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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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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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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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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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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2. 도둑과 양아버지-(2)

DUMMY

그 뒤로도 크고 작은 몇 차례의 폭력 사건들이 있곤 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여느 어른들의 말은, 나의 경우에서는 전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쉽사리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언젠가 담임선생님께 부질없는 상담이란 걸 받아본 적이 있었다. 내게 내려진 처방은 아주 간단했다. 네가 행동거지를 똑바르게 하면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않는단다.


나는 분명 그때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하고 그의 교무실을 나왔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아버지께조차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 현실은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내가 모두 지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무거웠다.


학교는 이제 작은 사회를 넘어서 동물원이었다. 작고 힘없는 동물은 힘센 이들에게 소리 없이 깔려 죽을 운명인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폭력의 강도 또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기절했다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깨어나는 것은 이미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당해본 적도 많았다. 그들은 재미있는 놀이를 시켜준답시고 내 목을 천장 밧줄에다 매달아 놓곤 했다. 나는 그날, 숨이 막혀 죽기 직전까지 가 보았다. 아직까지도 목 언저리를 잘 들여다보자면 시퍼런 멍 자국이 서려있을 정도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놀이’라는 건 내게 자살에 대한 크나큰 공포를 심어주었다.

물론 죽고 싶었던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천장에 매달 수 있는 밧줄 따위의 것들에 눈독을 들이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죽는 것이 이리도 고통스러운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그런 멍청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땅 위에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정말로 웃기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도박판을 잘못 굴린 사람처럼 그야말로 온몸이 썰려서 길바닥에 앓아눕게 된 적이 있었다. 나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 술을 억지로 먹여 기절시켜 놓고선 내 몸을 접칼로 군데군데 상처를 내어 놓았다.

물론 그 당시 내 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아차릴 수가 없다. 아마 이유는 꽤나 간단한 것일 것이다. 난 그 학교에 다니는 유일한 악당이었으니 미움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 이런 식으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범죄였다.


나는 길바닥에 쓰러져서 손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부터 복부까지 사선으로 직선으로 잘도 그어놓았다. 조금만 멀리서 들여다보면 그 직선과 곡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157호라는 숫자에서 선명하게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범행 동기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악당 157호를 미워하는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그나마 옷으로 죄다 가려질 수 있는 부분들이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쓰라린 몸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 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꺾이는 다리는 그저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걸 다시금 각인시켜주었다.

그 뒤로는 무력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지혈되면 아침 해가 뜨기까진 돌아갈 수 있겠지. 자꾸만 더 어둑해지기 전해 집에 돌아가야 된다고 소리치는 강박 관념을 누르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던 나를 주워온 것은 아버지였다. 눈을 떠보니 내 몸은 침대 위에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은 여기가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악당이 병원에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

창밖에선 이미 새벽의 여신이 푸른 기운을 깨우고 있었다. 아버진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졸고 계셨다. 피곤에 찌든 모습을 보니 도저히 깨울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를 흔들려던 손을 거두었다.

아이들이 나를 끌고 간 곳은 꽤나 으슥한 곳이었다. 그는 나를 찾아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께선 나를 데려오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상처투성이인 자식 놈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그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 침상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니 끝이 나질 않아서였다. 그냥, 그 순간만큼은 다 잊고 싶었다. 이렇게 다쳐 와도 그는 옆에 있지 않은가. 아버지께선, 그렇게 괴로워 하시면서도, 계속 내 곁에 있어주시지 않던가…….



몇 년 뒤에 열아홉의 나이로 꽤 유명한 명문 대학에 붙었다. 영웅들만 다닌다는, 악당들은 발조차 들이기 힘들다는, 그런 대학이었다. 원래 악당이라는 거 자체가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기가 힘든 것이기는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장학생이 되었다. 근로 장학생이었다. 아버지께선 내게 학비를 대주지 않으셨다. 아니, 내가 요구하지 않았다. 대주지 못하실 것을 내가 안다. 입에 겨우겨우 풀칠하고 사는 형편인데 대학이 뭐란 말인가. 그러기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만 같았던 그를 한사코 뜯어말렸다. 근로 장학생이 아닌, 학업 장학생이라는 거짓말까지 내세우면서.


난 처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까도 생각해봤다. 효도는 아닐지라도 염치없는 자식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남들이 하는 건 꼭 해봐야 한다며 대학에 들어가길 완강히 고집하셨다. 당신조차도 나오지 못한 곳을. 결국, 난 또다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하고 펜만 잡는 신세가 되었다.


근로 장학생. 그것도 악당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대학을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시종도 너무 높은 직책이었다. 노예였다. 정말 그것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것이 노예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들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까지 트집을 잡았다. 미칠 노릇이다. 내가 만약 고등학교 때까지 악당 취급을 받지 않았었더라면 난 이런 부류의 대우를 참지 못하곤 이놈의 대학을 때려치우고 나와 버렸을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학생들은, 나를 대놓고 때리거나 괴롭히진 않았다. 하지만 따돌림은 여전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내가 근처를 지나가면 표정이 싹 바뀌며 저들끼리 숙덕댔다. 괜찮았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이런 대우, 하루아침에 받았던 게 아니지 않은가.



넓은 홀을 나 혼자서 다 닦았다. 허리가 휘어질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대학에 들어간 주제에 바닥이나 닦고 있다고…….


“어머, 저길 봐. 악당 아냐?”

“그러게. 쯧쯧, 한심한 녀석 같으니.”

“자기가 악당이라서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배운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어?”

“내버려둬. 지가 힘들면 알아서 그만 두겠지.”


같은 과 학생들이 대놓고 내 흉을 보았다. 그리고선 애써 청소해 놓은 바닥에 쓰레기를 냅다 버리고 갔다.

걷어붙인 소매에 157이 보였다. 소매를 다시 내려 그것을 가렸다. 그런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정말 한심했다.


“똑바로 안 해?”


같은 과 선배가 양동이를 들어, 내게 물을 뿌렸다. 지금까지 청소해온 물을 그대로 다 맞았다.


“너 천재가 맞긴 하냐?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데! 저쪽에 먼지가 있잖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이래서 악당들이 문제야! 어쩌다가 저런 악당이 기어들어왔담. 이 쓸모없는 녀석. 똑바로 다시 해놔!”


그가 양동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선 씩씩대며 자리를 떴다. 고개를 들어 먼지가 있다던 쪽을 바라봤다. 먼지 따윈 없었다. 그냥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지. 구정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머리에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이 구정물보다 더럽고 쓸모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돈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지…….”


그렇게, 이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머리위에 마른 수건이 얹혀졌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어째서 그가 여기에 와있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질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방금 전의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는 것이다. 더불어 내가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뒤편에서 한심한 자식 놈의 짓거리를 보시며 내게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며 눈을 감았다. 상처 주는 말이든, 위로하는 말이든,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달갑게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이리 줘. 내가 할게. 넌 그동안 머리 말리고 있어.”


아버지께서 내게서 대걸레를 빼앗아 당신이 청소를 하셨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항상. 너에게 짐만 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혼자서 참고 있지 말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것이 위로인지 동정인지 비꼬는 건지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차라리, 차라리 다짜고짜 뺨이라도 맞았더라면, 더욱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저…… 근로 장학생인거 알고 계셨던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근로 장학생이라는 걸 어설프게 숨겼을 때부터, 이 은폐가 탄로날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이런 식으로 들통 나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그럼. 왜 모르겠어……. 넌 내 아들인데.”


머릿속이 이젠 깨끗하다 못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께선, 알고 계셨다, 이미.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나를 축복해주었다…….


“네가 상처받을까봐 모른 척했는데…….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가 날 조심스럽게 안았다. 죄송해야 되는데, 너무 행복했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내가 돌아와야 할 곳은 이곳이라는 게, 다시금 각인되었다.

따뜻했다. 익숙하지 않은 따뜻함이 느껴질 때마다 눈물부터 났다. 왜 우는지는 몰랐다. 기뻐선지, 서러워선지, 미안해선지. 내가 소리 없이 울자, 그가 내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더 울음이 났다.


“죄송해요. 못난 아들이라 죄송해요. 전,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울지 마. 남자가 마음이 약해서 어떡해…….”


눈물이 머리에서 떨어지는 구정물과 뒤섞여 흘렀다. 한심했다. 왜 아버지 앞에서만 이토록 약해지는 것인지. 그가 소매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하얀 양복이 또다시 더러워졌다. 매일 내가 더럽히고 있었다. 그의 마음조차도 내가 더럽히고 있었다. 새카맣게. 시커멓게.


“못난 아들이어도 괜찮아. 바르게 자라줘서 고마워…….”

“저도…… 바르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다. 그는 항상 내게 고마워했다. 뭐가 그리 고마운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것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그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 또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악당이라고 벼랑 끝에 몰아세워도, 언제나 당신만은 내 편이 되어주셨다. 아버지만이 나의 외곬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도 고마웠다. 너무도…….



그렇게 개인적 일들로 골머리를 앓아 가고 있을 적에 중대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불씨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산을 통째로 태울 커다란 불길이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디오에선 한동안 스포츠와 날씨 이야기만을 언급하더니 그 날만큼은 꽤나 흥미로운 논제거리를 내놓았다. 어느 악당 범죄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얀 괴도’라고 불리는 악당이 있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것을 종합해 보자면 하얀 괴도는 사람들을 목을 졸라 살인하고 비싼 것만 골라서 훔쳐가는 악당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항상 하얀 가면을 쓰고 다니기에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대충 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악당이 누구건 간에 나는 심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살인자들이 악당 체면을 다 깎아먹는 것이 아닌가. 세간 사람들의 인식에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악당이 되지 말자. 겉은 하얀 것 같으면서도 속은 시커먼 악당이……. 그렇게 다짐하고선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사실, 그날은, 라디오만 아니었으면 기분 좋게 하교할 수도 있었던 날이었다. 아니, 그깟 라디오가 무슨 대수인가. 바로 그날, 피나는 노력 끝에 드디어 학업 장학생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얼마나 기뻐하실까! 밤늦게까지 담당 교수님의 연구 수발을 들었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은 날이었다. 그게, 바로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행운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행이 도사린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그것이 이런 식으로 적용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래, 그날 밤이었다. 나는 평소보다 늦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품속에 책들을 한 아름 안고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끼고 돌고 있었다.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그 못돼먹은 하얀 괴도를 마주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범행 장면과 함께 말이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의 살인 방법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그 순결한 흰 장갑과 양복에 선혈이 묻는 것이 그토록 싫었던 것일까. 바로 내 눈 앞에서, 한 청년을 하얀 손수건으로 목을 졸라서 죽이고 있었다. 그 청년은 짧은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뒤로는 더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린 채 뒤돌아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하얀 괴도의 발자국 소리가 바로 뒤편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불빛조차 들지 않는 골목길이라 이리저리 부딪혔지만 아파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던 것일까. 나는 결국 막장에 몰리고 말았다. 다시 되돌아갈 길도 없었다. 하얀 괴도가 내 앞을 막고선 천천히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탈출할 방도가 없자 나는 고양이를 물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는 어차피 항상 죽고 싶어 하지 않았었나. 학업 장학생도 되어봤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봤으니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버지. 아버지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는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내가 탈출할 생각을 않고 가만히 있자 하얀 괴도는 점점 내 시야에 가까이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그때 고개를 절대 들지 말았어야 했다.


원망스럽게도, 난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고야 말았다. 그 익숙한 윤곽을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였다. 아니, 하얀 괴도였다. 절대 같을 수 없는 두 사람이, 그렇게나 겹쳐져 보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손에 들린 책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끝까지 부정했다. 혹은 그것은 일종의 최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버지는 분명 지금 이 시간엔 방적기를 돌리고 있을 거다. 혹은 벽돌을 나르거나 삽질을 하고 계시겠지 결단코 저 살인자가 우리 아버지는 아닐 거다. 아니다. 아니어야만 했다.


“아버지…….”


순간, 나는 내가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을 입 밖에 내뱉었다는걸 알아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가면 너머로 그의 보이지 않는 표정을, 난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살의였다.

하얀 괴도는 설령 내가 아는 사람이 맞다 치더라도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는 아니었다. 낯설었다. 내게 항상 따뜻한 표정을 지어주던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한 악당을 더욱더 극악무도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가 차라리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둥 다급한 변명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무섭게도 그는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막장에 몰린 나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손으로 목을 조를 뿐이었다. 고통스러웠다. 그의 손은 작은 떨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나를 죽일 생각만 가득 차있는 듯 했다.


점점 내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만큼은 하얀 괴도에게 찔려 죽든 목 졸려 죽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갈망만 맴돌 뿐이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생각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죽기 전에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그가, 죽기 전에 내게 한번만 웃어줄 수 있다면…….


“아버지…… 사랑해요.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에게 목이 눌리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정말 진실 된 마음에서 나오는 아첨이었다.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한번만 웃어 주세요, 한번만. 나는 몇 번을 그렇게 쉰 목소리로 정신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그가 내 목에서 손을 뗄 기미는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기만 거스를 뿐이었다.

그때, 또 다른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더니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찾았다! 괴도가 바로 여기 있다! 하얀 괴도를 잡아라!”


그제야 하얀 괴도가 다급하게 내 목을 놓았다. 갑작스레 들이켜진 공기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 때문일까, 나는 그를 놓쳤다. 그는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인기척은 다른 이들의 고함과 발자국 소리에 안개처럼 묻혀버리고 말았다.


물론, 나에겐 그를 뒤쫓을 기회가 있었다. 그가 내 앞에서 잠시 망설였으니 나에게 기회는 아주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내 본능과 이성이 모두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절대로 그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그 알량한 직관이 내 발목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내 손은 떨어진 책들을 줍고 있었다.


천하의 배은망덕한 자식이 아닌가! 나는 나 자신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멍청한 것! 너는 도대체 왜 사는 것이냐. 키워준 아버지를 살인귀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책이 잡고 싶었더냐. 한심한 놈, 죽어라! 차라리 목매달아 죽어라! 아주 그냥 콱 죽어 버려라!


그때, 일말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청소하다가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에, 내가 다니던 대학 근처에서 사체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하얀 괴도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끝까지 그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변명했다. 그러나 나는 점점 그 반론에 설득당하고 있었다. 그게 우연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만일 그것이 진짜 우연이라면, 아버지께서 내가 다니는 대학에 찾아 오셨던 이유는 또 무언가. 하필 그날, 그 시간에!


내 머리는 또다시 새로운 변명거리를 모색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가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손목에 번호조차 없지 않은가. 아버지께선 어딜 취직하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 않던가. 나는 그제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핑계도 변명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알고 있었다면서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은 태도는 또 뭔가!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기력함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에겐 항상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 너무도 뻔한 길이어서 나는 그 길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이 와장창 무너져버린 것이다.


일어서도 내 발걸음은 향할 곳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니 용기가 나질 않았고, 길거리를 방황하자니 또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나는 그렇게 제자리에 서서 방황하고만 있었다.


작가의말

비축분 중에 가장 신경쓴 퀄리티입니다만...

막상 올리고 나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그런데 이 소설...재미...있긴 합니까?;;

전 독자분들의 취향을 잘 모르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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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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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5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5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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