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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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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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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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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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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8. 엄동-(1)

DUMMY

“살려줘, 악당이다! 악당이 나타났다!”


묘령의 여인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계기로, 가면을 쓴 영웅들이 떼를 지어 등장한다. 그 여인이 거무튀튀한 실루엣을 가리키며 울상을 짓는다. 모든 영웅들이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본다. 검은 가면을 쓴 검은 코트의 악당이 모두의 이목을 끌며, 웃는다.


“하하하!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내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악당이 이렇게 수다스럽게 허세를 부리면 영웅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든다. 악당은 재간을 부려 잠시 동안 그들을 속인다. 뒤에서 공격하며 함정을 파놓곤 인질들을 납치한다. 물론 영웅들을 조롱하는 대사도 잊지 않는다. 민간인들은 악당의 횡포에 크나큰 혼란에 빠진다. 악당은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며 사악하게, 웃는다.


“사악하고 파렴치한 악당! 네놈이 선량한 시민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다.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각오해라!”


그러나 영웅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악의 축을 때려잡는다. 악당은 처음에 승기를 잡는 것 같으면서도 나중엔 처참히 부서진다. 인질들은 풀려나고 자신들을 구해준 영웅들을 찬양한다. 그러면 영웅들은 기절한 악당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 악당이 어디로 이송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경조차 쓰질 않는다. 어떤 응징을 당하는지 알게 무언가. 악당은, 어차피, 언젠간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다량의 택배를 받은 것은 영웅들이 내 집에서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밀 연구는 바로 중단되었고 이제부터 내 유일한 생계는 이 염병할 악당 노릇뿐이었다.

혁명의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던 그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악당으로 나 자신을 치장해야만 했다. 낡은 택배 상자에는 검은 쥐스토코르(justaucorps) 두 벌과 흰 크라밧(Cravat)이 몇 장 들어 있었다. 딴에는 나를 옛날 귀족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나본데, 내가 입으니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런 낯선 복장은 민간인들에게 이질감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검은 연극용 가면을 쓰니 영락없는 광대가 된 것만 같았다. 겉으로는 화려한 의상 선물일진 몰라도 내겐 수갑이나 다름없었다. 두꺼운 대본을 들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본을 외워오는 것은 그다지 큰 부담이 되질 않았다. 오점은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에 있었다. 나는 이미 영웅들에게 패배할 대로 패배한 것이다. 이런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해봤자 괴로운 것은 나뿐일 게 뻔했다.


거울을 보며 과장된 대사를 읊어보았다. 지시문에 나와 있듯이 손짓과 몸짓도 적절히 섞어야만 했다. 이런 짓을 하는 내 자신이 그렇게나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거울 속의 나는 끊임없이 다음 대사를 읊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입이 열 개라도 내게 할 말이 없었다. 가면 너머로 회색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상대역의 눈빛에 주눅이 늘었다. 나는 그만 거울에서 시선을 떼버렸다. 나 자신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내일이란 것이 오고야 말았다. 광장에 나가기 몇 시간 전, 나는 천사님의 집에 들렀다.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이젠 난 102호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꼴이 되었지 않나. 나는 그녀의 집 문고리에다 그녀가 준 흰 목도리를 묶어놓았다.

나는 결국 엄동을 이겨내지 못했다. 더는 이것을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치졸한 악당일 뿐이었다. 미안해요, 문 앞에서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들을 리는 없었다.


돌아온 목도리를 본다면 앞으로 나를 찾지 않겠지. 오히려 더 잘 된 일이었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며 슬퍼할 일은 이제 없지 않은가. 문고리를 꼭 잡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애쓰는 목도리를 뒤로하고 나는 유유히 광장으로 향했다.

내 아버지를 진짜 악당이자 살인자로 만든 그 광장 말이다. 민간인들을 겁주고 영웅에게 응징당하는 새로운 악당이 되기 위해,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려 애쓰고 있었다.



“으윽, 두고 보자! 나는 반드시 이 세상을 지배할 거야. 나는 내일 또다시 네 앞에 나타날 거야.”

“그 정도 했으면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을 텐데? 나도 끝까지 네 야망을 막고야 말겠다!”


정오에 광장에서 벌어진 작은 연극은 그럭저럭 잘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영웅의 일격에 맞아 바닥에 쓰려졌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제 오늘 분량은 여기가 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내게 배당된 대사와 지시문은 이것으로 끝인데, 나는 아직 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기어갔다. 하지만 숙달되지 않은 삼류 악당에겐 도망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내 앞길이 영웅의 다리가 가로막히고 나는 들어 올려졌다. 그리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조용히 끌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감방에 끌고 가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사령관, 그 작자는 알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끌려가야 할 곳은 감옥 말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손을 포박당한 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방향은 짐작컨대 본부로 가는 길이었다. 나를 본부에 데려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떠올리곤 작게 신음을 흘렸다. 대체 내가 사령관과 무슨 척을 졌기에 계속해서 그를 보는가 싶었다.



“어때, 옷은 마음에 드나? 너무 크지는 않고?”


영웅들이 나를 내팽개치듯 집무실에 던져놓곤 우르르 빠져나갔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머리를 숙였다. 이젠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고용인 대 피고용인의 구도였다.

더는 반항한답시고 사령관의 얼굴을 노려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해고당하면 난 그대로 영구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 없는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겐가? 얼굴 펴고 입 열어. 앞으로 지겹도록 보고 살아야 할 사이인데.”

“당신…… 아니, 사령관 각하께서 원하는 대로 되어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이젠 제 모습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같잖은 소리라는 듯 그가 코웃음을 쳤다.


“말은 가려서 하는 것이 자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야. 내가 자네를 여기까지 찾아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실적 문제 때문인데……”


그는, 그렇게 소름끼치도록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쇠 작대기였다. 영웅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던 바로 그 곤봉이었다. 그가 무기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위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위협적인 모습에 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댈 뿐이었다. 그가 작대기의 끝부분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상부에서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령이 내려왔거든. 그런데 이런 멀쩡한 모습으로는 인정을 해 주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다면 애초에 왜 절 멀쩡하게……”

“언제까지 멍청하게 굴 생각이지? 영웅들이 밖에서 자넬 반쯤 죽여 놓으면 구경꾼들의 비위가 어떻겠나? 걱정은 하지 마. 몇 대만 맞으면 끝나는 일이니까.”


드디어는 그가 작대기를 꽉 움켜쥐더니 그것을 휘둘러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하면서 얼마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악당을 때려잡는데 도가 텄는지, 작대기는 계속하여 같은 곳만 가격했다. 몇 차례 얻어맞은 뒤로는 머리는 터질 대로 터져 있었다.

얼굴 주위로 뜨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어느 곳에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섣불리 기절해서는 안 되었다. 내려가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들어 매 봤지만 소용없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가 혼절하는 그 순간까지 그 어떤 조롱의 말도 지껄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때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이와 같은 절차가 몇 번 반복되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몸소 이 게임의 규칙을 터득하게 되었다. 도망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역량이었다. 영웅이 악당을 쓰러뜨리고, 민간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순간 악당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행여나 도망치다가 잡히거나 하는 날엔 어김없이 사령관 앞으로 불려갔다. 사령관은 나를 죽도록 때리곤 그걸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실적을 올렸다. 도망치는 데 성공한 나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는 것은 내게 암묵적으로 살아나갈 숨구멍을 트여준 것이었다. 이걸 깨닫기까지 나는 수없이 머리며 팔다리를 얻어맞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사령관이 배려심 많은 성인군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여러 규모의 영웅들을 상대했다. 적게는 두 명에서부터 많게는 일곱 명까지 한꺼번에 내게 덤벼들었다. 그나마 두세 명의 영웅을 상대할 때는 도망칠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다. 머릿수가 적으니 나도 그만큼 덜 맞았기에 재빨리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 명 이상의 영웅들이 출동하는 때가 다반사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본부로 끌려들어갔다. 아무리 약하게 친다고 한들 때리는 자가 많아진다면 제때 정신을 차리기가 꽤나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엔 대부분은 도망치다가 기절하거나 잡히기 마련이었다.


사령관은 내게 이런 쓸데없는 희망을 안겨줄 정도로 잔인한 자였다. 나는 본부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나를 악당으로 만든 그를 원망했다. 그리고 그의 수법에 걸려들은 나 자신도 원망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나는 실업자로 살아가더라도 계약을 파기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러한 나의 퇴로마저도 철저하게 막아 놓았다. 그가 강압적으로 나를 협박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연극을 해온 지 한 달이 지나고 첫 월급을 받던 날이었다. 그 날도 나는 본부에 끌려가 신나게 두들겨 맞고 널브러져 있었다. 사령관이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에 흰 봉투를 쥐어주었다. 반강제로 맺어진 계약이므로 나는 처음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봉투를 열어 현금을 한 장 한 장 세어나갈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액수에 나는 손을 덜덜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악당이 감히 만져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나는 현금을 받아본 뒤론 생각을 고쳐먹었다. 밤낮 새워가며 밀 연구를 했을 때 받았던 돈 하곤 비교가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병원비와 약값도 그쪽에서 대준다니 그런 쪽으로 나가는 돈도 없을 터였다. 자괴감이 들게 만드는 봉투였다. 진작 이 짓을 했더라면이란 후회까진 들지 않았지만, 노력한 만큼 대가가 따라주지 않는 불공평한 세상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작가의말

타사이트에서 중요한 질문 들어와서 올려봅니다

 

Q : 초대 영웅인 영웅 1호는 무슨 생각으로 '악당'을 만든 거죠?

A : 초대영웅의 특징(히어로편 1-(2)화에 나와있죠)을 보시면 사실 ‘리바이어던’ 즉, ‘국가’를 비유한 것입니다.
초대영웅은 시민들이 영웅들(권력자층)을 영원히 필요로 할 수 있도록 악당이란 존재(보이는 위협)를 만들지요.
정작 실제 일어나는 범죄(실제 위협)는 해결하지도 못하면서요.


장르를 ‘현대’판타지로 정한 이유도 이러한 현실성을 띈다는 점에서 있습니다.

현대에서 자살하고 회귀해서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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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8. 엄동-(2) +1 15.01.22 421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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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5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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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78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4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5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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