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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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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23
추천수 :
229
글자수 :
348,419

작성
15.01.2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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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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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8. 엄동-(3)

DUMMY

“너…… 누구……?”

“아저씨!”


참으로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만 활짝 웃고야 말았다. 그 몰골로. 102호는 처음에만 놀라더니 오히려 거지라도 찾아온 것처럼 미간을 괴롭게 일그러뜨렸다.


“넌 이게 뭐야…….”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잠깐이면……”

“아니……. 나는 너 모른다.”


뜬금없는 거절에 내 눈이 도리어 커졌다. 믿을 수 없었다. 102호가 도리질 치며 현관문을 닫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문은 내 앞에서 매정하게 닫혔다.


또 버림받았구나. 이 와중에 나는 나를 배신한 102호를 탓하기보단 나를 탓했다. 당연한 처사가 아닌가. 애초에 그는 내게 자꾸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었나. 게다가 나 또한 나에게 동참을 요청해온 두 명의 악당들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쫓아내지 않았었나. 인과응보지. 이마에서 흐른 피가 입을 타고 턱 너머로 흘러내렸다.


나는 한동안 집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다가 머리를 떨군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까지도,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다신 저기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화가 나거나 슬프기보단 한심했다. 세상에 실망이나 하는 나 자신이. 뭘 믿었나. 대체 뭘 믿고 여기까지 걸어왔던 것인가. 나는 그냥 아무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갔어야 했다.


퇴각하는 길에 나는 더욱 비관적이게 변질되어 갔다. 맥이 탁 풀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저럴지도 모른다. 천사님인지 뭔지도 똑같겠지. 여차하면 내게서 등을 돌릴 것이 뻔하지 않던가.


아무도 내 편에 서질 않는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아버지의 생각이 났다. 그는 이렇게 맞아오면 항상 미안하다며 치료를 해 주곤 했다. 그가 없는 현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였다. 대체 그때의 난 왜 이런 것을 각오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무리 봐도 못났는데, 무엇을 믿고 이런 것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잠시 잊고 있었던 명치의 통증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리곤, 나는 골목길에 기대어 각혈했다. 입 안에 비릿하고 기분 나쁜 맛이 남았다. 붉게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곤 나는 기겁했다. 속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기에 이만큼의 피를 게워낸단 말인가.

체력이 방진된 몸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다. 이때쯤 되면 피해망상증이란 게 나를 덮쳐오는 것이다. 길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이 조소를 흘리며 뒤돌아서 내게 돌을 던질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비참한 기분 말고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괴로움에 떨던 나는 결국 다시금 진통제와 수면제를 번갈아가며 삼켰다. 그것들이 유일한 나의 친구들이었다. 찬장 앞에서 벗들을 하나씩 목구멍으로 넘기다가 차츰 의식을 잃어갔다. 야릇한 기분이 들며 귓가에 소리가 들려왔다. 잊었나본데, 나는 악당이야. 여차하면 영웅뿐만 아니라 같은 악당도 등쳐먹을 수가 있지.



다음날 일어났는데 속이 쓰렸다. 죽고 싶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어제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내가 어째서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헛구역질이 자꾸만 올라왔다. 어제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질 않았으면서 빈속에 약을 넣은 탓이었다.


별안간 입에 무언가 차갑고 단단한 게 닿았다. 스테인리스 컵이었다. 누가 주는지도 모른 채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목으로 넘겼다. 타오르는 갈증 탓이었다. 처음엔 나는 내게 물을 먹이는 자가 사령관인줄 알았다. 내게 드디어는 독약을 먹이는가 싶었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가 고개를 글었을 때, 내 눈앞에 드러난 사람은 102호였다.


나는 왜 왔느냐, 당신은 날 모른다 하지 않았냐는 둥 여러 가지를 캐묻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내가 죄를 지은 쪽인 것 같았다. 그리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물의 원인이 안도감인지 배신감인지 원망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멀쩡한 손을 들어 머리를 만졌다. 벌어진 상처는 실로 꿰매져 있었다.


“어디한번 해봐.”


102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실컷 원망해 보라고.”

“감사합니다…….”

“아니. 누가 감사 인사하래? 난 어제 널 버렸었어. 기억 안나?”


그의 추궁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고갤 저었다.


“욕해봐 한번. 내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안겼다. 울면서 남은 한쪽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뭐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날 버리지 마세요. 날 포기하지 말아요. 날 혼자 두지 마세요. 난 살고 싶단 말예요……. 참으로 딱하고도 웃기는 일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내 자신을 버린 주제에 남에게 버리지 말라고 애원한다는 것이.

하지만 102호는 내 통곡에도 동정하기는커녕 무덤덤하게 앉아만 있었다. 대신 그는 이런 날 밀어내지도 않았다.


“난 진심으로 널 버렸었어. 네가 숨겨달라고 청할까봐 두려웠으니까. 네가 영웅들에게 쫓기는 줄로만 알았거든? 알아둬. 난 원래 그런 놈이라는 거.”


그의 냉정한 말에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목에 기댔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건 공포로 인한 유대감이었다.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는 것보단 나았다.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벗이라도 있는 것이 나았다. 나를 언제까지고 약병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잠자코 있다가 내가 진정되자 내 검은 가면을 꺼내 들어보였다. 아까 울며불며 매달렸을 땐 언제고 이젠 그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가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안단 말인가.


“언제부터야.”


그의 짜증스런 목소리에 나는 아예 입이 붙어버렸다. 면목이 없었다. 얼마간 대답을 할 공백을 주었지만 내가 아무 대꾸도 않자, 그가 내 얼굴에 가면을 집어던졌다.


“어쩐지 요새 연락이 뚝 끊겼다 했지. 뭐하나 궁금했더니만 몸을 팔고 계셨어? 이건 연기가 아니라 앵벌이야! 알기나 해?”

“돈을 벌고 싶었어요…….”

“거짓말 마! 교수가 언제부터 그런 성격이었다고! 분명 그 치의 수법에 넘어간 거겠지. 내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고 경고했건마는, 이젠 어디 팔 게 없어서 인간의 권리를 팔아넘겨? 이 동물아!”


내가 같잖은 변명을 하자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이런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악당들은 사실 대부분은 참된 악당이 아니다. 영웅들이 씌워놓은 가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102호도 똑같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마인드 리더 아니랄까봐 그가 자신은 명백히 다른 거라며 쐐기를 박아놓았다. 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건 내가 아주 잘났다는 소리가 아니라 네가 아주 못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너는 이제 큰일 났다. 여기 한번 발을 들이면 온몸이 절단 나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못 빠져나오는 곳이다. 그는 그렇게 절망적 상황을 다시금 내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지난 일을 후회해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가슴을 찌르는 지청구에 난 그저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는 한바탕 나를 혼내고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나도 참 못났다. 네게 해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니.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나를 외면하지만 말아달라고 비굴하게 간청했다. 졸렬한 청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에 강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염치 불구하고 그에게 머리를 다시 기댔다.

그는 날 침대에 바로 눕히곤 일어나서 물수건과 미지근한 물을 대야에 받아왔다. 그리곤 그걸로 말없이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많이 아파?”


혼잣말과도 같은 속삭임에 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가 아픈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방안에는 시계소리와 물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 일이 있은 후로도, 나는 102호를 직접적으로 찾아가진 않았다. 그러나 그와 마주치는 일이 전보단 잦았다. 하지만 악당 ‘역할’로서 마주치는 때가 훨씬 많았기에 아주 기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내 편에 서서 악당노릇을 하진 않았지만 내가 가면을 벗고 나면 자주 내 곁에 있어주었다.


언젠가, 우리가 영웅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온 날이 있었다. 나는 악당들이 거주하는 빈민가의 낮은 계단에 앉아 진통제를 퍼먹었고, 102호는 담배를 빼물었다. 그가 흡연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랐다. 102호는 이제 알았냐고, 나 십 년산 골초야라며 낮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진통제를 삼키며 그에게 권했다. 담배 피지 마세요, 몸도 안 좋은데 건강 나빠져요. 그가 내게 말했다. 그럼 너도 그 약 끊어라, 나도 담배 끊을 테니. 내가 쏘아붙였다. 날 죽이려고 작정했나 보군요! 난 이 약 없으면 못 살아요.

그가 또다시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너도 상관 마라,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눈을 찬 물수건으로 눌렀다. 맞아서 부은 눈이 참으로 딱해보였다. 나 또한 얼음 팩을 왼뺨에 대고 있는 상태니 연민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꼴을 하고 앉아있다니 무어라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달라붙어 몸을 기댔다.

내가 뜻밖의 행동을 하자 그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2차 흡연하기 싫으면 떨어져. 하지만 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나를 힐끔 보더니,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담뱃불을 껐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가 날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놀러나 가자. 밤 마실 어때?”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그가 일어났다.


“다쳤는데 괜히 움직이지 마세요.”

“여기 앉아서 한숨이나 내쉬는 것보단 도움이 되겠지. 일어나.”


그가 나를 이끌고 빈민가를 거닐었다. 빈민가에는 모두 악당들이 거주한다. 손목에 번호를 찍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거리의 부랑자나 거지들은 모조리 악당으로 취급하기 때문이었다. 이 빈민촌도 마을 이곳저곳에서 떨어져 살던 대부분의 가난한 악당들을 영웅들이 한곳으로 모아서 놔둔 것이다. 감시하기도 편하고, 무엇보다도, 몰살시키기에도 편하지 않은가.


“조만간 이 마을을 담당하는 영웅들이 여길 찾아와서 모조리 허물 건가봐. 저번에 큰 시위가 난 것도 이런 이유 때문도 있어.”

“이해할 수 없군요. 왜 허문다는 거죠? 애초에 악당들을 강제로 쫓아낸 건 그들이 아니던가요?”

“포장도로와 편의 시설을 짓는단다.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든다고. 아마 시위가 일어나서 그런지, 인지도 있는 악당들 빼고는 모조리 몰아낼 생각 인가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럴 리가요. 그들은 언젠가 우리도 없애버리겠죠.”

“아니야, 그들은 우릴 살판나게 만들진 않는다만 죽이지는 않아. 그들한텐 우리가 필요하니까. 악당이 없으면, 영웅도 없지.”

“악당이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어디 영웅이 없어지기나 하겠어요.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악당을 만들 거예요. 이 사회가 살기 좋아질 때까지.”


나는 겉으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개탄했지만, 속으로는 청승맞은 나란 놈에 대해 비관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그 혁명에, 사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나는 접점조차 만들려 하지도 않았지 않은가. 변혁의 불길에서 발뺌하기에 급급했던 나는 동지들을 동정할 자격도 영웅들을 비판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진짜 악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처지도 그리 못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자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외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늘의 별은 야속하게도 머리 꼭대기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에 난 다시 본부에 불려가게 되었다. 102호가 있다고 해서 마음은 편해졌을 진 몰라도 육체적인 고문은 전보다는 더 악화되었다. 영웅들은 이젠 날 해치워야 할 적으로 생각하기보단 살아있는 장난감으로 여기는 듯 했다. 가면을 쓰고 명령을 내려 받은 철없는 청년들은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들은 거기에 더해서 이젠 정신적으로도 날 학대하기 시작했다. 작대로 이마를 쿡쿡 찌르며 모든 것이 너의 잘못이다, 너는 존재 자체가 부정 되어야한다, 이런 식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어서 나는 더 괴로웠다.


행여나 아니랍시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에 대한 형벌로 단근질을 택했다. 영웅들이 달군 인장으로 내 전신을 골고루 지졌다. 그러면 악당인 나는 그들과 나 자신의 압박에 못 이겨 내 죄를 인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실종되었던 누구를 내가 죽였다는 둥 이런 식으로 거짓 증언을 하면 그들도 나도 편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미결에 그친 사건을 해결했고, 나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검은 가면의 악당을 보면서 나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시위대를 외면한 내 죄가 삭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편해지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치사하고 유치한 방법으로 그간의 경위를 묻어두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꼭 내 목에 쇠 작대기를 박아 넣거나 얼음물을 뒤집어씌워 추운 바깥으로 쫓아내거나 유리조각 위를 걷게 하는 것 따위의 강도 높은 처벌만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끔 별난 방법으로도 나를 괴롭혔다.

내 손을 뒤로 묶고 옷 속에 지렁이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리곤 그 째로 내 온몸을 때렸다. 오장이 뒤집히는 감각에 나는 그만두라고 애걸복걸했지만 지렁이들은 내 옷 속에서 맥없이 터져 죽어나갔다. 그것이 나를 보는 것만 같아 나는 더욱더 괴로웠는지도 모른다.


언젠간 한번 영웅들이 내게 미상의 알약을 먹인 적이 있었다. 캡슐 알약은 보기엔 알록달록 매력적이게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독극물이었다. 속이 뒤틀리는 멀미를 느껴 그것을 뱉어내려 애를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죽는구나하고 깔끔하게 체념하기엔 비위가 매우 상하는 극약이었다.

독기를 견딜 수 없어 이리저리 구르는 나를 영웅들이 복부를 발로 차댔다. 겨우내 그것을 뱉어냈을 때는 왜 그랬나 싶었다. 몇 분만 조신하게 행동하면 모든 고통들이 스러질 것을. 하지만 내가 숨을 헐떡이며 내 후회스런 행동을 곱씹었을 땐 영웅들이 이미 나를 혼절시키려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그 사건이 화근이 되어 그들은 더욱 극단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내게 마약을 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 들어왔지만 아무 반항도 하질 못했다. 나는 이게 마약인 줄 나중에야 알았다. 슬슬 약효가 돌기 시작하고 감각이 형제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내리자 나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어렴풋이 울면서 영웅들에게 아버지를 한번만 보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영웅들은 돌아가며 약에 취한 나를 놀려댔다. 약기운이 가신 후에는 극심한 고통이 똬리를 틀곤 도사리고 있었다. 치사량이 아닌 소량이었지만 그것의 후유증을 없애는 데에도 나는 며칠을 머리를 싸매고 앓아누워야만 했다.


상황이 이러니 내 꼴을 지켜보고 있는 102호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마약과 비슷한 효과를 내 보려고 갖은 진정제들을 섞어 먹기 시작했다. 102호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한바탕 싸운 뒤로는 몰래 숨어서 먹곤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악당인 마인드 리더를 속이기에는 나는 너무 어리숙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내 모습에 이골이 났는지, 102호는 화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약병을 잡아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렇게 계속 먹다간 골로 가는 거야, 이 멍청아!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죽지 못해 살지 말고, 죽을 각오로 살아! 교수는 인생이 아깝지도 않아? 아버지께서 죽음으로 물려주신 인생이 아깝지도 않냐고!”


하지만 약에 반쯤 중독된 내가 고분고분하게 그의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그거 다시 주세요! 누군 방황만 하면서 살고 싶은 줄 아세요? 지금 그 방법을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안쓰러우시면 이제 그만 알려 주시든가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걸 내게서 알아가려 하면 어떡하냐고! 그러는 순간 그건 내 인생이 되는 거지, 교수 인생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 정 모르겠다면 하나만 알아 둬. 웃어! 죽을 만큼 슬퍼도 웃고, 미치도록 괴로워도 웃어! 최면이라도 걸어 봐. 교수는 지금 행복하다고. 악당답게 그저 웃어 보란 말이야. 웃지도 못하면서 살려고 하지 마.”


웃어라. 그 한마디가 나를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아버지께선 내가 거짓으로 행복해해서 화를 냈었다. 그런데 102호는 거짓이라도 좋으니 행복한 척이라도 해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이한 견해 사이에서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지를 몰랐다.

미래를 포함한 내 인생에서 행복한 기억이 있거나 생길 리 만무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니던가. 나는 억지로라도 행복한 기억을 돌이키려 애썼지만 텅 빈 추억 속에 남은 건 삶의 회한뿐이었다.


나는 차라리 102호의 의견을 수렴해, 나름 웃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새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입 꼬리를 암만 올리려 분투해봤자 102호는 미소로 화답하기는커녕 더더욱 얼굴을 찌푸렸던 것이다. 원하던 모습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만, 그만해…….”


102호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내게서 얼굴을 돌린 채 나를 거울 쪽으로 밀어냈다. 나는 죄지은 듯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이런 걸 시키니 이딴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쪽 가서 웃어봐. 교수 꼬라지를 좀 보라고.”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거울 앞에 나 자신을 마주했다. 꼴도 보기 싫은 상판이 거울에 비쳤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맨몸을 보인 것처럼 창피해졌다. 그러나 곧, 나는 내게 주어진 임무를 생각해냈다. 웃어보라고 했다. 웃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고 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그것을 마법 주문마냥 되뇌며 웃어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미소라기 보단 오만상에 가까웠다. 괴로움에 젖어 울 때나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스스로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웃어왔던가? 진짜로 웃는 법을 잊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표정을 바꿔보았다. 어색한 웃음은커녕 점점 더 괴로운 표정이 지어졌다.


102호는 내가 못하겠다고 고백할 때까지 뒤에서 팔을 접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난색을 하곤 내게 말했다.


“사랑할 줄 모르지?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조차도.”

“…….”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오겠어.”



작가의말

이번 화 쓴다고 고문과 마약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부모님께 들켜서 한소리 들었습니다 :(

자료수집은 정말 고역이더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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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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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80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5 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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