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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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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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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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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9. 그 악당-(1)

DUMMY

“네 까짓 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나? 입만 살아가지고는!”


오늘도 그 악당은 레드 선배에게 맞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에게 맞는 것이다. 나조차도, 그에게 일말의 흠집조차 내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나는 그를 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언젠가 해낼 것이다. 두고 봐라 이 영웅 놈들아. 나는, 내일 다시 올 것이다. 반드시 다시 올 거야!”


그 악당은 얄궂게도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마지막 대사를 읊조렸다. 그냥 빨리 추스르고 도망갈 것이지. 팀원들의 거센 발길질 속에서도 용케 저런 말을 할 기력은 남아 있는가 보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할 만하다. 아니, 나는 이전부터 계속 궁금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우리는 대체 왜 싸우는가?


“요것이 입만 살아가지고는. 귓구멍이나 후벼 파고 똑똑히 들으시지! 네가 몇날 며칠을 찾아오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마지막 일격이 그의 얼굴에 가해지고 그 악당은 맥을 못 추스르고 쓰러졌다. 레드 선배를 기점으로 모든 팀원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웃는다. 주변에 있던 모든 군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나는 약한 어지럼증을 느끼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나는 이미 기억 저편 심연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웃음소리가 내 기억을 더듬는다. 몽환적이다. 놀랄 것도 없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눈을 뜨면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보고 있다. 나는 내 또래의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영웅 놀이를 하고 있다. 천 쪼가리와 헝겊 나부랭이를 들춰 매고 각자 가위 바위 보를 한다. 진 아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울상을 짓는다. 진 아이는 무조건 악당 역을 맡아야만 한다. 선택권 따윈 없다. 악당 역할을 맡은 아이는 입을 비죽대며 마지못해 그 역할을 맡는다.

악당 역할은 반전도 없이 그저 영웅들의 총공격에 맞춰 “으윽 당했다!”하고 쓰러지는 게 다다. 그 어린 시절의 나는 영웅 역할을 맡은 아이들 편에 끼어서 환호성을 지른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자라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영웅들과 관중들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과연 나는 지금, 자라서 무엇이 되었는가?


“아들아, 이 아빠는 네가 제일 자랑스럽단다.”

“그건 이 엄마도 마찬가지야. 장하다, 우리 아들.”


아버지께서 격려하듯 내 등을 두드려 주신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곁에서 나를 보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신다. 내가 화이트와 함께 처음으로 영웅에 간택되었을 때의 날이다. 부모님은 영웅이 된 나를 정말로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다. 내 앞에 임명장을 들고 계시는 사령관님이 보인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임명장과 제복을 건네준다.


“넌 오늘부터 세상을 지키는 영웅, 블루란다.”


그것을 받아들며 웃는 내 모습도 환하다. 실은 나도 처음엔 나 자신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구해줄 때마다 감사인사를 날리는 민간인들. 악당들을 때려잡으며 정의를 실현할 때의 그 성취감. 그리고 사령관님의 격려와 칭찬을 받을 때의 그 보람.

나는 영웅인 내가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그래서였을 지도 모른다. 이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 악당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암 같은 존재가 돼버렸던 것은. 나의 사명이 그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돼버렸던 것은.


어릴 적부터 뇌리에 박혀 쉽게 바뀌지 못했던 내 생각을 돌린 것은, 다름 아닌 ‘그 악당’이었다. 파란 곱슬머리에 항상 어둡고 칙칙한 옷과 가면을 껴입고 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비참하다던, 바로 그 악당 말이다.


내가 그 악당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도 내 알량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란 걸 나는 안다. 그는 내가 아는 여느 악당과는 달랐다. 그가 뛰어난 전략과 악랄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대사는 내가 보아왔던 여느 악당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문제는 그의 행동 면에서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어색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막연한 외침은 처음엔 식상한 허세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린 이 짓을 너무 많이 했다. 화이트가 다른 마을로 가기 전부터 계속 지껄여 왔던 소리였으니까.


그 악당은 누군갈 해칠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누군갈 정복해서 자신의 야망을 이룰 원대한 이상을 진실로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란 소리다. 위선으로 가려진 자와 허세로 가려진 자를 구분하는 것은 꽤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색안경이라는 안대로 눈을 가린다면 누가 악당이고 누가 살인자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천치가 되어버리는 모양이었다.

영웅들이 항상 지껄이는 대사도 그들 자신을 멍청이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사실, 만일 그것이 나의 위대하신 영웅 선배님들만 꼴통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장 난 축음기처럼 되풀이되는 말은 다른 민간인들까지 기만하기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마저도 이젠 그 연극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극장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계기는 그것의 의의치곤 꽤나 담담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지도 모른다. 여느 때처럼 그 악당은 패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폐허가 된 임시 기지에서 망연하게 인질들을 데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기가 누전되어 일말의 화재가 나고야 말았다. 나는 정말이지 그가 여기서 인질들과 영웅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줄만 알았다. 실낱같은 연민이 실망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내 착각임이 밝혀졌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인질들을 찾아다닐 때, 염치없이 그가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그의 멱살을 추켜잡고 인질들의 행방을 추궁하려고 했다. 여차하면 폭력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입 밖에 나온 소리는 스스럼없는 체념이었다. 인질들은 이미 풀어주었다. 오늘도 내가 졌으니 이제 나를 잡아가라.

물론, 처음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파렴치한 괴짜 악당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내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게 된 것은 인질들은 탈출했으니 빨리 악당을 데리고 나오라는 레드 선배의 고함소리가 들린 뒤였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 때만큼은, 그는 극장 밖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찬 공기에 내보인 맨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본부에 넘기고 나는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보다는 후회에 가까운 자책이었다. 왜 그때 그에게 말을 붙여보지 못했었나. 진실을 코앞에 두고 놓쳐버린 꼴이었다. 졸렬하게도, 나는 그 형식적인 자책을 지키지 못했다.

작심삼일이라 했던가, 나는 지금까지도 그에게 말을 붙여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진실은 어찌되든 제 양각을 드러내는 모양인지 그에게 말을 붙여볼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내가 내 소꿉친구인 화이트와 결성한 팀원이 해체되고 나서 다른 5인 팀에 결성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사령관님께서 그중 하필 내게만 어떤 도움을 요청하셨다. 나는 뜬금없이 본부로 가게 되었다. 나는 무슨 대단한 악당을 처리하러 출동이라도 하나 싶었다.

그러나 내게 내려진 지령은 고작 내 눈 앞에 있는 조그만 여자아이를 붙잡고 있으라는 것 하나 뿐이었다. 사령관님은 출생 신고를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니 그 아이가 도망치지 못하게 잡고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주사 맞히는 아이를 달래는 간호사들 꼴이 된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그 이상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집행관 두 명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인을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였다. 나는 황급히 그 두 사람을 말렸다. 지금 이게 무엇 하는 짓이냐. 이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아니,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 그런데 사령관님께선 나를 잘 타이르기 시작했다. 저 꼬마 아이는 악당이란다. 악당은 다 저런 식으로 출생 신고를 하는 게야.


그 충격에 나는 그만 목석처럼 서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도덕 시간에도, 문학 시간에도, 학교를 넘어서 세간 신문에도 그런 소리는 초성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악당에게 낙인을 찍는다니? 악당은 그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퍼뜩, 퍼플 선배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설의 영웅, 영웅 1호는 세상 사람들에게 누가 악당이고 누가 영웅인지 정해 주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을 지금, 그 집채만 하다던 영웅 1호보다 더 거대한 사회가 낙인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진짜 악당인지도 모르는 이런 조그만 꼬마 아이에게까지.



집행관 두 명이 여자아이의 손에 인장을 지졌다. 182라는 붉은 숫자가 타들어갔다. 꼬마 아이는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며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런 아이들의 원한이 쌓이고 쌓여 우릴 애먹이는 삼류 악당들이 나오는 거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자라게 될까.


아이는 일말의 소독 조취조차 안 된 채 밖으로 내쫓겼다. 나는 사령관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여자아이를 따라갔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이는 서럽게, 조용히 흐느끼고만 있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제야 울게 만든 걸까.

내가 말했다. 꼬마야 아팠을 텐데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꼬마가 내게 소리쳤다. 아니에요. 소리를 지르면 온몸을 지져 버린대요. 옆집 언니야도 그러다가 죽었어요!

그 꼬마는 그렇게 톡 쏘아붙이고선 거리로 줄행랑을 쳤다. 어두워진 하늘이 신생 악당 182호를 집어삼켰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아 나는 몸을 돌려 다시 본부로 돌아왔다. 저 시커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아주 사소한 일상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망설이던 나 자신을 각성하기에 아주 좋은 촉매제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히어로 블루를 한층 더 무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었던 후로 나는 악당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전보다 편치 않게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별다른 생각 않고 때려잡았던 악당들의 얼굴에 그 꼬마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나는 공연히, 영웅들의 주된 임무인 악당들을 응징하는 것에 있어서 점차 소극적이고 회피적이게 변해만 갔다.


특히, 그러한 악당들 중에서도, 푸른 머리의 악당이 내게 있어서 영웅 일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 악당은 내가 보아왔던 악당이라는 편견을 깨는 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을에서 난리 법석을 떨던 마인드 리더를 맞닥뜨렸을 때, 실수로 그의 손목을 잘라버린 일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그 악당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인드 리더가 손목이 잘리고 주저앉자, 어쩔 줄 몰라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도리어 그 악당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 일인 마냥 잔뜩 겁에 질려서는 마인드 리더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그들이 무슨 혈연관계인가 하고 잠시 착각했을 정도로, 그는 동족의 불행을 슬퍼했다. 아쉽게도 둘을 놓쳤지만, 그 악당은 나와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치는 악당이니 나는 조금은 그와 대화를 해볼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본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 악당이 내 팀원들에게 지곤 도망가고 있었던 중에 일어난 일이다. 레드 선배의 명령으로 나는 그를 끝까지 추격해 막다른 길의 벽까지 몰아갔다. 그 악당은 막장에 몰렸지만 내게서 벗어나려 애쓰기는커녕 모는 걸 포기한 모양이었다.

아까전의 당당한 악당다운 태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여기엔 겁 많은 소시민만이 남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 발치에서 올라올 줄을 몰랐다. 나는 지금까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어 안달이었던 질문을 솎아내느라고 섣불리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너도 손목에 번호를 찍었겠지?”


나는 그 많은 질문 중에 가장 멍청한 말을 뱉어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전히 말이 헛 나온 것이다. 그도 내 발언에 놀랐는지 영원히 안 올라올 것 같던 눈길이 내 눈과 똑바로 맞추어졌다. 한동안 팽팽한 정적이 우리들의 발길을 매어두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그리 심기가 불편했는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레드 선배가 쏜살같이 달려와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을 짐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 나는 다른 팀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올 때까지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미해결로 남아버린 대답에 대한 미련이 어지러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날 밤, 난 지독히도 더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내게 아쉬움을 남긴 그 괴짜 악당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왔다고 해서 그 꿈이 그토록 혐오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불미스러운 내용 면에서 있었다.


난 꿈속에서조차 영웅이었다. 푸른색 제복을 갖춰 입고 푸른 가면을 쓰고 오른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난 멤버들하고 악당들의 본거지를 이 잡듯이 터는 중이었다. 나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어느 수상해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방에 그 악당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악당은 혼자였다. 그 어두침침하고 칙칙한 방에 경비 한 명 부하 한 명 없이, 그 혼자서 그 악당의 옥좌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한 치의 두려움도 당황스러움도 없는 악당 특유의 당당함이었다.


나는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는 물 밖으로 나온 힘없는 물고기처럼 내가 드는 대로 들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엔 여전히 두려움 따위가 묻어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가 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세세한 오만까지 다 파악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내 착각임이 밝혀졌다. 내가 그의 멱살을 잡던 손을 놓았을 때, 그의 몸뚱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리가 볼품없이 꺾여서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기어서라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한쪽 팔도 부러졌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가면을 벗겨내었다. 사지가 부러진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판에 어떤 거만한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리곤 머지않아 충격적인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문제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물범벅에 땀이 뒤섞인 채로 그는 허공을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왜곡된 행복이라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즐겁디 즐거운 모습이었다.


나는 송충이라도 집은 듯, 그 가면을 던져버리곤 자리를 급히 뜨려고만 했다. 악당 토벌이란 목적조차도 까맣게 잊고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나와 버리려 했으니까. 이런 미친놈을 잡아서 뭣에 써먹겠냐고 합리화하며. 문고리를 잡으려던 난, 마지막으로 도망치려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문 앞에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날 놀라게 했다.


그가 힘도 안 들어가는 팔다리를 바르작거리며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다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초라한 권력에 대한 욕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체념의 욕심이었다. 그는 기어이 그 옥좌에 다시 앉더니 신나게 웃어젖혔다. 내가 항상 듣던 그 웃음소리. 그 목소리로, 어둠 속으로 묻히는 내 귓가를 지독히도 안쓰럽게 찔러댔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온 몸이 땀에 젖은 채로 일어났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이리도 유쾌하지 않은 영웅 놀음 꿈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슴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들어서였다.

새벽 다섯 시. 아직 팀원들은 출동 신호가 없으니 세상모르고 잘 시간이었다. 나는 소매로 축축한 이마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잘만 들락거리던 내 방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렇게나 답답할 수가 없었다. 당장 바람이라도 쐬지 않는다면 질식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겉옷을 대강 걸쳐 입고 본부의 발코니를 서성거렸다. 새벽바람이 땀을 식혀 주었다만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얼굴에 이는 냉랭한 공기마저 날 괴롭게 만들었다. 복수라도 하는 건가. 그 악당은 하필 왜 내 꿈에 나와선 사람 기분 꼭두새벽부터 다 잡쳐놓는지.


“잠이 안 오냐?”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레드 선배가 내게 다가오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의 손만 힐끔 바라보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이나 처 잘 것이지 왜 나와서는…….


내가 아무 말 않자 그가 내게 또 냉정한척 한다니 저쨌다느니 면박을 주었다. 내가 그래도 입을 열지를 않자 그가 무안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기지개를 켰다.


“아아, 시원하다! 역시 새벽 공기는 상쾌하다니까.”


순간 주먹을 들어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생각이 동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그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리 다혈질이었던가. 그 악몽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선배라면, 선배라면 잠이 오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의도가 조금이라도 전달될 수 있도록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또다시 그 눈치 없는 입을 열었다. 그것은, 못 가진 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진 자의 미소였다. 분명했다. 내 소꿉친구였던 하얀 영웅 녀석도 그런 미소를 짓곤 했으니까.


“그렇지. 영웅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야. 이 순간에도 그 누가 악의 무리에게 고통 받고 있을지 모르는데. 역시 세상의 악을 완전히 근절시키기란 어려워.”

“악을 근절시켜요? 무엇이 악인데!”

“너 정말 몰라서 묻냐? 평화롭고 순탄하기만 하던 일상을 깨버리는, 그 악랄한 놈들 말이야. 그것이 바로 악당이지.”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두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모르는 일이요가 아니라 그게 대체 무언데란 식으로, 그가, 진실한 시치미를 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득, 그 악당의 웃음소리가 다시 도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실로 조소였다. 꿈속에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는데, 그건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냉소였다.


나는 레드 선배의 상판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 젠장할 발코니를 나왔다. 다시 방으로 가, 잠이 들고만 싶었다. 꿈 속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왜 웃느냐고 묻고만 싶었다. 그 다음엔 왜 그런 식으로 웃어야만 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멱살을 들어 올리는 대신, 그를 그 칠흑 같은 방으로부터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시 잠자리에 들었건만 꿈은커녕 수면의 실오라기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을 자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잠도 오지 않을 눈을 감았다.




작가의말

1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이번화 시점 주인공은 히어로편 읽으신 분들은 잘 알겁니다
풀네임은 ‘카이닌 블루’입니다
히어로편 서브남주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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