 했다. 소설 속의 나는 무상으로 악당들을 가르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현실 속의 나는? 나는 돈 받고 영웅만을 가르치던 대학 교수가 아니던가!


그는 어쩌면 어떻게 살면 좋을지 모르겠다던 내게 이러한 모습을 원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번도 이러한 삶을 내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 갈 길을 가라고만 했지. 죽지만 말아달라고 했지.

그래, 틈만 나면 죽고 싶다던 나를 보며 그는 이 소설을 판타지 소설이라 생각했겠지.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 여기까지 걸어왔나. 나는 대체 어디를 보며 걸어오고 있었나…….



나는 102호가 명을 다한 뒤론 밖에도 안 나가고 얌전히 집에만 있었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결단코 얌전히 있었던 게 아니다. 하루 온종일 별별 종류의 약만 하고 지냈다. 헤로인이었던가. 주사약도 몇 번 해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싶어 했던 모범답안은 이미 나왔지만, 나는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다. 102호가 내게 원했던 삶을 내가 살아가기엔 난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가 나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답안을 알려주었더라면 달라질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이것들은 일종의 핑계였다. 나도 사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마약을 하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사복을 입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검은 가면을 쓴 사악한 악당, 157호의 복장을 변명하듯이 빼입고 있었다.


방황하는 내 주변에 남은 것은 이제 그 악마의 약물뿐이었다. 격려하던 이도, 동경하던 이도, 소중했던 이도 모두 떠나 가버렸다. 나는 진통제며 자살충동과도 모두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것은 다 마약 덕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혐오하던 걸 그만둘 수 있다고 해서 마약이 좋은 친구라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사채업자였다. 빚을 겨우내 다 갚았다고 생각하면 배로 불려주는 악덕한 조폭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용 불량자이니 그 각별한 벗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내게 환장할 천국을 안겨주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미친 세상을 순간 싹 잊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감각을, 나는 한번 맛본 뒤로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 이것이 마지막임을 몇 번이고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들이키는 순간 머리는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온몸이 희락으로 달아오르고 팔다리는 꺾여서 힘없이 떨렸다.

나는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며 순순히 쾌락에 복종했다. 내게 잠언을 속삭이던 내면의 오랜 현자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새로 사귄 벗은 내게 있어서 연인과도 다름없었다. 천사님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곁에 있으면, 아저씨의 치료를 받으면, 내가 아팠던 것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밤낮 구분 없이 그저 효과가 가시면 또 불결한 그것과 혀를 얽었고, 그때마다 느껴지는 건 절로 좋다는 교성과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벅찬 감각이었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중력조차도 무시할 수 있었다. 내가 허공에 책을 던지면 책은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고 땅을 한번 치면 방바닥은 한없이 나락으로 꺼졌다. 집안에 또다시 괴상한 물체들과 도형들이 내가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근 현관문을 따고 몰려들어왔다.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도 있었고 악랄한 마녀도 있었다. 나는 판타지를 논한 셈이다. 그래! 나는 세계를 창조하는 마법사였다. 세상의 기계론적인 법칙들을 내가 바꿀 수 있었고 그 물리책의 최후의 한 줄글까지도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쾌감에 헐떡이고 있는 중에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했다. 내가 현재 닿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약에 내성이 생겼다.


나는 이 상황을 끝까지 도리질 치며 부정하려했다. 요 모양 요 꼴이 될 때까지 내 몸은, 내 정신은 뭘 하고 있었나!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여기까지 내성이 도져버렸던가! 게다가, 내가 남겨뒀던 여분의 양들마저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하지만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지금 쾌락은 쾌락이었다. 난 또 그런 걱정을 하면서 입에 코에 혈관에 약들을 집어넣었다. 나는 알약들을 삼키며 기쁘게 활짝 웃어보았다. 이것이 내 운명인 게지! 내가 언제 훗날을 생각하며 살아왔던가!

어디 한번 떨어질 테면 떨어져 보라지. 나는 그때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면 될 테니. 나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행복하게 잠식하며 갈 테니.



“아들.”


약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내 귓가에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이제 이 목소리가 누군지 모르겠다.


“아들, 뭐해?”

“…….”

“살기 싫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눈물이 고여서 들고 있던 약병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는 이것이 쾌락의 눈물인 줄 알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 허상을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팔에 덜덜덜 경련이 일어나서 인식하기가 힘들었다.


“왜 그래……”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다만 내 눈물은 도대체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한 번도 마약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건 악몽이 분명했다. 쾌감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이건 끔찍하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가 날 전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너는 살아야지…….”

“싫어요.”

“그래도……”

“싫다구요!”


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저만치 바닥엔 내가 공중에 띄워서 부숴버린 거울 파편이 있었다. 나는 이미 고쳐지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야금야금 죽어가던 나는, 이제 완전히 나의 양아버지를 저주하고 있었다. 날 왜 주워서 살려다 놓았나. 날 왜 글자를 아는 천치로 만들어 놓았나. 내게 왜 진즉에 살인을, 도둑질을 가르쳐주지 않았나.


“나도 데려가요.”

“…….”

“거긴 환장하게 편하죠? 네? 구름만 있죠!”

“…….”


나는 허공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비굴하게 내뺀 것이다. 나는 더더욱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처절하게 절규했다. 그때처럼 내 고개는 하늘로 처 들어져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라면서요, 살려달라고요! 아버지! 이 도둑놈아!”


그때처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약효가 떨어져서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더 들이켜 봐도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고문이었다. 잔인한 고문. 또다시 눈물이 시야를 희뿌옇게 가렸다. 이번엔 슬슬 기분 좋은 약발이 도는 듯 했다.


“난 죽고 싶지 않아요……”



*


흑색 장발의 청년이 밤늦도록 본부 집무실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실은 말로만 정리지 그는 서류를 낱낱이 파헤쳐 놓는 중이었다. 몇날 며칠을 단서를 찾아내는 데에만 몰두해왔다. 오늘은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겠다. 찾아내야만 한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마침내 원하는 서면이 나왔는지, 그는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마인드 리더의 지장과 서명이 찍혀있는 문서였다. 토씨도 빠뜨리지 않고 그것을 다 읽어낸 그는 갑작스레 그 종이를 구깃구깃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러곤 자신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렸다. 이 계약서에서 지목하는 그 ‘종신 계약’이라는 게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였다.


마인드 리더가 갑작스레 목을 매달아 자살을 했다고 언론이 신명나게 떠들어댔다. 그 푸른 머리의 악당도 예고도 없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정작 사령관님은 자신의 팀원들에게 아무 설명도 하질 않으셨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팀원들 중 단 한명도 사령관님이라든지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마인드 리더의 손목을 자르고 푸른 머리의 악당의 본모습을 알아버린 죄를 저지른 장본인은 달랐다.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사령관의 허락 없이 가져온 마스터키까지 사용해 가며 뒷조사를 계속해 나갔다. 그 노고를 치하하는 듯,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사건의 열쇠가 그의 손에 쥐어지고야 말았다. 그것은, 악당 157호의 종신 계약서였다. 157호라는 악당의 사진은 자신의 뇌리에 못 박듯 박히어 잊히지 않던 그 얼굴이었다.


이블 플랜이라 적힌 두꺼운 종이 뭉치는 어떤 대본이 빼곡히 적혀져 있었다. 대사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던 그는 그 자리에서 기절이라도 하고만 싶었다. 그 악당이 하루를 멀다하고 낭송해대던 말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상부에 제출하던 보고서들을 훑어보았다. 이제야 모든 일들이 잔인하도록 딱딱 들어맞았다.


이것이, 다 연극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대체 누구를 상대로 매일같이 싸우고 있었단 말인가! 우린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사람을 서걱서걱 썰어서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히어로 블루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던 이곳이 사실은 무대였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그의 이성은 보기 좋게 끊어지고야 말았다.



사령관과 그의 충직한 영웅들은 일을 끝마치고 마악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여기저기서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는 격려를 주거니 받거니 했고 모두 짐을 싸들고 있었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전례 없던 광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히어로 블루가 종이 뭉치를 한 아름 들고 와서는, 사령관의 앞에 던져버리듯 내려놓았다.

사령관은 얼이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블루가 소리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이냐. 어떻게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서 학대를 할 수가 있느냐. 이딴 거 다 때려 쳐라. 난 위선자 같은 영웅 노릇 이젠 그만 두겠다.


주변의 영웅들은 그의 속사포 같은 발언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령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문이 예고 없이 열리더니 불청객이 기어들어온 것이다. 그리고선 그는 꼬부라진 혀로 또박또박 말을 늘어놓았다.

그 장황하고 지루한 주정이 끝나고, 그는 그것의 결론을 짧은 구절로 압축했다.


“나를 잡아 가라구! 잡아 가!”

“진짜 미친놈이군. 여기가 어디라고 주사에 마약질인 겐가!”


사령관이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다른 영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싸하게 얼굴이 굳어버렸지만 그 불청객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젠장, 빨리 아니 잡아가? 니들 정말 실수 하는 거야. 내가 누구운줄 알아?”


검은 가면을 쓴 불청객은 주변의 관객들에게 비난하듯 손찌검을 해댔다. 그러곤, 주머니 안쪽에 손을 넣더니 번쩍 팔을 쳐들었다.


“나는, 마법사다!”


그 악당이 허공에 반짝이는 하얀 가루들을 계속 뿌려댔다. 그것은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이었다. 그는 공중에 마법의 가루들을 퍼트리곤 미치광이 과학자처럼 숨이 넘어갈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그동안 이런 미친놈이랑 승부를 벌였다니. 얘들아. 빨리 밖으로 끌어내자.”

“레드, 미안해. 난 못하겠어. 토할 것 같아.”

“나도. 저 악당 좀 치워.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너희들 왜 그래? 만날 상대하던 놈이잖아.”


영웅들은 저마다 저 악당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은근히 자신들의 지도자, 사령관이 명령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턱을 괴고 그 악당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자알 알아드을어? 내 마법 하나면 너넨 다 황천길이라고! 흐흐흐!”

“제기랄, 저 악당 빨리 치우라고! 안 들려?”


영웅 레드가 겁에 질려 소리쳤지만 정작 자신도 선뜻 나서진 못했다. 157호는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입에서 계속 뽑아내었다.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다들 조용히 해! 요것들, 요 잡것들! 귀찮은 것들, 이런 제기할! 으으응……”


그 악당은 그렇게 외치곤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들어 황홀한 표정으로 들이켰다. 그것은 들이킨다기보다 녹여내듯 빨아대는 것에 가까웠다. 연인과의 뜨거운 입맞춤이기도 하고 메마른 갈증에 들이키는 시원한 담수이기도 했다. 그는 또다시 거기서 머리부터 시작해 식도를 타고 온몸을 한꺼번에 장악하는 상쾌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에겐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환각에 절어서는 눈을 감고 입에 약을 집어넣는 그를, 그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표정은 똑같았다. 하지만 신중한 이라면 금방 그 굳어버린 표정에서 저마다 다른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는 표정들이었다.

사령관은 기가 차는 듯했고 나머지 영웅들은 두려워하거나 성가셔했다. 하지만 블루만은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되었는데.


보다 못한 블루가 한숨을 내쉬며 그 악당의 약병을 빼앗았다. 그리곤 그는 그 악당의 손을 잡고 회의실을 도망쳐 나왔다. 그 악당은 비틀거리며 억지로 끌려갔다. 복도에서 블루가 그 악당을 다그쳤다.


“왜 이러십니까. 대체 왜 그래요. 무엇이 불만입니까!”

“으응? 너는 날 믿지, 그치?”

“미안합니다.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이것 봐아라. 마법 사전이라고. 만물의 진리가 여기 있으어…….”


그 악당은 품속에서 이번엔 얇은 물리 서적을 펼쳐들어 주문을 외우는 마술사 흉내를 냈다. 블루는 그런 그를 감당할 수 없어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 악당이 정신 나간 얼굴로 웃어보였다.


“너에게 마법 걸어 줄까? 메카니즘! 으흐흐! 히히히!”


그 악당이 주머니에 또 손을 넣더니 블루에게 마약 가루를 마구 뿌려대기 시작했다. 블루는 코를 틀어막고 그 악당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그 악당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블루는 거기에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대책 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듯, 그 악당이 다짜고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파! 아프다고!”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놔! 아파! 너무 아파!”


그 악당이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블루는 괴로워하는 그 악당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블루의 표정도 점차 그 악당을 닮아가고 있었다. 블루가 도리질을 치며 물었다.


“제가 당신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네?”


그 악당은 꾸중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점차 흐느낌이 줄어들고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풀린 눈으로 눈앞의 블루를 쳐다보았다. 블루는 그 악당의 얼굴에서 아직도 일련의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듭니까?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 일은 못 본 걸로 해드릴 테니까 빨리……”

“나랑 놀러가자!”


블루의 얼굴에서 희망에 부푼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악당은 블루에게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바닥에 비릿한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쏟아지는 피가 멎질 않자, 그 악당은 블루에게서 약병을 다시 빼앗아 복용했다. 그리고 다시 각혈하기를 반복했다. 블루는 차마 그를 말리지도 못한 채 완전히 혼이 나가버렸다.


그때, 사령관도 복도에 들어섰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혈액을 게워내는 그 악당의 머리를 발로 찼다. 그 악당이 맥을 못 추리자 블루가 쓰러지지 않도록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사령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게 뭣 하는 짓이야! 미쳤다고 오냐오냐해주니 여기가 이젠 안방으로 보이는가! 바닥이 더러워지고 있잖나!”

“제가 금방 치우겠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가만 놔두시죠!”


블루가 그 악당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뒤편에서 퍼플이 걸어 나왔다.


“아뇨, 제가 치울게요. 물걸레질 몇 번이면 돼요. 그리고 블루, 넌 이 악당이나 빨리 치워줘.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잖아.”


몰려나온 다른 영웅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쓰레기장에 갖다버려.”

“공동묘지는 또 어떻고? 산 채로 묻어버려.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는데.”

“아무렴 어때. 여기 다신 못 찾아오게 해.”


블루는 힐난을 퍼붓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그 악당을 안고 본부를 나왔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 병원이 최선이라 생각한 그는 그 악당을 데리고 병원에 가 보았다. 의사는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블루가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하면…… 의사는 그런 블루에게, 일단은 그 악당이 마약부터 먹지 못하게 막으라고 처방을 내렸다.


그리곤 또 다른 병명을 죄다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피해망상에 자아분열, 과대망상증, 환각증상, 정신착란 등등. 이 악당의 이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의사가 혀를 끌끌 찼다. 나 참, 이 지경이 되도록 이 양반은 제 몸 하나 건사 못하고 뭐하셨답니까? 어디 앉아서 온종일 연구만 해댔답니까? 블루는 그런 그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알 것 없습니다. 정확한 진단,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하군요! 블루는 157호를 데리고 도움도 안 되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이리저리 그를 데리고 방황하던 블루는, 모든 방법이 먹히질 않자, 마침내는 최후의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다. 그 악당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고야 만 것이다. 블루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무력함도 있었겠지 만은, 사령관의 강요가 더 컸다.


157호는 가엾게도, 보통 사람들이 가는 정신 병원에는 가지 못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악당을 연약한 환자들과 붙여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악당이 갇힌 곳은 정신병원을 가장한 감옥이었다. 다만, 감옥과 다를 것이 있다면 그는 더는 탈옥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약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블루는 참혹한 꼴을 이제는 멀리서 구경만 해야 했다.


사령관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그 악당이 누워있는 병실에 면회를 오게 되었다. 신경안정제를 맞고 병실 구석의 침대에 쓰러져 잠든 악당이 있었다. 블루는 그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상한 것들이 눈에 띄어 그 악당의 파란 머리카락을 들추어내자 머릿속의 흉측한 몰골이 드러나게 되었다. 깨지고 멍들고 흉 지고, 심지어는 꿰맸던 자국까지 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대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블루가 울상을 지으며 속삭였다.


“제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군요.”

“…….”

“당신은 절 용서할 수 없을테고요…….”



한편, 사령관의 딸은 그녀 나름대로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사령관은 집에까지 찾아와 꼬치꼬치 캐묻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질 않았다. 그저 그를 놓아주었다고만 넌지시 내비칠 뿐이었다.


그녀가 따졌다. 놓아 주었다면서 왜 소식이 없는 거죠? 아무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대요, 단 한명도요! 사령관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는 이제 도망갔단다, 아가야! 어디로 도망쳤는지는 모를 일이지. 그녀가 반박했다. 아니요, 전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본부에 가서 퍼플 영웅님께 여쭈어 볼래요. 사령관은 불필요하게 고집이 센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리 알고 싶다니 말해주마. 그 작자는 미쳤다. 돌아버려서는 본부에서 행패를 부리 길래 정신병동에 보냈지. 그는 이미 현실로부터 도주했어. 네가 그를 구하기엔, 그는 일찍이 선을 넘었다고.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 말고 집 안에 얌전히 앉아 있거라.”

“아버지, 아버지. 이건 정말 아니에요. 정상인 사람을 병원에 가둬두는 것은 범죄라고요!”


사령관은 딸의 칭얼거림에 머리가 딱딱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만 고분고분하게 듣던 천사 같은 딸은, 언제부턴가 이상한 곳으로 빗나가고만 있었다. 참으로 갑갑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령관이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 회피하듯 말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구나.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그 파렴치한 악당 놈을 정신적으로 죽여 놓는 수가 있단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이루셨지요! 아버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영웅이에요!”


그녀는 그녀의 잔인한 아버지를 뒤로한 채, 문을 세게 닫고 그의 집을 벗어났다.



작가의말

※마약 과다 복용은 몸에 매우 해롭습니다

원래 남주가 먹는 약을 LSD로 잡고 썼는데
엘에스디는 중독성이 없을뿐더러
액체가 아니라 주로 흡착지의 형태로 복용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일부러 종류를 모호하게 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냥 모종의 마약이라고 치부해주시면 됩니다

10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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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7. 돌아온 작살-(1) +2 15.01.21 365 1 17쪽
35 6. 산(酸)-(2) +4 15.01.20 590 3 12쪽
34 6. 산(酸)-(1) 15.01.20 622 2 21쪽
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5 3 16쪽
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31 4. 위대한 군주는-(2) +2 15.01.18 463 3 11쪽
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29 3. 교수라는 직책-(2) +2 15.01.17 724 3 31쪽
28 3. 교수라는 직책-(1) 15.01.17 463 3 20쪽
27 2. 도둑과 양아버지-(4) 15.01.16 427 3 14쪽
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78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4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5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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