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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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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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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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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9. 그 악당-(3)

DUMMY

나는 순간 그가 절대 동의하지 않겠다는 항변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팽팽한 긴장의 공기가 감돌았다.

세간 사람들은 그가 아주 흉측한 몰골을 했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어쩌면 그의 마음씨까지도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오해의 실타래를 풀고만 싶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데도, 나 하나만은 그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 얼굴에 손을 댈 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나는 그의 얼굴로부터 그 연극용 가면을 조심스럽게 때어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말이라도 조폭 같은 인상을 기대했던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짙은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험한 일 하는 악당이 아니라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귀공자의 상이었다. 더구나, 그의 눈매는 아무도 해치지 못할 것처럼 순해보였다. 물론 그는 생긴 대로 행동하고 있었고 말이다.

꿈에서 깨면서 잊혔던 그의 맨얼굴이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난 뼈저린 고통을 느꼈다. 죄책감이었다. 나는 그동안 이런 사람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착한 눈으로 죄인인 내 상판대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주시죠. 내 생김새가 당신을 불쾌하게 했다면 죄송하군요.”


그는 내가 어물쩍게 들고 있는 가면에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얼굴에 자신감을 조금도 가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철판때기 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큰 화상이라도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잘생기셨어요.”

“빈말은 됐습니다. 난 그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 봅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도저히 악당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이지 않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따지고 있었다. 왜 이런 얼굴을 하고선 악당이나 하고 있냐는 억지였다.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며 가면에 뻗던 손길을 거뒀다.


“그래요. 범죄자하고나 어울리는 얼굴이겠지요.”

“아니오, 귀공자 상이시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귀족이요.”


내가 그의 무릎에 가면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가 가면을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맞습니다. 고생은 나를 입양한 양아버지께서 하셨죠. 나는 지금 그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는 겁니다.”

“이게요? 이게 무슨 죗값입니까? 이건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겁니다!”


그 말을 줄곧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그가 눈을 번뜩였다. 그리곤 어김없이 자기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태도를 취했다.


“맞습니다. 난 이미 범죄자입니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 모두에게 죄를 지었죠.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자, 그럼 그 파렴치한 죄인을 당신이 심판해주시는 건 어떠합니까? 사형감입니까? 그런 거라면 당신의 손으로 내 목을 세게 조여 죽여 보십시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

“진짜 미쳤군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피해망상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상담을 좀 받아 보시던 가요!”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꿈속에서 보았던 그의 미소를 볼 수가 있었다. 그 오만하고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조금은 수줍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내겐 도발적인 교태(驕態)나 다름없었다. 그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순수한 회색 눈을 휘며 웃는 미소라 더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의 수법에 휘말린 나는, 순간 저 악당을 내가 직접 교수형에 처하면 어떨까라는 정신 나간 충동이 일었다. 나는 공격적으로 그의 무릎 위의 가면을 식탁 위에 내동댕이쳐 버리곤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여기에서 보였던 그 어떤 태도보다 무례한 행동이었건만 그는 자신의 목을 조르려는 내 만행을, 그 착한 눈으로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죽고 싶어서 환장하는 사람 같았다.


“나를 죽일 겁니까?”


그는 진짜 죽여 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의 맨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채 그의 목이 들린 내 두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나가버렸던 이성이 다시 찬찬히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두 손을 떨었다.


“저는…… 못 합니다…….”


나는 수전증 환자마냥 가늘게 손을 떨었다. 그의 뒷목에서 맥박이 가늘게 팔딱팔딱 뛰는 것이, 내 손가락에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일정하게 뛰는 것이 하도 징그러웠는지, 나는 그만 힘없이 그의 목을 놓아버렸다.


“다른 영웅들은 몰라도, 저는 못한다고요.”

“내가 악당이 될 인물이 아니라 하셨습니까? 내가 보기에도 당신은 영웅 자격 없습니다. 이런 평범한 악당을 죽일 기회를 손수 날려버리다니요.”

“하지만…… 전 당신이 이런 모습을 보일 지는 상상조차 해보질 못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런 악당이 아니 덥니까? 적어도 제가 당신과 영웅 대 악당으로 싸울 때는 그랬습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까?”


내 진심어린 변명에 그가 과분한 호의를 받은 사람처럼 손사래를 쳤다.


“아뇨, 이해합니다. 당신은 분명 이런 모습을 기대하셨겠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 위에 발을 딛고 올라갔다. 한 손으로는 식탁 위에 내가 던져놓았던 가면을 얼굴에 다시 끼워 맞췄다. 그 모습은 마치, 무대 위를 비장하게 오르는 연극배우와도 같았다. 그가 내 귀에 익숙한 어투로 외쳤다.


“하하하! 사악하고 끔찍한 악당의 기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히어로 블루!”


그것은,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그에게서 들었어야만 했던 대사였다. 나는 재주를 넘는 동물을 보는 관중들처럼 정신없이 그 구경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머지않아 소파에서 무대 내려오듯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쓰고 있던 가면도 벗어 재꼈다.


“넌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어.”


그의 협박이 두려웠는지, 이것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이 두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손을 수전증 환자마냥 덜덜 떨기 시작했다.


“유치하군요…….”

“나는 내가 진작 가면을 쓰고 영웅들에 맞서 싸우는 악당이 되질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손바닥만 한 가면으로 얼굴만 가리는 게 아니라 몸도 가리고 나 자신도 가리는 겁니다. 완벽히요!”


그가 대단한 발견을 한 과학자처럼 흥분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광기였다. 그 악당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신기하다고요? 가면을 쓰면 누구나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당신네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맨 정신으로는 상상도 못할, 아주 다른 인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역할극처럼요.”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절규하듯 외쳤다. 내가 괴로워하자 그 악당은 더욱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더한 일이지요. 나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히어로 블루!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죄책감도, 자괴감도 없이 엄청난 일들을 저지를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파괴하고! 히어로 블루, 히어로 화이트, 아니, 히어로즈! 나는 악당입니다. 당신들의 영원한 적이지요. 그래요. 이게 바로 나인 겁니다. 범법자, 변절자, 살인마!”


나는 참말로 그가 아직도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의 연극이 절정에 치달았는지 그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자, 이젠. 이젠 어쩌실 겁니까? 이젠 나를 죽일 마음이 생겼습니까? 이건 당신이 할, 아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는 결국엔 당신네들 손 안에서 죽어갈 운명입니다.”

“아니요! 싫습니다! 당신은 심판받아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악당이라는 걸 제가 아주 잘 압니다. 당신이 어딜 봐서 살인마라는 겁니까?”


그의 끊임없는 자기 비하적 발언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내 반박이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요? 천만에요! 나는 내 손으로 사람도 죽여 봤습니다. 당신도 매체에서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요? 묻겠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어 본 적이 있습니까? 또, 그 사람이 당신을 노려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은요? 물론 이런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더러 직접 소중한 이를 죽여보란 소리는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나를 알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주 가치 없는 일은 아니겠지요.”


그의 이야기라면 신문에서 얼핏 보았던 적이 있었다. 신문 1면에 양아버지를 죽였다고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하지만 직접 죽였다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다고 내게 털어놓을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곧 정신을 차지고 말을 이었다.


“모른다고 쳐 둡시다. 모르니까 묻겠습니다. 전 당신이 왜 그런 악당 짓을 하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명령대로 당신과 싸우는 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고요. 그걸 알기 위해서 여기로 찾아온 겁니다.”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대체 왜 하시는지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군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지만 나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라리 아까 내 손에서 죽어가고 싶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건 대답이 아닙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경쟁심 때문입니까? 아님 정복욕? 한 번이라도 영웅들을 이겨보고 싶다, 뭐 이런 열망 때문입니까?”


내 추측이 모두 답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당신들을 이기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진즉에 그랬을 겁니다. 더럽고 치사한 방법을 쓰더라도 승리는 승리이니까요. 그냥 이렇게 생각해 두십시오. 나는 맞는 걸 좋아한다고.”

“헛소리 집어치워. 난 너의 가면을 반드시 벗겨낼 거야. 절대로 네 뜻대로 돌아가게 놔두지 않겠어.”


나는 그가 끝까지 변죽을 울리는 것에 미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나는 또다시 그의 암묵적인 도발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내가 그의 멱살을 추켜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내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눈에 자신의 순한 눈을 똑바로 맞추고 노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신이 차갑게 돌아오자 나는 내 무례한 행동에 깜짝 놀라 그를 놓아버렸다. 더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나와 언쟁을 벌인 거라면, 이번에는 기어코 그가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준다니 감사하군요.”


그가 얼굴에 냉소를 올렸다. 이긴 것이 그리도 좋은 걸까. 나를 완전히 깔보는 듯한 표정에 나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몸에 배어있는 그 예의바름은 그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그는 현관문까지 날 배웅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해줄 인사말을 또다시 모색해 봤지만 이번에도 적절한 대안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주셨으면 합니다. 난 내일 또다시 당신의 발치에서 굴러야 할 겁니다.”

“제가…… 당신을 구해줄 방법은 없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하고 싶어서 악당 노릇을 하는 거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협박을 받고 있거나 이러면 저한테 도움을 청하세요. 영웅이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마지막까지 그에게 간청했지만 그는 귀를 아예 닫아버린 듯 했다. 이어서 문 또한 내 앞에서 매정히 닫혔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차마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지도 못한 채, 닫혀버린 문 앞에서 얼마간 서 있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그의 인적사항을 한 손을 넣어 구겨버렸다.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영웅이 악당을 구하겠다고 싹싹 빌다니. 더구나 애써 구해주겠다고 자비를 가장한 허세를 부려놓곤 그 악당에게 거절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다른 팀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날 두고두고 비웃을 것이다.


그때, 주머니 속의 발신기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또 출동인가 생각했지만 그건 레드의 호출에 그쳤다. 젠장 맞을 월말 회식에 오란다. 오늘은 왜 이렇게 모일 일이 많은 건지. 하지만 난 정말 오늘만큼은 그 알록달록한 팀원들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 현란한 유니폼을 또 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현기증이 일었다. 그 악당을 만난 뒤여서 그렇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맞긴 맞다.


땡땡이나 쳐 볼까―나는 잠시 꾀병을 부릴까도 생각해봤다. 아니, 안되겠다. 회의도 멋대로 피해갔는데 여기까지 빠지면 나중에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장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집합 장소는 따뜻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사실 매달마다 가는 그 식당이었지만 그 악당의 거처에 다녀온 뒤라 더욱 더 고급스러움이 부각되는 것만 같았다. 전에는 은근히 이런 분위기에 들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나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안락한 의자들은 내겐 가시방석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물맛마저 들척지근하게 느껴졌다. 퍼플 선배가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켕기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모두가 모이자 사령관님이 축사를 올리셨다. 귀담아듣는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난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그의 연설이 막바지에 이르자 작은 일이 터져버렸다.


“난 너희가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럽다. 너희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걸. 내 자식은 너희뿐이란다.”

“어? 하지만 사령관님께선 자식이 이미 한명……”


그린이 절대 꺼내선 안 될 말을 입 밖에 내버린 것이다. 윽! 옐로가 일부러 그린의 정강이를 차자, 그린이 후회의 신음을 흘렸다. 눈치 없는 자식. 맞아도 싸다. 사령관님 앞에선 그의 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린이 금기를 깨자 사령관님의 얼굴이 무서우리만큼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내가 말했다. 사령관님은 내가 사과를 하자 억지로 얼굴을 밝게 하셨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참으로 무엇 하지만, 그는 팀원들 중에서도―심지어 리더 격인 레드 선배보다도―나를 제일 믿는 것 같았다. 경찰차 시절부터 그는 화이트와 나를 매우 총애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난 괜찮단다. 그보다 다들 실적에 대해서 말해보지 않겠니? 월말 정산을 한번 해보자꾸나. 다들 한 번씩들 불러 보거라.”


그의 명령을 거부할 자는 이 자리에서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세울 수 있어서 더욱 신이 난 듯 했다. 레드 선배부터 시작해서 눈치 없는 그린까지 무슨 날에는 악당을 몇 명이나 어떤 식으로 죽였다는 둥 거침없이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그들의 잔인한 실적을 들으며 욕지기가 났다. 밥맛이 다 달아난 나는 그만 밥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이윽고 내 차례가 오고야 말았지만 난 아무 소리도 내뱉지 않았다. 사령관님마저 내게 끈질기게 물어오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한 명 죽였습니다. 한 명이요! 제 손으로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고요! 그리고 지금도 죽이고 있지요!”


나는 나를 향하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무시하고 식당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더는 이런 숨 막히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내뱉었던 말을 곱씹어보곤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명? 정말 한명이었던가? 자신의 발아래에서 고통스러운 절규를 흘리던 이가 정말 그 악당, 단 한명 뿐이었던가?


해는 이미 산을 꼴딱 넘어가 버리고 거리에는 암흑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리의 집이며 상점가 같은 따뜻하고 아늑한 자리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환한 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반면에 악당들이 강제로 거주한다던 빈민가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데없이, 그 악당의 집은 지금 불이 켜져 있을까 없을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저기…… 당신이 히어로 블루인가요?”


갑자기 어둠 속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짝 긴장하곤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지금은 가면도 쓰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민간인이 나를 알아본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대형 참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내가 소문으로만 듣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령관의 딸, 틀림없었다. 말로만 들었던 그녀 특유의 상냥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듯 했다. 본부의 영웅들 사이에는 백발에 쪽빛 눈동자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늘빛에 가까운 백발이 어둠에 물들어 지금은 잿빛 하늘로 보였다.


“당신이 사령관님의……”

“네, 맞아요. 아버지에겐 절대 말하지 마세요. 부탁드려요.”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겐 무슨 볼일로…….”


그녀가 고운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나는 처음 대면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히어로 퍼플에게 들었어요. 영웅님께서 그…… 악당님 댁에 찾아가셨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퍼플이 어떻게 눈치 챈 것인가. 곧 나는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류가 한 장 빠진 것에 대해 그녀가 알아차린 것이다. 회의 시간에 그 악당에 대해서 다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그 악당에 대해서 실랑이를 벌인 것은 그녀뿐이었으니 충분히 내 경로를 짐작 가능하지 않던가. 그런데 눈치 챘다고 한들 저 사람에게 귀띔해줄 건 또 뭔가!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당황해했다.


“히어로 퍼플은 가끔 말 못할 고민들을 제게 털어놓곤 하시거든요. 요즘 블루 영웅님께서 일탈행위를 해서 큰일이라고 하시고…… 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요! 저……”


그녀가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내게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 앞에서 무슨 진지한 서약이라도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에서 전혀 벗어난 말이었다.


“그 악당님께서 요즘 뭐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가 필사적으로, 그 착한 쪽빛 눈망울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도 차마 발뺌하기가 그래서 나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어디 알다 뿐이겠습니까. 우린 거의 숨 쉬듯이 만납니다. 영웅 대 악당으로요.”


나는 그 악당이 저지를 악행보다는, 우리 팀원이 그에게 저지른 만행들 위주로 낱낱이 말해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거짓을 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점점 핏기가 없어져만 갔다.


“거, 거짓말이죠? 그 사람은 절대 자발적으로 그러실 분이 아닌데……”

“그야 난들 모르죠.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커녕 실마리조차 내비치지 않더군요.”

“그 사람 어디 사는지 아시나요?”


그녀가 다시 한 번 난처한 질문을 해왔다. 난 이 질문만큼은 대답하기가 심히 망설여졌다. 내 마음대로 그의 개인정보를 유출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짐짓 씁쓸한 표정을 지어봤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서 내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쉽게 떠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듯 했다.


나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그의 집 주소를 적어주고야 말았다. 내가 땅을 치며 후회했을 땐 이미 그녀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별 일 없을 거라고 자기 위로를 해 봤지만 걱정은 쉽사리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악당이었다.


사람 찾아오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던데 그녀가 그에게 좋지 못한 말이라도 내뱉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녀에게 신신당부했지만 그 악당의 귀에 내가 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것이 들어간다면, 아주 두고두고 귀가 가려울 것만 같았다. 그의 괴로운 표정을 떠올리자 나 또한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밤은 어두침침하게 깊어져만 갔다.



그 악당이 항상 내뱉는 말이 있다. 나는, 내일 다시 올 것이다. 그는 다른 말은 몰라도 이 말은 항상 지켰다. 실제로, 그와 껄끄러운 면담을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에도 나는 그의 얼굴을 또 봐야만 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웅 대 악당으로서 만났다는 것이고, 평소의 격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그를 악당으로서만 취급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내 인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오늘도 유치한 레퍼토리를 외치기에 바빴다. 오늘도 우리 팀원들은 사이좋게 그를 뭉개버렸고 오늘도 그는 패배한 악당이 되었다. 오늘도 그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자 레드 선배가 작대기만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평소에는 잠자코 있었을 법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 악당은 죽기 직전까지 영웅들에게 매타작을 당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그의 머리가 깨지는 것을 오늘만큼은 아무런 감흥 없이 넘기려야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두시죠! 선배.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를 넘었다고요!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블루, 너 대체 왜이래? 평소에는 냉정하게 눈 하나 깜짝 안하던 녀석이.”


히어로 레드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히어로 그린과 히어로 옐로우가 차례로 거들었다.


“이봐 레드, 아무래도 저 악당이 미리 손을 써 놓은 것 같은데?”

“맞아. 속아선 안 돼. 블루를 최면에 걸리게 한 걸 거야.”


나는 그들의 비아냥거림에 무언가 더 반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엎어져있던 그 악당이 내게 달려들어 내 팔을 잡고 나를 바닥에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패배하고 나선 한 번도 영웅에게 이런 식으로 반항한 적이 없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팀원들은 선뜻 그를 말리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흥, 내가 분명 그때 일은 잊으라고 했었을 텐데?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정이나 계속 해봐, 인마!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하는지!”


그 악당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말하면서도 절대 나를 때리지 않았다. 이쪽도 피차일반이었다.


“정신 차려. 넌 너를 몰라!”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왜 나를 몰라! 난 원래 이런 놈이야! 그래, 너 오늘 자알 걸렸다. 어디 한번 날 죽여 봐라! 목을 으스러뜨리고 팔다리를 분질러서 죽여 봐라! 이 악당아!”


그것은 하나의 증오스러운 발작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손 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그의 가면 너머로 본모습을 보게 되어서 그런 건지, 그가 악당이 될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선 지는 나도 잘 몰랐다. 어찌되었건 그 악당은 나를 누를 만한 몸무게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나는 쉽게 그를 밀치고 밑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 악당의 승기는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히어로 레드, 그린, 옐로가 달려들어 나대신 그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그 대열에서 예외였다. 나는 오늘만큼은,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가 없었다. 퍼플이 다가와 얼빠지게 앉아있는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블루, 그것 봐. 악당이지.”

“네, 선배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악당이지요.”


히어로 레드가 마지막 일격을 그 악당의 머리에 날렸다. 그 악당은 이미 나를 밀치기 전부터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의 다음 대사는 일절 없었다.

앞으로 기절해버린 어두침침한 그를, 찬란하게 빛나는 영웅이 지그시 밟았다. 군중들은 환호의 물결에 요동쳤고, 나는 오늘도, 약한 어지럼증을 느끼곤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정의가 바로 악당이지…….”



작가의말

9화 끝입니다

 

6월9월 모의고사 덕분에

재수학원에 최상위반으로 들어갔네요...

흑흑 기분이 썩 좋진 않습니다

수능때 잘나왔어야 했는데... 모의고사만 일찍으면 뭐하나...

이와중에 황금가지는 원고 투고 확인 안하고 왜 잠적하시는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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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그 악당-(3) +2 15.01.23 564 1 25쪽
43 9. 그 악당-(2) 15.01.23 433 2 15쪽
42 9. 그 악당-(1) 15.01.23 444 1 20쪽
41 8. 엄동-(4) +2 15.01.22 615 1 27쪽
40 8. 엄동-(3) 15.01.22 628 1 19쪽
39 8. 엄동-(2) +1 15.01.22 421 1 20쪽
38 8. 엄동-(1) +1 15.01.22 448 1 11쪽
37 7. 돌아온 작살-(2) 15.01.21 514 1 9쪽
36 7. 돌아온 작살-(1) +2 15.01.21 365 1 17쪽
35 6. 산(酸)-(2) +4 15.01.20 590 3 12쪽
34 6. 산(酸)-(1) 15.01.20 622 2 21쪽
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5 3 16쪽
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31 4. 위대한 군주는-(2) +2 15.01.18 463 3 11쪽
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29 3. 교수라는 직책-(2) +2 15.01.17 724 3 31쪽
28 3. 교수라는 직책-(1) 15.01.17 463 3 20쪽
27 2. 도둑과 양아버지-(4) 15.01.16 427 3 14쪽
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78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4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5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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