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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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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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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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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글자수 :
348,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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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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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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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20쪽

3. 교수라는 직책-(1)

DUMMY

프리드리히 니체.

평생 아픈 몸으로 살고 사랑도 못 이루고 방랑하다 정신병자로 산 그다. 그래도 그는 철학이라는 살아가는 이유가 있었다. 그걸로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이겨냈다. 나에겐 사는 이유가 없다. 전에는 아버지였는데. 그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바르게 살았다. 그는 내 곁을 너무 급하게 떠났다. 내게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저것 봐. 키워준 부모를 죽인 악당이래. 정말 배은망덕하지 않아?”

“어머, 그럴 줄 알았어. 하여간 주워 온 놈들이 더하다니까?”


내가 복도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대놓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익숙한 비난이기에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요 근래에 나는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유야 당연히, 내가 나의 아버지를 총살했기 때문이었다. 신문에서 나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왜곡된 진실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도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속여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날, 그 참극의 목격자들 또한 언론의 연극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내가 하얀 괴도의 살해 사건에 깨끗하게 제외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또한 그의 충동적인 자살에 크게 일조했지 않은가. 내가 애초에 그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가 날 주워오지 않았더라면 하얀 괴도는 처음부터 존재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키워준 아버지를 죽인 후레자식이란 크나큰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정작 경찰 쪽에서는 내게 체포 영장 하나 내밀지 않았다. 윤리적인 면에서 보기엔 불미스러운 일일지라도 법률상으론 전혀 문제가 되질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악당이 민간인이나 영웅을 죽이면 이것은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악당이 악당을 죽이면 그것은 얘기가 달라진다. 아버지께선 더구나, 손목에 번호도 달지 않으셨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졸렬한 모함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질 못했다. 나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 반쯤 미쳐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졸도하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정신이 완전히 들었을 때는 이미 하루가 지나 있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대학 의무실에 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의 나는 정신 이상자처럼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마구 외쳐대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아버지를 찾는 소리였을 것이다. 혹은 나를 저주하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진 아마 조각조각 해체당해서 어딘가로 팔려나가셨을 것이다. 혹은 쓰레기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개 모든 악당이 그렇듯, 그 또한 땅에 곱게 묻히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가 자살한―혹은 살해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어 명의 시체처리반이 그를 연행해 갔다. 그가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알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인 것을.


내가 마지막으로 그 초라한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땐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따윈 없었다. 내가 기다려야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미줄로 도배된 찬장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집을 비우시기 전에 항상 여시던 곳이었다. 찬장에는 이전과 같이 투명한 병에 최면제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맛있는 과자인 줄로만 알았다. 희멀겋고 동글동글한 그것을 그가 주는 대로 집어먹고선 깊은 잠에 빠지곤 했었다. 마치 여느 간식의 달달한 황홀감을 맛보는 것처럼. 그렇게 한잠을 자고 나면 그가 돌아오곤 했다. 그 찬장은 내게 있어서 화수분보다 신비한 마법의 상자였다.


찬장에서 그것을 꺼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먹었다. 남은 것들은 병째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후의 일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론 그저 담담하게 뒤를 돌아 경보를 가듯 그 집을 나왔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몇 발자국 채 떼지 않아 시야가 거뭇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졸도하는 그 순간까지 집의 반대편으로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또한 폐가를 비운 뒤로는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여 본 적이 없다. 나는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하루 일과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점점 임의적이고 즉흥적이게만 변해갔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역마살 낀 듯 거리를 계속 쏘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걸어갈 길을, 걷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서였다.

이와 쌍으로 불면증은 석양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마냥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겐 그 끔찍한 괴물을 물리칠 기막힌 무기가 있었다. 최면제를 한 알 두 알 먹다보면 나는 거짓된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신비한 알약을 박하사탕 먹듯 집어먹자 끝내는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다. 빈 병은 기숙사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최면제가 다 떨어지자 나는 새로운 병을 사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의 양아버지로서의 하얀 괴도를 잊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설이라 생각했으나 나는 조금씩 나 자신에게 설득당하고 있었다.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나만 잊으면 그는 희대의 살인자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가 얼마나 추하게 인간적이었는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얀 괴도로 모두의 머릿속에서 하이얗게 잊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지위를 하얀 괴도의 양아들이라는 것에 귀속시키곤 했다. 그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편해지는 꼴을 못 보는 모양이었다. 특히, 내 담당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자백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자네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은 죄책감 때문일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백을 하는 것이 어떤가.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란 소리였다. 나는 내 양심을 각성시키려는 그의 설교를 들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제안까지 건성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감옥에 간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별반 차이는 없을 것만 같았다. 오히려 귀찮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만 차단해줄 터였다. 무엇보다도, 일상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웅의 본부라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것이 얼마나 얼간이 같은 생각이었는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기껏 경찰서에 찾아갔더니 하는 말이, 그런 것은 자기네들 관할이 아니니 본부에 찾아가라는 것이다. 본부에 찾아가니 저마다 나를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 급급했다.

누가 누구를 체포하는지조차 잊은 채, 그렇게 정신없이 불려 다니다보니 꽤나 낯익은 얼굴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아버지 앞으로 끌고 갔던 중년 남자였다. 주변의 영웅들은 그를 사령관이라고 부르는 듯 했다. 그는 사무실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채, 눈 하나 깜짝 않고 내게 물었다.


“그래, 하얀 괴도의 양아들. 무슨 용건으로 여길 찾아온 게지?”


나는 차마 자수하겠다는 말을 선뜻 내뱉지 못하고 두 손목을 모아서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당장이라도 잡아서 감옥에 처넣을 줄 알았건만 그는 내 천치 같은 행동에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멍청하긴. 그런다고 해서 자네가 영웅으로 승급할 수 있을 것 같나? 정말 오만한 악당이로군.”


나는 그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자, 그가 인상을 구기며 책상 서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나? 악당을 죽이면 그것은 정의가 되고 그 정의는 영웅을 만든다. 그래. 자네는 말이지, 동족을 살해하고선 비굴하게 영웅으로 추양 받고 싶은 게야. 그러니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거고. 내가 자네에게 표창장이라도 수여해야 하나?”

“나는…… 악당이 아니라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 그럼 그건 또 잘한 짓인가? 자넨 오만한 줄만 알았더니 밑도 끝도 없는 멍청이로군. 백 오십 칠호. 그럼 자네는, 지금 나에게서 상과 벌, 그 두 가지를 바라고 나를 찾아온 겐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네는 악당이야. 자네가 상을 받든 벌을 받든 자네 존재는 변하지 않는 거라고. 꼴도 보기 싫군. 이래서 악당들이 추악하다는 거야. 그래 주마. 상이다. 상.”


그러곤 그는 책상 서랍에 있던 동전들을 꺼내 내게 흩뿌렸다. 피할 겨를도 없이 그것들을 안면에 직격으로 맞았다. 내 얼굴을 치고 간 동전들이 요란스럽게 울며 바닥을 맴돌았다. 꽤나 볼만한 광경이었는지 주변의 일하던 영웅들이 내 청승맞은 꼴을 보곤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웠던 걸까.


“가는 길에 차비로 쓰든지.”


그가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곤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 오만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였다. 저런 자가 영웅들의 수장이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본부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자들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다. 걸음을 빨리하며 그들을 실컷 욕했다. 그리곤 곧, 저런 비상식적인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내 자신도 실컷 욕했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벌이었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상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 뒤로는 주변에서 아무리 양심을 운운하며 자수를 권해도 귓등으로도 듣질 않았다. 또다시 그 때의 학창시절로 나는 돌아갔던 것이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수업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나의 대학시절은 그렇게 편하게 흘러갔나 보다.


나흘째 밤을 새던 날이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빠개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누울 수가 없었다. 교수님께서 과도한 과제를 내 주신 것도, 논문을 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놈의 불면증이 또 도진 것이리라. 눈이 피곤에 절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눈앞의 펜과 메모장을 집어 들었다. 아는 공식은 죄다 두서없이 메모지에 적어대며 무료한 시간을 죽였다. 물론 그것이 수면제 역할을 해낼 리는 만무했다. 한 페이지가 꽉 차게 되자 그것을 종이 뭉치로 만들어 코트 주머니에 쑤셔놓곤 밖으로 나갔다.

이 공식들이 쓰일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메카니즘! 세상은 공식의 집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뜯어볼 수만 있다면 내가 또다시 불면증이 도진 이유 또한 밝혀지리라.



“내 이름은 해리슨이에요! 해리슨은 우리 엄마가 지어주신 이름이라고요! 나는 번호를 찍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름이 있어요. 내 이름은 해리슨이란 말예요. 엄마, 엄마 살려주세요!”

“조용히 못해! 모르긴 몰라도 우릴 혼란시키려는 속셈인 게지! 이런 교활한 악당 같으니. 우린 네 치사한 수법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내 눈에 띤 것은 어느 한 연행의 장면이었다. 한 아이가 영웅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손목에 번호가 없는 아이를 잡아가는 것이다. 번호 없는 악당들은 일종의 불법 체류자들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마치, 내 학창 시절을 낡은 사진첩처럼 다시 끄집어내어 감상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 했다. 나도 이 주변의 방관자들 중 하나였을 뿐, 정작 저 정의로운 행태를 말릴 용기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차마 발걸음을 떼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이의 처절한 몸부림이 더욱 생생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살기 위한 몸부림, 그것은 죄도 뭣도 아니었다. 저 아이는 끌려 갈 이유가 없었다.


정의의 심판자라도 되어보고 싶었던 걸까, 난 정말 충동적으로, 내 겉옷 주머니 속의 종이 뭉치를 꺼내서 아이를 잡아가려는 영웅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물론 종이 뭉치가 저들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질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억지스러운 행동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자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겐가?”


그 뒤로는 언급할 것도 없었다. 영웅들은 나의 수준 낮은 행태에 길길이 날뛰었고 나는 또다시 본부로 잡혀 들어오게 되었다. 사령관은 나를 의자에 앉혀두고 아까의 행동이 얼마나 반사회적이고 비교양적인지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변의 영웅들은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지만, 나로서는 그 연설에 몰입하기엔 약간의 장애가 있었다. 따뜻하니 졸음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암만 눈을 감아 봐도 오지 않던 잠이 하필 이제야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더는 들을 수 없겠다싶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귀에 걸리는 고함소리들이 흐릿하게 녹아내렸다. 그는 지금 일종의 공식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식들이…….


의자가 쓰러지고 나는 또다시 그 어렸던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다. 맞는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딱 하나를 추려 보자면 그것은 뭇사람 앞에서 그들의 자존심에 흠집을 냈기 때문이리라.

애초에 악당이 맞는 이유 따위는 중요치 않지 않던가. 악당은 그 자체로 악이고 영웅은 그 자체로 선이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공식이 아니던가. 메카니즘! 이 얼마나 절대적인 법칙이냐! 내가 잠도 못 자고 맞으며 사는 이유를, 아버지께서 타살되신 이유를, 꼬마 아이가 끌려가던 이유를 단박에 설명해주지 않던가!


사령관이 바닥에 엎어져 실실 웃는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발로 나의 오른쪽 손목을 밟았다. 157이 찍혀진 그 저주받은 손목 말이다. 그러곤 가차 없이 발에 밟힌 손목을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끌려가던 꼬마 아이의 살려달라는 외침이 귓가에 꽂혀 메아리쳤다. 그것은 아마 내가 살아오면서 내뱉어왔던 소리일지도 모른다. 살려달라는 외침이 어째서 죄란 말인가. 그것이 그렇게도 공식에서 어긋나는 수식이란 말인가…….



정신이 가까스로 들었을 땐 병원이었다. 나는 무심코 내 오른쪽 손목을 확인했다. 손목에 붕대와 부목이 둘러져 있었다. 살짝 건드린 것만으로도 괴로운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도무지 그 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였다. 기껏해야 길거리에 내던지거나 쓰레기장에 처박아 둘 줄 알았건만 병원에 입원시켜놓을 이유는 또 뭔가.

다행히 손목 말고는 부러진 데는 없었지만, 몸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땅에 발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다쳐온 것이었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침상에 누워있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난 그 와중에 왼쪽 손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했다. 곧 이런 안일한 생각을 가진 나를 질책했다. 참으로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몸은 좀 어떤가?”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나를 이 병원에 집어넣은 자가 들어섰다. 사령관은 당치도 않은 안부를 물으며 태연하게 내가 몸져누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가까스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나를 왜 병원에 데려다놓은 겁니까?”

“별 이유 없어. 재밌잖아.”

“재밌다고요? 이런 게 말입니까? 그렇담 한 악당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 때도 이만큼 재밌었겠군요!”


내 무례한 발언에 그가 재밌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곤 내 왼쪽 손목을 위협적이게 붙잡았다.


“마음에 들지? 그래야 할 거야. 개인 병실은, 정말 비싼 곳이거든. 원한다면 입원 기간을 더 연장해 줄 수 있어. 봐봐, 지금도 간절히 바라고 있잖아? 피학대 도착증 환자야, 아주.”

“어떻게 이런 게 재밌을 수가 있습니까? 당신 부하가 어떤 악당 아이를 끌고 가더군요. 그 애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살려달라고요! 그게 무슨……”


난 왼쪽 손목의 안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에게 말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항은 그가 한 손으로 날 밀치며 침대에 눕히는 바람에 끝맺지 못했다.


“아직 반항할 힘이 더 남아 있으시나본데,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협박할 대상을 잘못 선택했군요.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그래? 그럼 살아가는 건 어떤가? 살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던가? 매일 이렇게 병실에 누워서 말이야. 무인도처럼 오고가는 사람도 없이 자넨 혼자서 살아가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대해선 그리 이렇다 할 반박을 마련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여태껏 죽지 못하고 살아간 이유는 아버지,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도 없는 지금, 나는 왜 죽지도 못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건가. 내 표정이 괴로워질수록 사령관이 웃는다. 그것은 비웃음이라기 보단 죽어가던 사람 하나를 살려놓았을 때의 웃음과도 같았다. 나는 그래서 저 자가 더 싫었다.


“나가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도망치는 건가? 비겁하게?”

“나가라고 했을 텐데요.”


나는 결국 더는 강경하게 나오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침대에 누워 버렸다. 나는 사실은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사령관은 무슨 생각인지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고 순순히 나갔다. 또다시 찾아올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어째 전보다 더한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은 이제 하루를 멀다하고 나를 찾아와서 영양가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갔다. 대충 결론지어보면 내게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그런 소리였다. 딴에는 내가 자살 충동이라도 들게 하고 싶었나본데, 그 전에 지겨워서 죽을 판이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었던 걸까. 대체 환자랑 무슨 좋은 담화를 나누고 싶었던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나가라는 말만 연신 외쳐대기 일쑤였고 그는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내가 지쳐 쓰러지면 나가곤 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게 뭔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정신 나간 시도를 한 것이 바로 병원 탈출이었다. 탈출이랄 것도 없었다. 붕대도 안 풀고 환자복 채로 무작정 병원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병원을 나왔지만 딱히 갈 데도 없어, 정처 없이 거리로 공원으로 쏘다녔다. 결국 나를 정신병자로 오해한 어떤 행인의 신고로 나는 또다시 병원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담당 의사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사령관, 그 자를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결국, 제발 함부로 나가지 말아달라는 의사의 간곡한 요청에 병실 면회를 금지 시키고서야 그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병실 문 앞에 ‘면회 금지’라는 푯말이 내걸렸다.

진짜 정신병자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사령관은 이를 모르고 나를 찾아왔다가 문 앞에서 실컷 비웃고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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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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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29 3. 교수라는 직책-(2) +2 15.01.17 724 3 31쪽
» 3. 교수라는 직책-(1) 15.01.17 464 3 20쪽
27 2. 도둑과 양아버지-(4) 15.01.16 427 3 14쪽
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78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4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5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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