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r.who작가 님의 서재입니다.

히어로즈(Heroes)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라끌리에
작품등록일 :
2015.01.04 23:44
최근연재일 :
2015.01.27 20:07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3,430
추천수 :
229
글자수 :
348,419

작성
15.01.25 19:50
조회
693
추천
1
글자
19쪽

11. 데탕트-(2)

DUMMY

광장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대낮부터 악당을 공개 처형한다는 일도 드물거니와 악당 157호의 행색 또한 가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젠 검은 악당 차림이 아니라 하얀 환자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 검은색 연극용 가면만은 잊지 않고 착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157호를 알아보는 지표가 되었다.


사령관은 하얀 괴도를 죽음의 끝으로 몰고 갈 때처럼 천천히 사형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큼은 죽는 이가 누군지 헷갈릴 정도로 처량했다. 관중들의 크나큰 기대 속에서,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레치드.”


악당 157호는, 사령관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비참한 악당이라는, 자신의 별명을 부르는데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령관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사령관은 초점 없는 얼굴로 레치드를 바라보았다. 나를 용서해라고 지껄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레치드의 최후는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야만 했다. 하얀 괴도를 죽인 그 파렴치한 양아들이, 레치드라고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잊었던 에피소드를 기억해낼 것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댈 것이다. 차라리 길거리에 버려져서 죽는 것이 나았다고.

157호는, 레치드는, 마을 사람들의 돌을 맞는 것이 괴로워 자살을 택하고 말 것이다. 그의 양아버지가 죽었던 광장에서. 157호의 양아버지였던 레비를 죽였을 때부터 그려 놓았던 틀을, 이제 와서 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령관은 무거운 입을 떼서 또다시 대사를 이어나갔다.


“네게 할 말이 있다. 하얀 괴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사령관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이런 건 대본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자멸에 이르게 될 그 발언은 멎을 줄을 몰랐다.


“웃기지 않나? 내가 하얀 괴도를 만들었다고. 자네를, 레치드를 만든 것처럼. 계약이라는 맺어, 돈과 목록을 주고 범행을 저지르라고 시켰지. 이 날은 이런 사람을 죽이고, 저 날은 저런 사람을 죽이고……. 돈이 궁했던 레비 녀석은, 양아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조건을 거니까, 군소리 않고 하얀 양복을 걸치더군. 물론 경찰에도 몇 번 끌려갈 뻔했던 그를 풀어준 것은 다름 아닌 우리였어. 하얀 괴도는 우리 손으로 잡아야만 했으니까. 하얀 괴도는 그렇게, 영웅들만이 처리할 수 있는 악명 높은 악당이 되어갔던 거야. 그런 악당을, 우리들이 없애버리는 거지. 사람들이 영원히 우릴 필요로 할 수 있게…….”


혹한에 떠는 듯한 표정을 지은 사령관과는 다르게 레치드의 표정은 여전했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진짜로 무표정인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사령관은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간 너무너무 괴로웠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어. 물론 내 죄가 이런 식으로 탕감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용서해주지 않을지라도 난 자네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돼. 나는 지금 총도 없고 작대기도 없어. 자네에게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을 것이니……”


사령관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 표정은 157호와 꼭 닮았던 그 악당이 자신에게 용서를 빌던, 그 표정이었다. 사령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가 자신을 죽일 거라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도 착해빠진 157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그는 말로 대드는 방식을 택할 것이었다. 사령관은 이 순간까지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게만 나오는 자신을 책망했다. 동시에, 그는 다음 장면이 궁금해 안달이 났다. 화를 낼까, 오열을 할까, 아니면, 아니면 혹시라도, 나를 용서해 줄까…….



그런데, 뜻밖에도, 157호는 더는 괴로운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원망이 담긴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사령관은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질 않자 놀라서 고개를 들고야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157호가 사령관의 목을 두 손으로 잡은 것이다. 가면 너머의 그의 눈동자엔 증오도 원오도 서려있지 않았다.


사령관은 갑작스레 자신의 목이 조이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사령관은 숨이 막히면서도, 하얀 환자복 차림의 그에게서 하얀 괴도의 모습을 보았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들을 목 졸라 죽이던 새하얀 살인마 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다는 걸 증명해주듯, 157호의 얼굴을 반쯤 가린 검은 가면이 그가 완전한 살인마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가면 너머에 착하게만 생긴 회색 눈의 선행(善行)일지도 모른다. 157호는 사령관이 질식해 죽기 전에 목을 놓았다. 사령관은 불시에 들이켜진 공기에 기침을 해댔다.


검은 가면을 쓴 악당, 레치드는, 악독한 사령관을 죽이는 것에 실패한 후에,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허탈하게만 들리던 그 웃음은, 점차 신명나게 사령관의 귀를 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당 157호가 연기해온, 레치드의 웃음소리였다.

그리곤 그 웃음은 기묘하게 정신병자의 광기로 서서히 변질되어갔다. 그는 그렇게 웃으며 사령관의 어깨를 잡았다. 사령관은 얼굴을 공포로 일그러뜨리며 그를 바닥에 밀쳐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령관은 그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을 줄은 몰랐다.

불행하게도, 레치드는 머리부터 세게 떨어져서 기절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갔으나 아무도 그를 거들어주지 않은 채 숨만 죽이고 있었다. 꼼짝 않는 방관자들 속에서 한 용기 있는 사람이 그 악당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령관의 딸이었다.


“아버지께서 결국엔 해내셨네요. 아버지께서 저도 망치고 이 사람도 망치셨어요. 세상에 아무런 해도 안 끼치고 살아가는 이 사람을 건드려서 왜 인생을 파탄내시는 거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관중들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 그녀가 크게 외쳤다.


“레치드란 악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요. 다 제 아버지께서 만들어내신 허상에 불과하다고요. 진짜 악당은 바로 영웅들이에요! 왜 악당들이 이런 취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죠? 죄를 짓기도 전에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모순이에요. 이 사람은 악당이기 전에 그저 평범한 대학 교수였다고요!”


그러나 그녀가 암만 발악을 해 봤자, 수많은 대중들 중 단 한명도 그녀에게 동참해주지 않았다. 내막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녀는 그 침묵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그녀의 간절한 외침이 통했는지 뜻밖의 자리에서 동조의 손길이 뻗어왔다. 그는, 이 마을에서 유명했었던 영웅, 히어로 블루였다.


“맞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영웅들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자가 바로 사령관이지요. 저 자가 모든 것을 선동했습니다!”


블루가 원망할 표적을 정해주듯 사령관을 가리키자, 그제야 여기저기서 긍정을 표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맞다, 레치드는 한 번도 인질을 해한 적이 없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 악당을 영웅들이 마구 때렸지 않느냐.

사람들은 아주 작은 불씨를 틔워주었을 뿐인데도 저마다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올랐다. 모두가 길가의 돌멩이를 주워들어 영웅들에게, 특히, 사령관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이 악마야, 이 악당아! 사령관을 포함한 영웅들은 차마 민간인들을 제지할 수 없어 돌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사령관은 반대의 불길이 거세지자 영웅들을 데리고 본부로 철수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번에는, 항상 패배만 하던 악당 레치드가 이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지도 못한 채 레치드는 사령관의 딸과 블루가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블루는 가까운 병원이라도 보내기 위해 그를 안아들었다. 레치드는 그렇게 히어로 블루의 팔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


달빛이 처량하게 빛나는 어느 날 밤이었다. 월광보다도 새하얀 차림을 한 레비가, 하얀 괴도의 모습으로 다리 밑에서 누군가와 밀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양아들을 주워 왔던 그 다리에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인, 사령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은 레비가 오자 어둠 속에서 조소를 입에 물며 돈 봉투를 던졌다. 이번 달 일당이야. 레비는 그것을 받아들곤 묵묵히 돈을 셌다. 하얀 장갑이 돈에 쓸려서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 따윈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의 표정엔 일련의 변화가 없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세고 장수가 맞자, 레비는 뭐가 그리 기쁜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사령관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얘가 이렇게 돈을 밝힐 줄은 몰랐는데. 레비는 의아해하는 사령관을 개의치 않고 목표를 달성한 것 마냥 행복하게 웃었다. 이제 아들 대학 보낼 수 있겠다면서.



사령관은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지극정성이다. 보아하니 자식농사에 투자를 해서 빛을 좀 보려나본데 네 양아들은 지 잘되면 너를 내치고 배신할지도 모른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던가. 그 애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악당이니까. 근본 없는 자식이니까.

레비는 그의 말에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그 애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그 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매일매일 웃어줬으면 좋겠어.


레비가 웃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더욱 환하고, 초라하게만 보였다. 부모 없는 악당이면 어때. 근본 없는 자식이면 어때. 난 그래도…… 그래도 사랑하는 걸…….


*


악당 157호는 머리를 다친 뒤로는 전보다 더욱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매일 웃으면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대체로는 얌전한 편인데, 발작이 시작되면 몇 시간이고 이상행동을 보였다. 몸 전체에 경련을 일으키며 벽 쪽을 가리키곤 눈물이 나올 때까지 미친 듯이 웃어대는 것이다.


의사들도 함부로 그를 건들 수가 없는데 하물며 사령관의 딸에게 면회가 쉽사리 떨어질 리 없었다. 그녀는 157호의 발작이 하도 심해 병원한테 퇴짜 맞을 때마다 병원 로비에서 쭈그려 앉아 있곤 했다. 저런 상태의 환자를 놔두고 자신만 몰염치하게 집에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루는 그녀가 갖은 곤욕을 치르며 병실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157호는 발작을 일으키는 대신 침상 위에 얌전히 앉아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사령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도주라도 하는 듯 다급하게 자신의 딸에게 말했다.


“짐 챙겨라. 우린 다른 마을로 가야만 한단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죠? 목소리 좀 낮추세요. 여긴 병실이에요.”


사령관은 이를 악물고 오히려 더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난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얼른 짐 챙기고 나오너라. 너와 블루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더는 영웅으로 받들지 않아. 우린 더 이상 이 마을에 있을 이유가 없어. 안 올 거면 널 이 마을에 버리고 가겠다. 그래도 네가 내 명목상의 자식이니 책임이라도 지려고 이러는 게야.”

“아버진 정말 너무하세요! 그러면 저 사람은요? 저런 사람을 그냥 두고 도망치듯 떠나잔 말이에요?”


딸이 157호를 가리켰다. 사령관은 그게 뭐 어쨌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157호를 보자 그런 소리는 아예 목구멍 너머로 달아나버렸다. 그는 번호가 찍힌 오른쪽 손목을 피가 나도록 긁고 있었다. 그는 그 번호를 아예 손목에서 파내려는 작정인 듯 했다. 사령관은 157호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이러지 마. 왜 이러는 게야.”


사령관은 157호의 손목을 잡아 옆에 있던 붕대를 감아주었다. 157호는 이리저리 자신의 손목을 살펴보더니 불쾌한 듯 그것을 다시 잡아 뜯으려 했다. 사령관이 자해의 손길을 제지했다.

157호가 천진난만하게 웃더니 사령관을 안았다. 전 당신이 너무 좋아요. 제 곁에 있어주세요. 이제야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딸딸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땅치고 후회해봤자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다 용서해요. 제 곁에만 있어 주세요. 157호가 귓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여왔다. 157호가 지금 무엇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령관은 얼굴을 불편하게 일그러뜨렸다.


“아니야, 절대로 날 용서하지 마.”


사령관은 이제 자신의 아내를 죽인 영웅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도록 미안해하고 있었다. 용서받아야 할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영웅은, 어느덧 울면서 그 악당을 더 세게 껴안고 있었다.


“용서해줘. 정말 미안해…….”



사령관이 마을을 뜬 뒤로는 본부에는 이웃 마을에 발령나있던 새로운 영웅이 사령관직에 취임했다. 금발에 청록색 눈이 새로운 사령관은 여태껏 사령관직을 맡았던 자들 중에 제일 나이가 적은 영웅이었다.

전도가 유망한 청년의 치하에선 전보다는 영웅과 악당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이 꽤나 줄어드는 듯 했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되었고 모두가 만족스럽고 행복해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건, 모두들 그렇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 가여운 무리 중 하나가 157호라는 악당이었다. 그는 아직도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궁상맞은 세상에서의 유일한 탈출구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것들에는 천사 아가씨가 늘 속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마을로 떠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일을 정신병원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자신도 면회차로 병원을 출석하는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를 구원해주러 온 영웅이 있었으니, 그가 다름 아닌 히어로 블루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이제 더는 영웅이 아니었다. 블루는 전직 사령관이 다른 마을로 떠난 이후로 영웅을 아예 그만두었다. 그는 이제 악당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그저 민간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웅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영웅 시절에 쌓여왔던 죄책감까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는 또다시 악당 157호가 갇혀있는 정신병원에 면회를 오게 되었다. 블루가 그 악당을 지키고 있는 사령관의 딸에게 말을 걸었다.


“사전 통보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악당님을 데려오라고 하시던가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블루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이제 더 이상 영웅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 명령을 내린다한들 제가 들을 이유는 더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은 당신께 부탁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한테요? 대체 무슨……”


블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머뭇거리기만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억눌러왔던 말을 터뜨렸다.


“전 이제 악당을 구하는 영웅이 될 겁니다. 다시는 레치드 같은 악당이 나오지 않게, 다른 마을을 방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어로 화이트였던 새로운 사령관을 만나러 갈 건데,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화이트도 믿든 안 믿든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요.”


그가 범죄를 고백하듯 계획을 털어놓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요. 전 그 사람에게 가면 안 돼요. 그 사람은 분명 이 병원에 찾아오려고 할 거예요. 그 사람을 이곳에 들여놓아선 안 돼요. 잘못했다간 제가 이곳에 다시는 찾아오기 힘들지도 몰라요.”

“바로 그게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가씨께선…… 더는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을 위한다면요. 이걸 좀 보세요.”


그가 157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곤 그는 157호에게 바투 다가섰다. 그가 가까이에서 그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어주자 그가 좋다고 눈을 감곤 안겨왔다.

157호는 사람을 불문하고 자꾸 누군가에게 붙어 있으려만 했다.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만 가는 증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자신과 매일같이 싸워오던 영웅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선천적인 질병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령관의 딸은 고개를 숙이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돌봐주다간 이 사람은 끝까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우린 이제 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혼자 일어설 수 있게 놓아주는 거지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이젠 아무도 이 사람을 레치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녀가 등을 돌렸다. 블루는 한숨을 쉬며 병실 문을 열기 시작했다.


“저 먼저 가겠습니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일 먼저 제가 아니라 화이트에게 찾아가세요.”



히어로 블루가 떠나고, 사령관의 딸은 미쳐버린 157호를 바라보며 며칠간 고뇌하고 망설였다. 이게 과연 잘 하는 짓일까? 히어로 블루가 찾아오지 않았었더라도 그녀는 실로 이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상태로 망가져버린 사람을 놓고 가는 것도 결코 마음편한 일만은 아니었다. 늦은 밤, 그녀는 베개를 껴안고 잠들어버린 157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악당님,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흔들리던 결심을 굳혔다. 그 결정이 157호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히어로 블루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157호가 잠든 그날 밤, 그녀는 이 병원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나도 떠나게 되는구나. 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정말로 제정신을 차리고 진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까. 도둑이라도 된 듯, 그녀가 조용히 문고리를 잡았다.

침상에서는 신음과도 같은 잠꼬대가 들려왔다. 가지 마세요, 나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내 떼어내어 문을 잡아 열었다. 어둠 속에 한차례 빛이 나타났다가 사그라졌다.


악당 157호는 그렇게 광기 속에서 혼자가 되었다.



작가의말

11화 끝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히어로즈(Heroes)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2 히어로즈(Heroes) 후기 15.01.27 505 2 5쪽
51 E. 닫는 이야기(새벽에 임하는 자) +2 15.01.26 685 1 14쪽
» 11. 데탕트-(2) +2 15.01.25 694 1 19쪽
49 11. 데탕트-(1) 15.01.25 683 1 16쪽
48 10. 일탈-(4) +3 15.01.24 586 1 26쪽
47 10. 일탈-(3) 15.01.24 663 1 20쪽
46 10. 일탈-(2) 15.01.24 480 1 18쪽
45 10. 일탈-(1) 15.01.24 552 1 16쪽
44 9. 그 악당-(3) +2 15.01.23 564 1 25쪽
43 9. 그 악당-(2) 15.01.23 434 2 15쪽
42 9. 그 악당-(1) 15.01.23 445 1 20쪽
41 8. 엄동-(4) +2 15.01.22 615 1 27쪽
40 8. 엄동-(3) 15.01.22 629 1 19쪽
39 8. 엄동-(2) +1 15.01.22 421 1 20쪽
38 8. 엄동-(1) +1 15.01.22 449 1 11쪽
37 7. 돌아온 작살-(2) 15.01.21 514 1 9쪽
36 7. 돌아온 작살-(1) +2 15.01.21 365 1 17쪽
35 6. 산(酸)-(2) +4 15.01.20 590 3 12쪽
34 6. 산(酸)-(1) 15.01.20 622 2 21쪽
33 5. 현자의 망언-(2) 15.01.19 587 3 16쪽
32 5. 현자의 망언-(1) 15.01.19 698 3 15쪽
31 4. 위대한 군주는-(2) +2 15.01.18 464 3 11쪽
30 4. 위대한 군주는-(1) 15.01.18 414 2 16쪽
29 3. 교수라는 직책-(2) +2 15.01.17 724 3 31쪽
28 3. 교수라는 직책-(1) 15.01.17 465 3 20쪽
27 2. 도둑과 양아버지-(4) 15.01.16 428 3 14쪽
26 2. 도둑과 양아버지-(3) 15.01.16 380 3 15쪽
25 2. 도둑과 양아버지-(2) 15.01.16 365 3 21쪽
24 2. 도둑과 양아버지-(1) 15.01.16 587 3 14쪽
23 1. 귀공자 15.01.15 453 2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