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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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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19
추천수 :
229
글자수 :
34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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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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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0. 일탈-(3)

DUMMY

*


내가 마약의 물결에서 어느 정도 헤어 나왔을 땐, 102호가 내 옆에 있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이젠 귀찮은 마음이 확 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도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히어로 블루도, 천사님도 저 마인드 리더란 자도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내 자신을 놓아버리고 나니 모든 것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젠 혼자서 저 심연까지 망가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아무도 이런 내 곁에 남아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아저씬 내 자유를 침해하고 있어요!”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불시에 일어서서 그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102호는 의자에 앉아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나는 내 몸을 망칠 자유가 있어요. 내가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든 신경 쓰지 말라고요! 우린 어차피 남남에 불과해요. 당신이 말했었죠. 내 인생은 당신의 인생이 아니라고.”


그가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그의 얼굴을 보며 얼마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럼 교수한텐 자신의 몸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거야? 자유만 있고?”

“그래! 나한텐, 없어요! 나한테서 찾지 말아요. 그건 사령관, 아니, 영웅들…… 아니 세상의 책임이라고요!”


나는 점점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미쳐가고 있었다. 그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내 병명에 대한 진단을 내렸다. 그것은 히어로 블루가 내게 간곡하게 권하던 그것이기도 했다.


“이런 말하기 정말 미안한데, 교수는 미쳤어. 비꼬는 게 아니라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상담을 좀 받아봤으면 좋겠어.”

“내가요? 내가 왜 미쳐요? 맞아요, 난 미쳤어요! 날 때부터 미쳤다고요. 미쳤다고 이런 세상에 태어났지! 흐흐흐!”

“제발 그런 식으로 웃지 마!”


그가 공포로 얼룩진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신이 나서 환희를 담은 소리를 내질렀다. 어째 내가, 그가, 고통스러워 할 때마다 나 자신은 점점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 거울 파편들이 내 일부가 된다는 것만큼 즐거운 희열이었다.


“이제 나가세요. 아저씨 도움 따윈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이 싫다고요!”

“너 대체 왜 그래……”

“나가요. 나가라고요!”


나는 기어이 그를 문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도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 귓가에 내 목소리와 비슷한 환청이 들려왔다. 배신자, 배신자, 이 배신자! 나는 몸을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죽고 싶었다.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횡포에 나는 비명을 질렀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쫓겨나버린 셈이었다.


완전히 혼자가 된 뒤에도 내 생활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없었다. 악당 157호는 아직까지는 마을에서 악명 높은 악당이었다. 평소대로, 영웅들에게 맞기 전에도 약을 했고 맞고 나서도 약을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약의 종류였다. 약의 강도를 조금 높였을 뿐인데 나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이야말로 내 곁에 있어주어야 할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주변의 비아냥거림마저도 완벽하게 차단시켜주었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었다. 나의 친절한 친구들은 쇠 작대기마저도 요술 봉으로 바꾸어주는 신기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항상 즐거움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떠나면 나는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구역질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내 몸속에서 어떤 액체가 역류하는 것이다.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것의 정체를 규명해보면, 그것의 열의 아홉은 비릿한 혈액이었다.

피가 몸속에서 조금 깎여나가는 것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질 없었다. 문제는, 내가 그 짓을 매일같이 해댄다는 것이다. 자다가 몸을 일으켰을 때 온 세상이 돌았고 몇 주간 반복되자 나는 서있기만 해도 어지럽게 되었다.


한동안 이런 삶이 반복되었고 내 몸은 이제 더는 망가질 수 없을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 나는 마약을 시작한 뒤로 거울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나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며 자살을 결심했다.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엔 자신은 너무 멀리 와버렸고, 돌아갈 의지가 있다고 한들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자살할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선택한 것은 목을 매다는 것이었다. 그 편이 제일 간단하고 덜 고통스럽게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살을 하는 데엔 마약이 일절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조금의 의지만 있으면 되었다. 천장에다 밧줄을 매달고 내 목에다가 그것을 씌우려던 참이었다. 난데없이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내 범죄 행위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몰염치하게 다시 내 집에 발을 들인 것이다. 나는 그가 멋대로 들어오자마자 내 발을 지탱해주던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이 미친놈아! 마약도 모자라서 이젠 자살이냐? 대체 넌 너를 얼마나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한 건데!”


나는 그의 꾸지람을 귓등으로도 듣질 않고 밧줄에 쏠려 쓰라린 목 언저리만 문질렀다. 내가 의자를 발로 차자마자 그가 달려들어 기를 쓰고 나를 구하고 만 것이다. 나는 고맙기는커녕 그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완벽한 계획을 망쳐버린 꼴이 아니던가. 나는 되레 적반하장으로 그에게 대들었다.


“당신은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듣질 않는군요. 제가 자살할 줄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죠?”


그러자 그가 내 따귀를 때렸다. 그것의 강도만으로도 정신 차리라고 때린 것이 아니라 미워서 때린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고개가 보기 좋게 돌아갔다. 그걸로 만족할 성싶지 않았는지 그가 내 멱살을 움켜쥐어 벽에 세게 밀어붙였다.


“그럼 내가 교수가 하는 꼴을 보고서도 짐작 못 할 줄 알았어? 그래, 매일 찾아왔어. 언제 직접 목을 매다나 궁금해서. 그리고 교수는 고맙게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말이야! 진짜 살인자가 되고 싶어서 그래? 자살도 살인이야! 그것도 제일 저급한 살인이라고! 알고는 있어?”


그의 말은 내 심금을 울리기에 아주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 그저 그의 눈만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이제 그의 말 따위는 귀에 걸리지 조차 않았다. 102호는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내 발을 동동 구르며 내게 애원했다.


“내가 교수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응? 대체 뭣 때문에 그래…….”

“아저씨. 저 이제 이런 짓 못 하겠어요……. 그냥 깨끗하게 죽고 싶어요. 죽으면 훨씬 편해질 거예요.”


나는 그에게 내 진심이 똑바로 전달되도록 천천히 말했다. 이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결심이 섰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아예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내니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듯이, 나는 나의 죽음을 그에게 예고했다. 그러자 그가 더욱 겁을 먹었다.


“교수가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라!”

“난 분명 천국에 갈 수 있을 거예요. 현실보다 지옥인 곳은 없어요.”

“아, 안 돼. 죽지 마. 네가 죽으면 난…… 제길……. 내 말은…… 교수는 정말 이기적이라고! 이 악당아!”


그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당황해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는 그에겐 절대 어울리지 않는 복잡스런 감정에 자신의 이성을 일체 일임하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그라면 절대 내뱉지 않았을 말을 입 밖에 냈다. 우리, 도망가자. 다른 곳으로. 그래, 도망치는 거야. 그는 그렇게 백기를 들고선 어둠 속에 혼자 내버려진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분명히 다른 세상이 있을 거야. 우리도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영웅들도 없고 악당들도 없는……. 그래. 친구야. 너는 내 친구지, 그렇지? 나랑 같이 도망가자. 다른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거야. 다른 세상에서. 판타지 세계에서…….”


지나치게 현실적이던 사람이 왜 이런 허황된 소리를 하는 건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곳은 없어요. 악당들이 행복해질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요. 아저씨께서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신 거고요.”

“아니야, 아니야. 분명히 있어! 가자! 지금 가!”


102호는 내 손을 잡곤 미친 사람처럼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잃은 인도자처럼 뒤도 안돌아보고 걸어갔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천하의 마인드 리더가 대체 왜 이렇게 겁을 낸단 말인가. 이것이 가면을 벗은 그의 본모습이란 말인가. 유머와 위트에 가려진 외로운 악당이 바로 마인드 리더였던가…….



그의 빠른 발걸음은 외진 숲으로 귀착했다. 그 숲은 언젠가 나와 그가 탈옥했을 때 한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집을 소개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내 친구가 죽기 전으로. 너는 하얀 괴도가 죽기 전으로.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아무 죄책감도 갖지 말고…….”


102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두려운 적을 만난 것처럼 심하게 덜덜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비굴한 모습까지 구경한 후에야 무언가 머릿속에 아차하고 떠올랐다.

아! 왜 몰랐던가. 그는 친구인 나를 잃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는 필시 그 먼저 죽었다던, 나와 똑같이 생겼다던 그 친구를 마음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아버지께서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고 내게 털어놓지 않았었나.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와 똑같은 선택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나는 얼마나 그에게 잔인하고 비겁하게 굴었던가! 찾아오지 말라던 그를 기어코 찾아와서는 친구 취급까지 하게 만들어놓고서는 이젠 배신하고 나 혼자 도망치려 하지 않았는가.


“왜 이렇게 춥지. 그래, 불을 한번 지펴보는 게 어떨까? 불을……”

“아저씨.”


그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는 걸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불을 지필 수 있을 거야. 내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정말로……”

“잘못했어요…….”


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가 모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모두 떨궈버렸다. 그리고 그도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자살하지 마. 나랑 약속해.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나는 그가 입술을 달달 떨며 내게 애걸복걸 비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염산을 맞은 것처럼 괴로움만이 그득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내가 꼭 행복하게 해줄게. 하루하루 웃을 수 있게 만들어줄게. 반드시 그렇게 해줄게…….”



나 자신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론, 나는 감옥 대신 102호의 집에 갇혀 살게 되었다. 사실, 내가 나가고 싶으면 있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으니 그것은 얹혀사는 신세라고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내게 빌고 빌어서 내가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


공짜로 얻은 셋방에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지만, 일단, 내가 마약을 일절 입에 대지 않게 된 점에 있어서는 굉장히 반길 만한 일이었다. 진통제조차도 먹질 못했다. 한 알이라도 손을 댔다간 그가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는 내가 다쳐오면 손수 치료를 해주곤 했다.

어쩌면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여길 떠나지 못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도 항상 내가 맞고 오면 머리에, 마음에 붕대를 감아주곤 하셨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기뻐한 것은 다름 아닌 102호 쪽이었다. 죽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살고 싶었던 그에게는 아직까지는 내가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집주인답지 않게 항상 내 눈치를 보면서 지냈다. 더는 내게 조언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비꼬는 말투 또한 말끔히 고쳐내는 경이를 보여주었으니까. 그는, 이전의 마인드 리더가 그리워질 정도로 부담스럽게, 나를 상냥하게만 대하고 있었다.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외출을 하고 와서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으며 크나큰 영광을 안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이제 악당 짓을 그만 둘 수 있다고 말하면서. 너는 이제 자유야,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지 못해 그를 따라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던 것의 계기가 말이다. 그는 전보다 자주 담배를 빼물었고 혼자 있는 시간도 급격히 증가해만 갔다. 밥도 먹으라고 해도 안 먹더니 잠도 자질 않았다. 그의 얼굴에 항상 피로가 열꽃처럼 피어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이상하리만큼 밝은 모습을 보였다. 참으로 의심 가는 행색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가 무슨 사고를 저질렀는지 별로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겉으로 어떻게든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가 벌인 대형 참사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방구석 생활을 한지 이주일쯤 지나서였다. 내가 자료를 찾기 위해 그의 서랍을 뒤지다가 발견한 종이 몇 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 옆엔 미상의 알약들이 작은 봉지에 잘 포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보약이라도 챙겨먹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종이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는 그것이 보약이 아니라 독약임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종이는, 계약서였다. 분명 사령관이란 작자와 계약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대충 이런 것이었다. 어느 기한을 줄 테니 그때까지 약을 먹고 죽어라. 그러면 악당 157호의 종신 계약을 풀어주고 차후에도 손을 떼겠다.

정신 나간 내용을 담고 있는 계약서의 약관 동의 란에는, 원망스럽게도 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내 손에 들린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뻔 했다. 적어도, 그가 공교롭게도 그 시각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그래버렸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대신 그 종이를 구겨버렸다.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나보곤 죽지 마네 어쩌네 하면서 뒷골목으로 빼고 계셨겠다. 그가 허둥지둥 같잖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난 순전히 너를 위해서 먹으려 했던 거야. 너처럼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령관, 그 빌어먹을 녀석이 계약을 뒤탈 없이 해지시켜 주겠다잖아. 그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어?”

“누가 그딴 걸 해달라고 그랬죠? 그놈의 ‘나’를 위해!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죠. 당신마저 이런 얼간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리고 이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같은 악당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 나 하나가 죽으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어. 너를 포함해서!”


그가 한 손으로 종이를 빼앗으려 들었지만 내가 잽싸게 피해버렸다.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담 당신의 목숨이 그 누군 줄도 모르는 다수의 목숨보다 하찮다는 말이군요.”

“내 목숨이 다른 악당들 목숨보다 가볍다는 말은 아니야.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봐. 하나를 살린다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어. 어쩌면 그 하나조차도 사라져버릴 지도 모르지. 이게 애초에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교수는?”

“아뇨, 근본적으로 그 논리는 틀렸어요. 애초에 당신은 지금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어요. 계약이 풀리고 내가 자유의 몸이 되면요? 그 다음에는요? 내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악당들을 다 구할 수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동화 속 영웅이 아니고, 당신이 꿈꾸는 그런 악당도 아니에요. 나는, 그저 속물일 뿐이라고요!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요. 제발 나에 대한 환상을 버리세요. 나는 다방면에서 능수능란한 천재가 아니에요. 그저 수식 몇 개 더 끼적일 줄 아는 게 그리 대단한 일인 줄 아세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내게 반문해왔다.


“왜? 왜 네가 못할 거라 생각하는데? 이유가 뭐야! 왜 너 자신을 믿지를 못해?”

“왜냐하면 아저씨께서 하지 못하셨으니까요!” 나도 질 순 없었다. “내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책임 지우려 하지 마세요. 나는 그저 이대로 살다가 죽을 테니까요! 당신도 두려우면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 때려치우고 멀리 도망이나 가세요. 무인도 같은 곳으로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나는 그렇게 답답하고 치사하게 답변하면서 한편으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제발 그가 이 짓을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나는 무심코 그의 잘린 오른손을 보곤 다시금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에겐 없는 오른쪽 손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정말, 투쟁의 길은 저 사람이 짊어져야만 하는 몫인가? 정말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던가? 악당 속에서 어느 구원자가, 영웅이 나타나길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평생?


“이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야. 왜냐고? 난 악당이니까. 악당은 패배할지언정 포기를 모르지. 난 몇 십 년을 방황하면서 찾아다녔어. 내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래, 그 속에는 실로 도주도 있었어. 자살도 있었지. 하지만 곧, 그런 소극적인 해결책으로는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어. 이딴 멍청한 반항으로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아.”

“참으로 명답이로군요. 나도 진즉에 그 답을 찾았으니까요. 그러니 이 염병할 세상에서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거고요.”


내 비아냥거림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훈계하기 시작했다.


“내 말 끝까지 들어. 멀쩡히 살아가는 것 또한 시위가 아니야! 그건 초라한 패배이자 타협이지. 영웅이든 악당이든, 다음 한 수를 준비해놓지 않으면 백날 패배나 하고 앉아있게 되고 말아. 우리가 왜 항상 원하지도 않는 결말을 따라야 하고, 따를 수밖에 없게 되는 거지? 힘이 없어? 머릿수가 부족해? 천만에! 우린 영웅들 뒷바라지하는 들러리가 아니야. 우리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어!”


그의 장황한 연설을 들은 나는 또다시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그 갈등이란 것은, 개인이냐 단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그가 죽는 걸 그만두게 할까라는 문제였다. 동족의 운명이 어찌되었든, 나는 그의 자살을 막고 싶은데, 내게는 그 방법이 없었다.

동기야 숭고한 희생이던 괴로움의 몸부림이던. 어찌되었건, 어차피 그가 죽는다는 것, 그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른 손에 들린 약봉지를 꽉 움켜쥐면서 망설였다. 이것들을 내가 대신 한꺼번에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이 위아래로 경기를 일으키며 달달 흔들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나는 그것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는 억눌러왔던 소리를 터뜨렸다.


“아저씬 정말 이기적이에요! 이 배신자야!”


그리고 나는 도망치듯이 그의 집을 나와 버렸다.


작가의말

※마약 과다 복용은 몸에 매우 해롭습니다

 

이번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일탈을 감행합니다

영웅이건 악당이건 상관없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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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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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80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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